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사(17) - 문필 변증가들의 활약1
교회사(17) - 문필 변증가들의 활약1
  • 이한규 목사
  • 승인 2012.09.13 16: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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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난과 함께한 교회의 역사

 

 

 

기독교에 대한 사상적 공격

 

로마제국이 정치적, 군사적 방법으로 기독교인들을 박해한 것과 병행하여 문서적, 사상적으로도 기독교를 공격하는 자들이 등장하기 시작했다. 사단은 복음을 대적하기 위해 물리적 박해만 가한 것이 아니라, 새로운 전술을 구사하기 시작한 것이다. 그 사상적 공격수들은 주로 철학자들이 많았는데, 루키아누스(Lucianus of Samosada)와 켈수스(Celsus, 셀수스) 등이 대표적인 사람이었다.

안팎에서 공격을 가하는 영지주의, 몬타니즘, 반삼위일체주의 등의 이단들이나 철학자들과 교회가 싸우면서 기독교 신앙을 변증(辨證, 변론하여 증명함)하는 변증서들이 많이 저술되었고, 교리문답 학교도 등장했다. AD 125년 즈음에는 아테네 교회의 감독 콰드라투스가 하드리안 황제에게 공개적으로 변증서를 썼고, 아리스티데스는 피우스 황제에게 변증서를 썼다. 하지만 그 중요성으로 볼 때 저스틴(Justinus, 유스티누스)이 기독교의 첫 변증가로 꼽힌다.

 

 

하나님의 세상 창조를 부정한 켈수스(Celsus)

 

켈수스(Celsus)는 2세기 후반의 인물로, 플라톤 학파에 속하면서도 에피쿠로스 학설에 기울어진 사람이었다. 그는 자신의 저서 <진리>에서 기독교에 대하여 총체적이면서도 논리적이고 학문적인 비판을 시도했다. 켈수스는 자신이 이용할 수 있는 온갖 학설과 풍자와 상식을 다 동원해서 기독교를 공격하였다.

켈수스의 사상은 그리 깊지는 않지만 후세의 기독교 반대론자인 볼테르, 시트라우스가 사용한 말들 중 상당수가 켈수스의 저서에서 나왔을 만큼 날카롭게 기독교를 부정했다. 그는 '그리스도인들이 근친상간을 하고 인육을 먹는다'는 식의 대중적 비판을 답습할 만큼 경솔하지 않았고, 기독교 신조의 각 조항을 조목 조목 조롱하고 비방했다.

 

 

그는 하나님이 세상을 창조한 것이 아니라고 했다. 만약 하나님이 세상을 창조했다면 지금보다 더 나은 세상, 즉 그릇되게 나가지 않을 세상을 창조했을 것이라고 했다. 만일 하나님이 세상을 창조했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세상이 그릇된 방향으로 나갔다면, 그것은 하나님이 세상을 바로잡는 데 관심이 없다는 증거라고 했다. 만약 하나님이 그런 데 관심이 있었다면 팔레스타인을 자기 땅으로 선정했을 리 만무하며, 아울러 그 땅에서 저급한 하층민들을 모으고 그들에게 세상을 구원하도록 맡기지 않았을 것이라고 했다.

 

"예수가 십자가에서 부활했다고 하지만, 누가 살아난 것을 보았는가? 미친 여자와 넋나간 사람들뿐이다."

 

 

 교회에 적대감을 품을 포르피리우스

신플라톤주의 철학자들 중에서 가장 냉정한 인물로 여겨지는 포르피리우스(Porphyrius)는 성경이 말하는 창조, 타락, 성(成)육식 구속, 심판 등의 진리를 송두리째 배격했다. 그는 다신교 옹호자로서, 교회에 대해 몹시 적대감을 품고 무려 15권의 저서를 지어서 기독교를 공격했다. 그는 '하나님이 어떻게 해와 달을 창조하시기 전에 빛을 창조하실 수 있었는지, 그리스도가 어떻게 제자들에게 더 이상 자기를 보지 못할 것이라고 말하고 동시에 그들과 항상 함께 있겠다고 할 수 있었는지'를 물었다. 또 신약과 구약이 서로 충돌한다는 것, 사도들이 서로 분쟁했다는 것, 제자들의 사상이 일치되지 못했다는 점 등을 들어서 예수님의 신성을 부정하고 그 가르침이 불완전하다고 했다. 더 나아가 예수님이 거짓말을 했으며, 제자들의 본이 되지 못했다고 했다. 또, 예수님의 제자들은 에수님 사후에 그 교훈을 곡해하여 사족을 달았다고 했다.

초기 교부들은 그를 가장 독선적이고 화해할 수 없는 신앙의 적대자로 여겼다.

