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사(34) - 개혁의 샛별, 존 위클리프(John Wycliffe)
교회사(34) - 개혁의 샛별, 존 위클리프(John Wycliffe)
  • 이한규 (기쁜소식동서울교회 목사)
  • 승인 2014.01.27 11: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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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사(34회)

 


개혁의 샛별 위클리프
‘개혁의 샛별’이라 불리는 위클리프는 영국의 에드워드 2세 때 섹슨 혈통으로 태어났다. 그는 옥스퍼드 퀸즈 대학을 다녔고, 1366년에 성직자가 되었으며, 1374년에 신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위클리프는 옥스퍼드 대학의 유명한 신학 강사였으며, 위대한 성직자요 깊이 있는 대학 교수요 철학의 대가로 이름이 높았다. 이러한 사실은 그의 저서들이 증명해 줄 뿐 아니라, 그를 대적했던 왈덴(Walden)이 교황 마틴 5세에게 보낸 서신에도 나타나 있다.
“그가 얻은 권위, 그의 이성의 힘과 열정을 지닌 강력한 논증에 크게 놀랐습니다.”

 

위클리프 등장 당시의 종교적 상황
위클리프는 옥스퍼드 발리올 대학에서 신학, 철학, 법률을 공부하고 1360년에 동 대학의 학장이 되어 철학을 강의하던 중 1366년 영국 왕실의 전속 신부가 되었다. 당시 영국의 종교는 유럽 전역에서 그러했듯이 타락하고 부패하여 국가 전체가 깊은 어둠에 덮여 있었다. 많은 사람들이 이름만 기독교인이었다. 하나님이 보시는 죄, 참된 회개, 율법의 목적, 값없이 주어지는 은혜, 의롭게 됨과 거듭남, 그리스도인의 자유 등에 대해서 설교하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복음의 능력을 버린 교회는 겉치레뿐인 의식(儀式)들과 인간으로 말미암은 전승(傳承)에 따라 움직이고 있었고, 사람들은 그 안에서 구원을 얻는다는 교리에 사로잡혀 있었다. 성경을 보지도 못하고 알지도 못하는 사람들은 성직자들이 전해 주는 것만 알면 된다고 여겼고, 성직자들은 교황청에서 공표한 것 외에는 거의 가르치지 않았다. 사람들은 주교들이 제멋대로 인도하는 대로 끌려다녔고, 성직자들은 사람들의 영적 무지를 이용해서 세속적인 권력까지 움켜쥐고자 했다. 그리고 무엇이든지 구실만 있으면 세금을 부과해 교황청의 금고에 돈을 쌓았다. 그 돈은 교황청을 화려하게 꾸미고 교황과 교직자들의 사치스러운 생활을 유지하는 데 쓰였다.

교황과의 충돌
복음의 진리가 세속적인 성직자들에 의해 더럽혀진 것을 본 위클리프는 침묵할 수 없었다. 부패한 종교의 거짓된 교리와 잘못된 가르침으로 수많은 사람들이 멸망으로 가는 것을 보고 개혁의 기치를 높이 들었다. 그는 고해성사는 구원에 불필요한 것이라고 선언했고, 교황의 세속적인 통치권에 반대하는 연설을 했다. 하나님 앞에서 날카로운 감각과 양심을 소유했던 위클리프는 믿음에 관한 저서들을 통해 교황에게 정면으로 도전했다.
“교황의 주장들은 성경에 비추어볼 때 악한 것이다. 교황 자신의 구원도 보통 사람의 구원과 다를 바 없이 살아 계신 그리스도를 믿느냐, 안 믿느냐로 결정된다. 결코 교황이 신앙의 기준이 될 수 없다. 교회의 법률은 오직 성경뿐이다.”
위클리프는 강의에서도 교황의 횡령과 그의 무오성의 잘못됨과 그의 자존심과 허욕을 맹렬히 비난했다. 교황에 이어 주교들의 겉치레와 사치스런 옷차림, 미신적인 행동과 속임수 등에 대해서도 명확한 논리로 비평했다.
이를 들은 교황 그레고리 11세는 위클리프에게 몇 가지 부분에 그의 의견을 취소하라고 캔터베리 대주교를 통해 지시했다. 그리고 그 지시에 따르지 않을 경우 로마로 송환하라고 명령했다. 그러나 그 명령은 쉽게 이행될 수 없었다. 위클리프에게는 랭커스터 백작, 헨리 퍼시 경(卿) 등 당시 영국에서 권력을 가진 친구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박해의 산을 넘어
에드워드 3세가 죽은 후 그의 손자 리처드 2세가 열한 살의 나이에 왕위를 이었다. 왕국의 통치를 랭커스터 공작에게 맡겼던 늙은 왕이 죽고 새 왕이 즉위하면서 랭커스터 공작과 퍼시 경 등이 자리에서 물러나자, 주교들은 위클리프를 공격할 좋은 기회라고 생각했다. 그들은 위클리프에게 말씀을 전하지 말고 잠자코 있으라고 명령했으나 위클리프는 몇몇 동료들과 함께 맨발에 거친 모직으로 만든 가운을 입고 다니며 부지런히 전도했다. 진리를 전하고자 하는 그의 열정을 주교의 명령이 막을 수 없었다. 위클리프와 그와 함께한 사람들은 평민들에게 그들이 믿고 있는 복음을 전하려고 애썼다.
1377년, 리처드 2세가 즉위하던 해에 교황은 옥스퍼드대학에 교서를 보내어, 위클리프의 교리를 카톨릭 교리로 근절시키지 못하고 뿌리를 내리도록 방치한 것을 꾸짖고, 위클리프를 찾아내 3개월 안에 교황 앞에 서게 하라고 명령했다. 이에 옥스퍼드대학의 부총장은 위클리프를 일정 지역 밖으로 나가지 못하게 했는데, 영국 국왕은 그렇게 행한 부총장을 오히려 투옥시켰다.
1378년에 교황 그레고리 11세가 죽으면서 교황권 다툼이 일어났다. ‘아비뇽 유수’로 교황청이 로마에서 프랑스로 약 70년간 옮겨져 있다가 그레고리 11세가 죽자 로마에서 우르바노 6세를 교황으로 선출했는데, 프랑스에서도 클레멘스 7세를 교황으로 세워 서로가 서로를 비난하며 온갖 불법을 자행했다. 이후 위클리프는 교황을 적그리스도요, 오만하고 세속적인 착취자요, 약탈자이며 저주받을 인물이라고 맹렬히 공격했다. 위클리프는 교황권에 반대하는 소책자를 만들었고, 그 책은 모든 계층의 사람들에게 열렬히 읽혀졌다.
이단(?)을 근절시키려는 대주교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위클리프를 따르는 사람들은 끊임없이 늘어났다. 도시민, 상인, 젠트리(gentry, 귀족 다음 계급)는 물론 말단 성직자들 가운데에도 위클리프를 따르는 사람들이 점점 늘어났으며, 소수의 하원의원과 왕실의 기사들도 지지를 보냈다.

