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젠 하나님의 말씀만 듣는 종이 되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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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관리자
  • 승인 2013.10.15 20: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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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령이 충만한 선교사들의 생생한 간증 시리즈 ③

 

 

 

 

 

 

 

 

빨리 제거하지 않으면…얼마 전, 한국 월드문화캠프 참석차 한국에 들어왔을 때 치과에서 어금니를 하나 뽑았다. 그냥 두고 싶었지만 그러면 다른 치아까지 상하게 하기에 당장 뽑아야 한다고 해서 어쩔 수 없이 뽑게 되었다.
며칠 지나서는 병원에서 검사를 받으니 간에 꺼풀이 하얗게 끼어 있다며, 빨리 제거하지 않으면 간경화가 된다고 했다. 의사이기도 한 잘 아는 장로님이 “이렇게 피곤한데 어떻게 살았냐?”고 하는데, 필리핀에서 자주 피곤을 느꼈던 이유를 비로소 알게 되었다. 제거해야 할 것을 그냥 두고 사니까 힘들고 피곤했던 것이다.

 

 

“남경현 형제가 얼마나 거만한지 몰라.”
한국에 나오기 전 마음이 많이 어려웠다. 그 전에 우리 선교회를 대적하고 떠난 사람들이 있었는데, 그들 가운데 몇 사람의 자녀가 필리핀 교회에서 유학생활을 하고 있다. 그 유학생들이 내는 생활비가 교회에 큰 보탬이 되었기에 그들의 부모가 교회를 떠난 일은 내 마음에 영향을 많이 끼쳤다.
한국으로 들어와 새벽에 기쁜소식강남교회로 갔다. 평소에는 모임을 8시부터 시작하는데, 선교사들이 왔다고 그날은 7시 30분부터 시작했다. 그 자리에서 내 마음을 조금 이야기하자 박옥수 목사님이 “남경현 형제가 얼마나 거만한지 몰라.” 하셨다. 몸이 굉장히 피곤한 상태에서 그 소리를 들으니까 서운했다.
다음 날에는 난생처음 위아래 입술이 다 흉측하게 터졌다. 그날 모임 시간에 다시 “목사님, 서운합니다. 좀 따듯하게 대해주시면 안 됩니까?” 하고 말하며, 교회를 떠난 사람들로 인해 마음이 어려웠던 부분 등 내 마음에 있는 것을 다 내놓았다. 그러자 목사님이 “이제부터 남경현 시대를 끝내고 예수님 시대를 열면 돼.” 하셨다.
그 이야기를 곱씹어 보니 굉장히 무서운 말이었다. ‘자넨 지금까지 남경현으로 살았어. 난 자네에게서 예수님을 본 적이 없어’ 하는 말이었다. 큰 충격이 찾아왔다.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말씀에 귀를 기울이는 것밖에 없었다. 월드문화캠프 때 박 목사님이 캠프에 참석한 학생들에게 전하시는 말씀을 귀 기울여 들어보니, 전부 내게 하는 소리였다.
사람이 교만하고 거만해지면 무엇이든 바로 볼 수가 없다. 그런데 그런 사람일수록 자기 판단을 믿는다. 그러나 그의 눈에 보이는 교회가 교회의 진짜 모습일 수 없고, 그가 보는 하나님의 종이 종의 참모습일 수 없다. 안타깝게도 나도 그처럼 내 판단을 믿으며 살았던 것이다.

