내 혈장을 다 빼내고 새로운 혈장을 넣듯 새 사람을 입으라
내 혈장을 다 빼내고 새로운 혈장을 넣듯 새 사람을 입으라
  • 월간 기쁜소식
  • 승인 2012.11.07 15: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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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시작한 투석
2000년에 아버지의 신장을 이식 받아 11년간 건강하게 살다가 신장의 기능이 떨어져서 작년 8월부터 다시 투석을 받아야 했다. 한번 건강해졌다가 다시 투석을 받으면서 살아야 하는 내 삶이 너무나 괴로웠다. 삶도 다 엉망이 되어버렸다. 1주일에 3일씩 투석을 받다 보니 가정생활도 사라지고, 내가 어떤 사람인지조차 가늠할 수 없었다. 몸은 부어만 가고, 늘 머리가 아파서 지옥 같은 나날을 보냈다. 조금만 걸어도 숨이 차고 다리나 몸이 부어서 걸어다니기도 힘들었다.
구원받고 교회 안에 있었지만 내게 닥친 형편 앞에서 나는 하나님을 잃어버리고 살았다. 내 곁에 있는 남편도 보이지 않고 좌절과 절망 속에서 고통스럽기만 한 나날을 보냈다.

결혼, 좌절, 그리고 구원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 부모님이 복음이 있는 교회에 다니셔서 나는 어려서부터 구원 이야기를 많이 들었지만 관심이 없었다. 그런데 한번은 천국과 지옥 이야기를 들으면서 내가 죽으면 천국에 갈 수 있을까 생각해보니 자신이 없었다. ‘그럼 난 지옥에 가야 하는데…!’ 두려워서 엄마에게 나도 구원받고 싶다고 했고, 어떤 분이 복음을 전해주셨다. 그때 나는 구원받았다고 생각했다. 그 후 나는 구원받았으니 됐다는 마음으로 살았다.
시간이 흘러, 같은 호텔의 직원이었던 지금의 남편을 만났다. 나는 모든 면에서 남편과 다른 대우를 받고 있었다. 난 경력사원이었고 남편은 수습사원이었기 때문이다. 남편은 나에게 관심을 쏟았지만 나는 별 관심이 없었다. 그런데 나를 대하는 남편의 모습에 점점 이끌려 주위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1992년 가을 우린 결혼했다.
결혼하고 보니, 결혼은 꿈이 아니라 현실이라는 말이 맞았다. 시댁엔 기댈 조건이 하나도 없고 오히려 도와주어야 할 형편이었다. ‘내가 잘못 결혼했구나…. 속아서 결혼했어!’ 하는 생각에 남편이 너무 미웠다. 남편은 두 가지 직업을 가지고 열심히 일했지만 형편은 나아지지 않았다. 남편의 가정환경과 능력이 무시되고, 내가 남편을 만난 것이 불행의 시작이라고 생각했다.
어렵게 시간을 보내고 있을 즈음 우리 선교회를 만났다. 먼저 교회를 옮기신 부모님을 따라 나도 교회를 옮긴 것이다. 그런데 교회에서 자꾸 내 구원에 대해 이야기하려고 해서 마음이 불편해, 살고 있던 서대문 지역을 떠나 가평으로 이사했다. 그 후로는 기쁜소식춘천교회에 나갔지만, 앓고 있던 병 루푸스 때문에 몸이 좋지 않아 제대로 다니지 못했다.
어느 날 엄마가 구원을 받았다고 하셨다. 전에 구원받았던 분이 다시 구원받았다는 말이 참 이상했다. 그 후 엄마가 권해서 집회에 참석했다. 설교 말씀을 다 듣고 나자 신앙상담을 나누라고 했다. 구원받은 내가 왜 상담을 해야 하는지 마음이 내키지 않았지만 떠밀려서 상담을 했다. 나와 이야기를 나눈 목사님은 나에게 먼저 어떻게 구원을 받았는지 물으셨다. 내가 구원받은 간증을 하자, 목사님은 다 듣고 나서 구원 근처에도 가지 않았다면서 “장윤미 씨, 왜 구원받았다고 우기세요?” 하셨다. 기가 막히고, 이유는 모르겠지만 눈물이 흘렀다. 목사님이 다시 “장윤미 씨, 그만 울어요. 말씀을 들어야 살 거 아니에요!” 하고 소리치셨다. 그 소리에 ‘그래, 말씀을 들어야 살겠다’는 마음이 들었다. 목사님은 내 죄가 예수님의 것이 되고, 예수님의 의가 내 것이 된 이야기, 예수님과 내가 서로 바뀐 이야기를 해주셨다. 비로소 복음이 내 마음에 임했다. 마음이 평안했다. 1996년 6월이었다.
구원받은 후 무척 행복했다. 내 삶과 질병도 예수님의 문제라는 마음이 들어 평안했고, 무엇보다 나를 끌고 가던 생각들에 더 이상 끌려다니지 않는 삶이 행복했다. 구원받고 얼마 후부터 투석을 받았지만 그래도 감사했고, 3년간 투석을 받다가 아버지의 신장을 이식받았다. 2003년에는 남양주에 있는 아파트가 당첨되었지만 교회가 없어서 난감했는데, 얼마 후 남양주에 교회가 개척되어 그 후로 지금까지 기쁜소식남양주교회에서 신앙생활을 하고 있다.

