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매를 위해 자신을 뿌렸던 사람들
열매를 위해 자신을 뿌렸던 사람들
  • 박민희 편집장
  • 승인 2014.04.01 16: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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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 연재 . 성도를 찾아서_홍두남 자매

 

1973년 1월, 박옥수 전도사는 하나님의 인도를 따라 김천에서 대구로 간다. 내당동에 있는 어느 건물의 2층에서 20명 남짓의 성도들과 함께 복음 전하는 삶을 시작한다. 구원받는 사람들이 계속해서 일어났고, 그 해 6월에 지금 기쁜소식대구교회에서 신앙생활을 하고 있는 홍두남 자매가 구원을 받는다. 당시 스물 여덟 살의 처녀가 이제는 세 명의 손자를 둔 예순 아홉의 할머니가 되었다. 홍두남 자매님에게서 당시의 일들에 대해 들었다. 세월이 많이 흘러 세세한 일들은 기억하지 못하지만, 지워지지 않는 아름다운 추억들이 자매님의 마음에 새겨져 있었다.

 
요한복음 1장 29절 말씀을 들으면서
자매님에게 어떻게 구원받았는지부터 물었다.
“1973년 봄이었어요. 기성 교회를 다니고 있다가 친척 분의 전도를 받아서 대구 교회에 갔어요. 박 목사님이 전해 주시는 말씀이 마음에 와 닿았어요. 그리고 예배 때 성도들이 나와서 자신의 부족함을 간증하는 게 신기했어요. ‘어떻게 자신의 허물을 저렇게 말할 수 있지?’ 하고요. 마음이 열려서 계속 예배에 참석하면서 말씀을 들었고, 어느 날 예수님이 세상 죄를 지고 가신 요한복음 1장 29절 말씀을 들으면서 죄 사함을 받았어요. 새 삶이 시작된 거지요. 6월에 구원받고, 박 목사님이 중매하셔서 11월 27일에 결혼했어요. 남편은 나보다 조금 늦게 구원받았지요. 결혼하고 복음과 함께 사는 삶이 좋았어요.”

“밤 12시가 넘어가는데도 집에 갈 생각을 안 해요”
그 당시 구원받은 성도들은 어떻게 살았는지 궁금했다.
“마음이 순수했어요. 목사님 가족도 자주 굶고, 형제 자매들도 가난했지요. 참 어렵게 살던 시절이었어요. 목사님 집에 쌀은 아예 없고, 보리쌀도 거의 없었어요. 연탄도 없어서 찬방에서 자고…. 그런데 목사님은 전혀 상관하지 않고 복음을 위해 사시는 거예요. 늘 전도 다니고, 성경공부 하고, 집회 하고, 수양회 하고…. 그 모습이 정말 좋았어요. 자연스럽게 우리도 그렇게 살아야 하는 줄 알았지요. 삶이 어려워서 누릴 게 없어서 그랬는지, 전폭적으로 복음을 위해서 살았어요. 당시 차비가 일반인은 15원, 학생은 10원이었는데, 차비를 아끼려고 1시간 가까이 걸어서 교회를 다녔어요. 차비가 생기면 먹을 것을 사서 형제 자매들과 함께 먹었지요.”
교회 생활은 어떻게 했는지 궁금했다.
“설교 말씀이 좋고 교회가 좋아서, 주일 저녁 예배를 마치고는 아무도 집에 갈 줄을 몰랐어요. 무슨 할 이야기가 그리 많은지, 배는 고파도 이야기를 주고받으면서 웃고 즐거웠어요. 들은 말씀 이야기, 복음 전한 이야기, 사는 이야기…. 밤 12시가 넘어가는데도 집에 갈 생각을 안 해요. 목사님이 ‘우리 자야 한다’며 가라고 하셨죠.
주일 오전 예배를 마치고는 오후에 다 전도를 나갔고, 복음 전하는 삶이 몸에 배어 있었어요. 교회에 구원받지 않은 사람이 와서 목사님이나 어느 형제님이 복음을 전하면, 나머지 사람들은 한쪽에서 다 기도했어요.
전도집회를 하면, 부르지 않아도 다 와서 한결같은 마음으로 봉사했어요. 수양회도 무척 사모했지요. 수양회가 다가오면 가슴이 설레고. 직장에 다니는 형제 자매들은 회사에서 보내 주지 않으면 쫓겨날 걸 각오하고 그냥 참석했어요. 수양회를 마치고 마지막에 ‘저 멀리 뵈는 나의 시온성…’ 찬송을 부를 때면 수양회에 참석한 형제 자매들이 다 울었어요. 하나님의 나라를 마음에서 소망했지요.
가난했지만 교회에 일이 있을 때마다 작정헌금을 했어요. 많이 하고 적게 하고 차이는 있었지만, 한 사람도 빠지지 않았어요. 지금도 구원받은 성도들이 자신의 마음으로 사는 게 아니지만, 당시를 돌아보면 정말 자기 마음으로 산 게 아니었어요. 자기 마음으로는 그렇게 살 수가 없어요. 하나님이 그렇게 살게 하신 거예요.”
형제 자매들은 서로 어떻게 지냈는지 궁금했다.
“교회에서 매일 기도회나 모임이 있으니까 교회에 와서 한데 어울려 살았어요. ‘육신의 형제보다 더 가깝고’라는 찬송 가사가 있는데, 정말 그렇게 살았어요. 육신의 부모나 형제에게 하지 못하는 이야기들을 서로 나누며 살았어요. 서로 집에도 자주 찾아가고요. 다 어렵게 살던 시절이라, 돈이 생기면 같은 돈으로 가장 많은 양의 음식을 만들 수 있는 국수를 사서 함께 나눠 먹을 때도 많았지요.”