나는 모든 것 위에 앉아 있었다
나는 스물일곱 살에 구원받고 예수님 안에서 30년을 보냈다. 오랫동안 교회 안에 있으면서 복음, 회개, 안식 등에 관한 말씀을 숱하게 듣고 마음에 믿음을 갖기도 했다. 그런데 내 믿음은 검불 같았다. 교회를 대적하는 사람들의 말을 들어보면 그 말에도 일리가 있다는 마음이 들었다. 그처럼 모든 것을 스스로 판단하고 있는 내 모습을 보니, 나는 모든 것 위에 앉아 있었다.
“네가 네 마음에 이르기를, 내가 하늘에 올라 하나님의 뭇별 위에 나의 보좌를 높이리라, 내가 북극 집회의 산 위에 좌정하리라.”(사 14:13)
내가 거만한 것이 맞았다. 내 속에 사탄의 마음이 들어 있었다. 내가 그런 마음으로 살아온 것을 사역자 모임 때 다시 이야기했다.

하나님의 말씀이 이긴다는 확신이 없이는
사역자 모임 중에 본 박 목사님의 모습이 마음에 남았다. 목사님이 교회를 떠난 사람들 이야기를 하면서 약간 싱글 웃으며 “이 친구들이 나를 얼마나 고발했는지, 경찰서에도 가야 하고 검찰에도 가야 해.” 하시는데, 얼굴에 요동이 전혀 없었다. 마음에서 벌써 그 싸움에서 이겨 평안한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일이 진행중에 있지만 마음은 그 과정에 있는 것이 아니라 끝에 가 계셨다.
사람은 누구나 고발을 당하면 조금이라도 두려움을 느낀다. 함께 있던 사람이 떨어져나가면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도록 조치를 취할 수밖에 없다. 세상은 어떤 조직이든지 그렇다. 그런데 박 목사님은 전혀 그렇지 않았다. 나는 한국에 오면서, 교회를 떠난 사람들도 있으니까 박 목사님이 선교사들을 부드럽게 대하실 줄 알았다. 그런데 목사님은 사역자들에게 “난 내 길 가고, 자네들은 자네들 길 가!” 하며 다 자기 길을 가라고 하셨다. 그건 사람의 배짱으로 할 수 있는 말이 아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이긴다는 확신이 없이는 할 수 없는 말이다. 어떤 일이 일어나도 말씀이 이기고, 믿음의 눈으로 보면 이미 이긴 것이다. 그 사실이 분명하기에 모두가 대적해도 목사님은 아무것도 두려워하지 않는 모습을 보이시는 것이다.
‘저분은 마음에 하나님의 말씀만 있구나! 자신은 빠지고 하나님의 말씀만 남겼구나!’
바위처럼 견고한 그 믿음 앞에서 내가 옳다고 여겼던 것들, 내 신앙은 바람에 날리는 검불처럼 느껴졌다.
지난 시간들을 돌아보니, 우리가 박 목사님께 들고 간 문제들에 대한 목사님의 대답은 언제나 하나였다. “그것 아무것도 아냐.” 예수님이 문제들 앞에서 하신 말씀이다. 예수님은 바리새인들 앞에서도, 병자들 앞에서도, 귀신 들린 사람 앞에서도 한결같이 그것들을 아무것도 아닌 것으로 여기셨다. 자기 마음을 버리고 예수님의 마음으로 사는 사람들은 다 그같이 사는 것이다.
나는 예수님과 같은 마음으로 살지 않은 사람이었다. 문제 앞에서 염려하고 두려워하는 사람이었다. 그러면서 목사님이 신앙에 대해서 이야기하면 속으로 ‘목사님, 이제 그만하십시오. 그 이야기 질리도록 들었고, 다 알겠습니다. 밑도 끝도 없는 이런 교제를 계속해야 합니까? 이제 그만합시다.’ 하는 마음을 품었다. 신앙에 대해서 내가 귀로 듣고 머리로 이해하지만 그 사실이 마음 중심에 자리 잡지는 않으니까 목사님은 그렇게 될 때까지 같은 사실을 가르치고 또 가르치셨고, 나는 마음이 교만하니까 그게 질리는 것이었다.

