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순 일곱, 복음 안에서 젊은이처럼 살고 싶다
예순 일곱, 복음 안에서 젊은이처럼 살고 싶다
  • 월간 기쁜소식
  • 승인 2012.12.19 14: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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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금 더 잘살려 하고, 더 좋은 것을 찾아다녔던 지난 시간들. 그러나 하나님과 함께하지 않은 날들은 허망한 것이었다. 내가 빚보증을 잘못 서서 당한 고통과 남편의 질병, 그것이 우리 마음을 무너뜨렸고, 하나님을 만나 참된 행복을 얻게 하였다.

 

회오리바람
나는 7남매 가운데 다섯째 장녀로 태어나 아들 많은 집에서 귀여움을 듬뿍 받으며 자랐다. 우리 아버지와 시아버지는 두 분 다 교직에 계셨고, 선후배 사이셨다. 나는 대학을 졸업하고 교직생활을 조금 하다가 역시 교사였던 남편과 결혼한 후 교사 일을 그만두었다. 남편은 교장이 되기 위해서 시골 학교에 지원해 근무하기도 하여 우리는 잠시 주말부부로 생활하기도 했다.
20여 년 전, 섬유공장을 하던 하나뿐인 여동생이 보증을 서 달라고 부탁했다. 나는 남편이 월급 타서 주면 그 돈으로 아이들 뒷바라지만 하면서 살았지 사업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몰랐다. 그때 내 이름으로 된 아파트가 한 채 있어서 남편 허락도 받지 않고 보증을 서주었다. 후에 남편이 그 일을 알고는 다음부터는 보증 서는 일을 하지 말라고 했다. 그것으로 끝냈으면 괜찮았을 텐데, 동생이 다시 보증을 부탁해서 또 허락해주었다.
얼마 후, 동생 공장이 부도가 났다. 동생 부부가 제품을 만들어 납품하던 섬유업체에서 부도가 나면서 연쇄적으로 부도가 발생한 것이다. 납품 받던 업체에서 부도가 났을 때 동생이 나에게 이야기했으면 집의 명의를 이전하고 통장에 있던 돈도 인출해서 피해를 줄일 수 있었을 텐데, 동생이 아무 말도 해주지 않아 그대로 당했다. 갑자기 아파트가 날아가고, 통장이 지불정지가 되고…. 그것만이 아니었다. 동생이 갚지 못한 빚이 보증자인 나에게 다 넘어왔다.
갚아야 할 부도 금액이 몇억 원은 되었다. 교육자에게 무슨 돈이 있겠는가? 처음에는 내가 집을 떠나 다른 곳에서 지냈다. 그러다가 남편에게까지 차압이 들어와 우리 부부는 어쩔 수 없이 법적으로 이혼했다. 두 딸이 중학교와 고등학교에 다닐 때였다. 이혼하고는 집에서 함께 살 수가 없었다. 채권자인 보증보험에서 수시로 찾아와 뒷조사를 하기에 집에 있을 수가 없었다. 여기저기 돌아다니며 지내다 보니 주민등록이 말소되는 등 별별 일이 생겼다. ‘이래서는 안 되겠다’ 싶어서 친정 오빠에게 돈을 빌려서 분식집을 시작했지만, 장사도 아무나 하는 것이 아니었다. 그 돈마저 다 까먹고 말았다.

10년 만에 다시 한 혼인신고
연말이면 빚을 탕감해주는 제도가 있는데, 남편이 그걸 알고 보증보험 사람을 만나 우리 가정 일을 사실대로 말했다. 빚이 두 곳에 있었는데 두 곳 다 빚을 많이 탕감해주었고, 나머지는 갚을 수 있었다. 친정 동생 때문에 겪은 일이라 남편에게 할 말이 없었지만, 남편은 한 번도 “왜 그렇게 했어?” 하고 나를 탓하지 않았다.
빚을 다 해결한 줄 알았는데, 그 후로도 몇 곳에서 빚을 갚으라는 연락이 와서 몇 년 더 고생해 남은 빚도 다 청산했다. 아이들도 고생이 많았고, 우리 부부도 힘들게 보낸 10년의 세월이었다. 빚을 다 갚고 나서야 우리 부부는 다시 혼인신고를 했다.

