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사(41) - 프로테스탄트가 승리하기까지
교회사(41) - 프로테스탄트가 승리하기까지
  • 이한규 (기쁜소식동서울교회 목사)
  • 승인 2014.08.13 16: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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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사(41회)

 


교황청의 압박과 루터의 저항
루터의 95개 조항이 소개되자, ‘로마교황청이 면죄부라는 이름으로 독일 교회를 착취하고 있다’고 생각하던 독일인들이 루터의 항의문에 동조하여 로마교황청에 반대하는 운동이 확산되어 갔다. 반대로 루터의 강력한 대적자도 나타났다. 대표적인 인물이 잉골슈타트대학의 신학교수이며 한때 루터의 친구였던 논적論敵 에크Johann Eck였다. 그는 루터의 95개조가 발표되자 ‘날카로운 기둥들Obelisci’이라는 논문을 써서 루터를 이단으로 기소했다. 1518년 초에는 대주교 알브레흐트와 도미니칸수도회가 루터를 로마에 정식으로 고소했다.
교황은 루터를 로마로 소환했으나 루터는 불응했다. 교황은 추기경 카예탄Cardinal Cajetan을 시켜 루터에게 그의 주장을 철회하도록 강요했지만, 루터는 이 역시 거부했다. 이에 카예탄과 로마교회는 루터를 체포하려고 했는데, 이를 안 작센 지방의 제후 프리드리히가 먼저 루터를 피신시켰다. 그는 독일(신성로마제국) 황제를 선출하는 권한을 가진 선제후選帝侯로 교황청에도 영향력이 컸으며, 자신이 설립한 비텐베르크대학의 교수인 루터를 보호하려고 했다.

 