▲ 같은 호텔 직원이었던 남편과 주위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1992년 가을 결혼했다. 처음엔 행복했지만 결혼은 꿈이 아니라 현실이라는 말이 맞았다.

나로 인해 구원의 길을 찾은 남편
나는 결혼해서 루푸스 때문에 계속 약을 먹었기 때문에 아이를 가질 수 없었다. 입양을 생각해 보았지만 잘 되지 않았고, 나이를 점점 먹다 보니 그냥 포기하고 살았다. 그런데 동생이 이혼하면서 아이를 친정에 맡겼고, 엄마가 아이 키우는 것을 너무 힘들어하셔서 내가 한 달만 데리고 있겠다고 데려온 것이 5년을 키웠다. 나는 조카를 키우면서 내가 얼마나 악한 사람인지, 뿌리까지 보았다. 그래도 잘 키워보겠다고 학교에서 이것저것 임원도 맡고 학교 봉사도 열심히 했다. 덕분에 학교의 여러 직책에 있는 분들을 알게 되었다.
한번은 선거철에 시의원이 나에게 선거운동을 부탁했다. 평소 안면이 있는 사이라 거절할 수 없었다. 선거운동을 하면서 시장님, 도의원, 시의원, 그리고 지역 유지들을 만나고 다니다보니 내가 뭔가 된 것 같은 마음이 들었다. 내가 그런 사람들과 같은 레벨의 사람처럼 여겨졌다. 그런 마음으로 지내다가 집에 들어오면, 매일 먹고사는 일에 매여 허덕이는 남편이 초라하게 보였다. 그것이 우리 가정에 불화의 씨가 되었고, 남편은 그렇게 사는 날 못마땅하게 생각했고 나 역시 남편이 싫었다. 나는 집을 나와버렸다. 남편은 괴로운 마음에 방황하다가 갈 곳이 없어서 우리 교회(기쁜소식남양주교회) 목사님을 찾아갔다.
“우리 집사람이 지금 이런데, 나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남편은 목사님에게 자신의 처지를 하소연하며 마음을 털어놓았다. 남편은 가끔 교회에 가기는 했지만 구원과는 거리가 먼 사람이었다. 목사님은 남편에게 “아내를 버리지 말고 기다리세요.” 하고 말씀하셨고, 사모님은 남편에게 집회에 참석하면 좋겠다고 하셨다. 지난날 내가 오랫동안 교회에 가자, 집회에 가자고 했을 때에는 “내가 지금 집회에 갈 형편이야? 한푼이라도 더 벌어야지!” 했던 남편인데, 그날은 집회에 가자는 사모님의 말씀이 무척 감사했다고 한다.
그 후 남편은 2011년 여름 수양회에 참석해서 구원을 받았다. ‘사람은 정말이지 믿을 존재가 못 되며 악하고 추하다’는 마음이 들어 인간에 대해 회의를 느끼고 남편은 하나님을 찾은 것이다.
구원받은 후 우리 가정이 달라졌다. 전에는 상상할 수 없는 일이 일어났다. 내가 투석을 받으며 지냈던 지난 1년 동안 남편은 매일 아침 기도하고 성경을 보며 하루를 시작했다. 그것은 분명히 하나님이 우리 가정에 주신 큰 축복이었다. 남편은 구원받은 지 이제 1년이 되었는데, 교회에서 은혜를 입으며 구역장도 맡고, 교회 재정도 담당하는 일꾼이 되었다.

▲ 링컨국제중학교에 다니는 조카를 찾아가 즐거운 한때를 보냈다.

