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사(29) - 교부(敎父) 어거스틴 Ⅰ
교회사(29) - 교부(敎父) 어거스틴 Ⅰ
  • 이한규 목사(기쁜소식동서울교회)
  • 승인 2013.08.16 17: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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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사

 


어거스틴에 대한 일반적 평가
교부들 중 어거스틴에게는 많은 연구가들이 “사도 바울 이후 가장 위대한 기독교 신학자”, “2000년 기독교 역사상 가장 영향력 있는 인물로 꼽히는 교부”, “초대교회의 완성자”, “서방(로마)교회의 아버지”, “초대 기독교 교회가 낳은 위대한 철학자이자 사상가” … 등의 화려한 수식어를 붙이곤 한다. 어거스틴(Augustine)은 영어식 이름이고, 그의 라틴어식 이름은 아우구스티누스이다. 그를 연구한 어떤 교회사가들은 어거스틴이 고대의 모든 신학적 전통을 종합하는 자리에 서 있다고 하며, 중세 이후의 모든 신학 전통을 수립·발전시키는 관문에 서 있었다고도 하고, 기독교 신학에 있어서 오늘날까지 어거스틴에게서 발견되지 않는 어떤 중요한 사상도 없다고 할 만큼 어거스틴의 신학 체계는 다양하고 포괄적이라고 평가하기도 한다. 그는 신학자들뿐만 아니라 많은 철학자, 심리학자, 문학가들이 연구의 대상으로 다루는 <고백록(참회록)>의 저자로도 잘 알려져 있다.
어거스틴의 사상은 (좋은 면으로든 나쁜 면으로든) 중세교회를 지배했다. 개신교회, 카톨릭, 성공회 등 거의 모든 서구 기독교의 주류들이 그의 뒤를 잇는다고 자처하고, 16세기 프로테스탄트들이 가장 존경했던 신학자이기도 해서 그는 전체 서방 교회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신학자로 평가되고 있다.
그러나 그의 사상과 교회관이 정통 신학에서 벗어났다고 부정적으로 평가하는 교회사가들도 있다.

 

어거스틴의 어린 시절
어거스틴은 아프리카의 북부의 소도시 타가스테(Thagste)에서 AD 354년에 출생했다. 그의 아버지는 전통적 이교도로 근근이 생계를 유지하는 가난한 시민에 불과했다. 그는 아들의 교육을 위해 희생적인 노력을 아끼지 않았다. 어거스틴은 여섯 살 때 초등학교에 들어갔다. 당시의 초등학교 교육은 엄격해서 어거스틴은 종종 교사의 체벌 때문에 그 괴로움에서 벗어나게 해달라고 하나님께 기도했다고 한다. 아버지는 아들의 세속적 성공에만 관심을 기울였을 뿐 아들의 내면의 세계에는 전혀 관심을 보이지 않았기 때문에 어거스틴은 아버지의 희생과 수고를 고마워하면서도 그를 존경하거나 사랑하지는 않았다. 아버지 파트리키우스는 어거스틴이 17세 되던 해에 세상을 떠났다.