▲ 남편 퇴직 후, 지난날의 어려움을 잊고 여행을 하며 즐겁게 살려고 했다.(헝가리 부다페스트에서).

실버타운(silver town)으로 
고생해서 빚을 다 갚고 나니 남편 나이 59세, 퇴직이 가까웠다. 미안한 마음으로 열심히 살았다. 남편이 63세에 퇴직한 후로는 어려웠던 시간들을 다 잊고 받는 연금으로 해외 여행을 다니면서 즐겁게 살았다. 그런데 퇴직 후 3년째 되던 해, 건강검진 결과 남편은 간경화 진단을 받았다. ‘알코올성 간경화’였다. 남편은 바로 술을 끊었지만 망가진 몸을 회복하기 위해서는 환경이 좋은 곳에서 살아야 할 필요성을 느꼈다.
우리 부부는 여기저기 알아보다가 창녕에 있는 실버타운(silver town)에 들어가기로 했다. 그곳에 가서 체험해보니, 공장이 없는 청정지역으로 공기도 맑고 환경이 좋았다. 실버타운에는 영화관, 수영장, 헬스장 등 온갖 문화시설과 체육시설이 갖추어져 있었다. 거기에다 밥도 해먹지 않고, 청소는 일주일에 두 번, 빨래는 한 번 해주는 등 여자가 지내기에도 너무 좋았다. 집에 있던 책과 가구 등을 아는 사람들에게 다 주고 살던 집이 바로 팔리지 않아 전세로 내놓은 후 옷가지와 중요한 것들만 가지고 실버타운으로 들어갔다.
그곳에서 서울에서 내려온 한 부부를 만났다. 그곳에는 70대, 80대가 많기에 60대인 우리 부부가 제일 젊었는데, 우리보다 젊은 부부가 들어와서 그들과 친구가 되어 아주 친하게 지냈다. 그 부부와 함께 여행도 하고 즐겁게 보냈다.

이놈의 죄는 언제 없어지나?
친구 부부는 일요일이면 교회에 갔다. 우리 부부도 일요일이면 친구 부부를 따라서 교회에 가기 시작했다. 그런데 교회에서, 오래 전에 들었던 ‘구원’이라는 말은 전혀 하지 않고 사람들이 늘 ‘알고 지은 죄, 모르고 지은 죄를 용서해 달라’고 했다. 나는 속으로 ‘이놈의 죄는 언제 없어지나?’ 하고 생각했다. 설교 말씀도 무슨 소리인지 마음에 와닿지 않았다.
내가 30대였던 30여 년 전, 아는 친구가 대구에 살던 나에게 서울에서 하는 수양회에 놀러 가자고 했다. 서울 어느 학교에서 텐트를 쳐놓고 수양회를 하는데, 그곳에서 성경 말씀을 많이 들었다. 옆에서는 사람들이 계속 구원받아야 한다고 했다. 나는 아무것도 모르고 준비가 전혀 안 된 상태여서 무슨 말을 하는지 알아들을 수 없었다. 나에게 죄 이야기를 하는데, 나는 죄가 없다고 했다. 나름대로 정직하게 살았기 때문이다. 수양회를 다녀와서 그 모임에 속한 대구에 있는 교회에 잠시 나갔는데, 마음만 무거워
‘나만 지옥에 가나? 내 주위에 있는 사람도 다 가는데…’ 하고 교회에 발길을 끊었다. 그후로는 교회를 잊고 살았다. 그런데 세월이 지나도 마음 깊은 곳에서는 하나님을 믿어야 한다는 마음을 항상 간직하고 있었던 모양이다.