나도 예수님과 같은 모습이었다
에스더 성경에서 와스디는 왕이 부르는데도 가지 않았다. 내가 그 와스디와 같은 사람이었다. 박 목사님은 우리를 만나면 항상 우리를 부르는 눈빛을 가지고 계신다. ‘자네, 날 좀 찾아와’ 하는 눈빛을 보이시지만 나는 그것을 느껴도 가지 않았다. 그런데 에스더는 왕이 부르지 않았는데도 생명을 얻기 위해 “내 생명과 내 민족을 내게 주소서.” 하며 아하수에로 왕 앞에 나갔다.
내 마음에 사탄의 마음, 교만한 마음이 들어오니까 교회와 하나님의 종에 대한 권위가 뚝 떨어졌다. 교회와 하나님의 종을 판단하고, 내가 옳다는 마음이 나타났다. 그런데 내 속에 사탄의 마음이 들어 있는 것을 발견하고 나니 다시 하나님의 권위가 살아났다. ‘하나님의 말씀이 진정으로 생명이다!’는 마음이 들었다.
다른 것은 다 몰라도, 박 목사님은 우리에게 늘 하나님의 말씀에 대해 이야기하신다.
“요한복음 1장 14절 말씀대로 말씀이 육신을 입고 우리 안에 거하시는 분이 예수님이고, 우리는 육신을 입고 마음에 말씀을 담은 사람입니다. 그러니까 결과적으로 우리와 예수님이 똑같습니다.”
말씀이신 예수님은 육신을 입고 이 땅에 오셔서 수많은 이적과 놀라운 일을 행하셨다. 그것처럼 하나님의 사람은 육신을 입고 있지만 그 마음에 하나님의 말씀을 담고 살기에 예수님과 같은 일을 하며 사는 것이다. 박 목사님도 육신에 말씀을 담고 살기에, 실제로 삶 속에서 만나는 모든 문제와 싸움을 이기면서 사셨다.
목사님 이야기를 듣고 생각해 보니 ‘그게 내 모습이잖아’ 하는 마음이 들었다. 나도 예수님과 같은 모습이었다. 내가 죄인으로 태어났지만 죄 사함을 받고 내 마음에 하나님의 말씀이 담겼다. 육신을 입고 마음에 말씀이 담긴 나와 말씀이 육신을 입고 오신 예수님이 다를 바 없었다. 그런데 나는 하나님의 말씀만 마음에 두고 사는 것이 아니라 말씀과 내 생각을 섞어서 사는 게 문제였다. 좋을 때는 말씀을 좇다가 좋지 않을 때는 내 생각을 좇는 등 왔다 갔다 하니까 큰 형편이 닥쳐오면 말씀을 잃고 뒤집혔던 것이다.
이 부분을 정확히 정리하고 말씀과 생각을 분리해 내니까 내 마음에도 믿음이 생겼다. 목사님이 어떤 문제를 당해도 “그것 아무것도 아냐.” 하시는 말씀을 나도 할 수 있는 믿음이 생긴 것이다.

정확한 믿음의 소리를 낼 때까지
그라시아스 합창단의 지휘자 보리스 아발랸이 처음 합창단원을 지도할 때 정확하게 ‘도’ 음을 내게 했다고 한다. 음의 사이클이 조금만 틀려도 ‘그건 도가 아니다’고 했다고 한다. 합창단원 전체가 정확한 음정을 낼 때 소리가 굉장히 맑고 아름다워지기 때문이다. 박 목사님도 우리가 정확한 믿음의 소리를 낼 때까지 믿음의 음정을 정확하게 잡아주고 계시는 것이다. 그런데 목회자들이 비슷한 소리를 적당히 내고는 다 됐다고 생각해서 목사님이 하는 이야기를 지겹게 듣기 시작하는 것이다.
기쁜소식강남교회에서 사역자 모임을 가지면서 둘째 날부터 ‘이 교제가 귀하고 아름답구나! 정말 좋구나!’ 하는 마음이 들었다. 모임 중에 목사님이 “우리가 새벽 4시에 일어나서 밤 11시까지 교제하는데, 무엇 때문에 이렇게 하겠느냐?”며 한번 생각해 보라고 하셨다. 우리에게 주실 것이 있기에 그렇게 하시는 것이 아니겠는가! 참으로 목사님은 우리에게 주실 것이 있었다. 그것은 다른 것이 아니라, 우리 마음에 하나님의 말씀과 섞여 있는 잡다한 것들을 다 몰아내고 말씀만 세우시려는 것이었다.
사흘 동안 새벽 4시에 일어나서 11시까지 앉아 있으려니 허리가 몹시 아팠다. 그것 빼고는 모임을 갖는 것이 정말 행복했다.

