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사(30) - 교부(敎父) 어거스틴 Ⅱ
교회사(30) - 교부(敎父) 어거스틴 Ⅱ
  • 이한규(기쁜소식동서울교회 목사)
  • 승인 2013.09.16 16: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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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사

 


어머니 모니카의 죽음
어거스틴은 386년 회심한 후 가슴에 병을 앓아, 산 속에 있는 벗의 별장에 8개월 동안 머물렀다. 그곳은 그에게 휴식과 함께 명상과 기도와 대화의 장소를 제공했다. 387년 3월, 그는 다시 밀라노로 돌아왔다.
어거스틴은 암브로스에게 편지를 보내 세례 받을 준비를 위하여 어떤 책을 읽으면 좋으냐고 물었고, 암브로스는 이사야서를 권했다. 그러나 어거스틴은 이사야서가 매우 어려워 바울의 서신을 읽으면서 세례를 준비했다. 세례 지원자들에게는 암브로스 감독의 엄숙한 교육이 실시되었다. 다음 해 부활절 전날 밤, 어거스틴은 외아들 아데오다투스와 친한 벗 아리피우스와 함께 ‘사탄을 거부하고, 자기 일을 거부하고, 허영을 거부할 것’을 서약하고 암브로스 감독으로부터 세례를 받았다. 이때 깊은 물 속으로 내려간 어거스틴은 주님의 은혜가 너무나 고맙고 감사해서 울기만 하였다.
“세례를 받고 나니 과거 생활에 대한 괴로움이 사라져버렸습니다.”
다음 달, 동향인(同鄕人)인 수오디우스가 궁정 근무를 사임하고 신앙에 전념할 마음으로 아프리카로 돌아간다고 하여 어거스틴도 그와 함께 가족을 이끌고 밀라노를 떠난다. 그 여행 중에 어거스틴의 어머니 모니카가 오스티아(Ostia)에서 56세를 일기로 삶을 마감한다. 병석에 있던 모니카는 걱정과 슬픔에 잠긴 자식들을 바라보며, “너희는 나의 시신을 아무데나 묻어도 괜찮다. … 한 가지 너희에게 바라는 것은, 너희가 어디를 가든지 주의 제단 앞에서 기도하고 있는 나를 기억하여라.”라고 하였다.
어거스틴은 <고백록>에서 그때 심정을 회상하며 “그동안 눈물로 나를 지켜내신 어머니는 지금 내 시야에서 떠나가셨지만, 나는 하나님의 시야 안에서 살게 될 것이다”라고 기록하였다.
어거스틴은 아프리카행을 잠시 연기하고 로마로 가서 여러 권의 책을 저술하였다.

 

히포의 감독이 되어
어거스틴은 388년 8월에 로마를 떠나 카르타고로 갔다가 다시 고향인 타가스테로 갔다. 그곳에서 아버지께 상속받은 재산의 대부분을 팔아 가난한 사람들에게 주고, 살던 집은 개조하여 수도원으로 만들었다. 처음에는 소수의 수도자가 모였을 뿐이지만 후에는 대단히 발전하여 현재도 어거스틴파(派)의 수도원이 존재하고 있다.
타가스테에 있는 동안 어거스틴은 외아들 아데오다투스를 잃었다.
391년에 어거스틴은 한 친구를 카시키아쿰 공동체에 가입하라고 권하기 위해 히포(Hippo)를 방문했다. 히포는 1000년의 역사를 지닌 아프리카 북부의 항구도시로, 아프리카에서 두 번째로 큰 도시였다. 그곳에 있는 동안 그는 교회에 출석했는데, 회중 속에 있는 어거스틴을 알아본 감독 발레리우스(Valerius)는 ‘하나님께서 합당한 시기에 양떼들을 위해 목자를 보내신다’는 요지의 말씀을 전하고, 어거스틴에게 기도를 부탁했다. 그 후 교인들은 어거스틴의 반대의사에도 불구하고 그를 발레리우스를 돕는 감독보에 임명했다. 발레리우스는 다른 교회에서 어거스틴을 데려갈까 염려하여 다시 그를 4년 동안 자기와 함께 일하는 공동 감독에 임명했다. 당시 교회 법은 한 교회에 한 명 이상의 감독을 두지 못하게 되어 있었고, 감독은 교회를 옮길 수 없었는데, 얼마 후 발레리우스가 죽음으로써 어거스틴은 히포에서 여생을 보내게 되었다. 그는 395년에 42세의 나이로 히포의 감독이 되었고, 430년 세상을 떠날 때까지 히포의 감독으로 사역하였다.

