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사(38) - 마르틴 루터 Ⅱ- 구원에 이르기 전까지의 삶
교회사(38) - 마르틴 루터 Ⅱ- 구원에 이르기 전까지의 삶
  • 이한규 (기쁜소식동서울교회 목사)
  • 승인 2014.05.08 19: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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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사 (38회)

 

 

사제가 되어
루터는 1507년 2월 27일에 부제(副祭, deacon) 서품을, 4월 4일에 신부 서품을 받았다. 그의 나이 24세 때였다. 서품을 받을 때 루터는 서약문을 읽고, “서약문에 굉장히 감동하여 가슴이 벅차올랐다”고 술회했다. 신부가 된 사람에게는 성만찬을 집전할 수 있는 권한이 주어졌다. 첫 미사 때 성만찬을 집례하는 순간이 서품을 갓 받은 신부에게는 가장 긴장되면서도 가장 축복되고 영예로운 순간이었다.
루터는 1507년 5월 2일에 첫 미사를 집전했다. 다른 신부들, 수도승들, 그리고 친척들이 빙 둘러서 있었다. 루터의 아버지 한스 루터도, 아들이 법률가보다는 신부가 되는 것이 만족스럽지는 않았지만, 아들을 축하하기 위해 20여 필의 말을 몰고 축하사절단을 이끌고 에르푸르트로 왔다.
루터가 동료들과 손님들이 어울려서 담소하고 있는 연회 식탁으로 내려왔을 때, 아버지에게서 무슨 위로의 말을 들을까 하여 입을 열었다. “아버지, 제가 신부가 되는 것을 왜 그렇게 말리셨습니까? 지금 저는 이 생활이 참 평안하고 경건합니다.” 그러자 옆에 앉아 있던 아버지 한스가 버럭 화를 내면서 많은 손님들 앞에서 루터에게 호통을 쳤다. “너, 배워먹은 학자 놈아! 그래, 네 부모를 공경하라는 성구(聖句)도 못 읽어보았느냐? 네 에미 애비가 이렇게 늙도록 밥벌이에 시달리는 것이 누구 때문이냐?” 루터는 아버지에게 조용히 말했다. “그러나 아버지, 제가 세상에 남아 있는 것보다 기도를 통해서 더 많은 혜택을 아버지께 드릴 수 있습니다.” 그러고는 천둥이 치던 날 자신이 하나님으로부터 부름을 받은 사람임을 아버지에게 일깨워 주었다. 노년의 한스는 “제발 그것이 마귀의 허깨비가 아니었길 바란다”고 타이르듯 말했다.
스승 요한 슈타우피츠(John Staupitz)
루터가 수도 생활에 최선을 다하고 고해성사를 드려도 마음에 평화를 누리지 못하고 번민할 때, 루터에게 영적 안내자의 역할을 한 사람은 요한 슈타우피츠(John Staupitz)였다. 그는 수도원의 원장이자 비텐베르크대학의 교수였으며, 어거스틴 수도회의 독일 전역을 관장하는 총 주교의 대리였다.
슈타우피츠는 루터에게 가장 중요한 영향을 끼쳤던 인물로, 그는 루터가 영적인 면과 학문적인 면에서 신학자로 성장할 수 있는 길을 열어 주었다. 그는 루터를 뛰어난 지성과 종교적 열심을 가진 유능한 젊은이로 여겼고, 비텐베르크대학의 교수가 되도록 선제후(選帝侯) 프리드리히에게 천거했다. 비텐베르크대학은 1502년에 설립된 신설 대학으로, 당시에는 소규모의 대학이었다.
루터가 고뇌로 시련을 겪고 있을 때, 종종 자신이 고뇌하는 문제들을 슈타우피츠에게 물었다. 하루는 슈타우피츠가 루터가 있던 에르푸르트 수도원에 시찰을 왔다가, 비참한 자기 영혼의 모습을 인해 괴로워하며 구원의 길을 찾고 있던 루터를 만났다. 그는 루터를 따뜻하게 위로하고, ‘노력이나 맹세를 통해서 하나님 앞에 서려는 것은 잘못이며, 하나님의 은혜와 긍휼로 구원받는다’는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성령께서 자네의 죄악들이 용서되었다고 말씀하시네. 이것은 성령이 자네 마음에 주시는 증거일세. 왜냐하면 인간이 값없이 믿음으로 의롭게 된다는 것은 바로 사도 바울의 교리이니 말일세.”
그는 루터에게 이렇게 권고했다.
“자네는 죄가 없을 것이네. 진실로 죄를 가지고 있지 않네.”
“자네는 어리석은 사람이네. 하나님이 자네에게 분노를 품으신 것이 아니라, 오히려 자네가 하나님을 향하여 분을 품고 있네.”
슈타우피츠는 루터에게 죄에서 그리스도에게 이르는 길을 이야기했다. 율법에서 십자가로, 행위에서 믿음으로, 스콜라 철학에서 성경 연구로 가는 길을 가르쳤다. 그로 말미암아 후에 루터가 복음의 빛을 보게 되는 데에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무엇보다 중요한 가르침은 성경 연구에 대하여 적극적으로 권면한 것이었다. 후일에 루터는 성경 연구를 통하여 모든 문제에 대한 답을 얻을 수 있었던 것이다. 슈타우피츠는 루터에게 성경을 읽는 일에 몰두하라고 권하며, 루터가 세상에서 가장 갖고 싶어했던 성경을 선물해 주었다. 그 후로도 루터는 슈타우피츠와의 서신 교류를 통해 많은 도움을 받았다. 루터는 후에 고백하기를 “내가 슈타우피츠를 만나지 못했다면 나는 지옥에 빠졌을 것이다”라고 했다.

