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매를 맺게 하시는 이가 이미 내 안에 계셔서
열매를 맺게 하시는 이가 이미 내 안에 계셔서
  • 월간 기쁜소식
  • 승인 2012.11.23 13: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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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는 한국에 돌아가고 싶지 않다
베냐민의 자루에서 나온 요셉이 감추어두었던 은잔. 그 은잔을 본 순간 베냐민의 마음은 어떠했을까? 나이지리아에 살면서 종종 그런 순간들을 만나곤 했다. 그럴 땐 재판이라도 걸어서 상대가 얼마나 잘못되었는지 보여주어야 속이 풀릴 것 같았다.
2010년 8월 초 월드캠프를 마친 후, 10월 셋째 주에 나이지리아의 수도인 아부자에서 IYF 캠프를 가졌다. 남편은 아부자에 간 차에 다음 해에 있을 월드캠프 때 한국에서 오는 분들이 무비자로 들어올 수 있는 길을 알아보려고 이민국에 들렀다. 또한, 우리 가족의 비자 서류를 이민국에서 분실했기 때문에 해결책을 의논하려고 했다. 그런데 이민국에서는 남편이 나이지리아에 머무는 것이 불법이라며 남편을 이민국에 가둬버렸다. 캠프가 끝나지도 않았는데 너무 황당한 일이 일어난 것이다.
남편과 전화 통화도 못 하고 라고스로 내려오면서 온갖 마음이 오갔다.
‘이게 해결이 안 되면 쫓겨나야 되는데…. 이렇게는 한국에 돌아가고 싶지 않다.’ 마음이 너무 어려웠다. ‘하나님이 왜 이런 일을 주시는지….’ 가나의 조경원 목사님께 연락을 드리고, 일이 어떻게 해결되기를 기다릴 수밖에 없었다.
우리 교회 형제들이 이민국 측과 해결하려고 했지만, 이민국에서는 무조건 우리 가족이 한국으로 돌아가야 한다고 했다. 자신들의 실수를 인정하지 않고 오히려 남편에게 ‘여긴 나이지리아이니 돈을 주었으면 이런 일이 일어나지 않았을 텐데, 순전히 네 잘못이다’고 했다. 그 소식을 전해만 들어도 분통이 터졌다.
열흘이 지난 후 박옥수 목사님과 통화를 했다. 목사님은 한국에 온 지 얼마나 되었느냐고 물으시고는 그냥 들어오면 되겠다고 답을 주셨다. 이민국 직원의 감시 아래 나이지리아를 떠나면서 ‘한국에서 나이지리아 거주 비자를 받는 것이 쉽지 않다는데…, 거주 비자를 받지 못하면 다시 못 들어오는데…’ 하고 생각하니 꼭 하나님이 우리를 쫓아내시는 것 같은 생각이 들어 마음이 어려웠다.

