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사(21) - 성경의 형성과 보존의 역사
교회사(21) - 성경의 형성과 보존의 역사
  • 이한규 목사
  • 승인 2013.01.22 17: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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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난과 함께한 교회의 역사

 

   
 
   
 

성경은 1,600년에 걸쳐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

성경을 영어로는 바이블(The Bible)이라 한다. 바이블은 라틴어의 비블리아(biblia)에서 유래되었으며, 비블리아는 헬라어 비블로스(biblos)의 복수형으로 책을 의미했다. 종이가 발명되기 이전 고대에는 갈대줄기를 엮은 '파피루스'에 글을 기록하였기에 그 책을 '비블로스'라고 했다. 또한 비블로스는 지중해 연안 페니키아의 항구 도시 '쥬베르'의 헬라어 이름이기도 했다. 그곳은 이집트산 파피루스의 주요 수입항 역할을 했다. 최초의 성경 사본들은 아프리카에서 그리스로 수입된 파피루스에 쓰여졌는데, 당시 그리스 사람들은 파피루스 원료를 편의상 '비블로스(byblos)'라 부르기 시작했고, 후에 글자가 'biblion'으로 바뀌어 '파피루스 두루마리' 또는 '책'이라는 뜻이 되었다. 후대에는 '책 중의 책'이라는 뜻에서 성경(聖經)을 가리키게 되었다.

성경은 약 3,500년 전 모세로부터 약 1,900년 전의 사도 요한까지 1,600년 가량에 걸쳐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이다. 이 66권의 책들은 신성한 계시인 정경(正經, canon)으로, 캐논(canon)이라는 단어는 라틴어 칸나(canna)에서 유래했다고도 하고, 갈대를 의미하는 헬라어 카논(kanon)에서 유래했다고도 한다. 카논은 자(ruler) 또는 측량 막대기(measuring stick)를 의미했는데, 길이를 재는 정확한 자가 없었을 때에는 갈대를 측정기구로 사용했기 때문이다. 자(尺)는 후에 인증된 권위(recognized authority)라는 개념으로 발전했다.

4세기 경에 교회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아들여진 성경들의 목록'을 의미하는 데 캐논이라는 단어를 사용하기 시작했다. 그래서 '정경'이란 진리와 신앙의 척도가 되는 최고의 텍스트를 말한다. 정경이라는 용어가 갖는 이상의 의미는 정경이 형성되기 전에 이미 정경 이외의 많은 다른 문서 자료들이 존재했음을 전제한다. 정경이란 용어를 기독교에서 공식적으로 사용한 것은 325년 니케아 공의회에서 아타나시우스에 의해서였다고 한다.

율법서인 '토라'와 예언서인 '네비임' 그리고 성문서인 '케투빔'의 세 부분으로 이루어진 히브리어 구약 정경은 '타나크'라고 하는데, 세 부분의 알파벳 머리 글자를 모아서 붙인 이름이다.

 

성경이 원본과 사본

성경의 자필 원본은 유실되고 현재는 필사한 사본만 남아 있지만, 수많은 필사본들이 동일한 내용을 담고 있어서 하늘로부터 계시된 성경이 원본이 확실히 존재했다는 사실은 분명하다. 초대교회에서는 자필 원본의 문서 자체보다 정확하게 전해진 말씀 자체에 더 가치를 두었다.

성경의 원본들은 오토그래프(Autograph)라고 부르고 사본들은 애퍼그래프(Apograph)라고 부른다. 성경을 복사하여 사본을 만들 때에는 각별한 주의를 기울이도록 했다. 처음에는 제사장들이 이 일에 종사하게 되어 있었으나(신 17:18) 후에는 서기관들이 이 일을 맡았다(렘 8:8). 그들은 오로지 성경만을 그대로 필사하는 전문 필사자들이었다. 사본 성경의 수요가 점점 늘어남에 따라 서기관들의 수도 많아지고, 또 성경의 필사가 전문화되었으며, 나아가서는 율법을 가르치고 해석하는 일도 서기관들이 함께 하게 되었다.

성경을 필사하는 서기관들은 19가지의 엄격한 규정을 따랐다. 양피지는 유대인이 만든 정결한 동물의 가죽만 사용할 것, 각 가죽종이는 같은 수의 단(段)으로 구분할 것, 한 단에는 48~60의 줄을 가질 것, 먹(墨)은 특별하게 제조한 검은 먹만 사용할 것, 글자나 단어를 기억으로 기록해서는 안 되고 반드시 인증된 사본을 보고 기록할 것 등이다. 하나님의 가르키는 '야훼'나 '엘로힘'을 기록할 때는 매번 펜을 경건하게 닦고 기록해야 했으며, 실수가 하나 생긴 경우에는 그 장(章)을 폐기해야 했다. 또 성경을 필사하는 중에는 다른 곳을 쳐다보지 말아야 하며, 왕이 들어와도 쳐다보지 말아야 했다. 그들의 필사 규정과 방법은 치밀했고, 필사자에 대한 감독도 엄격했다.