 

친구 부부를 따라 교회에 가서 설교를 들으면 그때 들었던 이야기와 차이가 있어서 ‘저게 아닌데…’ 하며 참된 믿음을 갖고 싶은 마음이 숙제처럼 남았다. 남편도 교회를 좋아하지는 않았다. 교회에 다니는 사람들이 안 믿는 사람들보다 더 이기적인 것 같다고 느꼈기 때문이다. 그래도 친구가 좋아서 왔다갔다하는 재미로 같이 다녔다.
그 친구 부부와 다섯 계절을 함께 즐겁게 보냈다. 그런데 서울에 사는 친구 부부의 자녀들이 서울로 다시 올라오라고 하도 졸라서, 실버타운에 들어온 지 1년 3개월 만에 친구 부부는 다시 서울로 갔다. 친구 부부가 떠나자 우리 부부도 그곳에 더 있고 싶지 않았다. 단짝이 없어지니 마음이 허전했다. 게다가 남편이 실버타운에서 부회장으로 일하면서 스트레스를 많이 받아 건강이 더 안 좋아졌다. 간이 나쁜 사람은 스트레스를 받으면 안 되는데, 건강을 위해 갔다가 오히려 몸을 버린 것이다. 2011년 11월, 남편 치료를 핑계로 실버타운에 들어간 지 1년 6개월 만에 그곳에서 나왔다.

30년 만에 떠오른 이름
실버타운에서 나오기 얼마 전, 하루는 갑자기 ‘박옥수 목사’라는 이름이 떠올랐다. 30여 년 전 대구에서 ‘죄 사함 거듭남의 비밀’이라는 제목의 집회 포스터를 본 적이 있었다. 당시에는 교회에서 부흥회를 많이 했기에 장로교회에서 하는 집회라고 생각해 관심을 갖지 않았다. 그런데 30년이 흐른 어느 날 갑자기 집회 포스터에서 보았던 목사님 이름이 생각난 것이다. 인터넷에서 이름을 검색한 후, 기쁜소식선교회 홈페이지에 들어가서 설교들을 들어보았다. 일요일이면 갔던 교회와 달리 구원의 복음을 전한다는 사실을 확실히 알 수 있었다. 실버타운에서 나온 후로도 종종 인터넷으로 설교 말씀을 들었고, 그 가운데 조규윤 목사님의 ‘복음 강해’를 계속해서 들었다.
2012년 5월 초, 남편과 함께 기쁜소식선교회에 속한 교회에 가보기로 했다. 교회가 어디에 있는지 몰라 동대구교회에 전화를 걸었다. ‘인터넷에서 복음 강해를 들었는데 담임 목사님과 상담을 하고 싶다’고 하며 목사님의 성함을 묻자 조규윤 목사님이라고 했다. “인터넷에서 바로 그 목사님 설교 말씀을 들었는데, 그분은 안양에서 목회한다고 했는데요?” 하고 묻자, 일주일 전에 이동되어 왔다고 했다. 며칠 후, 목사님 부부가 우리 집에 찾아오셨다. 인터넷에서 이미 여러 번 보았기에 처음 만났지만 낯설지 않았다. 목사님은 우리 부부에게 말씀을 전해주시고, 5월 20일부터 기쁜소식대구교회에서 대전도집회가 있으니 참석하라고 권하셨다.

