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사(32) - 피터 왈도와 왈도파 그리스도인
교회사(32) - 피터 왈도와 왈도파 그리스도인
  • 이한규(기쁜소식동서울교회 목사)
  • 승인 2013.11.15 14:3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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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사

 

어둠이 깊었던 중세의 빛, 왈도파
로마카톨릭이 장기간 권세를 잡고 있는 동안 세상은 암흑으로 뒤덮였지만 진리의 빛이 아주 소멸되지는 않았다. 하나님의 섭리 안에서는 어둠이 아무리 깊어도 작은 빛이 어두움을 이긴다.
중세에 가해졌던 무서운 종교 핍박을 꿋꿋이 견뎌내며 수세기 동안 카톨릭의 부패에 전혀 감염되지 않은 그리스도인들이 있었다. 복음의 진리를 증거했던 왈도파 사람들이 바로 그들이다. 그들은 자신들의 기원을 사도 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가 찾았다. 14세기에 이르러 자신들의 거처인 알프스의 골짜기들이 침입을 당했을 때도 그들은 조금도 두려워하지 않고 침입자들에게 사도 시대부터 그때까지 유지해온 자신들의 믿음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했다.
“이 고백은 우리 선조들, 그 선조들의 선조들 때부터 모든 시대에 걸쳐 모든 연령의 사람들에게 가르치고 전수한 내용 그대로이며, 더 나아가 손에서 손을 거쳐 이어받아 온 것이다. … (중략) … 우리가 가지고 있는 이 신앙은 우리 대적들이 거짓으로 주장하는 것처럼 단순히 현재의 신앙이거나, 혹은 몇 년 전에 처음으로 발견한 그러한 신앙이 아니다. 우리 위의 아버지, 할아버지, 그 선조, 그보다 훨씬 오래된 우리 선조들이 가진 신앙이다. 그것은 성인들과 순교자들의 신앙이며, 박해에 굴하지 않은 독실한 고백자들과 사도들의 신앙이다.”
왈도파 그리스도인들은 교황의 권위가 굳건한 나라에 살면서도 교황의 오류와 허위와 부패에 복음의 진리로 당당히 맞섰다. 로마카톨릭의 핍박이 심해지자 어떤 이들은 외국으로 가서 그 땅에 진리의 깃발을 꽂았고, 어떤 이들은 깊은 산골짜기나 험준한 산 속으로 가서 자유롭게 하나님께 경배했다. 그들은 진리를 위하여 편한 삶을 포기하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았다. 그래서 그들을 반대했던 자들조차도 “그들의 신앙이 존경받을 만한 것임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고 고백했다. 왈도파 그리스도인들은 인간이 만든 유전과 성경에 위배되는 교리를 전하는 종교 지도자들의 탄압에 맞서 생명을 바쳐가면서까지 굳세게 항거해, 복음의 진리를 후대에 전하고 위대한 종교개혁의 씨앗을 뿌렸다.
그들의 활동 기간은 AD 1000년경에서 1600년경까지 약 6세기에 이른다.

 