하나님이 모든 일을 맞추어가시는 것을 보며
전도자 양성 훈련, 체조경기장 전도집회. 한국에 들어가자마자 하나님이 말씀 앞에 나를 비추어보게 하셨다. 나이지리아 사람들과 엉겨 사는 동안 내가 그들보다 옳고 바르다는 생각, 사역을 잘해야 한다는 마음, 월드캠프를 하면서 프로그램을 망칠까봐 안달하던 나, 다른 나라보다 잘하진 못해도 따라는 가야 한다는 의지…. 그런 마음들 속에 사단이 숨어 있어서 하나님의 말씀이 아닌 내 생각을 세우게 했다. 체조경기장에서 말씀을 들으면서 선지자 생도의 아내의 마음과 내 마음이 겹쳐지면서, 박 목사님의 말씀이 내 모습을 정확히 보여주고 있었다.
나이지리아에서 살면서 가졌던 마음을 자세히 돌아보았다. 물탱크에 물때가 끼듯 은혜를 입었다는 것, 잘해보려는 마음, 그래도 나는 성실하게 살았다는 생각 등이 비워지지 않은 채 찌끼처럼 마음에 붙어 있었다. 말씀이 내린 정확한 결론은 “육신의 생각은 사망이요”(롬 8:6)이었다. 백향목처럼 곧게 뻗고 싶은 욕망이 있으나 실제의 나는 구불구불한 포도나무였다. 그런데 내가 나를 곧게 펴가면서 포도를 맺어야 하는 것이 아니었다. 당신의 뜻대로 나를 만들어가시며 열매를 맺게 하시는 이가 이미 내 안에 계셨다.
신청하고 두 달은 걸린다는 나이지리아 거주 비자, 금요일에 신청해서 어떻게 된 건지 모르지만 다음 주 월요일에 비자를 받았다. 지금도 가끔 라고스의 한인들을 만나 그런 이야기를 하면 믿으려 하지 않는다.
우리 가족이 한국에 있는 동안, 간암을 앓으시던 아주버님의 장례식도 교회의 은혜 속에서 치를 수 있었다. 그토록 외면하시던 친정 아버지가 겨울 수양회에 참석하셔서 복음반에 함께 앉아 있는 은혜도 입었다. 1998년 아프리카로 선교를 오기 전, 친정의 어려운 사정을 박 목사님께 상세히 말씀드린 적이 있었다. 그때 목사님이 해주신 말씀을 지금도 잊지 않는다. “자네가 아프리카에 있는 동안 하나님이 돌보실 거네. 다 맡기게.” 친정아버지가 구원받고 교회에 나가신다는 것이 내겐 얼마나 엄청난 하나님의 선물인지…! 아버지와 마주앉아 이야기를 한다는 것이 꿈같았다. 나이가 많이 드셔서 마음도 퍽 약해지신 모습을 보니 안타까웠지만, 다시 목사님이 해주신 말씀을 내 마음에 세우기로 했다.
하나님이 당신의 때에 우리를 한국으로 이끄셨고, 하나님이 모든 일을 맞추어가시는 것을 보았다. 나는 나이지리아 이민국 직원들을 미워하고 억울하게 한국에 쫓겨왔다고 생각했지만, 모든 일을 엮어가시는 하나님의 손길을 느끼면서 원망도, 미움도 더 이상 내 속에 있지 않았다.

우리도 무전전도여행을 떠나자
한국에 머무는 동안 미국의 사역자들이 한달 간 무전전도여행을 다녀온 간증을 들었다. 참 은혜로웠다. 남편은 우리도 나이지리아에 돌아가면 그런 은혜를 입고 싶어했다. 무전전도여행! 그건 응당 형제들의 몫이라고 생각했기에 내가 갈 생각은 한 번도 해본 적이 없었다.
2011년 3월, 무전전도여행을 떠났다. 사역자 부부는 4주, 선교학생들과 단기선교사들은 2주로 기간을 정했다. 우리 부부는 수도인 아부자로 떠나기로 했다. 한달! 너무 길어 보여 부담스러웠다. 교회 식구들은 다들 우리 부부를 보고 백인 둘만 떠나는 여행인데 괜찮겠냐고 걱정들이었다.

3월 8일 - 당신이 도와주어야 마땅하지 않냐?
라고스에서 버스로 12시간 정도 걸리는 아부자. 길에서 차를 잡아 타고 가기로 했다. 이바단을 지나 아쿠레에 이르자 벌써 날이 어둑어둑해졌다. 거기서 다른 차를 잡아 타고 가야 했는데, 차도 사람도 왕래가 점점 드물었다. 방법이 없어서 그냥 서 있는데, 두 여자가 지나가다가 다시 돌아와서 왜 거기 서 있느냐고 물었다. 아부자로 전도여행을 가려고 차를 잡고 있다고 하자 한 여자가 자기도 아부자로 가려고 한다고 했다. 바로 그때 코카콜라를 실은 큰 트레일러가 지나가는 것을 그 여자가 세우더니 차비를 흥정하기 시작했다. 이어 다른 여자가 그 차로 가서 우리를 가리키면서 뭐라고 이야기하더니 우리를 오라고 손짓했다. 그는 운전기사에게 ‘이분들은 선교사로 아부자로 전도여행을 가는 중이니 당신이 도와주어야 마땅하지 않겠냐?’고 하며 그냥 타고 가라고 했다. 엉겁결에 트레일러에 올라탔다.
대략 밤 11시쯤이면 도착하겠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내가 타본 차 중에 그렇게 느리게 가는 차는 처음이었던 것 같다. 시속 10km, 20km의 속도로 엉금엉금 갔다. 전도여행의 첫날은 그 차 안에서 보내고, 다음 날 새벽 5시
즈음 아부자에 도착했다. 허리도 아프고 고달팠지만 하나님이 느린 트레일러를 준비해주셔서 하룻밤을 보내게 하신 것이 무척 감사했다.