어머니 모니카(Monica)
그의 어머니 모니카는 어거스틴의 생애에 깊은 영향을 미친 경건한 여인이었다. 어거스틴에게 있어서 그녀는 ‘하나님의 음성’이었다. 그래서 어거스틴은 “그녀를 통해서 당신은 나에게 말씀하셨습니다. 그녀의 권면을 거절한 것은 곧 당신을 거절한 것이었습니다”라고 고백하곤 했다.
모니카는 기독교 가정에서 엄격하게 자라났다. 그녀는 인내와 온유의 성품으로 사람들을 화해시키고, 기도로 사람들을 하나님께 인도하는 삶을 살았다. 그의 남편을 인내와 기도와 전도로 마침내 하나님 앞으로 인도했고, 자기를 오해하고 미워하던 시어머니도 인내와 온유로 굴복시켜 화목을 이루었다. 모니카는 누구보다도 어거스틴을 깊이 사랑했다. 아들에 대한 애착이 유별했던 그녀는 아들을 하나님 앞으로 인도하기 위해 많은 고통을 겪으며 눈물의 기도를 드렸다.
어거스틴은 예민한 소년으로 자랐다. 그는 사람들에게 인정받으려고 애썼고, 다른 소년들을 경쟁에서 물리치려고 발버둥쳤다. 학교에서 매를 맞는 굴욕을 당할까봐 애써서 공부했지만 공부를 좋아하지는 않았다. 어거스틴은 웅변의 대가가 되기 위한 교육을 받았다. 교육 내용은 고대 로마의 유명한 웅변가 키케로(Cicero)를 비롯한 수많은 고전 작품들을 읽고 줄줄이 외우는 방식이었다.
어거스틴이 받은 교육의 목적은 화술을 배우는 것, 사람들을 설득시켜서 자기 생각을 따르게 하는 웅변술을 습득하는 것이었다. 어거스틴은 이러한 교육으로 자기 표현법을 배웠다. 그는 스스로 눈물을 흘릴 줄 알았을 뿐더러 남들을 울릴 줄도 알았다. 그러나 43세에 어거스틴은 소년 시절의 교육 방식을 이렇게 회고했다. “오, 나의 참된 생명이신 하나님! 그때 나의 웅변이 다른 학우들의 것보다 더 많은 박수갈채를 받은 것이 지금 나에게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그것은 실제로는 모두 연기와 바람뿐이 아니었습니까?”

청소년 시절
16세의 어거스틴은 스스로 고백하듯이 정욕의 노예였다. “내 육체의 나이가 16살이 되었을 때 욕정의 미치광이가 나를 사로잡고 있었습니다. 나는 법에 의해 금지된 부끄러운 짓에 빠지고 말았습니다.”
그의 부모는 아들의 뛰어난 재능을 발견하고 최고의 교육을 받게 하려고 17살 되던 해인 371년에 카르타고로 유학을 보냈다. 그는 남들처럼 출세하기 위해 웅변이나 수사학에 열중했다. 그러나 그는 온갖 정욕의 수렁에 빠졌고, 도둑질도 했다. 온갖 교만과 허영이 가득한 생활이 계속되었다. 무엇보다 한 여자와 동거를 시작하여 15년 동안 함께 살며 19살에 그 여자에게서 아데오다투스(Adeodatus, ‘하나님의 선물’이라는 뜻)라는 아들을 얻기까지 했다.
이처럼 허영과 육체의 쾌락을 좇아 방탕한 생활에 젖어 있던 어거스틴은 19세 때에 로마의 위대한 철학자 키케로(Cicero)의 호르텐시우스(Hortensius)를 읽고 그 내용에 감동을 받아, 육체적인 쾌락보다 더 고귀하고 높은 지혜와 진리의 세계가 있음을 깨닫고, 뛰어난 언변과 문체보다 인간이라면 마땅히 진리를 추구해야 된다는 결론을 내린다.
어거스틴은 카르타고에서 공부하면서 철학에 평생을 바칠 것을 결심한다. 그 후 교회에서 세례를 받기 위해 교리를 학습하는 예비 신자반에서 그는 자연스럽게 구약 성경에 관심을 가지게 된다. 그러나 그리스 철학에 젖어 있던 그에게 구약 성경은 받아들이기 어려운 잔인한 내용들과 세속적이고 부도덕한 이야기들이 많아 보였고, 영적 지혜나 고전의 교양미와 세련미를 발견할 수도 없었다. 신약도 지혜의 근본인 그리스도를 소개하는 데 지루한 족보들이 나와 어거스틴은 적잖이 실망했다.
“내가 성경으로 돌이켰을 때 성경은 키케로에 비해 아주 무가치하게 보였습니다. … 성경은 겸손한 자들의 성장에 도움을 주는 것인데, 나는 겸손해지기를 거부하고 교만에 부풀어 있었습니다.”
목회자들의 태도 역시 마찬가지였다. 포용적이기보다는 배타적이었다. 감독들은 자기들의 권위에 대한 어떤 도전에도 지나치게 민감했다. 그 당시 아프리카의 기독교가 너무 보수적이고 폐쇄적이고 권위적이었기 때문이었다. 어거스틴은 실망하고 말았다.