라이프치히 논쟁
루터는 복음에 대한 믿음을 어디서나 굽히지 않고 분명히 밝히고 주장했다. 그는 복음의 진리를 천명하기 위하여 우선 글로 카톨릭교회와 싸우기 시작했다.
최초의 논쟁은 1519년 7월 4일에서 14일까지 라이프치히Leipzig에서 열렸다. 라이프치히 논쟁은 칼슈타트Andreas Carlstadt가 에크에 반대하여 성경이 전 교회의 권위보다 우선한다고 주장하자, 에크가 공개토론을 제안하여 시작되었다. 로마교회 측에서는 에크를 비롯한 잉골슈타트Ingolstadt대학의 교수들이 참석했고, 루터 측에서는 루터와 칼슈타트와 멜랑히톤 등 비텐베르크대학 교수들이 참석했다.
한 증인은 당시 논쟁자들의 모습을 이렇게 묘사했다.
“루터는 중간 정도의 키에 걱정과 연구로 몸이 야위어 살갗 위로 드러난 뼈를 셀 수 있을 정도였다. 그러나 그는 힘이 넘쳤고, 가슴을 파고드는 힘찬 목소리를 지니고 있었다. 그는 학문이 풍부했고, 성경을 손끝에 잡고 마음대로 구사했다. 그는 다정하고 친절했으며 완고하거나 오만하지 않았다. 에크는 가슴팍이 벌어진 육중한 몸과 독일어 악센트의 힘찬 목소리를 소유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의 목소리는 분명하지 못했고 거칠었다. 그의 두 눈과 입과 얼굴 전체의 모습은 신학자라기보다 푸주한butcher을 연상하게 했다.”
초기 논쟁은 에크와 칼슈타트가 벌였고, 후반에는 루터가 논쟁을 주도했다. 루터와 에크의 논쟁 주제는 크게 세 가지였다.
첫째는 교황의 권위에 관한 것이었다. 에크는 교황의 권위가 하나님이 주신 것이라고 주장했지만, 루터는 그것이 인간의 전통에 근거한 것이며 교황도 인간이기 때문에 많은 오류가 있다고 주장했다. 루터는, 교황의 우위성이 초대교회 때부터 1,100년 동안 주장되지 않다가 400년 전부터 주장되기 시작했으며, 비성경적임을 지적했다. 그는 오직 성경만이 교회의 교리와 규범이 된다고 이야기하며, 성경에 따라 교회를 개혁할 것을 주장했다.
이에 에크는 루터로 하여금 위클리프와 후스의 입장에 동의함을 시인하도록 유도했다. 에크는 루터가 주장하는 사상이 이단으로 정죄된 위클리프와 보헤미아의 개혁자 후스의 사상과 일맥상통한다고 했다. 라이프치히는 보헤미아에 대해 극심한 반감을 가지고 있던 독일 지방이어서 그곳에서 논쟁을 갖게 된 것은 루터에게 크게 불리했다. 하지만 루터는 위클리프나 후스가 이단적인 사상을 가진 것이 아니라, 개혁자들을 정죄한 교회 회의가 잘못을 범했다고 비판했다. 에크는 “이것은 보헤미아의 병균이다”라고 한탄했다.
둘째로, 연옥에 관한 논쟁이 있었다. 에크는 연옥이 마카비2서 12장 45절에 나오므로 연옥 교리가 성경적이라고 주장했으나, 루터는 마카비서는 외경일 뿐 성경이 아니라고 하였다. 외경의 교훈은 신적인 권위가 없으므로 신뢰할 수 없고, 그러한 외경에 근거한 연옥 교리는 잘못된 것이라고 하였다.
셋째로, 면죄부와 고해성사가 다루어졌다. 에크는 면죄부와 고해성사가 교회 전통에 근거한 것이므로 교회가 따를 수 있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이에 루터는 교회의 전통이 인간의 생각에서 비롯된 것이므로 잘못될 수 있고, 오직 성경만이 무오하며 면죄부와 고해성사는 성경에 배치되는 것이라고 하였다. 루터는 보속補贖의 개념을 제거했다. 사죄를 얻기 위해 필요한 것은 오직 그리스도께서 십자가 위에서 완성하신 대속代贖의 공로를 믿는 믿음뿐이라고 하였다.
루터는 라이프치히 논쟁에서 “나는 내가 믿는 진리를 피 흘려 죽기까지 변호하기로 작정했다. 나는 … 진리만을 고백하겠다”고 하며, 오직 성경을 주장하고 에크의 교회 전통 사상을 비판함으로써 교황뿐 아니라 공의회의 권위마저 부인하는 사람으로 드러났다.
당시 독일에서는 막스밀리안 황제가 죽음을 앞두고 있어서 황제 선출 문제가 대두되었다. 교황 레오 10세는 이탈리아의 영주로서, 스페인 황제였던 카를 5세나 프랑스 황제였던 프랑수아 1세가 나서는 것을 상당히 불편하게 생각했고, 차라리 프리드리히가 황제로 선출되기를 바랐다. 그 때문에 교황은 프리드리히가 보호하는 루터를 뜻대로 처리할 수 없었다.

교황청의 최후통첩을 불태워버린 루터
라이프치히 논쟁은 루터에 대한 기대도 증대시키고, 그에 대한 공격도 가속화시켰다. 에크의 보고서를 본 교황은 1520년 6월 15일에 발표한 교서에서, 60일 간의 말미를 주며 이 기간 안에 루터가 뉘우치고 자신의 주장을 철회하지 않으면 그와 동료들을 모두 파문할 것이라 하였다. 교서에는 루터의 저작著作에 나오는 41개 발언들을 이단적이고 위법적이며 거짓이라고 정죄하고, 루터의 모든 저서를 불태울 것을 명령했다.
레오 10세가 발부한 교서는 에크와 알렉산더에 의해 1520년 12월 독일에 도착했다. 그러나 독일 정부는 교서 공포를 거절했고, 독일 대부분의 지역에서도 그에 대해 미온적이거나 적대적이었다. 결국 교황의 교서는 에크와 알렉산더를 통하여 루터에게 전해졌다. 당시에 파문은 사형 선고와 같았다. 파문 당하면 이단자요 반역자로 처형되고, 저서들도 모두 불태워지기에 교황청은 루터가 순응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루터는 1520년 12월 10일에 교황청의 최후 통첩 교서를 많은 교회 법전들과 함께 시민들과 학생들과 동료 교수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불태워버렸다. 비텐베르크 시市 당국은 이를 묵인했다. 이에 분노한 교황청은 1521년 1월 3일 루터의 파문을 공포했다.