3월 9일 - 말씀을 전할 기회와 하룻밤 잠자리
해가 떠오르고 사람들이 북적대기 시작했다. 어디서 어떻게 복음을 전해야 할지 막막했다. 몸도 피곤하고 배도 고픈 데에다 뜨거운 태양의 열기에 지쳐서 꼼짝도 하기 싫었다. 어느 집 앞 나무 그늘 밑에 벤치가 있기에 지나가는 사람이 보거나 말거나 누워 있는데, 문지기가 나오더니 가달라고 정중히 부탁했다. 할 수 없이 일어나 몇몇 가게를 방문해 전도했지만 내 머릿속에는 온통 ‘오늘 어디서 자지?’ 하고 걱정이 떠나지 않았다. 남편에게 물었다.
“어딜 가야 하지?”
“여길 가도 되고, 저길 가도 돼. 우리가 여길 가든 저길 가든 하나님이 도우실 거니까.”
실제로 하나님은 전도여행 내내 그렇게 일해주셨다.
해질 무렵, 남편은 두세(Duse) 지역으로 가자고 했다. 가는 길에 처음 보이는 교회에 들어가서 목사님을 만나고 싶다고 하자 흔쾌히 안내해주었다. 목사님에게 우리를 소개하고 두 가지 부탁을 했다. 말씀을 전할 기회와 하룻밤 잠자리. 감사하게도 두 가지 부탁을 다 들어주셨다. 예배를 마친 후에는 가게에 가서 이것저것 먹을 것을 사서 챙긴 후 호텔까지 태워다주는 호의까지 베풀어주셨다. 잘 방이 있다는 것이 얼마나 감사하던지….

▲ 하나님의 은혜로 호텔에서 잔 후, 아침에 무더위에 질려 호텔 마당에 있는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다가 만난 켄(Ken).그는 우리 부부에게 자기 집 안방을 내주고 집을 마음대로 사용하라며 집 열쇠를 우리에게 맡기고 출근했다.

3월 10일 - 켄(Ken)의 집에서
아침에 떠날 준비를 하고 마당으로 나왔다가 내리쬐는 태양에 질려서 호텔 밖으로 나갈 엄두가 나지 않았다. 마당에 있는 의자에 앉아 있다가 그곳에 있는 사람들과 성경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러다 보니 하루종일 남편은 남편대로, 나는 나대로 그곳에서 계속 복음을 전했다. 말씀을 듣던 호텔 매니저가 ‘당신들 아침부터 지금까지 6시간째 이야기하고 있는데, 배는 고프지 않냐?’며 음식과 음료수를 가져왔다.
말씀을 듣던 사람들 가운데 켄(Ken)이라는 분이 우리에 대해 꼬치꼬치 캐묻더니, 괜찮으면 자기 집에서 지내면서 말씀을 전해 달라고 했다. 그는 어려웠던 시절에 아내가 도망가 홀로 두 아이를 키우며 살고 있었다. 안방을 우리 부부에게 내주고, 아침에 출근할 때에는 집 열쇠를 아예 우리에게 맡기며 마음대로 집을 사용하라고 했다. 전도여행이 끝날 때까지 있어도 괜찮다며, 저녁에는 말씀을 들을 사람들과 함께 오겠다고 했다.
낮에는 두세 동네를 다니면서 말씀을 전하고, 저녁에는 켄이 데리고 온 사람들과 함께 모임을 가졌다. 처음 듣는 복음(福音)! 사람들은 간절히 말씀을 듣고, 자기 집에 와서도 말씀을 전해줄 수 있느냐고 물었다. 켄의 집에 머문 닷새 동안 하나님이 그렇게 은혜를 입혀주셨다.

