콘스탄티누스의 기독교 공인과 교회의 세속화
콘스탄티누스의 기독교 공인과 교회의 세속화
  • 월간 기쁜소식
  • 승인 2013.03.08 16: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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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라파엘로와 그의 제자들이 그린 <밀비안 다리의 전투> (바티칸 박물관 소장).

로마제국의 혼란과 디오클레티아누스의 개혁
3세기의 로마제국은 매우 혼란스러웠다. 235년에서 284년까지 49년 동안 무려 26명의 황제들이 제위에 올랐다. 당시의 로마 군대는 제국 자체보다 자신이 속한 군단(軍團)의 군단장이나 지역의 총독에게 절대적인 충성을 바치는 풍조가 만연해서 한 군단장이 몇몇 군단과 힘을 합치면 로마로 진군하여 황제 자리를 찬탈하는 것이 가능했다. 새로 등극한 황제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황제 근위대가 황제를 암살하고 다른 황제를 세운 적도 있었을 만큼 혼란스러웠다.
284년 일리리아(발칸반도) 출신의 장군 디오클레티아누스가 황제가 되면서 혼란은 끝이 난다. 디오클레티아누스는 로마제국을 부흥시켰지만, 기독교는 위험 세력으로 간주해 탄압을 계속했다.
디오클레티아누스는 거대한 제국을 한 사람이 다스리는 것은 무리라고 여겨 사인정(四人政)을 도입하였다. 로마제국을 네 개의 지역으로 나눈 후, 2명의 대황제(아우구스투스)가 각각 소황제(카이사르)를 한 명씩 거느리고 다스리는 것이다. 대황제가 죽거나 은퇴하면 소황제가 대황제가 되고, 신임 대황제가 소황제를 새로 임명하는 시스템이었다. 이는 군대가 황제를 만드는 폐단을 없애고 효과적인 황제 계승 체계를 만들기 위함이었다. 디오클레티아누스는 로마제국을 보스니아 지역을 기준으로 크게 둘로 나누었는데, 이는 나중에 로마가 동과 서로 나뉘는 계기가 되었다.

밀비안 전투와 콘스탄티누스의 개종 선언
4세기에 들어서서 로마의 권력투쟁은 다시 시작되었고, 여러 과정을 거친 후 서로마 지역에서 콘스탄티누스와 막센티우스가 전투를 벌였다. 312년, 콘스탄티누스는 자신의 휘하에 있는 병력 10만 명 가운데
5만 명을 이끌고 갈리아에서 이탈리아로 진군하였다. 콘스탄티누스는 막센티우스가 보낸 장군들을 차례로 무찌르고 이탈리아 본토로 진입하였다. 답답해진 막센티우스는 점술서를 참고하였는데, 얼마 안 가서 로마의 적이 죽는다는 점괘가 나왔다. 로마의 적을 콘스탄티누스라고 여긴 막센티우스는 병사들을 모두 모아 티베르 강을 건너 강가에 포진하였고, 두 군대는 밀비안 다리 앞에서 전투를 벌였다.
기록에 따라 차이가 있지만, 전투가 있기 전 콘스탄티누스는 정오가 막 지났을 무렵 하늘에서 이상한 물체를 보았다고 한다. 그것은 빛나는 십자가로, 거기에는 ‘엔 투토이 니카(Εν Τούτῳ Νίκα)’라는 그리스어 문구가 아로새겨져 있었다. 이 문구는 “In Hoc Signo Vinces(이 증표 안에서 승리하리라)”는 라틴어로 더 널리 알려져 있다. 콘스탄티누스는 매우 놀랐고, 그 환상의 의미를 깊이 생각하는 동안 밤이 되어 잠이 들었다. 콘스탄티누스는 다시 꿈에서 구세주가 낮에 본 것과 동일한 형상이 그려진 깃발을 손에 들고 나타나서 ‘이 깃발을 만들어 전쟁에 나가면 승리할 것이다’라고 하는 소리를 듣는다. 그는 잠에서 깨자마자 꿈에서 본 것을 그렸고, 기독교 지도자들을 불러서 하나님과 자신이 본 십자가 모양에 대해 물었다.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지식을 얻은 그는 기독교로 개종했다고 선언했으며, 꿈에서 본 십자가를 제국의 깃발로 사용하기로 결정했다. 이 상징은 그리스 알파벳 중 ‘카이(Ⅹ)’와
‘로(Ρ)’를 합친 것이며, 그리스 알파벳으로 ‘그리스도’란 단어를 쓸 때 앞의 두 글자이다. 이 심벌은 후에 카톨릭교회의 상징으로 그대로 사용되었다.