카를 5세가 소집한 보름스Worms회의
1519년에 막스밀리안 황제가 죽고 그의 손자 카를 5세가 신성로마제국의 황제로 선출되었다. 새 황제는 독일의 통치를 조정하고, 이탈리아 지배를 위해 벌어질 프랑스와의 싸움을 준비하기 위하여 처음으로 1521년 1월 27일 보름스Worms국회를 소집했다. 회의를 앞두고 교황청에서는 다른 사무적인 일도 많았지만 루터 문제를 가장 먼저 해결해야 한다고 생각했기에 황제를 설득했다. 교황의 사절인 알렉산더는 교황이 이미 루터에게 파문 교서를 내렸으니 즉각적인 정죄와 처형을 실시할 것을 요구했다.
카를 황제는 망설였다. 루터는 이미 대중적인 지지를 얻고 있었고, 그를 보호하는 프리드리히는 큰 세력을 가졌으며, 몇몇 귀족들까지 합세하여 ‘루터가 자신의 의견을 충분히 설명할 기회가 없었으니 의회에서 진술할 기회를 주어야 한다’고 주장했기 때문이다. 결국 황제는 독일 국민의 감정을 상하지 않게 하고, 프랑스와의 싸움에서 교황의 도움도 받고자 루터에게 4월 17일에 보름스국회에 참석하라고 하였다.
4월 16일, 보름스 거리에는 많은 사람들이 나와서 루터를 구경하려고 했다. 역사적인 사건이었던 만큼 집들의 창문과 지붕까지 구경꾼들로 가득 찼다. 4월 17일에도 군중이 몰려들어 루터의 지지자들이 회의장 안으로 들어가기도 어려울 지경이었다.
에크는 루터의 저술들을 쌓아놓고 루터에게 주장을 철회할 의사가 없는지 물었다. 이에 루터는 자신의 저술들을 검토하고 하나님의 말씀에 어긋나지 않게 대답하기 위해 시간을 달라고 요청했다. 회의는 다음날로 연기되었고, 루터는 밤새워 기도했다.
“오, 나의 하나님이시여! 나와 함께하시며 세상의 모든 원수들로부터 나를 지켜주소서. 오직 주님만이 나를 보호하실 수 있나이다. 나에게는 아무런 힘이 없습니다. 이번 일은 나의 명예가 아니라 하나님의 명예가 달려 있는 일입니다. 나는 헛된 인간을 의지하지 않고 주님을 의지합니다….”
그는 다음날 황제와 의회 앞에서 심금을 울리는 유명한 말을 남겼다.
“내 양심은 하나님의 말씀에 사로잡힌 바 되었고, 내가 인용한 성경 말씀에 순종하고 있습니다. 양심에 역행하는 것은 안전하지도 않고 위험스러운 일입니다. 나는 여기에 서 있습니다. 나는 달리 어찌할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이여, 나를 도우소서!”
그는 독일 최고의 권위 앞에서 자신이 확신하고 있는 진리에 대하여 역사적인 선언을 하였다. 하나님의 종다운 믿음의 결단이었다.
카를 5세는 결국 로마교황청의 요구를 따라 루터를 정죄하는 황제의 칙령에 서명하고 만다. 이제 루터의 생명을 빼앗는다 해도 법적으로 문제가 되지 않는 상황이 된 것이다. 그의 생명은 바람 앞의 등불과 같았다.