마니교와 신플라톤주의에 빠져들다
어거스틴은 기독교에 적대감을 갖고 마니교도들과 사귄다. 마니교는 헬레니즘화한 조로아스터교로, 빛과 어둠이라는 두 궁극적 원칙 혹은 두 신을 가지고 있는 페르시아의 종교였다. 어거스틴은 결국 마니교에 빠지고 말았다. 그가 보기에 성경은 초라하고 조잡하여 진리를 담고 있지 않은 것처럼 여겨졌고, 마니교의 가르침은 부드럽고 아름다운 미사여구로 포장되어 있어서 무언가 참된 지식과 진리를 전해주는 것 같았다.
마니교의 빛과 어둠은 끊임없이 갈등하는 존재들이다. 인간의 영혼이 빛의 산물인 데 반해 물리적 우주는 어둠에서 기원한다고 보았다. 이러한 이론은 악의 기원을 설명해 주었다. 또한 인간이 자신의 악한 행위에 책임이 없다는 근거를 제공해 주었다. 악한 행위는 어둠의 산물이기 때문이었다.
“나는 죄를 짓고 있는 것은 내가 아니라 내 속에 있는 어떤 다른 성품이라는 견해를 붙잡고 있었습니다. 나는 나의 잘못을 나에게 돌리지 않고 내가 아닌 다른 것에게로 돌리기를 좋아했습니다.”
그러나 어거스틴은 마니교의 가장 뛰어난 교사로 일컬어지는 파우스투스(Faustus)와 대면한 후 크게 실망하고, 9년 동안 열정적으로 지지해 왔던 마니교를 떠나 다른 곳에서 진리를 찾기 시작한다.
“그들은 교만 가운데 지껄이는 육에 속한 사람들이었는데, 그들의 입은 마귀의 덫과 같았습니다. 당신의 이름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과 성경의 이름의 음절들을 섞어서 만든 마귀의 올가미였습니다. 그들의 입술에는 항상 그 이름들이 있었으나 그들의 가슴에는 진리가 없는 공허함뿐이었습니다.”
타가스테에 있는 동안 그의 친한 벗 한 사람이 죽었다. 이 죽음은 어거스틴의 마음에 큰 타격을 주었다.
383년 그는 최고의 연설가가 되리라는 야망을 품고 로마로 간다. 로마에서도 만족을 얻지 못하고 있을 때 384년 밀라노의 수사학 교수로 초빙되었다. 이 교수직은 자연스럽게 정부 고위관료가 될 수 있는 중요한 자리였다. 그러나 밀라노에서의 어거스틴의 생활은 여전히 번민하는 삶이었다. 정신적인 욕구와 함께 물질적·세속적 명성에 대한 욕망, 그리고 아버지로부터 유전되었다고 여긴 성적 욕망이 떠나지 않았다.
어거스틴이 밀라노에 있을 때 모니카는 아들에게 떳떳한 결혼을 하도록 권했다. 내연의 처를 정식 아내로 삼는 것은 그의 사회적 지위가 허용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어거스틴은 북받치는 슬픔을 참으면서 10년 이상 같이 지내오던 여인을 아프리카로 떠나보냈다.
“이것은 나의 가슴을 찢어 유혈이 낭자하게 한 커다란 충격이었다. 나는 정말 그녀를 사랑했는데….”
무명의 여인은 다시는 다른 남자를 만나서 같이 살지 않겠다고 하나님께 맹세하고 울며 밀라노를 떠나 아프리카로 가야만 했다. 어거스틴은 둘 사이에서 낳은 아들은 보내지 않았다. 여인이 떠난 후, 어거스틴은 어머니가 소개한 신부가 법정 결혼 연령이 되기까지 기다리지 못하고 또 다른 여인을 만났다.
이 무렵 어거스틴은 프로티누스의 서적을 읽기 시작했고, 신플라톤주의자가 되었다. 신플라톤주의를 통해 그는 악의 문제에 대해 좀 더 만족할 만한 대답들을 발견하고, 또한 회의주의를 극복할 수 있었다. 신플라톤주의는 어거스틴에게 영적 세계 안에 참된 세계가 있다는 사실과 하나님 안에 불변하는 모든 선의 근원과 모든 실체의 근원이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해주었다. 그리고 하나님을 아는 것이 최고의 축복이라는 이 철학은 어거스틴이 기독교를 받아들일 수 있도록 만들어 주었다. 그 후 종교와 철학에서 해결하지 못하고 극복하지 못했던 모든 문제를 암브로스를 통해 완전히 극복했다.