말씀과 간증으로 내 마음을 계속해서 쓸어내니까
교회 안에 있었지만 지난 여름에 가졌던 것과 같은 교제는 처음이었다. 선교사들의 간증이 복되어서 전국을 돌아다니면서 간증 집회를 가진 것도 처음이었다. 그 여행에 나도 동행할 수 있어서 감사했다. 간증 시간에 뛰어나가 여러 형제 자매들 앞에서 내게 일하신 하나님을 간증할 수 있는 것이 행복했다. 젊은 선교사들은 마음의 변화가 얼마나 빠른지, 나이 든 우리가 따라가기 어려웠다. 그들이 쏟아내는 간증들을 듣는 것이 말할 수 없이 즐겁고 행복했다.
유물을 발굴하는 사람들이 땅 속에 묻힌 유물을 찾아낸 후 붓으로 계속해서 쓸어내는 모습을 볼 수 있다. 그렇게 하다 보면 유물에 묻어 있던 흙들이 다 제거되고 소중한 유물이 그 모습을 드러내는 것이다. 계속해서 가진 사역자 모임이 내 마음에 그런 일을 해주었다. 말씀과 간증으로 내 마음을 계속해서 쓸어내니까,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말씀에 달라붙어 있던 내 생각들이 다 제거되고 하나님의 말씀만 마음에 남는 것을 보았다. 말씀을 믿는 믿음이 분명하고 정확하게 마음에 자리 잡는 것을 보았다. 내게는 말할 수 없는 행복한 시간이었다. 


가족 같았던 야곱
이스라엘에 선교하러 가서 전도하려고 애를 많이 썼다. 하지만 아무리 전도해도, 집회를 가져도 사람들이 잘 연결되지 않았다. 유대인과 이방인에 대한 선이 분명해서 말씀이 좋다고 하면서도 우리 교회가 이방인 교회라고 교회에 나오지는 않았다.
그렇게 지내던 중에 야곱이란 청년이 구원을 받았다. 그는 마약 중독자였지만 <죄 사함 거듭남의 비밀> 영문판을 읽고 구원받아 완전히 변화되었다. 마약도 끊고, 전도도 하며 새로운 삶을 살려고 했다. 당시 우리 교회 주일 예배에는 두세 명 정도 참석했기에 야곱은 우리와 가족처럼 지냈다.
그런데 내가 아프리카에 갔다 오니 야곱이 죽었다고 했다. 이스라엘에서는 마약을 복용하던 사람을 정부 차원에서 관리하는데, 내가 없는 사이에 형제가 병원에 갔다가 의문사를 당한 것이다. 병원에서는 자살로 결론을 지었다. 내가 마지막으로 야곱을 만났을 때 형제가 ‘병원에서 약물을 너무 과하게 투여하는 것 같다’고 하소연한 것이 기억나, 어떻게 자살했는지 알려 달라고 했지만 비밀이라 공개할 수 없다고 했다. 야곱은 부모도 없는 고아여서, 내가 아프리카에서 돌아왔을 때에는 이미 공동묘지에 묻힌 후였다.