어거스틴의 마니교 반박과 ‘자유의지론’
어거스틴은 감독이 된 후 경건한 생활과 명상보다는 목회활동에 더 많은 시간을 할애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한 책임을 염두에 두고 많은 책들을 저술했다. 그의 초기 저서들에는 신플라톤주의적 요소들이 남아 있다.
어거스틴은 387~400년 사이에 마니교를 반박하는 열세 편의 글을 썼다. 그는 마니교를 논박해야 할 특별한 책임감을 느꼈는데, 그 이유는 자신이 직접 마니교를 경험했기 때문이고, 또한 자신이 사람들을 이단으로 인도했다는 죄책감 때문이었다. 그는 ‘인간에게는 자유가 없고 모든 것이 이미 결정되어 있다’고 주장하는 마니교를 반박하며 인간의 자유의지를 강하게 주장했다. 그는 “죄란 하나님이 창조한 것도 아니고 하나님과 함께 영원히 지속되는 것도 아니다. 다만 인간이 자유의지를 잘못 사용할 때 생긴다”고 보았다. “의지는 억압된 것이 아니라 자유로운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 행위에 책임을 져야 한다”고 했다. 이러한 논점들은 어거스틴의 자유의지론에 자세히 나와 있다.

첫 것이 폐해지지 않고 둘째 것이 세워진 교리
대개 어거스틴을 신학자로서는 높이 평가하고 있다.
“모든 죄의 시작은 자만이다. 그리고 자만의 시작은 사람이 하나님에게서 돌아서는 것이다.”
어거스틴에 의하면 죄에 대해서는 한 가지 치유법이 존재할 뿐이다. 그것은 하나님께로 돌아가는 것이다. 그러나 그것까지도 하나님의 은혜를 입어서 비로소 가능하다는 것이다. 죄악이 바로 구원에 이르게 한다는 진리 앞에서 죄를 ‘복되다’고 부르짖었던 어거스틴. 그의 참회록을 읽어보면 어떤 대목에서는 복음적인 고백을 하고 있다.
“나의 기억력은 이 같은 죄들을 기억해 내는데도 나의 영혼은 이제 두려움 없이 평안함을 느낍니다. 오, 주님! 나의 이같이 추악한 죄악과 사악한 행위를 용서해 주셨습니다. 나는 이제 주님을 사랑하며 진심으로 주님께 감사드립니다. (중략) 주님은 자비와 은혜로 나의 더러운 모든 죄를 흰눈처럼 씻어 주셨습니다. 주님의 은총으로 이제 나는 변화받아 전에 지었던 죄악에서 떠나 살게 되었습니다. 사람에게 대항하기를 좋아하고 죄악 범하기를 즐겼던 이 죄인이 아니었습니까? 그렇습니다. 저는 죄인이었습니다.
내가 알고 지은 죄나 모르고 지은 죄나 주님의 도우심과 인도하심으로 모든 죄를 용서받았습니다. 인간의 나약함을 생각할 때 죄악을 저지른 자는 자신의 어떤 노력이나 공로로도 주님 앞에 가까이 나아갈 수 없음을 깨닫게 됩니다. 또한 감히 스스로 죄가 없다고도 말할 수 없게 됩니다. 그러나 당신의 사랑과 자비를 받을 자격이 없는 죄인일지라도 당신을 향하여 나아오는 자는 죄를 용서받을 수 있습니다.”(제2권 15)
그러나 제9권에서는 복음적이지 않은 간구를 보인다.
“육신의 삶에 얽매였던 어머니가 그리스도 안에서 새롭게 지으심을 입었고, 그리스도의 이름을 찬양하며 경건한 신앙 안에서 살았던 것은 분명한 사실입니다. 그러나 그렇다손 치더라도 중생의 체험을 하고 세례를 받은 이후에 당신의 계명에 어긋나는 단 한 마디 말의 실수도 없었다고는 감히 말할 수 없습니다.
(중략) 어머니의 선행으로 인하여 나는 기쁨으로 당신에게 감사를 드립니다. 그러나 또한 주님, 어머니의 죄를 인하여 간구하오니 자비를 베푸사 용서하여 주옵소서. (중략) 어머니의 생활은 사랑과 자비가 가득 찼고
‘그녀는 그녀에게 죄 지은 자를 용서하여 주었으니 주여, 그녀의 죄악을 용서하여 주옵소서.’(마 6:12) 그녀가 구원의 세례를 받은 이후 혹 잘못된 죄악이 있거든 주께서 용서하여 주옵소서. 주여! 이 부족한 종이 전심으로 간구하오니 그녀를 용서하여 주소서. 용서하여 주소서.”
이러한 고백들을 보면 그가 그리스도의 보혈로 말미암아 “언제든지 온전케”(히 10:1), “언제든지 죄를 없게”(히 10:11) 하는 구원의 복음과는 거리가 있음을 알 수 있다. 참된 복음은 첫 것을 폐하고 둘째 것을 세우는 것인데(히 10:9), 어거스틴의 이런 간증은 첫째 것을 폐하지 아니한 채 둘째 것을 세우고 있다.
율법 아래서 죄를 지을 때마다 그 죄를 사함받기 위해 반복적으로 드렸던 제사가 ‘첫 것’이요, ‘둘째 것’은 우리 행위와 상관없이 그리스도의 보혈의 공로로, 하나님의 온전한 은혜로 의롭게 되고 구원받는 것이다. 참된 복음은 첫 것을 폐하고 둘째 것을 세우는 것이지, 첫 것을 세워놓고 둘째 것도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다. 첫 것은 그림자요 참 형상이 아니므로 참형상인 둘째 것이 오면 그림자인 첫 것은 당연히 폐해지는 것이다. 이 부분에 대해서 어거스틴의 회심 자체가 복음적이지 않다고 보는 시각도 있고, 그가 성령의 역사로 회심은 했지만 복음적 교리를 제대로 정립하지 못한 데에서 기인했을 것이라는 시각도 있다.
교부(敎父)들의 삶이 경건하고 존경할 만하며 그들의 설교가 감화를 주기는 했어도, 문헌상 그리스도의 보혈로 말미암아 정확하게 영원한 속죄를 받고 거듭났는지를 명확히 검증하기는 쉽지 않다. 위대한 고전으로 평가받는 그들의 저서나 설교들 속에서 그리스도의 피로 죄 사함을 받고 구원의 진리를 깨달았다는 선명한 간증과 복음에 대한 정확하고 일관성 있는 메시지를 찾아보기 어렵기 때문이다.