롤라드파(Lollards)
위클리프를 따르는 사람들은 ‘롤라드파’라고 불렸다. 롤라드의 어원은 분명하지 않지만 ‘중얼거리는 자’라는 뜻을 갖고 있는 중세어(語)에서 유래한, 경멸하는 말이다. 유럽 대륙에서 경건한 체하지만 사실은 이단 신앙을 가진 집단을 지칭하는 데 쓰였다. 위클리프를 따르는 사람들에 의해 이뤄진 롤라드 전도 운동은 대단한 성과를 거두었다. 그들은 어디에서나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일에 헌신했다. 그들은 ‘청빈한 사제들’이라고 불리기도 했는데, 신발도 신지 않고 지팡이만을 짚고 둘씩 짝지어 다녔기 때문이다.

성경을 영어로 번역하다
1378년, 위클리프는 가장 중요한 일을 시작했다. 라틴어 성경을 영어로 번역하는 일이었다. 위클리프에게 있어서 성경은 제도적 교회나 전통보다 우월하고 유일한 권위를 가지고 있었다. 그런 성경을 대중이 알기 쉽고 편하게 접할 수 있어야 했기에 성경 번역은 불가결한 일이었다. 위클리프는 그보다 더 귀중한 일은 없다고 생각했다.
1382년, 그는 성경의 영어 번역 작업을 마쳤다. 그 일은 설교자들이 영어로 된 성경을 읽고 설교하는 새로운 변화를 가져왔다. 그 효과는 검은 먹구름이 걷히고 밝은 햇빛이 쏟아지는 것 같았다.
위클리프가 번역한 성경을 사용하기 위해서는, 당시는 활자 인쇄가 발명되기 전이었으므로 손으로 일일이 필사해야 했다. 보통 한 권의 성경을 필사하는 데 열 달 정도 걸렸고, 가격도 도서관 사서(司書)의 1년치 봉급만큼이나 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많은 양의 성경이 필사되자, 영국 국회에서는 법령을 제정하여 위클리프의 성경을 보급하지 못하게 하였다. 후에 롤라드가 증가되었을 때, 사람들은 위클리프가 번역한 성경 사본(寫本)을 가지고 있는 이를 저주받은 이단(?)으로 여겨 그의 목을 조르는 것이 관행이 되었다.
위클리프의 성경 번역은 약 150년 후에 윌리엄 틴데일이 히브리어 성경을 영역(英譯)하기로 결심하는 데 큰 힘이 되었다. 그리고 위클리프의 성경 번역 작업은 오늘날 ‘위클리프 성경 번역 협회’가 이어받아 세계의 모든 언어로 성경을 번역하기 위해 애쓰고 있다.