 

통곡할 마음을 가지고 ‘통곡의 벽’에 가서
3년 동안 마음을 쏟은 형제를 잃은 후 ‘하나님, 해도 해도 너무하십니다!’ 하며, 안 그래도 닫혀 있던 마음이 더 닫혔다. 거의 매일 통곡할 마음을 가지고 ‘통곡의 벽’에 가서 하나님께 왜 이렇게 하시냐고 기도했다. 나 자신을 보니 불쌍하고 비참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런 마음을 내놓을 곳이 없었다. 예루살렘에 있는 한인들은 우리를 몹시 싫어해서 쫓아내려고 온갖 일을 벌인다. 이스라엘 정부도 나 같은 사람은 추방시키려고 계속 찾아다닌다. 개인 신앙의 자유는 있지만 한국인이 유대인에게 예수님을 증거하는 것은 불법으로, 현장에서 체포할 수 있다. 그리고 예수님의 이름으로 유대인에게 물에서 세례를 주면 징역 6개월이다. 나를 좋아하는 사람은 이스라엘 땅에 아무도 없었다. 그렇다고 내가 교회와 다른 목회자들에게 마음을 열고 있는 것도 아니었다. 내 마음을 그대로 토할 친구도 없었다. 무척 슬펐다. 예수님을 믿는 신앙 자체를 떠나고 싶었다. 생각에 빠져드니까 마음이 저절로 높아졌다. 아프리카 목회자들 가운데 나와 가장 친했던 허인수 목사님이 그렇게 하면 안 된다고 권면했지만, 나는 그냥 내버려두시라고 했다.

“지금 어디에 서 있는지 자네 위치를 정확하게 발견해야 해.”
한국 월드문화캠프를 앞두고 이탈리아의 전형식 목사님과 전화통화를 했다. 선교학교 동기지만 성격이 불같아서 부담스러운 분이었다. 목사님이 나에게 마음이 어떻냐고 묻기에 있는 대로 다 쏟아냈다. 신기하게도, 마음이 바뀐 것은 아니지만 뭔지 모르게 시원한 마음이 들었다. 그 일을 계기로 한국에 가서 마음을 열고 교제하기로 마음을 정할 수 있었다.
한국에 나가기 전에 어느 이스라엘 사람이 간증을 했다. 박옥수 목사님의 저서를 읽고 내용이 굉장히 좋아 기뻐하던 그는 어느 모임에 갔다가 마침 한국 사람이 있길래 반가워 박 목사님을 아느냐고 물었다는 것이다.
그러자 그 사람은 안색을 바꾸면서 박 목사님이 잘못되었다고 마구 욕하더라는 것이다. 목사님 책을 아무리 읽어도 좋은 이야기뿐인데 뭐가 잘못되었냐고 묻자, 어쨌든 잘못되었다고 했다는 것이다. 간증한 이스라엘 사람은 ‘복음을 전하는 종을 도와주지는 못할망정 어쨌든 잘못되었다고 한다’며 한국 사람들 이상하다고 마음 상해 했다.
이야기를 들으면서 ‘세상 많은 사람이 목사님 욕을 하는구나. 목사님만 넘어뜨리려고 하는구나’ 하는 마음이 들었다. 문득 ‘나는 어떠냐?’ 하는 생각이 들었다. 내 마음을 보니, 나도 목회자 모임에 대해 늘 부담스러워하고 있었다.
한국에 와서 목회자 모임에 참석해 교제하는 것이 여전히 부담스러웠지만, 전형식 목사님과 나눈 교제에서 힘을 얻어 부담을 넘어 박 목사님을 뵙고 교제를 나누었다. 내가 먼저 잠깐 이야기를 하자 목사님이 첫마디로 “자넨 너무 거만했어.” 하셨다. 그대로 받아들여졌다. 목사님이 다시 물으셨다.
“자네가 왜 거만하지 알아?”
“잘 모르겠습니다.”
“하나님이 자네에게 말씀하시고, 교회가 말씀하는데, 하나님의 말씀을 자네 마음에 넣어줘도 자네가 거만해서 자네 생각으로 말씀을 다 밀어냈어. 그랬기 때문에 하나님은 자네를 통해서 일하실 수 없는 거야. 자네, 진짜 거만했어.”
“목사님, 제가 진짜 거만하고 나쁜 놈인데, 어떻게 하면 됩니까?”
“자네가 지은 큰 죄는, 다른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자네에게 말씀하셨을 때 그 말씀도 받아들이고 자네 생각도 같이 받아들인 거야. 이 시간부터 겸비한 마음을 가지고 내가 하는 이야기를 잘 듣고 깊이 생각하게. 그러면 성령이 자네를 교제 속으로 이끌어 주실 거야.”
교제를 마칠 무렵 목사님이 숙제를 주셨다.
“자네가 지금 어디에 서 있는지 자네 위치를 정확하게 발견해야 해. 내 위치를 정확하게 발견하면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사람으로 바뀔 수 있어.”
그 후로 교회에서 설교 말씀도 듣고, 목회자들이 해주는 간증도 듣고, 내 마음의 위치가 어딘지 생각도 하면서 시간을 보냈다.