 
‘희생이 없으면 복음이 전해지지 않는구나!’
당시 박옥수 목사의 삶은 홍 자매님에게 어떻게 비쳐졌는지 궁금했다.
“한번은 김장을 담글 때였어요. 대구 팔달시장이 채소가 싸요. 사모님이 싸고 좋은 배추를 사려고 새벽 5시에 시장에 갔어요. 저도 따라갔지요. 돈은 없고 배추는 좋은 걸 사고 싶고, 그러니까 시장을 다 둘러보고 나서 사요. 자연히 시간이 많이 걸리지요. 그렇게 시장에 다녀오면, 목사님이 사모님에게 시간을 낭비한다고 하시는 거예요. 처음에는 자신을 전혀 위하지 않고 복음만을 생각하는 목사님이나 사모님의 삶이 이해가 안 되었어요. 세월이 흐르면서 ‘희생이 없으면 복음이 전해지지 않는구나!’ 하는 마음이 들었지요. 저는 목사님 부부와는 비교할 수 없는 작은 희생이지만 그런 희생도 싫었는데, 남편이 자주 ‘한 알의 밀이 썩지 않으면 어떻게 열매가 맺혀? 희생이 있어야 복음이 살아 있어’ 하고 말했지요. ‘알았어요’ 하고 따라갔어요. 다 목사님 부부의 삶을 보고 배운 마음이지요.
사모님은 저에게 큰언니 같고, 엄마 같았어요. 좋았어요. 조금만 어려워도 찾아갔지요. 사모님이 한 부분 한 부분 이끌어 주셨어요. 혼도 내시고요. 참 가까웠어요. ‘이분들을 따라가면 내가 망하지는 않겠다. 이분들 발자취를 뒤따라가면 내 영혼이 복을 받겠다. 아니, 내 육신도 복을 받겠다’는 마음이 들었지요.”