3월 14일 - 6시 30분 전까지 나가줄 수 있으면
거처도 정하지 않고 떠나는 우리를 염려하는 켄과 작별인사를 하고 두세(Duse)를 떠났다. 남편은 괄링파(Gwalingpa)로 가기로 정했다. 길에 서서 차를 잡으니, 신기하게도 괄링파로 가는 차였다. 괄링파는 부유층 사람들이 모여 사는 동네로 전도하기가 쉽지 않았다. 깨끗하게 정리된 도로를 여기저기 걸어다녔지만 사람을 만나기 어려웠다. 배도 고프고, 목도 마르고, 내리쬐는 태양을 피해 마땅히 앉을 자리도 없었다. 그때 문지기 한 사람이 우리를 부르더니 음료수를 주며 마시라고 했다. 정말 목이 말랐었는데…. 우리를 세밀히 돌보시는 하나님이 느껴져서 마음이 찡했다.
하루종일 걸어다니다 보니 어느덧 해가 뉘엿뉘엿했다. 어디서 자야 할지 또 막막했다. 우리는 호텔에 들어가 은혜를 구했지만 프런트 직원은 매니저가 없어서 자신이 결정할 수 없다며 거절했다. 세 호텔에서 거절당하니 벌써 밤 11시가 가까워졌다. 지나가다가 한 호텔이 눈에 띄어 들어가니 역시 매니저가 퇴근하고 없다고 했다. 돌아서서 나오려고 하는데, 프런트에 있던 청년이 우리를 부르더니 ‘내일 아침 6시 30분 전까지 나가줄 수 있으면 방을 주겠다’고 했다. 시원한 에어컨이 있는 호텔 방, 우리에겐 천국 같았다. 하루의 피곤함이 다 싹 날아갔다.

3월 15일 - 윌리엄 목사님 부부에게 복음을 전할 수 있게 해주셔서
프런트에서 일하는 청년의 이름은 니콜라스. 전화번호를 주고받고 일찍 호텔을 나왔다. 길을 가다보니 큰 쇼핑센터가 보여 가게마다 들어가서 전도했다. 오후엔 가까운 시장에서 전도하는데, 니콜라스에게서 전화가 왔다. 지금 어디에 있냐며, 우리를 꼭 만나고 싶어하는 사람이 있다고 했다. 잠시 후 니콜라스가 우리를 데리러 왔고, 함께 간 곳은 니콜라스의 삼촌 집이었다. 그의 삼촌은 에코와(Ekowa) 교회의 목사로, 몇 달 전에 어느 교회의 초청을 받아 한국에 다녀왔다고 했다. 한국에 일주일 정도 있는 동안 한국 사람들이 자기에게 너무 친절했다며 우리가 한국 사람이라는 이유만으로 마음을 활짝 열었다.
아프리카 음식은 대부분 한 그릇 음식이어서, 닭이든 생선이든 한두 조각 올려주는 것이 대부분이다. 그런데 그분은 ‘한국에 갔더니 접시에 닭이든 고기든 쌓아놓고 마음껏 먹게 했다’며 우리에게도 똑같이 대접을 해주었다. 뷔페에 온 것처럼 차려진 음식들. 거기에다 한국에 갔을 때 받은 선물이라며 젓가락 한 모를 가지고 와서 남편에게 한 짝 나에게 한 짝을 주며 쓰란다. 이건 같이 쓰는 거라고 시범을 보여주었더니 다들 박수를 치며 신기해했다. 참 순수하고 재미있는 가족이었다. 위층의 방 하나를 내어주며 전도여행 기간 동안 얼마든지 자기 집에 있어도 된다고 했다. 그런 분을 만나게 이끌어주신 하나님의 인도를 생각하니 너무 신기했다.
7일 동안, 윌리엄 목사님 집에 머물면서 아부자의 이곳저곳을 다니며 복음을 전할 수 있었다. 특별히 하나님이 윌리엄 목사님 부부에게 복음을 전할 수 있게 해주셔서 너무 감사했다. 여러 부류의 사람들을 만나 복음을 전하면서, 우리가 나이지리아에 다른 것이 아닌 복음을 가진 자로 있다는 사실이 너무 자랑스럽고 감사했다.

