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사(42) - 루터 주변의 사람들
교회사(42) - 루터 주변의 사람들
  • 이한규(기쁜소식동서울교회 목사)
  • 승인 2014.09.12 10: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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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사(42회)

 

 

에라스무스
루터가 반박문을 게시했을 때, 로마교황청의 부패를 잘 알고 있었던 에라스무스는 루터에게 “모든 일에는 때와 기한이 있는 법이니 당분간 잠잠히 있고 급진적인 행동을 하지 말라”고 권유했다. 그 당시 교황의 칙령을 무시하고 경고를 받아들이지 않으면 감옥으로 끌려가거나 화형을 당하는 사람들도 있었기 때문이다.
“그가 반박문을 게시했을 때 나는 그에게 더 이상 급진적인 행동을 하지 말라고 권유했습니다. … 온 세상은 의식적인 행사로 가득 차 있습니다. 추문을 일으키는 수도사들은 양심이 마비되어 있습니다. 신학은 궤변에 치우쳐 있습니다. 독단적인 주장을 하는 사람들은 한없이 경직되어 있고, 사제나 주교들이나 교황청 관리들의 부패상은 말로 다 할 수 없습니다. … 나는 서로 간에 일치점을 찾아 타협할 것을 권유했습니다. … 그러나 루터를 후원하는 사람들은 고집스럽게도 한 치도 양보하려고 들지 않습니다. … 루터는 병든 몸에다가 아주 독한 약을 투여한 것입니다. 오직 하나님께서 그것이 효험을 보도록 허락해 주시기를 바랄 따름입니다.”
다음 해에 에라스무스는 “나는 루터가 이 시대의 잘못을 고치라는 사명을 받은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오늘날 당한 모든 문제가 어디에서 파생되었는가? 사제들의 공개적이고 뻔뻔스런 부도덕성과 신학자들의 오만함, 그리고 수도사들의 포악한 태도에서가 아닌가?”라고 썼다.

필립 멜란히톤
루터의 주위에 있었던 많은 사람들 가운데 특별히 언급해야 할 첫 번째 사람은 멜란히톤이다. 그는 21세의 나이에 비텐베르크대학 그리스어 주임교수로 부임한 천재적인 학자였다. 그는 본래 신학에 관심이 있는 사람이 아니었지만 비텐베르크대학에 와서 루터를 만나고 루터의 영향을 받아, 종교개혁 때 루터의 충실한 동지가 되었다. 멜란히톤은 아들 같은 심정으로 루터를 존경했다. 그는 1518년 9월 주임교수 취임 연설에서 루터를 ‘불멸의 진리를 위해 선택된 종’, ‘하나님의 말씀과 생명을 부어 주는 성령을 선포하는 축복 받은 전도인’, ‘경건한 영혼들의 순수한 지도자’ 등으로 소개했다. 1520년 4월에는 “이 세상에 그보다 더 위대한 사람은 결코 없었다. 그와 나 자신을 분리시키느니 차라리 죽는 게 낫다”라고 하였다.
대석학이었던 멜란히톤은 루터가 신학을 정립하는 데 큰 도움을 주었고, 어려움에 처할 때마다 위로하고 격려했다. 루터가 성경을 독일어로 번역할 때에도 어학의 대가였던 그는 지원을 아끼지 않아, 루터성경이 오늘날까지 독일 사람들의 사랑을 받는 데 큰 역할을 했다. 루터 또한 멜란히톤의 학문을 존중하고, 종교개혁의 동역자로 존경했다. 그에 대하여 “나의 가장 소중한 필립”이라고 표현했다.
1529년, 멜란히톤이 쓴 <골로새서 주석> 서문에서 루터는 “나는 거칠고 전투적이다. 나는 사탄과 악한 영들과 싸우기 위해 태어났다. 나는 돌과 가시가 있는 거친 숲을 치워야 한다. 그러나 필립 선생은 부드럽고 조용하게 씨를 뿌리고, 기쁨으로 물을 주는 은사를 하나님께로부터 받았다”라고 칭찬했다. 루터가 창조적 개척자라면, 멜란히톤은 근면하고 심오한 학자였다. 그는 성직자가 되지 않았고, 설교 강단에 올라간 적도 없었다.
멜란히톤은 신학을 연구하고 가르쳤지만 자기 주장을 당당하게 나타내지는 못했다. 그는 1521~1522년까지 비텐베르크를 소란스럽게 만든 ‘츠비카우 예언자들Zwikaw Prophets’의 신비주의적 성령운동에 동조하기도 했다. 1530년에 있었던 ‘아우구스부르크 신앙고백’ 협상에서는 루터교의 주장을 고수하지 못하고 로마카톨릭과 타협했고, 슈말칼덴 전쟁 후에 있었던 종교적 회담에서도 우유부단한 행동을 보였다.
시드니 휴튼은 <기독교 교회사>에서 멜란히톤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멜란히톤은 루터의 요나단이 되어 주었다. 멜란히톤은 루터가 설명하고 선포한 진리에 견고한 확신을 가졌다. 두 사람은 평생 우정을 지켜 나갔다. 그러나 멜란히톤은 매우 조심성이 있는 사람이었으므로 루터와 같은 용기나 담대함은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가 루터에게 커다란 도움이 된 것은 깊은 학식을 갖추고 있었기 때문이다. … 놀라운 재능, 해박한 지식, 높은 학문성, 풍부한 교양 때문에 멜란히톤은 ‘독일의 스승’이라는 칭호를 받았다. 멜란히톤은 루터의 정열과 열심이 한도를 넘어 과격해지지 않고 지혜롭고 온건하게 발휘되도록 최선을 다하여 도왔다.”
루터가 이끈 종교개혁이 성공한 것은 루터 곁에 충성스런 동역자 멜란히톤이 있었기 때문이다. 오늘날 비텐베르크 시市 광장에는 루터와 멜란히톤의 동상이 나란히 서 있어, 종교개혁이 두 사람이 함께 이룬 대업이라는 사실을 상징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루카스 크라나흐
루터와 동시대에 비텐베르크에서 살았던 화가 루카스 크라나흐는 루터를 마음 깊이 존경해 루터의 초상화를 많이 남겼다. 그 까닭에 루터는 교회 역사상 위대한 하나님의 종들 가운데 가장 많은 초상화를 남긴 인물이 되었다. 크라나흐가 그린 루터의 초상화를 보면 루터가 건장한 모습으로 보이지만, 루터는 40대에 들어서면서부터 여러 병고에 시달렸다. 고질적인 위장병과 담석증으로 고생했으며 편두통도 있었다. 때로는 어지럼증이 심해 설교를 중단했던 적도 있었다.
그러한 육신의 고통 가운데서 루터가 초인적인 저술활동을 하며 종교개혁을 성공적으로 이끌었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닐 수가 없다. 그래서 그는 말년에 이렇게 고백했다. “나는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며 설교하고 글을 썼을 뿐 내가 한 일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모든 것은 하나님이 이루어 주신 것입니다.”