두 번 다시 내가 걸었던 길로 가기 싫었다
부산 벡스코에서 열린 월드문화캠프 때 박 목사님이 하신 이야기가 마음에 들려왔다. 사람이 자신이 틀렸고 자신이 가고 있는 길이 잘못된 것을 발견하면 그 사람은 하나님이 무슨 말씀을 하시든지 다 들을 수 있으며, 그 사람 속에 하나님이 일하실 수 있다는 이야기였다. 목사님이 전에 그런 이야기를 하셨는지 모르지만, 나는 처음 듣는 이야기였다. 깜짝 놀랐다. 다시 생각해 보니, 나는 내 신앙이 처음부터 틀렸다는 생각을 해본 적이 없었다.
박 목사님은 신앙생활을 자신이 망하고 틀리고 안 되는 위치에서 시작한 것을 알 수 있었다. 한 번도 가져본 적이 없는 마음이었다. 나는 늘 ‘이렇게 하면 안 될까? 저렇게 하면 되겠지. 내가 이걸 잘 몰라서 그래’ 하는 식으로 살았다. 내가 무얼 하려고 하는 것 자체가 잘못이고, 그것이 안 되는 길인 줄 몰랐다. 그 부분에 대해서 선을 그은 적이 없었다. 그동안 내가 무엇을 쥐고 있었는지 모르지만, 쥐고 있던 것이 놓아졌다.
내가 걸었던 길을 마음으로 다시 한번 걸어보았다. 걷기 싫었다. 내가 걸어온 길은 되는 게 없는 재수 없는 길이었기 때문이다. 두 번 다시 그 길로 가기 싫었다. 내가 이스라엘에 가서 걸었던 길이 잘못된 길이었음을 분명히 알 수 있었다.