왈도파의 삶
왈도파는 세속적인 것을 피하고 간결한 성경적인 생활양식을 고수했다. 그들은 가족과 젊은이들을 은혜의 복음 위에 세우고, 하나님의 말씀으로 영적인 인도자들을 훈련시켰으며, 그들의 마음은 전 세계에 복음을 전파하려는 선교의 사명으로 불타올라 유럽 전역에 복음을 전했다. 그들에게는 ‘바르베(Barbe)’라고 불리는 인도자들이 있었는데, 그들은 여행하면서 전도하는 일을 했다. 왈도파의 복음 전도자들이나 교사들은 거짓 종교 지도자들이 이야기하는 헛된 철학을 하나님의 말씀을 인용하여 무너뜨리는 능력으로 사람들 사이에서 명성이 높았다.
전도를 통해 많은 사람들이 진실된 신앙을 갖게 하고자 노력한 초기 왈도파 그리스도인들은 길거리와 시장, 그리고 교회에서 설교했다. 당시에는 성경 사본이 매우 귀했으므로 그들은 귀중한 성경 말씀들을 외워서 전도했다. 많은 왈도파 사람들이 밤을 새워가며 성경을 읽고 성경 구절들을 외웠다.
왈도파는 성경을 믿음과 삶의 모든 문제에 있어서 유일한 기준과 최고의 권위로 생각했기 때문에 성경 보급에도 매우 적극적이어서 성경을 복사하여 기록하는 일도 했다. 때로는 깊고 어두운 동굴 속의 희미한 횃불 아래서 불굴의 노력으로 성경의 한 절 한 절, 또 한 장 한 장을 베꼈다. 그들은 자기 시간의 일부를 후에 자신이 선교사로 갈 때 배포할 성경을 필사하는 데 할애했다(J. A. Wylie, <왈도파의 역사>, 1860, p.14).
또한 그들은 ‘어느 시대에나 하나님의 뛰어난 일꾼들이 존재한다’고 생각해서 암브로스, 어거스틴, 크리소스톰 등 교부(敎父)들의 저서들을 읽었다. 그러나 그것들을 전부 받아들이지는 않고 순수하게 성경의 가르침과 일치하는 것들만 받아들였다. 그들은 불필요한 논쟁을 좋아하지 않았고, 경건한 삶을 강조했으며, 묵묵히 하나님을 섬기며 선을 행했다.
왈도파의 예배는 간결했고, 그들의 삶은 조용했기 때문에 이웃들로부터 판단받는 일이 없었다. 왈도파 그리스도인의 교회는 순결하고 단순하다는 점에서 사도 시대의 교회와 비슷했다. 그들은 인간의 허영과 교만을 나타내는 거대한 예배당이나 화려한 수도원 대신 멀리 뻗은 산기슭이나 알프스의 깊은 산골짜기에 모였으며, 위험이 있을 때는 큰 바위와 절벽으로 둘러싸인 요새에 모여서 진리의 말씀을 들었다.
목회자들은 복음을 전할 뿐 아니라 병자들을 위문하고, 아이들에게 문답식으로 교리를 가르치고, 잘못하는 자를 견책하고, 다툼을 해결하여 형제의 사랑으로 서로 화합하도록 노력했다. 그들은 섬김을 받으려 하지 않고 도리어 양떼들을 섬기신 주님을 따랐으며, 하나님의 양떼를 푸른 초장과 은혜로운 말씀의 샘터로 인도하여 먹였다.
왈도파 사람들은 가난했지만 늘 가난한 사람을 도왔으며, 선을 행하되 아무도 모르게 했다. 그들은 규칙적으로 성경을 읽고 가정 예배와 집회를 생활화했으며, 진리를 위하여 기꺼이 목숨을 버렸다. 그들은 유아 세례를 포함하여 사람이 만든 모든 전통을 거부했다. 1531년에 역사가 세바스찬 프랑크(Sebastian Frank)는 ‘왈도파들이 유아들에게 침례를 주지 않았으며, 그들과 재침례교도들 간에 일반적이고 광범위한 일치가 있었다’고 기술했다.
복음을 위해 자신들의 삶을 다 드렸던 왈도파는 종교개혁 이후 많이 쇠약해졌다. 그동안 믿을 수 없을 만큼 잔인하고 혹독한 박해를 받았고, 특히 16세기와 17세기 초에 왈도파 목사들이 대부분 살해당했기 때문이다.

왈도파의 인도자 피터 왈도
왈도파라는 이름은 그들의 인도자였던 피터 왈도에서 유래한다. 왈도파의 유래에 대해서는 여러 설(說)이 있는데, 왈도파의 창시자 피터 왈도(Peter Waldo, 혹은 페트루스 발두스Petrus Waldus)에 대해서는 알려진 이야기가 별로 없다. 그는 프랑스 리옹 태생의 갑부로, 정치권에서도 영향력이 있는 인사였다. 일설에는 왈도가 어느 날 그가 베푼 파티에 참석한 한 사람이 갑자기 죽는 것을 보고 죽음의 의미와 구원의 필요성에 대하여 깊이 생각하게 되었다고 하고, 일설에는 어느 방랑시인이 부자 청년의 회개와 구원을 주제로 한 ‘성 알렉시스(St. Alexis)의 삶’을 노래한 것을 듣고 그 내용에 마음이 사로잡혀 성경을 읽게 되었다고 한다.
그 뒤 왈도는 구원을 받고 사업을 포기한 후, 가족들을 위한 약간의 재산 외에 모두 팔아서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눠주고 한동안 성경 연구에 몰두했다. 두 명의 신부를 고용하여 라틴어 성경을 프랑스어로 번역하게 했다는 이야기도 전해진다. 그의 목적은 청빈한 사도적 삶이었으며, 가난했지만 예수님이 그의 삶 전체를 이끄신다는 확신을 가지고 있었다. 그는 재물에서는 자유로워졌고 예수님께는 종이 되었다.
얼마 후, 왈도는 복음을 전하기 위해 여행을 시작했다. 사람들이 그와 함께하기 시작했고, 곧 많은 무리가 모였다. 사람들은 그들을 왈도파(Waldenses, Waldensians)라고 불렀다. 그들은 ‘리옹의 가난한 사람들’이라고 불리기도 했다.
1179년, 교황 알렉산더 3세의 주관으로 열린 ‘제3차 라테란 교회 회의’에서 왈도파는 자신들의 생활방식과 설교하는 것을 합법적으로 승인해 달라고 요청했지만, 무식한 평신도라고 웃음거리가 되고 그들의 요청은 거절당했다. 1182년, 왈도는 교회의 명령에 복종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리옹의 주교로부터 파문을 당하고 추방당했다. 1184년에는 교황 루시우스 3세가 왈도파를 이단으로 규정했다. 그들에게 설교하지 말라고 한 로마카톨릭의 명령을 따르지 않았다는 이유 때문이었다.
당시에는 설교할 수 있는 권한이 교회법에 의해서 ‘서임 성직자’에 한정되어 있었다. 그 외의 사람들은 라틴어를 읽을 수 없고, 신학의 복잡한 부분을 잘 설명해 줄 수 없다는 이유 때문이었다. 그런 까닭에, 정식으로 교육받지 않은 평신도가 설교하는 것은 기존의 성직자와 교회의 권위에 대한 도전으로 받아들여졌다.
로마카톨릭의 박해를 피해 프랑스 주변 국가들로 흩어진 피터 왈도와 그의 제자들은 능력 있는 설교로 이름을 떨쳤다. 그러나 로마카톨릭이 독일에서 복음을 전하던 왈도파에게 ‘체포하여 화형에 처하겠다’고 하여 그들은 보헤미아로 이주해 간다. 왈도는 여행을 계속하다가 보헤미아에 도착해 그곳에서 죽음을 맞이한다. 그는 죽기 전 그 땅에 많은 복음의 씨를 뿌렸는데, 중세 후기의 개혁가 얀 후스(Jan Huss)를 비롯하여 이후 시대를 이끌어 간 영적 열매들이 맺혔다.