쉬운 구원
집회를 앞두고 기쁜소식대구교회에 다니는 두 자매가 우리 집에 찾아왔다. 조 목사님이 부탁한 모양이었다. 그 가운데 한 자매가 집회 기간에 아침저녁으로 우리 집에 찾아와서 우리 부부를 교회까지 데려다주었다. 그때는 교회에 가는 길을 모르고 남편이 눈이 나빠서 저녁에는 운전하기가 어려웠다.
처음 기쁜소식대구교회에 갔을 때 노인들이 계시는 것을 보고 너무 부러웠다. ‘저분들은 어떻게 구원을 받아서 이 교회에 나오고 있나? 어찌해야 나도 구원받을 수 있을까?’ 김동성 목사님이 전하시는 주일 오전 설교 말씀이 마음에 와닿았다. 그동안 다녔던 교회 목사님들의 설교와 많이 달랐다. 성경 말씀을 아주 상세하게 설명해주셨다. 예배를 마치고 김 목사님과 신앙상담을 나누었다. 목사님이 복음을 전해주셨다. 머리로는 다 이해가 되는데 마음에 믿어지지 않아 답답한 마음을 목사님께 말씀드렸다. “목사님, 예수님이 당신의 보혈로 내 죄를 사해주신 것을 머리로는 다 알겠는데 마음에는 믿어지지 않아요.”
저녁부터 대전도집회가 시작되었다. 강사인 박옥수 목사님의 말씀을 듣고 목사님과 신앙상담을 나누었다. 목사님께 내 상태를 말씀드리자 목사님은 “구원은 절대로 내가 이룰 수 없고, 하나님만 이루실 수 있습니다.” 하고 말씀하셨다. 그리고 성경 몇 구절을 찾아서 읽으라고 하셨다. 그 가운데 이사야 53장 6절 말씀이 마음에 들어왔다.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하여 각기 제길로 갔거늘 여호와께서는 우리 무리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도다.”
‘하나님께서 내 죄를 예수님께 담당시키셨다면 예수님이 다 지고 가신 것이지 않은가!’ 목사님이 설명해주시는 이야기를 듣고 생각해보니 정말 그렇다는 마음이 들었다.
“아! 예수님이 내 죄를 다 가져가셨네요.”
나는 구원이 그렇게 쉬운 줄 몰랐다. 구원받으려고 굉장히 노력했기 때문이다. 한편으로는 기쁘고, 한편으로는 ‘이게 구원인가?’ 싶은 게 어리둥절하고 실감이 나지 않았다. 남편도 복음이 믿어진다고 했다. 그날 이후 집회 내내 말씀도 잘 들리고 마음도 즐거웠다. 하지만 구원받은 다른 사람들처럼 기쁨이 막 일어나지는 않아 ‘내가 진짜 구원받았을까?’ 하는 생각을 계속 했다.
그후 8월에 있었던 여름 캠프에 참석했다. 우리 부부는 복음반에 들어가서 말씀을 들었다. 강사 목사님이 죄부터 구원까지 상세하게 말씀하시는데, 모든 것이 마음에서 분명해지고 시원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히셔서 다 이루었다고 하신 말씀도 믿어지고, 하나님이 저희 죄와 저희 불법을 다시 기억지 않겠다고 하신 말씀도 믿어졌다.