“속으로 ‘목사님은 꿈도 크셔라’ 했지요”
박옥수 목사는 형편과 상관없이 하나님의 뜻을 좇아 믿음으로 복음의 일들을 해왔기에, 그런 부분에서 어려운 점은 없었는지 물었다.
“목사님이 ‘우리가 선교사도 보내고, 책도 출판하고, 방송으로도 복음을 전하고…’ 하는 이야기를 자주 하셨어요. 그러면 우리는 속으로 ‘목사님은 꿈도 크셔라’ 했지요.”
“자매님도 그러셨습니까?” 하고 물었다.
“물론이지요. 너무 어려웠으니까요. 지금 뉴욕에서 선교하는 박영국 목사님이 아기 때였는데, 아이 먹을 음식도 없었어요. 그런데 그런 말씀을 하시니까 기가 막히지요. ‘우리 목사님은 진짜다’는 마음은 드는데, 하시는 말씀은 형편과 너무 동떨어져서 도무지 믿을 수가 없었어요. 결국 목사님이 하신 말씀대로 다 되었지요. 돌아보면, 목사님과 함께 그런 시절을 보낼 수 있었다는 것이 감사하고 정말 행복하지요.”

 
구체적으로 어떤 일이 가장 어렵게 느껴졌는지 물었다.
“예배당을 파동으로 옮긴 후, 선교학교를 시작했어요. 당시 형제 자매들이 40~50명 정도 되었을 거예요. 그때도 목사님은 종종 굶었어요. 그런데 선교학교를 한다고 하시니 형제 자매들의 반응이 어땠겠어요? 다 말렸죠. ‘목사님도 굶고 계시는 판에 선교학생을 모집하면 그 학생들은 무얼 먹이실 겁니까?’ 하고요. 조금 있다가 하면 안 되느냐고 했지요.”
“목사님이 뭐라고 하셨습니까?” 하고 물었다.
“하나님이 다 이루신다고 하셨죠.”
“그래서 뭐라고 했습니까?” 하고 다시 물었다.
“그러면 할 말이 없지요. 목사님이 하나님의 종인 것은 아니까요. 1976년 7월에 선교학교가 시작되었는데, 1기생으로 다섯 명이 입학했어요. 물론 자주 굶고, 어려움을 많이 겪었어요. 그런데 그 속에서 귀한 하나님의 종들이 일어났잖아요.”

아프리카에서 복음을 전하며 사는 아들

 
홍두남 자매님의 하나뿐인 아들은 지금 가나에서 선교사로 일하고 있다. 시간을 훌쩍 건너뛰어, 아들 김성재 선교사가 선교학교에 간다고 했을 때 마음이 어떠했는지 물었다.
“못 가게 했어요. 엄마 같은 성도 만나면 골치 아프니까 가지 말고 직장 잡아서 복음 섬기며 살자고 했지요. 그런데 하나님이 그냥 두지 않으셨어요. 하나님이 가라고 하시는데, 어쩌겠어요. 잡을 수 없잖아요. 지금은 아들이 하나님의 은혜를 입어 잘 살고 있지요.”
“아프리카의 형편이 많이 어려운데, 혹시 전화해서 어려우니까 도와 달라고 하지는 않습니까?” 하고 물었다.
“선교 초기에 한 번 그랬어요. 그래서 제가 ‘아프리카에는 하나님이 없나? 한국에 계시는 우리 하나님께 물어보니까 아프리카까지는 갈 수 없다고 하더라. 한국 돌보기도 힘드시단다’ 그랬어요. 그 후로는 절대로 그런 소리 안 해요. 실제로, 제가 1천 금을 가지고 아들을 돕는다 한들 하나님이 좋아하시겠어요? 아들이 교회의 인도를 따라 잘 지내지만, 한 번씩 아들에게 이렇게 말해요. ‘너는 아무리 어렵다고 해도 옛날 박 목사님만큼은 안 어렵다. 네 마음 꺾으면 어려움이 아무 문제가 안 된다. 요새는 배가 너무 불러서 그렇다’ 하고요. 아들이 아프리카에서 복음을 전하면서 사는 게 참 감사하고 영광스럽지요.”