프리드리히 심복들의 납치극
보름스를 떠난 루터는 황급히 마차를 달려 비텐베르크로 가고자 했다. 쉴 새 없이 말을 몰아 아이젠나흐 마을 가까이에 있는 숲이 빽빽하게 우거진 골짜기에 당도해, 그곳까지 무사히 온 것에 대해 루터는 안도의 숨을 쉬었다. 그 마을은 루터가 대학에 입학할 때까지 4년 동안 고등학교 과정을 공부했던 곳으로, 후일에 루터가 그의 생애에서 가장 행복한 시간을 보낸 곳이기도 했다. 그런데 갑자기 괴한들이 루터가 탄 마차를 에워쌌다. 그들은 루터를 마차에서 끌어내려 눈을 가리고 말에 태운 후 숲속으로 사라졌다.
괴한들은 자정이 다 되어 12㎞ 정도 떨어진 성채에 다다랐다. 프리드리히의 영지 아이젠나흐 근처의 산 정상에 세워진 바르트부르크Wartburg 성채였다. 프리드리히가 루터를 극비리에 안전한 장소로 피신시키라고 심복들을 시켜 납치극을 꾸몄던 것이다. 그리고 루터가 죽었다는 거짓 소문을 퍼뜨렸다. 프리드리히는 루터가 어려움에 처할 때마다 여러 번 보호해 주었지만 납치극은 상당한 위험을 감수해야 하는 일이었다. 누구도 루터를 보호해 주어서는 안 된다는 황제의 칙령이 내려진 상태였기 때문이다.
비텐베르크에 있던 루터의 친지들은 루터의 행방과 생사가 불확실해 불안한 가운데 있다가 극비로 전달된 서신을 받아 보고 깜짝 놀란다. 루터의 친필 편지였기 때문이다. 발신지는 “나의 밧모섬으로부터”라고 되어 있었다. 루터는 자신의 은신처를 밧모섬이라고 표현했던 것이다. 루터가 살아 있다는 사실을 확인한 친지들은 기쁨의 함성을 질렀다.

신약 성경을 독일어로 번역하다
바르트부르크 성은 루터에게 안성맞춤의 피신처였다. 가파른 산 위에 세워진 난공불락의 요새인 데에다 프리드리히의 영지에 있었기 때문에 루터는 안심하고 지낼 수 있었다. 그래도 루터가 그곳에 은신하고 있다는 사실은 비밀이었다. 루터 역시 머리와 수염을 길게 기르고 융거 게오르그라는 이름의 귀공자로 행세했다.
루터의 생애를 살펴보면, 위기의 시간에 오히려 왕성한 저술 활동을 했다. 그가 바르트부르크 성에서 지낸 10개월 남짓의 기간에 그는 12편의 책과 논문을 저술했다. 무엇보다 큰 업적은 신약 성경을 독일어로 번역한 일이었다. 루터 당시 성경은 모든 사람이 읽을 수 있는 책이 아니었다. 성직자들의 전유물로, 일반 신도들은 볼 수 없는 책이었다. 루터도 대학을 졸업하고 수도원에 들어갈 때까지 성경을 읽어본 일이 없었다고 술회했다. 루터는 ‘죄 사함을 받고 거듭난 모든 그리스도인은 하나님 앞에서 모두 제사장이며, 모든 사람은 누구나 성경을 읽을 수 있다’고 주장했다.
독일 사람 누구나 성경을 읽기 위해서는 독일어 성경이 필요했다. 루터는 피신 기간을 신약 성경을 독일어로 번역하는 기회로 삼았다. 그는 성경 말씀 한 자 한 자를 심사숙고하며 세심하게 번역했고, 번역 작업에 집중하여 12주 만에 초고 번역을 마쳤다. 생동감 넘치는 유려한 문체로 오늘날까지 독일인들의 사랑을 받고 있는 루터가 번역한 성경은 그렇게 만들어졌다. 고난의 시간에 하나님은 루터에게 놀라운 지혜와 능력을 부어주신 것이다. 그 후 많은 사람들이 성경을 읽고 신앙에 큰 관심을 갖게 되었고, 진리와 거짓을 분별할 수 있게 되었다. 루터를 따르는 사람들은 점점 늘어났고, 로마카톨릭의 낡은 체제는 무너지기 시작했다.