 

대항마(對抗馬) 변증론자들

철학자들의 공격에 맞서 교회의 지도자들은 기독교에 대한 오해와 잘못된 소문을 제거하고, 진리의 복음과 교회를 지키고 변증하기 위한 노력을 기울였다. 학식 있는 자들이 일어나서 자신들이 믿는 바를 붓으로 담대하고 능력있게 전했는데, 이들은 변증가(apologist)라고 부른다.

변증가들은 하드리안 황제(재위 117~138) 때부터 기독교에 대한 오해나 비난에 대하여 편지나 글로 변박하고, 기독교인이라고 까닭 없이 박해받는 사람들이 공평한 재판을 받을 수 있도록 변호하여 복음의 진리를 역설하였다. 이들의 글은 기독교 신앙을 정립하고 체계화해 신자들의 신앙을 견고케 하고 북돋우는데 크게 기여하였다.

속사도들이 서신을 남겼다면, 변증가들은 작품을 남겼다. 일부 변증가들이 복음의 진리를 헬라의 철학적 개념으로 설명하려고 한 경향 때문에 신앙적인 면에서는 속사도들의 신앙보다 후퇴했다고 평가되기도 하지만, 한편 신학의 기초를 놓았다고 볼 수 있다.

변증가들 중에는 주로 2세기에 출현한 신학자들, 특히 철학적 소양이 풍부한 헬라(동방) 계통 사람들이 많았다. 그 중에서도 순교자 저스틴은 탁월한 변증가였다. 또 라틴의 교부 터툴리안(Turtulian, 155~230 추정)도 대표적인 변증가였다. 터툴리안은 '신약(新約)'이라는 말과 '삼위일체'라는 용어를 처음으로 사용한 사람이기도 하다.
 

저스틴과 유대 노인과의 만남

대표적인 변증론자 저스틴(Justin Martyr)은 2세기 초 팔레스타인(세겜 땅)에서 희랍인 부모 사이에서 태어났다. 저스틴은 진리를 찾고자 하는 열망을 가진 사람으로, 열렬한 철학도였다. 여러 철학을 공부하고, 특히 플라톤 철학에 심취해 있었다. 30대 초반에 그는 '플라톤 철학의 최고봉'에 있는 신(神)에 깊이 매혹되어 에베소 근처의 해변을 걷고 있던 중 거듭난 늙은 유대인을 만나 대화를 나누었다.

온유하고 진지한 노인은 저스틴에게 그가 대답할 수 없는 많은 질문을 하였다. 열띤 토론이 있은 후, 노인은 저스틴에게 "그대는 행함과 사랑이 없는 말쟁이에 지나지 않소. 그대의 목적은 선의 실천자가 되는 것에 있는 것이 아니라 영리한 논쟁가, 교묘한 궤변론자가 되려는 데 있소."라고 하며 "성경을 뒤져 보라. 히브리 예언자들을 연구해 보라. 그대 앞에 광명의 문들이 열리게 해 달라고 기도하라. 하나님과 그리스도가 지혜와 계시를 주시지 않는 한 아무도 이것들을 깨달을 수 없기 때문이다."라고 말을 맺었다. 저스틴의 눈에 그 노인에게는 참된 철학이 있어 보였다. 이후 저스틴은 구약 성경을 탐독했고, 예수 그리스도가 구약을 성취한 구원자요, 진리임을 발견했다.

"나는 이 철학만이 안전하고 유익한 것임을 알게 되었다."

"나는 플라톤의 사상에 기쁨을 느꼈지만, 그리스도인들이 비난을 받으며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것을 보았을 때 그들이 죄악과 쾌락 속에서 산다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당시 그가 죄 사함의 경형에 대해서는 자세하게 언급하지 않았지만 그리스도가 진리라는 사실을 확신했고, 모든 철학 중 기독교가 참된 철학이라는 것이 그의 중심 사상이었다. 이후 그는 기독교의 역사와 진리에 대해 가르침을 열심히 받았고, 교회의 훌륭한 지도자이자 뛰어난 변증론자가 되어 강연과 논쟁과 저술 등을 통해 복음을 변호하고 전파하는 데 헌신했다.

 

 구약의 그리스도를 증거한 저스틴

스스로를 철학자라고 했던 저스틴은 거듭난 뒤 자신이 갖게 된 믿음을 전파하기 위해 많은 편지와 글을 썼고, 이교도들이 그리스도인들을 아주 가혹하게 다루자 그리스도인들을 변증하는 글을 써서 황제에게까지 띄웠다.

저스틴에게 있어서 구약 성경을 이해하는 열쇠는 그리스도였다. 저스틴은 시편 22편을 26회나 인용하여 에수님의 십자가 처형이 어떻게 예언되었는지를 보여주는 등 여러 시편을 자주 인용하였다. 그는 예수님이 당하신 고난을 증명하기 위해 이사야 52장 13절과 53장 12절을 29회나 인용하였다. 또한 그는 구약 성경의 여러 구절들이 신약의 예표로 나타났다고 보았다. 노아 방주의 나무는 십자가의 나무를, 야곱의 아내 레아나 라헬은 교회를, 여호수아는 예수님을 예표한다고 하였다.