다음은 어느 랍비가 성경 필사자에게 엄중히 경고한 내용이다.

"너는 네 일을 어떻게 할 것인지 주의하라. 네 일은 하늘의 일이다. 사본에서 철자 하나를 빼거나 더하면 너는 세상의 파괴자가 되는 것이다."

위와 같은 철저한 규칙 속에서 필사했기 때문에 사해 사본이나 마소라 사본의 기록이 똑같이 유지되었던 것이다.

 

   
 

성경의 보존

성경의 원본은 가장 조심스럽게 보관되었다. 모세가 기록한 오경은 제사장들에 의해 지성소의 법궤 옆에 안치되었다.

"모세가 이 율법의 말씀을 다 책에 써서 마친 후에 여호와의 언약궤를 메는 레위 사람에게 명하여 가로되 이 율법책을 가져다가 너희 하나님 여호와의 언약궤 곁에 두어 ... "(신 31:24~26)

여호수아(수 24:26)나 사무엘 시대에도 그러했다(삼상 10:25). 성막이 없어지고 성전이 세워졌을 때에는 성경이 원본들이 성전으로 옮겨졌다. 열왕기하 22장 8절을 보면 제사장 힐기야가 여호와의 전에서 율법책을 발견하였다는 기록이 나온다. 성경 원본들을 법궤 옆에 보관한 데이는 특별한 의미가 있었다. 이는 기록된 두루마리 책이 하나님과 가장 가까이 있어서 하나님의 말씀과 동일시되고, 세상의 다른 책들과 거룩히 분리시켜 놓음을 의미했다.

 

구약 성경 헬라어 번역본 70인역(LXX)

전해지는 이야기로는 BC 250년 경 이집트의 왕 프톨레미 2세의 명령에 따라 히브리어로 기록된 구약 성경을 헬라어로 번역한 것이 있었는데, 이것이 소위 '70인역'이라고 알려져 있다. <아리스테아스의 편지>라 불리는 서신이 이 70인역의 존재에 대한 유일한 증거물인데, BC 250년 전후로 구약 성경 전체를 번역한 헬라어 필사본은 현재 확실하게 하나도 없고, 이스라엘 역사에도 그런 일에 대한 기록은 전무하다고 한다.

70인역의 번역 작업에 참여한 72명의 유대인 학자들(?)은 이스라엘의 열두 지파에서 각각 6명씩 선별되었다고 전해지나 신빙성은 없는 이야기다. 유대인 중 성경 기록을 담당한 책임자는 신명기 17장 18절, 31장 24~26절과 말라기 2장 7절에서 증거하듯이 레위지파였기 때문이다. 70인역은 보통 영어로는 LXX로 표기하는데, 로마 사람들의 숫자 개념에 L은 50, X는 10을 뜻하므로 이를 합하면 70이 된다.

70인역 구약 성경에는 450년 이후에 정착된 히브리 성서인 마소라 본문(Massoretic Texts)에 없는 경전들이 포함되어 있는데, 개신교에서는 이를 외경(apocrypha)이라 부른다. 또 70인역에는 마소라 본문보다 내용이 적은 책도 포함되어 있는데, 예레미야서는 마소라 본문의 예레미야서보다 1/8이 적다.

70인역은 카톨릭 성경에 큰 영향을 주었고, 개신교에서는 정경의 범위에서는 마소라 본문을, 책 배열 방식에서는 70인역을 따르고 있다. 

 

모음이 붙여진 히브리어 구약 성경인 마소라 사본

고대 유대인들은 모음 없이 자음만으로 글을 썼으며, 구약 성경의 내용을 거의 암기하여 그것을 구전으로 후대에 전해주었다. 그런데 시간이 흐르면서 히브리어는 점차 잊혀지게 되었고, 대신 아람어가 통용되었다. 유대인들은 회당에서 율법과 예언서를 낭독했는데, 히브리어가 점차 사어(死語)가 되어가자 히브리어로 된 율법서와 예언서를 어떻게 읽어야 할지 중대한 문제에 봉착하게 되었다. 그래서 7세기부터 자음만 있던 히브리어에 모음을 달기 시작했는데, 그 작업을 주도한 유대인 학자들을 '마소라'라 불렀고, 그들에 의해서 모음이 붙여진 히브리어 구약 성경을 '마소라 사본'이라 부른다. 마소라는 '전통' 혹은 '말을 전하다'라는 의미를 지닌 히브리어 마사르(masar)에서 나왔다.

   
 

마소라인들의 목적은 어떠한 상황 아래에서도 구약 성경의 순결성을 보호, 보존, 전수하는 것이었다. 그들의 이러한 노력으로 오늘날 우리는 표준화된 히브리어 사본을 갖게 되었다.