밀비안 전투의 승리로 서로마의 주인이 된 콘스탄티누스는 313년 밀라노에서 그리스도인들에게 자유를 주는 밀라노 칙령을 발표했다. 이후 콘스탄티누스는 324년에 로마제국 전체를 다스리는 단독 황제가 되었다.

교회에 영향력을 행사하기 시작하는 콘스탄티누스
밀라노 칙령이 발표되기 전까지 교회는 세상과 구별되어 있었다. 그러나 밀라노 칙령이 발표되면서 기독교는 콘스탄티누스의 호의 아래서 세력을 점점 키워나갔다. 기독교인들은 빼앗겼던 시민권을 되찾고, 몰수당했던 교회의 재산을 되찾고, 돌려받은 재산으로 많은 예배당을 세웠다. 콘스탄티누스는 교회의 감독들에게 큰 호의를 베풀었고, 궁으로 초대하기도 했다.
콘스탄티누스는 교회를 후원하면서 한편으로 교회의 문제에 최고 권위를 가진 자로 자처했다. 그는 장로회에 호위병 없이 나타나기도 하고, 토론에 함께 참여하기도 하며, 신앙이나 교리 문제의 해결에 간섭하기도 했다. 그는 종교회의와 공회의를 소집, 주재하였고, 이 회의의 결정을 거부하는 이단자들에 대해서는 군사력을 동원하여 진압하였다.
기독교에 대한 가장 큰 위협이 느껴진 것은, 황제 자신이 교회를 다스리기로 결정한 때였다. 이때부터 교회에 보내는 모든 공문서에는 ‘카톨릭’이란 용어가 쓰이기 시작했다. (본래 카톨릭catholic이란 ‘우주적인’이라는 뜻으로, 2세기부터 이단의 무리나 분열되어 떨어져 나간 무리와 구분해서 일반적으로 그리스도인의 교회를 카톨릭이라고 불렀다.) 콘스탄티누스는 자신의 위치를 교회의 머리로 더욱 분명하게 드러냈다. 교회의 감독들이 있었지만 그는 자신을 감독 중의 감독이라고 했다.
그러면서 그는 동시에 자기 아버지가 믿었던 페르시아의 태양신 미트라를 섬겼다. 기독교를 공인한 후에도 그가 발행한 화폐에는 미트라 신(神)의 초상을 조각하고 ‘무적의 태양, 나의 보호자’라고 써놓았다. 그의 영향으로 미트라 신앙의 의식이나 제도, 관습, 교리 등이 초기 기독교에 대부분 수용되었다. 그는 종종 아폴로 신에게 신탁을 구했으며, 죽을 때까지 이방 종교의 제사장 직책(판티펙스 막시무스)도 여전히 가지고 있었다. AD 320년 그는 주화에 옛 신들의 상징들과 이름들을 새겨넣었고, 밀비안 다리에서 처음 사용했던 XP를 새겨넣었다.