 

 

복음의 변증가요, 순교자였던 저스틴

 

안토니누스 피우스(Antoninus Pius, 138~161)의 통치 기간에 저스틴은 로마에서 학교를 세워 학생들을 가르쳤다. 저스틴은 사상과 토론과 논증에 열중한 학자였다. 그가 마흔 다섯 살 때, 고린도에서 철학을 공부한 유대인 철학자 트리포(Trypho)와 논쟁을 벌였다. <트리포와의 대화>라는 책에서 저스틴은 트리포에게 구약 성경에 나타난 메시아가 바로 예수 그리스도임을 설명했다. 이 책은 주로 유대교에 공감하는 이방인들에게 기독교가 뛰어남을 변증하고 있다.

저스틴은 로마에게 한 유명한 철학자와 논쟁을 벌였고, 영지주의적인 발렌틱 파(派), 마르시온 파 사람들과 유대인들과도 논쟁하였다. 그러자 그의 삶을 시기하는 철학자들이 일어나, 저스틴은 '이방 신들에게 희생 제물을 드리라'는 황제의 새로운 법을 어겼다고 고소되었고, 재판관 앞에 서게 되었다. 재판관은 저스틴의 신앙에 대해, 교회의 모임에 대해 물었다. 저스틴은 '그리스도인들은 한 하나님과 하나님의 아들 구세주 그리스도를 믿으며, 그리스도인의 모임이 어디에서 이뤄지는지에 대해서는 결코 말할 수 없다'고 단호하게 대응했다. 그는 다른 신들에게 예배하고 신앙을 포기하라는 명령을 거부하고 그리스도를 위해 목숨을 버리는 길을 택했다. 저스틴은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황제가 통치하던 때에 일어난 박해 기간에 6명의 동료들과 함께 채찍질 당하고 참수형을 당하여 '순교자(Martyr)'라는 별칭을 얻었다.

 

 

저스틴의 변증서들

 

저스틴은 첫 <변증서(Apology)>는 안토니우스 피우스와 그의 양자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그리고 로마국민들에게 보내는 형식으로 되어 있으며, 기독교인들에게 자유와 공평을 베풀 것을 제안하였다. 총 68장으로 구성된 제 1변증서에서 그는 최초로 이교도의 여러 비난과 몰이해에 대해 논박하였다. 4~13장까지 기독교에 대한 비판을 논박하고, 그 뒷장들에서는 기독교의 우월성을 변증하였다.

제 2변증서는 15장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그리스도인을 부당하게 처벌한 것을 항변하는 내용이 담겨있다. 이교도인 남편이 그리스도인인 아내를 로마의 행정장관 우르비쿠스에게 고발했는데, 그 부인은 남편의 생활방식 때문에 이혼하기를 원하였다. 귀족이었던 그녀가 자신에 대한 재판을 연기시키는 데 성공하자, 그녀의 남편은 그녀에게 복음을 전해준 프톨레미라는 사람을 투옥시켰다. 프톨레미는 재판에 회부되어 그리스도인임을 고백하였다는 이유로 사형을 선고받았다. 루키우스라는 사람이 방청인 자격으로 그 부당한 판결에 대해 항의하였다가 그리스도인인지 심문 받았고, 그렇다고 대답하자 그도 즉각 사형을 언도받았다. 저스틴은 이들을 부당하게 처형한 것에 대해 격렬히 항변했다.

그는 또 "그리스도는 소크라테스보다 엄청나게 뛰어나다. … 왜냐하면 아무도 소크라테스의 가르침을 위해 죽을 만큼 그를 신뢰하는 사람은 없다. 그러나 그리스도는 … 철학자드로가 학자들이 믿었을 뿐만 아니라 예술가들과 전혀 교육을 받지 않은 사람들도 그분을 위하여 부귀, 두려움, 그리고 죽음을 초개같이 여겼다."라고 말했다.

저스틴이 한 변증의 공로는, 당시 만연해 있던 '기독교인은 무신론자고 부도독하며 인육을 먹는다'는 소문을 확실히 격침시켰으며, 이교에 대한 기독교의 우월성을 입증했다는 점이다. 저스틴의 사상은 전반적으로 성경에 기반을 두었으나 그의 철학적 배경에서 받은 영향도 무시할 수 없다. 저스틴은 소크라테스 같은 이들까지 그리스도 이전의 기독교인이었다고 주장하는 지나친 비약과 오류를 보이기도 하였다. 철학과 기독교 신앙 사이의 연속성을 설명하려 했던 접근방법은 알렉산드리아 학파의 클레멘트와 오리겐이 계승했다. 터툴리안은 그런 저스틴의 시도에 대해서는 '기독교의 옷을 입은 철학자'라고 아주 단호하고 비판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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