멀어진 게임, 쇼핑, 친구, 그리고 미움
나는 구원받기 전에 매일 컴퓨터 게임을 했다. 컴퓨터를 붙들고 살았다. 어쩌면 그렇게 컴퓨터를 붙들고 살았기에 기쁜소식선교회 홈페이지에 들어갔는지도 모르겠다. 중독까지는 아니더라도, 밤에 잠이 오지 않으면 컴퓨터 게임을 할 만큼 게임을 좋아했다. 그런데 구원받고는 딱 하기가 싫었다. 구원받은 후로는 친구들 모임에도 가지 않고 있다. 친구들과 모여서 영화관에 가고 시시덕거리고 하면 마음이 안 좋을 것 같아서, 친구들이 얼굴 한번 보자고 전화하지만 친구들을 보지 않은 지 여러 달이 되었다.
그리고 보통 여자들은 물건 사는 것을 좋아한다. 백화점에서 ‘무슨 품목을 몇 프로 세일한다’는 광고지가 오면 나는 틀림없이 가서 사왔다. 그런데 지금은 그런 광고지를 봐도 시큰둥하다. 그것이 헛되다는 마음이 들기 때문이다. 그런 데 쓸 돈이 있으면 복음의 일에 드려야겠다는 마음이 든다. 마음도 튼튼해졌다. 전에는 아픈 남편이 죽으면 나 혼자 남게 되기에 불안한 생각에 많이 울었다. 구원받고는 그런 불안감도 사라졌다. 모든 것을 하나님께 맡기고 싶은 마음이 생겼다.
내 인생에 고통을 가져다준 여동생. 나는 동생이 내 인생을 망쳤다고 여겨 무척 미워했다. 동생이기에 내색은 하지 않지만 마음 한구석에 자리잡고 있는 미운 마음이 사라지지 않았다. 그런데 구원받고는 동생을 미워하던 마음도 다 사라졌다. 마음으로 용서가 되었다. 나는 이제 동생이 구원받기를 소망한다. 동생은 교회 집사인데, 똑똑해서 아직은 복음을 받아들이지 않고 있다. ‘언니는 언니가 믿는 하나님을 믿고, 나는 내가 믿는 하나님을 믿는다’고 말한다. 하와이에는 목사인 오빠가 있는데, 오빠에게도 복음을 전하길 소망한다.

이렇게 하나님이 역사하시는구나!
예배 시간에 목사님이 기도하면 응답된다고 하시지만 나는 잘 믿지 못했다. 먼저 구원받은 자매들이 하나님께 기도하면 하나님이 필요한 물질을 주신다고 해도 ‘어떻게 그런 일이 일어나지?’ 하고 의아스러웠다. 그런데 월간 <기쁜소식>에서 선교사님들이 아무것도 없는 가운데 하나님께 기도했을 때 하나님이 응답하시는 간증들을 읽으면서 ‘아, 이렇게 하나님이 역사하시는구나!’ 하고 비로소 믿어졌다. 나는 믿음의 세계에서 어린아이 같아서 이처럼 하나씩 배워가고 있다.
요즘 우리 부부는 말씀 듣는 재미로 산다. 교회에 가서 말씀을 들어야 마음이 편하다. 기쁜소식강남교회 예배 때 박옥수 목사님이 전하시는 말씀도 인터넷으로 다 듣는다. 그리고 남편이 마하나임 사이버신학교에 청강생으로 등록해 나도 매일 옆에서 함께 강의를 듣는다. 들어도 잘 모르지만, 그래도 강의를 들으면서 ‘아, 이 말씀이 이런 말씀이구나!’ 하고 기쁨을 얻을 때가 많다.
나는 성격이 무척 급해서 남편과 잘 다투었다. 구원받은 후로도 하루는 남편과 다투고 교회 부인회에 갔는데, ‘아내가 남편과 다투는 이유는 마음이 남편보다 높기 때문이다’는 말씀을 들었다. 집에 돌아와보니 남편은 마음이 상해서 밥도 먹지 않고 있었다. 옛날에는 나도 자존심이 있기에 굽히지 않았는데, 그날은 “여보, 내가 오늘 설교 말씀을 들어보니까 내가 마음이 높아서 그랬어. 당신한테 내가 잘못했어.” 하고 빌었다. 그러고 나니까 마음이 얼마나 편한지…. ‘마음에 이렇게 평안이 오는 거구나! 구원받은 사람들이 이래서 마음을 빨리 돌이키는구나!’ 하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 전에는 친구들과 어울리는 것을 낙으로 삼았지만 지금은 발걸음이 자연스럽게 교회로 향한다.