콘스탄티누스는 새로 갈아입은 기독교의 의복 속에 이방 종교의 미신적인 액세서리들을 달고 다녔다. 그의 기독교는 혼합물이었다. 콘스탄티누스는 <하나의 제국One Empire, 하나의 법One Law, 하나의 시민One Citizen, 하나의 종교One Religion>를 통치 이념으로 삼았는데, 그가 기독교인들에게 호의를 베풀었던 것은 순전히 정치적인 동기에서 종교를 이용한 것이었다. 콘스탄티누스는 성경 말씀이나 영적인 진리에는 어두운 인물이었다.

세속적으로 변질되어가는 교회
기독교가 과거처럼 핍박을 받지 않게 된 것은 은혜였지만, 황제에게 보호를 받지 않는 것은 더 큰 은혜였음을 역사는 말해주고 있다. 콘스탄티누스의 기독교 공인 이후 기독교 사역자들은 새로운 사회적 신분과 세속적 이익을 얻었다. 콘스탄티누스는 이전에 이방 종교의 사제들이 누리던 특권을 기독교 성직자들에게 주었다. 감독들은 높은 명예를 가지게 되었으며, 이교도의 돈으로 교회들이 신축되었다. 콘스탄티누스는 교회의 면세를 확대했고(312), 십자가형을 금지시켰으며(315), 검투를 폐지시켰다. 또한 기독교의 주일을 공휴일로 제정했고(321), 교회의 절기를 존중하라는 지시를 내리기도 했다. 그는 수도를 비잔티움으로 옮긴 다음 도시를 확대해 콘스탄티노플로 개명하고, 그곳에 수많은 예배당을 건축했다. 자연히 출세를 위해 기독교로 개종하는 사람들이 많아졌다.
“불로 시험을 받던 교회가 이제는 호의로 시험을 받았다.”(롤랜드 베인튼, 1894~1984).
“(예배당) 지붕은 금으로 치장하고 대리석을 끼워 장식하고 있다. 한때는 불꽃 속에 던져졌던 그리스도인들의 거룩한 책이 이제는 화려하게 제본되고 황금과 보석으로 꾸며지고 있다.”(제롬, 345?~419?)
많은 가짜 기독교인들이 생겨났고, 점차 많은 사람들이 매우 무가치한 동기로 성직자 세계에 들어왔다. 순교를 각오한 신자들만이 들어올 수 있었던 교회가, 정치적 야심을 품고 아직 반은 이교적인 사람들이 몰려들어오는 세속적인 교회로 변질되어 갔다.
콘스탄티누스가 본 환상과 그의 삶은 그가 참으로 회개한 사람이 아니며, 말씀과 성령으로 거듭나지 않았다는 사실을 증거한다. 그는 개종했다고 한 후로도 여러 번 살인했고, 20년간 함께 살았던 두 번째 부인 파우스타(Fausta)를 물이 끓는 목욕탕 안에 넣어 질식시켜 죽이라는 비밀 명령을 내렸다. 또 니케아 공회의를 소집한 그 해에 맏아들을 처형(암살)함으로써 씻을 수 없는 오점을 남겼고, 자신의 누이의 아들은 태형으로 죽였다. 그는 피로 물든 옷을 입은 황제였다. 그러나 타락한 교회들은 고마운 후원자를 위해 콘스탄티누스의 미덕들을 찬양하고 그의 결점들은 감추었다. ‘황제의 축제일’까지 제정한 거짓 기독교인들은 콘스탄티누스라는 이름을 언급할 때마다 ‘12사도에 준하는 분’이라는 명칭을 반드시 덧붙였다. 
    
임종 직전까지 세례를 미룬 콘스탄티누스
에드워드 기번은 <로마제국 쇠망사> 제2권에서 콘스탄티누스에 대해 이렇게 전한다.