암브로스와의 만남
384년 가을, 어거스틴은 암브로스(암브로시우스)를 만난다. 함께 밀라노에 머물고 있던 모니카가 어거스틴에게 암브로스의 설교를 들어보라고 재촉했다.
암브로스는 왜소한 체구에 열정적인 사람이었다. 어거스틴은 암브로스의 설교를 듣기 위해 그가 인도하는 예배에 정기적으로 참석했다. 그는 암브로스의 설교 내용보다 설교 방법을 관찰했다. 그러나 점차 그의 경건한 삶과 탁월한 설교, 구약의 난해한 구절들을 설득력있게 해석하여 마니교의 비난을 해결해내는 메시지에 감복하면서 진리에 귀를 기울이고 있는 자신을 발견하였다. 그의 설교는 수사학적으로도 아주 탁월한 것이었다.
“암브로시우스 감독의 설교를 들으면서 설교의 내용이 내 마음에 와 닿기 시작하였다. 기독교의 메시지가 무엇인지를 정확히 배워서 ‘내 인생을 이끌어갈 무언가 분명한 빛’을 얻고 싶은 마음이 생겼다.”
암브로스 감독의 설교를 통해서, 그리고 그 자신의 개인적인 공부를 통해서 진리의 빛이 그의 가슴속에 점점 밝아오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진리의 빛이 밝아올수록 그에게 견딜 수 없는 고민거리가 있었다. 곧 그 자신의 더러움과 죄악된 모습이 밝히 드러나는 것이었다.
“주님은 다시 나 자신을 주목하게 하셨습니다. … 돌이켜 나의 바른 모습을 보게 하셨습니다. 정말 끔찍했지만 나 자신에게서 피할 길이 없었습니다. … 내 눈으로 그 모습을 직접 보게 하시고, 나의 사악함을 발견하게 하셨습니다. 그 모습이 정말 싫었습니다.”
암브로스를 통해 기독교에 대한 중요한 난제들이 해소된 후, 어거스틴은 만일 자신이 기독교인이 된다면 미지근한 신자는 되고 싶지 않고, 자신의 모든 정욕과 야망을 버리고 자신의 전 생애를 헌신해야 하리라고 확신했다. 그때 그는 육체의 정욕의 유혹에 심하게 시달리고 있었다.