도나투스파(派)와의 논쟁
어거스틴은 아프리카 교회를 황폐하게 했던 도나투스파의 분열 행동을 목전에서 보아야 했다. 분열은 312년
카르타고 교회 감독 임명의 정당성을 둘러싼 논쟁이 일어나면서 시작되었다. 본질적으로 이 논쟁은, 오래된 아프리카 ‘순교자들의 교회’와 나중에 등장한 보편(카톨릭) 교회와의 투쟁이었다. 어거스틴이 등장했을 때 이 싸움의 주도권은 도나투스파가 잡고 있었고, 아프리카의 보편 교회는 불안한 처지에 놓여 있었다. 그러나 412년에 어거스틴은 이러한 상황을 극적으로 반전시켰고, 도나투스파를 영구적으로 무력화시키는 데 성공했다. 어거스틴은 다양한 방법으로 이러한 일들을 해냈다. 도나투스파의 역사를 연구하여 그들의 문제점과 약탈 행위 등 나쁜 면들을 알렸고, 설교로, 심지어 노래로써 널리 선전하는 일에 몰두하기도 했다.
도나투스파는 처음에는 신앙의 순수성과 거룩성을 주장하는 데 열심을 내어 교회의 타락을 견제하는 역할을 했지만, 나중에 일부 도나투스파들(써쿰켈리온)은 신앙의 순수성보다는 분파적 이익을 위하여 폭력까지 사용하며 원래의 의도에서 벗어났다. 어거스틴은 어쨌든 약탈 행위는 중단되어야 한다고 확신했다.
어거스틴은 도나투스주의자들을 공격하는 일에 국가 권력과 강압을 이용했다. 어거스틴도 처음에는 이 같은 무력 사용을 반대했으나 결국에는 도나투스주의자들의 폭력에 대한 대응책으로, 교육상 매에 비교할 수 있는 훈계의 도구로 폭력을 받아들였다. 어거스틴은 성경에서 무력을 사용할 수 있는 근거를 찾았고, 적절하진 않지만 누가복음 14장 23절의 “강권하여 데려다가 내 집을 채우라”는 말씀을 끌어왔다. 그는 도나투스파에 대한 강압을 마치 사지(四肢) 하나를 절단함으로써 목숨을 구하는 사랑의 행위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일정한 조건만 충족된다면 전쟁이 정당할 수도 있다는 결론에 도달했다. 그 조건들의 첫째는 전쟁의 목적이 정당해야 한다는 것, 둘째는 올바르게 구성된 권위 있는 조직체에 의해 수행되어 한다는 것, 셋째는 불가피한 와중에서도 사랑이라는 동기가 중심을 이루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두 번째 조건은 후에 유력한 집단이 무력한 집단에 대해 행사하는 폭력과 전쟁을 정당화시키는 명분이 되었다.
어거스틴은 교회도 세상에 나타날 수 있는 조직의 일부라는 외형적 교회관에 사로잡혀서, 가시적(可視的) 교회를 일치시키려는 의도로 물리적 수단을 허용했다. 이러한 가르침은 본의 아니게 로마 교황들에게 이교도들을 처형시키는 물리적 수단의 근본 원리를 제공했고, 초대교회 때 로마제국이 성도들을 박해했던 것처럼 교회에 잔혹한 박해를 가할 수 있는 빌미를 제공했다. 그래서 롤란드 베인턴은 그가 전범 이론의 아버지가 되었다고 평가하고 있다.
어거스틴은 이단자들을 사형에 처하는 것에는 반대했지만, 결국 그의 가르침은 중세에 행해진 이단 탄압에 이론상의 명분을 미리 제공한 것이었다.