“엄격한 교회 용어를 따르자면, 최초의 기독교 황제라는 말은 적어도 그가 죽는 순간까지는 적용될 수 없었다. 대제(大帝)가 세례를 받은 후 신자로 입문한 것은 임종을 앞둔 병상에서였기 때문이다. … 황제 자신도 한 해에 두 가지 칙령을 발표해서 국민에게 희망과 두려움을 교묘하게 조장한 적도 있다. 두 가지 칙령이란 첫째는 일요일을 엄숙히 지키라는 것이었고, 둘째는 점술가들에게 정기적으로 자문하라는 것이었다. … 콘스탄티누스 대제는 어쨌든 마흔 살 가까운 나이까지 로마의 전통 종교를 지켰다. … 그는 특히 태양의 신, 즉 그리스 로마 신화에 나오는 아폴론을 숭배했다. … 후대의 비기독교인이라면 조롱해 마지않을 하늘의 십자가 계시는 콘스탄티누스 황제의 개종 직후에 기독교인들조차 믿지 않았다. 하지만 동서의 카톨릭교회만은 십자가에 대한 경배에 도움이 된다고 생각했는지 이 계시를 여전히 인정하고 있다.”
교회사를 보면, 콘스탄티누스는 기독교에 대한 우호적인 태도와 열심에도 불구하고 337년 죽기 바로 직전까지 세례를 받아 교회에 속하는 일을 미루었다. 그 당시 사람들이 가졌던 잘못된 교리들 중 하나는 세례를 받음으로써 죄 사함을 받는다는 것이었다. 그러한 교리는 세상에서 욕망을 따라 살다가 자기가 편할 때 쉽게 죄 사함을 받을 수 있다는 허가증이 되었다. 괜히 일찍 세례를 받아 공개적으로 믿음을 고백하고, 그 뒤부터 육신이 누리고 싶은 것들에 제약을 받는 부담을 피하고 싶었던 것이다. 세례 받은 후 짓는 죄를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죽기 전에 세례를 받음으로써 한꺼번에 모든 죄를 씻고자 한 것이다.
콘스탄티누스는 임종을 앞두고 교회의 감독을 자신의 궁으로 불러들였다. 당시 니코미디아 감독이었던 유세비우스(교회사가인 가이사랴 사람 유세비우스와는 다른 인물임)는 그의 신앙 고백을 듣고 세례를 주었다. 그는 하나님께서 자기를 살려주시면 집회에 나가겠다고 고백하고 다시는 자주색 황제복을 입지 않고 개종자가 입는 옷을 입겠다고 약속했으나 그는 AD 337년 세례 받은 직후 죽었다.

많은 것을 잃은 교회
기독교 역사가인 앤드류 밀러는 이렇게 말했다.
“여기에는 영구한 도성이 없다. 주를 못박은 세상에서 교회가 무엇을 기대하겠는가? 교회가 그런 세상에서 무엇을 받아들이겠는가? 이 땅에서 교회의 참 몫은 고난과 배척이다.”
B. K. 카이퍼는 기독교 공인의 부정적 결과를 다음과 같이 언급하고 있다.
“교회가 양(量)에서는 얻었으나 질(質)에서는 잃었던 것이다. 313년에 콘스탄틴의 칙령은 교회에 힘센 타락의 홍수 문을 열었던 것이다.”
콘스탄티누스의 우호적인 조치들은 교회의 순수성과 정결을 잃게 했고, 교계의 지도자들은 그리스도의 보혈로 말미암은 영원한 죄 사함의 복음, 의롭다는 믿음, 분명한 구원의 증거 등에는 관심을 잃어갔다.
콘스탄티누스에 의해 교권제도가 조직되면서 그리스도가 교회의 머리가 아니라 황제가 교회의 머리로 등장했고, 교회는 국가의 시녀가 되었다. 이러한 중앙집권적 교권제도는 카톨릭교회로 발전할 수 있는 발판이 되었다. 실제로 콘스탄티누스에 의해 만들어진 교권제도는 카톨릭 조직으로 급속도로 발전해갔다.
기독교 역사는 그리스도인들이 그리스도를 위해 고난을 받는 것이 왕궁에서 왕의 호의를 받고 잔치에 참석하는 것보다 신앙에 더 유익함을 보여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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