10세기 말에 마소라 학자들이 사용한 본문의 기원은 AD 1세기 경까지 거슬러 올라가는데, 그들이 만든 사본은 5세기 말에서 6세기 초에 처음 만들어졌다가 900년경에 표준이 정해졌다. 마소라 사본 중 11세기(1008년)에 기록된 레닌그라드 사본은 히브리어로 구약 성서의 본문을 모두 담고 있어, 1세기 말경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 히브리어 성경의 중심을 이루고 있다. 이 사본은 완전한 히브리어 성서의 가장 오래된 사본으로 현재 레닌그라드 도서관에 소장되어 있다. 레닌그라드 사본은 사해 사본이 생겨난 지 1,100년이나 지난 시기에 필사된 것이지만, 원문에 훨씬 더 가깝게 베껴졌다는 것이 사본학자들이 공통된 견해다.

1940년대까지만 해도 구약 성경의 가장 오래된 번역 사본은 AD900년 경의 마소라 사본이었으므로, 구약 성경의 정확도에 대해 의혹을 가지는 학자들이 있었다. 구약 성경의 마지막 책인 말라기는 BC 400년경에 기록되었고, 마소라 사본은 그로부터 1,300년이나 지난 후에 쓰여진 사본이므로 사본의 정확도를 의심한 것이었다.

그러나 하나님은 당신의 말씀을 친히 지키신다고 말씀하셨다. "천지는 없어지겠으나 내 말은 없어지지 아니하리라."(눅21:33) 그리고 1947년 쿰란 동굴에서 사해 사본이 발견됨으로써 이러한 의혹은 말끔히 사라지게 되었다.

 

기원전 150년 경 기록된 사해 사본의 발견

1947년 봄, 사해 북방에 있는 쿰란 공동체의 동굴에서 굉장한 고고학적 보물이 발견되었다. 아랍계 유목민인 베두인족의 '무하마드 아디브'라는 소년이 여리고 남쪽 사해의 서북쪽 2km 지점에 있는 황무지인 '와디쿰란' 지역에서 잃어버린 양을 찾고 있었다. 그는 가파른 암벽에서 동굴을 하나 발견하고 잃어버린 양이 그 동굴에 숨어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하여 그 안에 돌을 던졌는데, 안에서 항아리 깨지는 소리가 들렸다. 거기에는 아마포(亞摩布)에 잘 싸인 가죽 두루마리들이 들어 있는 항아리가 있었던 것이다. 몇 개의 항아리 안에는 양피지, 그리고 파피루스 두루마리들이 기름칠한 헝겊에 싸여 있었다. 그는 이것들이 골동품으로 가치가 있을 것이라 생각하여 그 두루마리들을 가지고 돌아갔다.

얼마 후 그 두루마리들은 여러 골동품 상인들의 손을 거쳐서 4개는 시리아의 예루살렘정교회 대주교인 마르아티나시우스 사무엘이 샀으며, 3개는 베들레헴의 아랍 상인을 통해 예루살렘 히브리대학교의 수케닉(Sukenik) 교수가 구입했다. 1953년 수케닉 교수가 사망한 후, 이스라엘 군 총사령관을 지낸 그의 아들 야딘(Yadin)이 교수이자 고고학자가 되어 1954년에 사무엘 대주교에게서 두루마리 4개를 사들였다. 그리고 1967년에 두루마리 1개를 추가로 구입하여 사해 사본 두루마리를 모두 8개 보유했다. 현재 그 두루마리들은 이스라엘 국립박물관 성서의 전당에 보존되어 있다.

탄소동위원소에 의한 연대 조사 결과, 사해 두루마리들은 BC 168년에서 AD 233년 사이의 것으로 밝혀졌다. 이 사본들 중 이사야서 두루마리의 일부분을 35mm 필름에 복사하여 유명한 히브리 고고학자이며 고대 셈어의 최고 권위자인 존홉킨스 대학교의 윌리암 알브라이트(Willim F. Albright) 박사에게 보냈는데, 알브리아트 박사는 연구 결과 이 사본이 BC150년 경에 기록된 구약 성경의 사본이라고 밝혔다.

알브라이트 박사는 사해 사본의 발견에 지대한 공을 세운 존 트래버(John Traver)에게 다음과 같은 편지를 보냈다.

"가장 위대한 사본을 발견하신 일에 대해 진심으로 축하드립니다. 이번 사본들이 나쉬(Nash) 파피루스(BC 2세기에서 AD 1세기 사이에 기록된 것으로 추정되는 구약 성경의 일부분)보다 더 오래된 것이라는 것을 의심할 여지가 없습니다. 그 시기는 BC 100년경으로 짐작됩니다. 도무지 믿어지지 않는 놀라운 발견입니다. 더욱이 사본의 순수성에 관하여는 추호도 의심할 수가 없을 것입니다."

이렇게 해서 세상에 알려진 것이 '사해 사본', 혹은 '쿰란 사본'이라는 고문서다. 이 사본이 질그릇 항아리 속에서 약 2000년 이상 보관되었음에도 썩거나 많이 훼손되지 않은 것은 사해 주변의 건조한 기후의 영향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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