‘다른 사람에게 피해 주지 않으려고 죽으려는 건데…’
내 신장은 루푸스로 인해 망가졌다. 남편은 오래 병치레를 하는 나를 보면서 안타까워하고 불쌍히 여겼지만 어떻게 해줄 방법이 없었다. 나는 그런 남편을 원망하면서 살았다. 내 모습은 전해 보지 못한 채. 두 번째 투석을 받고 있을 때 남편은 나를 위해 자신의 신장을 주겠다고 했고, 나는 ‘당연히 줘야지!’ 하는 마음을 가지고 있었다.
수술을 위해 검사를 시작했다. 다행히 남편의 신장을 이식할 수 있다고 해서 이식을 위해 필요한 검사를 받았다. 남편이 평소 건강했기에 문제가 없을 줄 알았는데, 검사 결과 남편의 소변에 단백질이 섞여서 나온다고 했다. 단백뇨는 신장 기능이 정상이 아닐 때 나타나는 증세로, 신장을 이식할 수 없게 된 것이다. 병원에서 집으로 오는 길에 우리 부부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 후로 어떤 위로의 말도 들리지 않았다. 하나님이 원망스럽고, 교회도 싫고, 남편도 싫고, 나 자신도 싫었다. 살고 싶지 않다는 생각에 정신나간 여자처럼 지냈다. 남편도 몹시 괴로워했다.
1주일에 3회 투석을 받으면서 몸도 많이 안 좋아졌다. ‘평생 이 꼴로 사느니 죽는 게 나아. 죽으면 이 꼴 저 꼴 안 보고 좋잖아’ 하는 생각에 사로잡혔다. 컴퓨터에서 자살사이트를 찾아 들어가서 ‘어떻게 죽지?’ 하고 생각했다. 내 삶은 더욱 어둡고 피폐해졌다.
어느 날, 우리 교회 목사님 부부와 교제하던 중에 “자매는 정말 교만한 사람이야! 정말 자기만 생각하는 사람이야!” 하는 말을 들었다. 나는 속으로
‘내가 왜 나만 생각해? 다른 사람에게 피해 주지 않으려고 죽으려는 건데…’ 하고 생각했다.
그날 나는 참 괴로웠다. 목사님이 나에게 그런 말씀을 하셔서가 아니라, 구원받은 내 마음의 상태가 너무나 비참했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내가 너무 싫고, 구원받은 사람이 그렇게밖에 생각할 수 없다는 것이 몹시 괴로웠다.

‘나 때문에 주위 사람들이 다 불행했었겠구나…!’
하루는 책 한 권이 눈에 들어왔다. 박옥수 목사님이 쓰신 <나를 끌고 가는 너는 누구냐>. 전에 한번 읽었지만 그때는 대충 읽었기에 다시 보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 ‘욕구’ 편에 나오는 이야기들이 내 마음을 두드렸다. 자신이 100정도 되는 사람이 스스로 200이나 300으로 알고 살면 늘 불만족하고 불평하면서 산다고 했다. 아내가 마음이 높으면 남편이 불행하게 되고, 주위에 있는 모든 사람을 불편하게 만든다고 했다. 그 내용을 읽으면서 난생처음 내 마음이 높았다는 마음이 들었다. 남편을 생각해 보았다.
‘저 사람이 나 때문에 얼마나 불행하게 사는가…. 내가 남편을 무시하고 살았구나! 내가 하나님도 무시하고 살았구나!’
결혼하고 처음으로 남편에게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나는 나만 생각하는 교만한 사람이었다. ‘나 때문에 주위 사람들이 다 불행했었겠구나…!’ 내 모습이 보이니까 전에 없었던 마음이 들어왔다. ‘하나님이 나에게 이런 형편을 주신 것은 하나님을 얻게 하기 위하심이야.’
마음이 바뀌니까 형편과 상관없이 모든 일이 감사했다. 그런 나를 구원해주신 하나님이 감사하고, 그런 나를 받아준 교회가 감사했다. 그리고 나 같은 사람을 참고 기다리고 기도해준 남편도 너무 고마웠다. 이후로 나는 내 몸 상태와 상관없이 교회에서 생활하며, 찬송도 하고 은혜를 입으면서 살았다.

▲ 얼마 전 나에게 신장을 준 언니(왼쪽)와 함께. 젊은 날의 모습이다.