항의하는 자들, 프로테스탄트
카를 5세는 16세에 스페인 왕이 되었고, 신성로마제국의 황제 자리를 놓고 프랑스의 프랑소와 1세와 대결하여 19세에 신성로마제국의 황제가 되었다. 그 시기는 종교개혁이라는 역사의 거대한 지각 변동이 일어나고 있던 때였다. 그는 개혁의 시대를 이끌고 나갈 만한 통찰력이나 리더십이 없어 루터 지지파와 카톨릭교회 지지파 사이에서 우왕좌왕하다가, 황제의 자리에 대한 중압감을 이기지 못하고 훗날 스스로 퇴위했다. 그 후 수도원에서 은둔생활을 하다가 생을 마쳤다.
카를 5세가 보름스회의에서 루터를 범죄자로 선포했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루터의 지지 세력은 늘어만 갔다. 많은 제후들도 루터의 강력한 지지자가 되었다. 독실한 카톨릭 신자였던 카를 5세에게는 이것이 큰 문제였고, 대외적으로도 긴박한 현안들이 많았다. 항상 숙적 관계에 있던 프랑스 문제, 유럽의 문턱까지 밀고 들어오는 오스만제국의 위협, 교황청의 압력 등 모든 일들이 부담스럽고 골치 아픈 문제들이었다.
1526년, 카를 5세는 하이델베르크 근처의 고도古都 스파이에르Speyer에서 제국회의를 소집한다. 당시의 모든 상황은 그에게 불리하게 돌아가고 있었다. 오스만제국의 위협은 잠을 설치게 했고, 교황의 지원을 받은 프랑스의 압박 또한 그를 불안하게 만들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황제는 루터를 지지하는 독일 제후들의 협력과 지지가 절대적으로 필요했기에 그들의 요구를 수용할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교회 개혁에 관한 입장을 제후들의 판단과 재량에 맡겼다. 루터 지지파 제후들은 황제의 결정을 그들의 영지에서 루터파 교회를 세울 수 있다는 것으로 확대 해석했다. 그들은 마침내 승리했다고 생각했고, 기쁨의 함성을 질렀다.
그러나 승리에 도취하기에는 일렀다. 3년 후인 1529년에 스파이에르에서 다시 제국회의가 열렸고, 이때는 대외적 상황이 많이 호전되어 황제는 긴박한 상황에서는 벗어났다고 생각했다. 유약했던 황제는 이러한 상황 변화와 카톨릭 측의 압력을 이기지 못해 3년 전의 결정을 번복하고 말았다. 즉, 보름스 칙령을 부활시키고 친 카톨릭교회 정책으로 선회한 것이다.
돌변 상황에 루터 지지 제후들은 침묵할 수 없었다. 이들은 일치단결해 황제에게 거세게 항의했다. 이때부터 루터 지지파들은 ‘항의하는 자들’이라고 알려졌고, 그런 뜻으로 ‘프로테스탄트Protestant’로 불렸다. 시간이 흐르면서 이 말은 루터 지지파뿐 아니라 카톨릭교회와 대비된 개신교 전체를 뜻하는 말이 되었다.
루터 지지파들로 구성된 슈말칼텐동맹은 독일 내에서 황제에게 대항하는 강력한 세력으로 부상했다. 이들의 단합된 힘에 손을 들고 만 황제는, 1555년 아우크스부르크 종교회의에서 ‘제후의 영지 내에서는 제후의 종교를 따른다’는 데 합의했다. 루터를 지지하는 제후들은 누구의 간섭도 받지 않고 자유롭게 루터파 교회를 세울 수 있게 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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