자네의 죄를 용서받았다고 믿고 있는가?
1508년 10월, 슈타우피츠는 루터를 비텐베르크로 보냈다. 루터에게 신학을 공부하도록 권했던 것이다. 그러나 루터는 1509년 가을에 다시 에르푸르트로 돌아왔다. 그때부터 루터는 본격적으로 신학 공부에 몰두했다. 그는 헬라어를 열심히 공부했다. 이때 접한 학문의 분야들이 루터가 신학적 기초를 이루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으며, 루터가 가진 신학의 배경이 되었다.
이 당시 루터의 마음을 사로잡아 그가 열심히 연구했던 사람 가운데 하나는 어거스틴이었다. 루터는 어거스틴의 저술들을 깊이 있게 공부했다. 고트족(族)의 침입에 의해 로마가 멸망하고 반달족(族)이 북아프리카를 정복한 것 등을 경험하면서 ‘교회의 존립을 위한 신학적인 과정들’을 설명한 어거스틴에게서 루터는 크게 감명을 받았다. 특별히 두 도성(都城)에 관한 이야기, 영원한 하나님의 도성과 세속적인 지상의 도성에 관한 이야기는 루터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하루는 어느 늙은 신부가 루터를 찾아와서 믿음에 대해 이야기해 주었다. 사도신경을 형식적으로 암송하며 그 내용을 이해하고 있는 것을 믿음으로 여기던 루터에게 그 신부는 일반적인 믿음이 아니라 개인적인 믿음에 대해 이야기했다.
“다윗이 죄를 용서받았다거나 베드로만 그의 죄를 용서받았다는 것이 아니라, 자네의 죄를 용서받았음을 믿고 있는가?”
이런 이야기들이 나중에 루터가 복음의 진리를 깨닫는 데 기초가 되었다.

마음에 그리던 거룩한 도시 로마의 타락상을 보고…
루터는 1510년 11월에서 1511년 4월까지 로마 방문 길에 올랐다. 그때 그의 나이 27세였다. 방문의 이유는, 그가 몸담고 있던 수도원에서 ‘엄격한 수도원의 규칙을 계속 지켜야 하는가, 아니면 규칙들을 완화시켜도 되는가?’에 대한 논쟁이 생겨, 그 문제를 로마 교황청과 의논하기 위해 대표로 파견되었던 것이다. 그는 다른 동료 한 명과 함께 로마로 향했다. 이 여행은 루터의 일생에서 가장 긴 여행이었다.
루터의 마음은 거룩한 도시 로마의 풍성한 영적 축복에 참여할 수 있으리라는 부푼 기대와 열정으로 가득 차 있었다. 루터는 순례자의 한 사람으로서 여러 도시들을 거쳐 마침내 로마에 도착했다. 도착하자마자 그는 땅에 엎드려 “성스러운 순교자들의 피가 뿌려진 진실로 거룩한 도시 로마여!” 하고 인사했다. 루터는 로마에 약 4주 동안 머물렀다.
루터에게 로마는 어떤 도시였는가? 칼릭스투스(Calixtus)성당 지하실에는 40명이 넘는 교황들의 유해와 7만 6천여 명의 순교자들이 묻혀 있다고 했다. 모세가 보았다는 떨기나무의 한 가지가 있는가 하면, 헤롯 왕 시대에 베들레헴에서 죽었다는 갓난아기들의 뼈가 3백 개나 있다고 했다. 성 베로니카의 손수건에 그려진 그리스도의 초상화가 있는 곳인가 하면, 사도 바울이 옥중에서 찼다는 쇠고랑과 도미티안 황제가 사도 요한의 머리를 자를 때 사용했다는 가위가 보관되어 있다는 곳이 로마였다. 그뿐 아니라 가룟 유다가 예수님을 팔고서 받은 동전들 가운데 하나를 가지고 있다는 교회도 있었다. 당시 로마카톨릭교회는 그러한 성물(聖物)들이 사람들에게 면죄를 베풀 수 있다고 가르쳤다.
무엇보다도 라테란성당 앞에는 28개의 거룩한 계단이 있었다. ‘빌라도의 계단’이라고 불리는 그 계단은 예수님께서 심문을 받기 위해 끌려나오실 때 빌라도가 서 있었다는 곳이다. 로마카톨릭 지도자들은 그 계단이 기적적으로 예루살렘에서 로마로 옮겨져 왔으며, 누구든지 맨 무릎으로 그 계단을 오르면 죄 사함을 받는다고 주장했다.
루터는 주기도문을 외우면서 그 계단을 올라갔다. 그렇게 함으로써 그는 할아버지의 영혼을 구원하기 원했다. 그러나 그가 계단 꼭대기까지 갔을 때 ‘이것이 진실인지 누가 아는가?’ 하는 생각이 떠올랐다고 루터는 후에 이야기한다.
그래도 루터에게 로마는 여전히 영광스러운 곳이었다.
‘이처럼 영적이고 성스러우며, 죄 사함을 베풀 수 있는 특권을 가진 도시가 이 지상에 로마말고 또 어디에 있단 말인가!’
루터는 로마의 이곳저곳을 다니면서 많은 고대 로마의 유적들을 보았다. 그의 눈에는 그러한 유적들이 이교(異敎)에 대한 하나님 심판의 증거로 보였다.
루터는 로마에서 공무를 마친 후, 성자(聖者)의 공로를 힘입어 자기 영혼을 구원하는 일에 모든 시간과 힘을 기울였다. 매일 성당에 가서 기도했고, 카타콤과 유적들을 방문했다. 그러나 그의 영혼은 만족할 수 없었다. 오히려 루터는 로마에서 교회와 성직자들의 타락상을 직접 목격했다. 거리에는 온갖 쓰레기가 난무했고, 성직자들에게서는 경건한 모습을 찾아볼 수 없었다.
1511년 초, 루터는 실망스런 마음으로 독일로 돌아왔다. 그는 아무 소득도 없이 로마의 타락상만 목격한 채 발걸음을 되돌렸던 것이다. 돌아오는 길에 루터는 생각이 달라져서 “지옥이 있다면 로마가 그 위에 세워져 있다”고 서슴없이 말했다.