그러고 보면, 이제 무슨 일에든 하나님을 인정하고 하나님을 바라보며 사는 것밖에 없는 것 같다. 처음에는 불평이 나오다가도 ‘이것도 하나님이 허락하신 일이다’는 마음이 들어 마음을 돌이킨다. 그러니까 마음이 편하다. 지난 주에는 교회에서 ‘도시락 데이’를 갖기로 했다. 주일에 집에서 밥을 싸와 함께 먹는 것이다. 맛있게 만들어 가려고 나름대로 마음을 쏟아 찰밥을 준비했다. 그런데 도시락 데이가 취소되어 속이 상했다. ‘이걸 다 어떡하지? 많이 준비했는데….’ 하지만 곧 하나님을 인정했다. 하나님의 선하신 손길이 있음을 믿었다. 그때 준비한 찰밥을 남편과 함께 지금도 맛있게 먹고 있다.
남편은 매달 서울대학교병원에 검진을 받으러 가는데, 검진하는 교수님이 간경화에 있어서는 우리나라 최고의 권위자다. 남편이 구원받은 후로 매번 병원에 갈 때마다 교수님이 상태가 좋아졌다고 한다. 간은 한 번 손상되면 회복이 잘 안 되는데 자꾸 좋아지고 있는 것이다. 굉장히 기뻐하고 감사해하는 남편에게 오직 하나님만 의지하며 살자고 이야기한다.

내일 죽는다 해도 소망이 있지 않은가
남편이나 나나 마음이 높아서 구원받지 못할 사람들이었다. 그런데 남편은 몸이 아프면서 마음이 꺾였다. ‘죽음 뒤에 분명히 무언가 있을 거야! 나도 죄가 많은데 그걸 알고 싶다!’는 마음을 가졌다. 그리고 나는 많은 돈을 잃으면서 마음에 큰 고통을 겪었고, 30여 년 전부터 믿음에 대한 갈증을 가지고 있었다. 생각해보면, 하나님이 우리 부부에게 그런 삶과 마음을 주신 것이다.
전에는 조금 더 잘살려고 했고, 우리가 가지고 있고 경험한 것보다 더 좋은 것이 있는지 찾아다녔다. 지금은 ‘우리가 산 것이 산 것이 아니었구나’ 하는 마음이 든다. 전도서에 기록된 말씀처럼, 삶은 헛되고 헛된 것이었다. 사회에서 어느 정도 위치에 서면 성공했다고 생각할지 몰라도, 하나님과 함께하지 않은 날들은 다 허망한 것이었다.
하나님을 알고 나서 우리 부부의 마음에는 참 소망이 있다. 죽고 나면 끝인 줄 알았는데 하늘나라에 갈 소망이 생겼다. 내일 죽는다 해도 소망이 있지 않은가. 이것을 모르고 살았지만 늦게나마 이 거룩한 은혜를 입은 것이 감사하다. 한번은 교회에서 찬양을 듣던 중에 ‘내가 알기 전에 하나님이 벌써 나를 사랑하고 계셨다’는 가사가 마음을 깊이 울렸다. ‘나는 하나님을 잊고 살았지만 하나님은 나를 버리시지 않았구나!’
이젠 두 딸과 그 가족들이 구원받길 마음 깊이 소망한다. 아이들은 아버지가 병이 들어서 우리 부부의 마음이 약해져 지금 이렇게 산다고 생각하는 것 같다. 둘 다 사회적으로 성공하다 보니 마음이 높아서 우리 이야기를 잘 듣지 않는다. 내가 성경 이야기를 하면 ‘엄마가 언제부터 예수님을 믿었다고?’ 하는 태도다. 하지만 그 아이들도 살다보면 마음이 무너질 때가 있을 것이다. 복음을 받아들일 날이 올 것이다.

▲ 내 나이 예순 일곱, 좀 많지만 마음은 젊다. 아니, 그리스도인으로서 어리다. 아이처럼, 젊은이처럼 교회안에서 복음과 함께 남은 생을 보내고 싶다.

내 나이 예순 일곱, 좀 많지만 마음은 젊다. 아니, 그리스도인으로서 너무 어리다. 아이처럼, 젊은이처럼 교회 안에서 복음과 함께 남은 생을 보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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