3월 21일 - “나도 의로운 거예요?”
아쉬워하는 윌리엄 목사님 가족과 작별하고 쿠브아(Kubwa) 동네로 갔다. 켄(Ken)의 집에서 함께 성경공부를 했던 안(Ann)이라는 여자 분이 우리를 초청했다. 안(Ann)도 저녁이면 동네 사람들을 불러와 그 집 마당에서 집회를 가졌다.
바위산으로 둘러싸여 있는 아부자는 유난히 더워서, 밤 사이에 더위가 채 식기도 전에 다시 태양이 떠올라 아침부터 더위가 기승을 부렸다. 내가 기억하기로, 아프리카에 있었던 시간 중에 그때가 가장 더웠던 것 같다. 우리는 어찌하든 뜨거운 태양을 피해 나무 그늘로 숨어들었는데, 하나님은 거기서도 복음 전할 사람들을 붙여주셨다.
큰 망고나무 아래서 음식을 팔던 모슬렘 아주머니. 두 백인이 나무 그늘 아래 앉아 있으니 궁금해서 이것저것 물어보다가 우리가 선교사라는 이야기를 듣고 본격적으로 이야기를 시작했다. 우리가 ‘예수’라는 이름이 ‘죄에서 구원하는 자’라는 뜻이라고 하자 그런 이야기는 처음 들어보았다며, 장사는 뒤로하고 여러 시간 말씀에 귀를 기울였다.
“나도 의로운 거예요?”
모슬렘인 아주머니가 복음을 받아들이는 것이 너무 신기했다.

3월 22일 - 우리가 가버릴까봐 노심초사하며
동네에서 조그마한 가게를 하는 멜시(Mercy)와의 만남. 아이를 못 낳는다는 이유로 이혼 당한 후 혼자 살면서 하나님께 자신을 드리는 삶을 살고 있었다. 나름대로 정성을 다해 신앙생활을 하지만 죄 문제를 해결 못했다며 우리가 전하는 성경 말씀을 참 간절히도 들었다. 오전, 오후, 가게에 오는 손님들에게 물건을 팔아가며 혹 우리가 가버릴까봐 노심초사하며 말씀을 들었다. 그리고 복음을 듣고 너무 감격스러워했다. 자기 집에 꼭 한번 들러서 가족들에게 복음을 전해 달라고 부탁했다.
쿠브아(Kubwa)에 머무는 동안 저녁에는 매일 안(Ann)의 집에서 집회를 하며 모인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할 수 있었다. 모인 사람들이 다니는 교회도 참으로 다양했다. 하지만 한결같이 죄 문제를 해결하지 못해 어려워하고 있었다.

3월 28일 - 복음 전하는 이유 하나 때문에
쿠브아(Kubwa)에서 만난 멜시의 집에서 그의 가족들과 함께 성경공부를 했다. 한국에서 선교사가 왔다고 이웃집에서 내가 제일 좋아하는 ‘프라이드 라이스’와 ‘플란틴’을 보내왔다. 가는 곳마다 받는 융숭한 대접, 복음을 전하는 이유 하나 때문이다.

▲ 복음을 듣고 감격스러워하던 멜시(가운데)의 집에서 성경공부를 한 후 멜시,그의 동생과 함께

4월 1일 - 나이지리아는 험악한 일이 많기로 소문나 있지만
라고스로 돌아가는 날, 우리 부부의 차비를 제하고도 우리 주머니에 50달러가 남았다. 전도여행 내내 장소를 옮길 때마다 하나님이 차를 예비해주셔서 마치 자가용처럼 사용했다.
전도여행 기간 동안 어제 아무리 배불리 먹는 은혜를 입었어도 오늘 주님이 도우셔야 양식을 얻을 수 있었고, 어제 아무리 많은 이에게 복음을 전했어도 오늘 주님이 허락하셔야 누군가와 말씀을 나눌 수 있었다. 생각해보니, 어느덧 내가 아프리카에서 너무 부하게 살아서 그런 은혜를 구하지 않고도 살아가고 있다는 마음이 들었다.
나이지리아는 험악한 일이 많기로 소문나 있지만, 전도여행 내내 좋은 사람들을 만나 마음껏 복음을 전하며 지냈다. 이곳도 하나님의 마음 안에 있는 거룩한 땅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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