비텐베르크대학의 성서학 교수가 되어
에르푸르트로 돌아온 루터는 스승 슈타우피츠의 개혁적인 노선을 지지했다. 이러한 태도는 다른 동료들에게 경계의 대상이 되었고, 에르푸르트 수도원은 루터를 비텐베르크로 전출시켰다. 이때가 1511년 9월경이었다.
비텐베르크로 옮긴 루터는 슈타우피츠의 인도로, 1502년에 비텐베르크에 세워진 어거스틴파(派) 수도원에 거주했다. 그는 그곳에서 설교가로서의 활동을 시작했다. 슈타우피츠는 재능 있는 그의 제자에게 관심을 가졌고, 그의 내성적인 성격에 놀라 그로 하여금 계속 공부하여 박사 학위를 받고 교수 경력을 쌓도록 격려했다. 루터는 주로 건강이 좋지 않다는 핑계를 대면서 박사 학위 공부를 거절했다. 그러나 슈타우피츠의 권유는 집요해서 루터는 결국 1512년 10월 19일 비텐베르크 신학부에서 성서신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
슈타우피츠는 루터가 에르푸르트 수도원에서 자신을 지지해준 데 대한 고마움을 늘 잊지 않았다. 그는 루터를 비텐베르크 수도원의 부행정관(vice-general)으로 임명했고, 그 해에 비텐베르크대학의 성서학 교수로 임명했다. 그때 루터의 나이 29세였다. 학생들에게 성경을 강해하는 일은 루터의 모든 재주와 에너지를 필요로 하는 과업이었다. 말년에 질병과 고령으로 강의를 포기할 때까지, 루터는 자연스럽게 이야기하는 형식으로 이 강의를 계속했다.
루터가 강의를 시작했을 당시의 비텐베르크대학은 개교한 지 7년이 조금 넘었으며, 캠퍼스도 없었다. 도시의 여기저기에 흩어져 있는 몇 개의 빌딩들을 대학 건물들로 사용했고, 학생도 몇 백 명 가량이었다. 루터는 1512년 10월 22일부터 주님 품으로 갈 때까지 그곳에서 교수로 재직했다. 그는 대학 동쪽에 위치한 어거스틴파 수도원의 작은 연구실에서 연구하고 숙식했다. 바로 이곳에서 루터는 훗날 자신의 영혼에 관하여 심각하게 고민하고 갈등하면서 로마서를 주해
(註解)하고 묵상하다가 죄 사함으로 말미암는 구원의 복음을 깨닫는, 소위 ‘탑 속의 경험(Turmerlebnis)’을 한다.
루터는 수도원의 삶에서 학식과 능력을 빠르게 인정받기 시작했고, 수도회와 대학에서 중책을 맡았다. 그는 1512년에 비텐베르크대학에서 신학박사가 되었고, 1513년부터 성서학 교수가 되어 시편, 로마서, 갈라디아서, 히브리서 등의 주석 강의를 했다. 1515년에는 수도원의 연구 책임자가 되었고, 동시에 11개의 수도원을 관리하는 교구장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