어거스틴의 회심
그 무렵 어거스틴은 유명한 신플라톤주의 철학자 빅토리누스(Victorinus)가 교회에서 공개적으로 신앙을 고백했다는 소식과 황제를 수행하던 두 명의 고위관리가 아타나시우스가 쓴 <성 안토니의 생애>를 읽고 복음을 받아들여 관직과 결혼을 포기하고 수도자의 길을 택했다는 소식을 듣고 많은 도전을 받았다. 더구나 수도사들은 대부분 배우지 못한 사람들이었지만 육체의 정욕을 정복해버렸다는데, 자신은 모든 지식을 가지고도 욕정을 자제하지 못한다는 점에 부끄러움을 느꼈다. 바로 이때 어거스틴은 정원의 무화과나무 밑에 엎드려 울부짖는다.
“나는 여전히 죄의 포로인 것처럼 느껴졌습니다. 그래서 비통하게 부르짖었습니다. ‘나는 언제까지 “내일, 내일” 하여야 하는가? 왜 지금은 안 되는가? 나는 왜 이 순간에 나의 추한 죄를 청산하지 않는가?’ 나는 내내 울면서 이렇게 자문했습니다. 내 마음 속에서 가장 비통한 슬픔이 눈물로 쏟아진 것입니다. 그러다가 난데없이 근처 어떤 집에서 들려오는 어린아이의 노랫소리를 들었습니다. 그것이 소년의 음성인지 소녀의 음성인지 모르겠으나, ‘집어서 들고 읽어라(tolle lege), 집어서 들고 읽어라’는 후렴이 연거푸 들려왔습니다. 그때 나는 곰곰이 생각해 보았습니다. 아이들이 이런 노래를 부르며 노는 어떤 게임이 있었던가 하고. 그러나 전에 그런 것을 들어본 기억이 없었습니다. 나는 눈물을 그치고 일어났습니다. 이것이 바로 성경을 펴서 내 눈이 처음으로 머무는 구절을 읽으라는 하나님의 명령일 것이라고 중얼거리면서….”
그는 성경을 집어 들고 그의 눈이 처음으로 닿은 로마서 13장 13~14절을 조용히 읽었다.
“낮에와 같이 단정히 행하고 방탕과 술 취하지 말며 음란과 호색하지 말며 쟁투와 시기하지 말고 오직 주 예수 그리스도로 옷입고 정욕을 위하여 육신의 일을 도모하지 말라.”
“나는 더 읽지 않았습니다. 더 읽을 필요가 없었습니다. 광명한 확신의 빛으로 내 마음을 비추어 내 속에 있던 모든 의심의 어두움을 물리쳐 주었기 때문입니다. … 이제 허망한 시절은 지나가고 내게 축복의 날이 임했습니다. 전에는 결코 포기할 수 없었던 육신적 정욕을 이제는 기쁨으로 포기합니다. 주님은 나에게서 육체적 소욕을 앗아갔으나 더욱 참되고 위대한 행복을 허락해 주셨습니다.”
386년 늦은 여름이었다.
“그 후 어머니에게 가서 어떤 일이 일어났는지에 대해서 말씀드렸습니다. 그랬더니 어머니는 기뻐서 어쩔 줄을 모르셨습니다. 자초지종을 다 말씀드렸더니, 어머니는 승리의 기쁨에 겨워 주님께 영광을 돌리셨습니다.”
“그것은 어머니의 기도 때문입니다. 나는 이 사실을 주저없이 인정합니다. 즉, 하나님께서 내게 진리 발견이 무엇보다 중요하다는 마음, 그밖에 아무것도 바라지 않고 그밖에 아무것도 생각하지 않고 그밖에 아무것도 사랑하지 않도록 된 마음을 주신 것은 어머니의 기도 덕분입니다. 그렇게 큰 유익을 얻을 수 있도록 한 것이 어머니의 기도였던 것을 나는 의심치 않습니다.”
어거스틴의 회심은 이전 사상과의 완전한 단절이 아니라 종합적 성격을 지니고 있다는 평가를 받는다. 그의 회심이 신플라톤주의로부터 완전히 벗어난 것은 아니라는 게 일반적 평가다. 고대 철학의 유산과 기독교의 전승을 엮어 새로운 직조물을 짜낸 그의 신학 사상은 이성(理性)과 신앙의 조화를 추구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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