“홍 자매는 안 죽어”
하나님이 홍 자매님의 삶에 베푸신 많은 은혜들 가운데 한 가지만 이야기해 달라고 했다.
“제가 어려서부터 몸이 자주 아팠는데, 아들이 중학교 1학년 때 아주 많이 아팠어요. 몸의 중요한 부분들이 여기저기 안 좋아서 사경을 헤맸지요. 병원에서는 죽는다고 장례 준비를 하라고 했어요. 그런데 박 목사님이 오셔서 ‘홍 자매는 안 죽어’ 하셨어요. 그때 저는 ‘하나님, 내 아들이 중학교 졸업할 때까지만 내가 살면 이 아이가 어딜 가도 밥은 먹고 살지 않겠습니까? 그러니까 그때까지만 살려 주세요’ 했는데, 이제는 손자가 곧 중학교에 가네요. 목사님 말씀대로 안 죽었어요.
1996년에 하나님이 마가복음 5장에 나오는 혈루증에 걸렸다가 나은 여자 이야기를 내 마음에 주셨어요. 많이 들었던 말씀이지요. 내 영혼을 사랑하시는 하나님께서 내 영혼을 담는 육신도 다 낫게 하셨다는 마음이 들어왔어요. 수 년간 먹던 약을 다 버렸지요. 그 후 병이 악화되었어요. 마음에서 ‘하나님, 왜 내게 말씀을 주셨지요? 난 마가복음 5장 말씀을 믿습니다. 오늘 주님 앞에 가도 할 말이 있습니다’ 하고 병원에 가지 않았어요. 그 후로 몸이 차츰 좋아졌어요. 6년 동안 앓았던 당뇨가 깨끗하게 나아서 지금은 당뇨가 없어요. 갑상선도, 목에 혹이 있어서 물도 못 마실 정도였는데 다 나았고요.
그 후, 2001년에 남편이 교통사고로 주님 품으로 간 뒤 놀라서 심장이 많이 상했어요. 아직 심장 약은 먹고 있어요. 심장이 약해서 아들이 선교하는 아프리카에 한 번도 못 가보았어요. 그래도 목사님의 기도 속에서 행복하게 살고 있어요.”

‘하나님이 여기서도 나를 인도하셨는데…’
“살다 보면 어떤 일로 마음이 울적해질 때가 있어요. 그러면 구원받고 신앙생활했던 그때를 생각해 봐요. 당시를 생각하면 지금 문제라고 여겨지는 것들이 아무 문제가 안 되지요. 당시의 삶에 비춰보면 지금은 제가 타락한 사람 같아요. 복음을 위한 순수한 마음을 많이 잃었어요.
파동 예배당이 ‘화신반점’이라는 중화요리집 2층에 있었는데, 지금도 화신반점이 있어요. 마음이 아주 힘들 때면 버스를 타고 거길 한번 가봐요. ‘그래, 하나님이 여기서도 나를 인도하셨는데…. 목사님이 여기서 선교학교를 시작하셨는데….’ 하는 마음이 일어나 어둡던 마음을 밀어내요.”

 
세월이 흘러 교회가 많이 성장했다. 하지만 삶이 좋아진 까닭인지 순수한 마음은 옛날에 비해 많이 잃어버린 모양이다. 그래서 오래 전에 구원받은 성도들은 순수하게 복음을 위해서 살았던 날들이 그립고, 그때로 돌아가고 싶은 마음이 드는 모양이다.
“한번씩 그때를 돌아보면 그립죠.”
홍 자매님에게 ‘오래 전에 함께 신앙생활을 했던 김동성 목사님이 담임 목사로 가까이에 계셔서 좋겠다’고 하자, 자매님은 잠깐 말을 않더니 그동안 이야기해온 어투와 전혀 다르게 “좋아요” 하고 아이처럼 대답했다(우리는 서로 한참 웃었다). 자매님은 “다른 사람은 어떤지 몰라도 나는 좋아요” 하고 덧붙였다.

소망이라면…
마지막으로, 어떤 소망을 가지고 있는지 물었다.
“소망이라면, 아들이 아프리카에 있잖아요. 거기서 마음 높이지 않고, 항상 마음을 비우고 하나님의 종과 마음을 함께해서 복음을 위해 살기를 바라는 것뿐이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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