‘하나님이 말씀하셨으면 내가 지금 아브라함이구나!’
이후 하나님께서 나를 하나님의 말씀 편으로 이끌어 가시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 너희 가운데 전파된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는 ‘예’ 하고 ‘아니라’ 함이 되지 아니하였으니 저에게는 ‘예’만 되었느니라. 하나님의 약속은 얼마든지 그리스도 안에서 ‘예’가 되니 그런즉 그로 말미암아 우리가 ‘아멘’ 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되느니라.”(고후 1:19~20)
나는 이 말씀과 반대로 살았다.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때는 ‘예’ 했지만 뒤돌아서면 ‘아니오’ 했다. 평생 두 마음을 가지고 산 내 모습이 이 말씀 안에서 정확하게 보였다.
다시 성경을 읽는데, 하나님이 나에게 “이제 후로는 네 이름을 ‘아브람’이라 하지 아니하고 ‘아브라함’이라 하리니” 하고 말씀하셨다. 하나님이 나를 통해서 아브라함에게 일하셨던 것처럼 일하시겠다는 약속으로 받았다.
그런데 내 마음에서 보여지는 것이 있었다. 그동안 나는 하나님이 나에게 아브라함이라고 하시면 ‘말씀 참 좋다. 하나님이 나보고 아브라함이라고 하시는구나. 그런데 지금 말고 나중에 그렇게 될 거야’ 하고 받아들였다. 그래서 기분이 좋으면 아브라함이 되었다가, 기분이 나쁘면 하나님이 나를 통해서 일하실 수 없는 사람이 되었다. 내 앞에 펼쳐지는 형편을 보고 ‘예’ 했다가 ‘아니오’ 하며 산 것이다. 그런 내 모습이 정확히 보였다. 목사님 말씀대로 나는 하나님의 말씀과 내 생각을 같이 받아들여서, 아브라함이면서 아브라함처럼 살지 못했던 것이다. 그렇게 살아온 내 모습을 보면서 깜짝 놀랐다.
‘내가 틀렸구나! 하나님이 말씀하셨으면 내가 지금 아브라함이구나!’
그날 마음에 분명하게 선을 그었다. 하나님이 나에게 아브라함이라고 하셨기에, 열매가 있든 없든 형편과 상관없이 나는 아브라함이다.

‘예수님 같으면 이렇게 생각 안 하시겠다.’
믿음은 가지려고 애써서 갖게 되는 것이 아니었다. 말씀은 변하지 않고 언제나 그 자리에 있었다. 내가 걸어온 길, 내 생각이 틀린 것이 보이니까 말씀이 마음에 그대로 와 닿았다. 이전에 목사님이 해주신 이야기들도 없어진 것이 아니라 마음에서 다시 떠올랐다.
“자네, 이스라엘에서 살기 어렵지? 그런데 그곳이 살기 제일 좋은 땅이야. 메마른 골짜기를 걸어가도 예수님과 함께 가면 재미있어. 물이 없고 햇볕이 뜨거워도 예수님과 함께면 재미가 있어.”
나는 이 이야기를 팽개치고 살았는데, 마음에 다시 떠올랐다. 어딜 간들 핍박을 받지 않고 복음을 전할 수 있겠는가. 그동안 핍박받기 싫고, 어려움 당하기 싫고, 고생하기 싫다는 육신의 생각이 내 마음에 자리 잡고 있었던 것이 보였다. ‘예수님 같으면 이렇게 생각 안 하시겠다. 박 목사님 같으면 나 같은 생각 안 가지시겠다.’ 마음에서 정리가 되었다.

이 마음을 계속 진행하고 싶다
그동안 목회자 교제를 수없이 했지만 이번에 처음으로 나 자신에 대해서 생각해 보는 시간을 가졌다. 내가 시작부터 틀렸다는 사실이 처음으로 내 마음에 비추어졌다. 그러니까 내 생각을 버리고 나 자신을 내려놓을 수 있었다. 내가 믿음을 가지려고 하지 않아도 하나님이 이미 말씀을 주셨고, 그 말씀이 일하실 것이 선명하게 비쳐졌다.
마음이 높으니까 그동안 배울 마음이 없었는데, 교제를 통해서 주님이 배우고 들을 수 있는 마음을 내게 허락하셨다. 참신앙을 배우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 나 자신과도 싸우고 싶은 마음이 생겼다. 이 마음을 계속 진행하고 싶다.
목회자 모임에서 교제로 내 모습을 비춰볼 수 있는 시간을 가진 것이 말할 수 없이 감사하다. 하나님의 말씀을 떠나 내 생각을 따라서 살며 잃어버린 마음을 하나님이 다시 찾아주셨다. 성경에서는 ‘예’만 있지, ‘예’ 하고 나서 ‘아니오’ 하는 것은 없다고 말씀하신다. 그 말씀대로 하나님의 약속 앞에서 나에게는 ‘예’만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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