“왜 당신에게 신장 하나 줄 사람이 없어?”
하루는 언니와 동생이 조카들과 함께 저녁을 먹자고 했다. 남편에게 같이 가자고 하자 남편은 “당신이 투석을 받으면서 이렇게 어렵게 지내는데, 저녁을 먹자고? 당신 식구들 중에는 왜 당신에게 신장 하나 줄 사람이 없어?” 하면서 속상해했다. 그 이야기를 친정 식구들이 듣고는 둘째 언니(장미경 자매, 기쁜소식부천교회)가 한번 검사를 해보자고 했다. 생각지 못한 일이었다.
검사는 수월하게 진행되었고, 검사 결과 이식이 가능했다. 다만, 혈액형이 맞지 않아서 혈장교환술을 여섯 번 해야 했다. 언니의 혈액형은 A형이고 나는 B형이어서 내 몸에서 이식 받는 신장에 대해 거부반응을 일으킬 수 있기에, 내 피 속에 있는 B형 혈장을 다 빼내고 A형 혈장이 일할 수 있는 조건으로 만들어야 했다. 혈장교환술은 한 번에 13팩이나 되는 혈장을 두 시간에 걸쳐 내 몸 안에 넣고, 내 혈장은 빼서 다른 팩에 모으는 방식으로 행해졌다. 약간의 부작용이 있었지만 큰 문제 없이 잘 진행되었다.
혈장교환술은 그 비용이 무척 비싼데, 헌혈증이 많으면 할인된다고 했다. 여기저기 이야기해서 헌혈증 80장 정도를 구하려고 했는데, 주위에서 150장도 넘게 구해주었다. 신장 이식 수술비도 1,700만 원 정도나 되어 정말 부담스러웠는데, 희망케어복지센터에서 300만 원을 지원해주었다. 영세민이 아니면 혜택 받기 어려운데, 사업체도 있고 차도 있는 우리가 지원금을 받은 것은 정말 하나님의 은혜였다. 그리고 수술을 맡은 교수님이 내 수술을 마치고 바로 외국 학회에 참석하러 가셔서, 더 이상 수술이 없는 바람에 나는 무균실에 오래 있게 되었다. 그렇지 않았으면 3일 만에 무균실에서 나와 비싼 병실로 옮겨야 했을 것이다. 또 교수님에게 진료를 받을 때 내는 특진비도 제해졌다. 이 외의 사소한 많은 일들에도 주님이 도우시는 것이 신기하고 감사했다.
주님은 나에게 있는 어떤 조건을 인해 나를 도우시는 것이 아니었다. 나에게는 조건이 없는 것이 참이었다. 나의 어떠함과 상관없이 주님은 나를 도우셨다.

몸도 마음도 새 사람을 입어 수술 후, 나에겐 감사한 일들이 많다. 지난 1년간 나는 소변을 한 방울도 보지 못했다. 소변을 보지 못하니까 물 종류는 거의 마시지 못했다. 시원한 물을 마시고 싶고, 남들이 먹는 차나 음료수도 무척 먹고 싶었지만 그럴 수 없었다. 약을 먹을 때에나 소량의 물을 마실 수 있었다. 몸도 아프지만, 물을 제대로 마실 수 없어서 항상 갈증에 시달리는 것도 너무 힘들었다. 그런데 이제는 물을 원 없이 마시고, 시원한 커피나 음료수도 마음껏 마실 수 있다. 물을 자유롭게 마실 수 있다는 것이 얼마나 행복한 일인지 모른다.
그리고 내 몸에서 소변이 나온다는 사실이 믿어지지 않았다. 화장실에 갈 때마다 말할 수 없이 행복했다. 한동안 소변을 보지 못해 방광의 크기가 많이 작아져서 한 시간에 한 번씩 화장실에 가야 하지만, 전혀 불편하지 않고 갈 때마다 감사하다. 아니, 5분마다 간다 할지라도 나는 소변을 볼 수 있다는 사실이 행복하다.

▲ 하나님의 은혜로 수술을 잘 마치고 여름 수양회에 참석했다. 강릉 바닷가에서 남편, 부모님과 함께.

또, 전에 나는 아침에 일어나면 심한 두통에 시달렸기에 아침이 오는 것이 두려웠다. 두통약 없이는 하루도 견디기 힘들었다. 그런데 지금은 머리가 전혀 아프지 않다. 두통 없이 상쾌한 아침을 맞는 것이 얼마나 감사한지…! 하나님의 은혜로 지난 여름 수양회에도 참석할 수 있었다. 갑자기 수술이 2주나 앞당겨진 까닭이었다. 수술 날짜가 앞당겨졌을 때 ‘이건 분명히 하나님이 나에게 수양회에 가라고 하시는 것’이라고 믿었다. 만약 수술을 제날짜에 받았다면 수양회에 가기 어렵고, 설령 간다 해도 수양회 중에 한두 번은 투석을 받아야 하기에 그 모습을 지켜보는 가족들도 힘들었을 것이다. 그런데 수술을 잘 마치고 새 몸으로 우리 가족들, 교회 식구들과 함께 수양회에 참석한 것이 너무도 감사했다.
내 몸만 바뀐 것이 아니다. 하나님은 내 마음도 바꿔주셨다. 내 몸에 새 신장이 들어와서 망가진 내 몸을 건강하게 만들어준 것처럼, 하나님은 내 마음이 아닌 주님의 마음을 받아서 그 마음으로 살 수 있게 해주셨다. 내 혈장을 다 빼내고 새로운 혈장을 넣듯, 하나님은 내 생각과 관념을 몰아내시고 새 마음을 넣어주셨다. “오직 심령으로 새롭게 되어 하나님을 따라 의와 진리의 거룩함으로 지으심을 받은 새 사람을 입으라.”(엡 4:23~24) 내 마음으로 살던 삶을 그치고 주님의 마음으로 살 수 있게 해주신 하나님께 감사와 영광을 드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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