어거스틴의 교회론
어거스틴은 처음으로 ‘보이지 않는 교회론’을 발전시켰다. 어거스틴에 의하면, 교회 안에 있는 모든 사람들이 진정한 그리스도인은 아니며, 많은 사람들이 명목상의 그리스도인일 뿐이다. 우리는 거짓으로부터 참된 것을 구별해낼 수 없고, 오직 하나님만이 사람들의 마음을 읽을 수 있으며, 누가 그분의 소유인지를 아신다.
어거스틴은 가시적 교회(외형상의 조직과 구조)와 오직 하나님만이 아시는 보이지 않는 교회(참된 그리스도인의 모임)를 구분했다. 그에 의해서 처음으로 ‘가시적(可視的) 교회’와 ‘불가시적(不可視的) 교회’, 그리고 ‘어머니로서의 교회’의 개념 등이 나왔다. 어거스틴에 의하면, 보이지 않는 참된 하나님의 교회는 오직 하나님만이 아신다고 하였다. 그리고 보이지 않는 참된 교회는 보이는 보편적 교회 안에만 있기 때문에 보편적(Catholic) 교회 밖에서는 구원이 없다고 했다. 그는 사도들의 신앙과 성직을 소유하고 있는 이 교회에 의해서만, 교회의 성례를 통해서만 구원받을 수 있다는 교리를 주창하고 공식화하였다.
어거스틴에 의하면, 그리스도의 몸인 카톨릭 교회 밖에는 진리도 없고 구원도 없게 된다. 그가 빚어낸 이러한 오류는 그가 얻은 명성 때문에 그 폐해를 더 심화시키는 결과를 가져왔다. 구원자 예수님과 인간 사이에 인간이 만든 조직과 체제를 개입시킴으로써 복음의 진리에 배치되는 누룩을 부풀게 만든 것이다.

<고백록>과 <신국론>
430년에 어거스틴이 세상을 떠날 때까지 그가 쓴 책은 무려 117권이나 된다고 한다. 그의 많은 저술들 가운데 가장 중요하고 대표적인 것이 <고백록>과 <신국론>이다.
<고백록(Confessiones)>은 인간에 관하여, 내면의 진리에 관하여, 그리고 인간과 하나님의 관계에 관하여 처절한 탐구를 통해 진리를 찾아가는 길고도 고통스러운 영혼의 여정을 자세히 보여준다. 그가 육체의 정욕과 죄악의 바다에서 헤매던 젊은 날의 방황과 세상 철학과 종교를 지나 진리를 찾아가는 순례자의 길을 진솔하게 묘사하여 오늘날까지 고전 문학 작품 가운데 특별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어거스틴의 최대 저작은 <신국론(De civitate Dei)>으로, 알라릭(Alaric) 왕에 의해 로마가 함락된 후의 음울한 시기인 412년에 집필이 시작되어 426년경 완료된 책이다. 제1권에서 어거스틴은 그의 저술 목적이 기독교가 로마를 파멸시켰다는 비난에 대해 반박하기 위한 것이라고 진술하고 있다. 즉, 로마를 성장시킨 옛 신들을 무시한 것이 로마 멸망의 원인이었다고 주장하는 이교도들에 대하여 기독교를 변호한 것이다. 이 책에서 그는 이방 신들은 인간에게 행복을 제공하지 않았다고 논증했다. 2부에서는 창조로부터 영원까지 서로 다른 두 개의 도성을 추적했다. 하나님의 나라와 사탄의 나라, 하늘의 도성과 지상의 도성, 예루살렘과 바빌로니아가 그것이다.
“두 도성은 두 가지 사랑에 의해 건설되었다. 지상의 도성은 하나님에 대한 생각을 경멸하고 자아를 사랑하는 것에 의해 건설되었고, 하나님의 도성은 자아를 경멸하고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에 의해 건설되었다. 전자의 영광은 그 자신에 있고, 후자의 영광은 주님께 있다. 한 도성에서는 정복한 통치자들이 지배욕으로 다스리고, 다른 한 도성에서는 통치자들과 피지배자들이 사랑 안에서 서로를 섬긴다. … 그들은 본성을 죄에서 자유롭게 하는 은혜에 의해 천상의 도시에 태어났다.”
어거스틴은 이 책에서 천년왕국설을 부정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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