농민 봉기가 가져다준 어려움
카톨릭 교계는 위클리프를 몰아붙일 결정적인 구실을 잡았다. 마침 농민들이 봉기하였는데, 그 일은 부당한 인두세와 행정의 부조리에 대하여 농민들의 불만이 폭발한 것으로 위클리프와는 직접적인 관련이 없었다. 그러나 교계에서는 농민 봉기가 위클리프의 설교와 롤라드 운동의 영향 때문이라고 뒤집어씌웠다. 게다가 농민 봉기가 실패하자 위클리프는 농민들에게 동정과 자비를 베풀어줄 것을 탄원했는데, 이 일은 그를 더 큰 곤경에 빠뜨렸다. 교계의 주장이 기정사실화 되다시피 한 것이다. 그로 인해 위클리프는 교계가 공격할 때 그의 보호막이 되어주던 국왕이나 귀족들의 지지를 잃었다.
위클리프는 대학에서 더 이상 강의를 할 수도, 설교를 할 수도 없게 되었다. 교수직을 박탈당한 후 위클리프는 시골 교회의 목사로 일하면서 저술에 힘을 쏟았다. 특히 성경 번역과 소책자를 저술하는 데 힘썼다. 그는 교회 안에서 자행되는 부패를 엄하게 공격하는 내용의 책들을 시리즈를 출간했다. 그런 통렬한 비판은 전에는 유례가 없던 것이었다. 그의 글들은 엄격하게 금지되었고, 1382년 그의 모든 저술들은 불태워졌다.

달려갈 길을 마치고
위클리프는 로마카톨릭 교회에서 이단으로 정죄되었는데, 그가 한 이야기들 가운데 가장 크게 정죄받았던 내용은 다음과 같았다.
“주교나 신부는 죄 가운데서 임명하거나 헌신할 수 없다. 그리스도께서 미사를 세우셨다는 것은 복음에서 증명될 수 없다. 성직자들이 이 세상 재물을 갖는 것은 성경에서 모순되는 일이다. 로마 교회는 사탄의 회당이다. 신부나 집사가 교황청이나 주교의 허락 없이도 하나님의 말씀을 전파하는 일은 합법적이다. 추기경들이 교황을 선출하는 일은 마귀가 고안한 것이다.”
위클리프는 가장 고집스럽고 돌이키지 않는 이교도로 선포되었다. 그러나 씨앗은 뿌려졌고, 위클리프가 한 이야기들은 널리 퍼져나갔다.
위클리프는 1382년 뇌졸중으로 쓰러졌고, 1384년 12월 28일 교회에서 예배를 드리던 중 두 번째 쓰러졌다. 그리고 1384년 12월 31일, 그는 복음의 경주를 끝마치고 주 안에서 평화로이 잠들었다.
위클리프는 성경을 토대로 청중들을 감화시킨 종교개혁 이전의 가장 위대한 설교자요, 저술가요, 학자요, 목회자였으며, 동시에 중세 스콜라 철학의 석학이었다. 그리고 그는 루터보다 140년 앞서 모국어로 성경을 번역한 성경 번역가였다. 그로 인해 그는 ‘개혁의 샛별’, ‘복음적 박사’, ‘옥스퍼드의 꽃’ 등의 명예로운 칭호를 얻었다. 존 위클리프는 모든 면에서 뛰어난 14세기의 복음주의자였다. 부와 권력을 잘못 사용하는 카톨릭 법에 대한 격렬한 공격, 성사(聖事) 예배 제도에 대한 비판, 라틴어 성서의 영문 번역 등은 후세에 그로 하여금 ‘종교개혁기의 샛별’이라고 이름하기에 부족함이 없었다.
위클리프는 꼼꼼하고 열정적인 정신의 소유자로, 독설을 쏟아낼 수도 있었다. 그럼에도 대부분의 학자들은 위클리프가 고결한 인물이었다는 데에 동의한다. 때로 교만하고 실수도 했지만 전체적으로 성실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그는 사후에 파문을 당했고, 그의 시체는 무덤에서 파내져 그의 책들과 함께 불태워졌다. 그것은 1415년 콘스탄츠 공의회에서 결정된 내용이었다. 그가 남긴 백 수십 편의 저서들은 발매 금지되었고, 이단분형령(異端焚刑令)이 통과(1401년)되어 눈에 띄는 대로 불태워졌다. 그러나 그가 떨어뜨리고 간 종교개혁의 불씨는 꺼지지 않았다. 이후의 종교개혁가들 가운데 위클리프의 영향을 받지 않은 사람은 거의 없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만큼 그는 종교개혁의 선구자였다.
토마스 퓰러는 그의 죽음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그들은 위클리프의 뼈를 불살라 근처에 있는 시내의 급류에 던져버렸다. 그 시냇물은 그 재를 아본 강으로, 아본 강은 그것을 세버른 강으로, 세버른 강은 그것을 좁은 바다로, 좁은 바다는 다시 큰 대양으로 흘러가게 하였다. 그리하여 그의 신조(信條)의 상징인 재는 이제 온 세상에 퍼지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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