왈도파의 고난과 왈도의 소망
왈도는 구원받은 후 평생 청빈한 옷차림으로 곳곳에 다니며 성경 말씀을 증거했다. 왈도가 증거하는 말씀은 사람들의 마음을 사로잡아 많은 사람들이 그의 주변에 모여들었고, 왈도와 그를 따르는 설교자들은 계속해서 이곳저곳 다니며 사람들에게 ‘세속화된 성직자에게 가기보다 참된 구원으로 인도하는 지식을 얻기 위해 성경으로 돌아오라’고 권했다.
로마 교황은 왈도와 그를 따르는 무리들을 범법자라고 하며, 그들을 없애는 일은 교회가 전체적으로 나서서 협조할 의무라고 했다. 로마카톨릭이 그들을 박해했음에도 불구하고 그 수가 계속해서 증가하자 카톨릭은 그들을 억압하는 각양 법규와 율령을 선포해 왈도파는 어느 곳에서나 안전을 보장받을 수 없었다. 땅을 빼앗기고, 재산을 몰수당하고, 죽은 자들을 장사지내는 것조차 금지되었다. 심지어 안전한 곳을 찾아 도망가려는 그들을 발견하는 대로 죽이라고까지 했다.
교황 알렉산더 3세가 왈도파와 가까이 지내는 사람들까지도 위협하자 왈도는 친구들의 안전을 위해 리옹을 떠났다. 그는 방랑하면서 여러 곳에서 피난처를 찾았으나 찾지 못해 산악인들의 땅 보헤미아에서 살다가 그가 사모하던 주님의 나라로 갔다.
왈도가 평생 조심했던 생각이 하나 있었는데, 그것은 자신의 세력을 키우지 않겠다는 것이었다. 그는 다만 사람들에게 ‘하나님을 볼 수 있는 눈’과 ‘복음을 뜨겁게 사랑하는 마음’이라는 보배만을 전해주기 원했던 예수님의 종이었다.

성경 번역, 진리의 보존과 전파
왈도파는 라틴어 신약 성경을 프랑스어로 번역해서 사용했다. 그들은 복음적인 교부(敎父)들의 책도 자신들이 살았던 지방의 언어로 번역했다. 그 시대에는 라틴어가 아닌 다른 언어로 된 성경은 거의 인봉된 상태였지만 왈도를 따르는 사람들은 자신들의 언어로 된 성경을 가지고 있었고, 그 성경을 통해서 참된 믿음을 확인하고 증거할 수 있었다.
왈도파는 성경을 신앙과 실생활의 유일한 규준(規準)으로 생각했고, 성경 배포에 매우 적극적이었다. 그들은 카톨릭교회의 세속화를 비판하고, 교황권·연옥설·면죄부·죽은 자들을 위한 기도·성자 숭배(veneration of saints)·유해 숭배(veneration of relics)를 거부했으며, 가시적(可視的) 교회의 거룩성을 인정하지 않았다. 그리고 타락해서 자격이 없는 성직자에 의해 거행되는 미사의 유효성을 부정했다. 성경의 가르침과 다르면 교황이라 해도 무시했다. 그들은 복음의 단순성을 크게 강조했으며, 거짓말을 대죄(大罪)로 여겼고, 인간의 피를 흘리게 하는 것을 불법으로 여겨 전쟁을 반대했다. 그들은 모든 그리스도인은 성령의 전(殿)으로서 누구든지 설교할 수 있고, 평신도도 믿음을 고백하는 자들에게 침례를 줄 수 있다고 믿었다.
그들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완성하신 완전한 속죄를 믿음으로 의롭게 됨을 믿었고, 믿는 자에게 임한 구원이 영원히 안전한 것임을 믿었다. 왈도파, 그들은 루터와 칼빈이 태어나기 300여 년 전에 유럽 전역에 걸쳐 복음을 전했던 그리스도인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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