칼슈타트
루터가 바르트부르크 성에 숨어 있는 동안 비텐베르크에서는 비텐베르크대학 칼슈타트 교수의 지도 아래 과격한 개혁 운동이 진행되었다. 칼슈타트는 루터와 가까운 동료 교수로, 1511년에 비텐베르크대학 총장이 되었다. 1512년에는 루터에게 박사 학위를 수여한 선배이기도 했다. 그는 한때 로마에 머물며 로마카톨릭의 광범위한 부패를 접하고 믿음에 회의를 가지게 되었고, 1516년에는 151개 항목으로 교회를 비판하기도 했다. 그랬기에 루터를 중심으로 종교개혁이 시작되었을 때 전면에 나서 루터와 함께했다. 그런데 칼슈타트는 차츰 루터와 다른 신학적 입장을 취했다.
1520년에 칼슈타트가 ‘야고보서 강해’를 하며 행위를 강조하자 루터는 이를 비판했다. 1521년 12월, 루터가 바르트부르크 성에서 잠시 나와 비텐베르크 거리에 나타났을 때 개혁운동은 과격하게 변해 폭력까지 등장했다. 신부神父들이 조소를 당하고, 제단에서 머리칼이 잡힌 채 질질 끌려가기도 했다. 루터는 폭력을 인정할 수 없었다. 칼슈타트는 영과 육을 대립시키는 이원론에 근거하여 성자의 상像이나 예배 음악 등을 배척했다. 성상聖像은 눈을 자극하고 음악은 귀를 즐겁게 한다는 이유에서였다. 그는 물질적인 것을 경멸해 신부의 예복을 금하고, 농부들의 옷과 비슷한 검은 회색 옷을 입고 다녔다. 또한 그는 ‘모든 성도가 제사장’이라는 루터의 이야기를 극단적으로 해석하여 모두가 평등하다는 ‘사회적 평등주의Social equalitarianism’를 내세웠다. 그는 자신을 칼슈타트 박사라고 부르는 대신 안드레 형제라고 부르라 했고, 성직자는 사례비를 받지 말고 모든 신도같이 일해야 한다고 했다. 실제로 그는 농장을 얻어 일했다.
칼슈타트의 주장에 대해 루터는 1525년 그가 쓴 글에서 다음과 같이 비판했다.
“칼슈타트는 우리에게서 떠나 최악의 적이 되었다. 성상에 관해 말하면, 칼슈타트가 그것들을 부숴버릴 꿈을 꾸기 전에 나는 이미 ‘성상들을 우리 마음에서 제거해야 한다’고 말했다. 또한 모세가 금한 것은 하나님의 형상이지 십자가 상像이나 성자의 형상이 아니다. 그러나 칼슈타트파派들은 성상들을 베고, 치고, 부수고, 떠밀고, 깨뜨리고, 파괴시키라고 부르짖는다. 칼슈타트는 반항적이고, 살인적이고, 분파적인 기질을 지니고 있다. … 그들은 ‘나와 같이 고요히 기다리라. 그러면 하늘의 소리가 너에게 임할 것이다. 하나님이 너와 더불어 말씀하실 것이다’라고 말한다. … 나는 칼슈타트에게 경고하는데 그는 회개해야 한다.”
루터가 새 교회를 건설하느라 동분서주하는 동안 개혁 진영 안에서 극단적인 견해들이 형성되었고, 그에 대해 루터는 ‘교황청에서 불어온 어떠한 강풍도 이것만큼 큰 타격을 주지는 못했다’고 말했다.
1523년 5월, 칼슈타트는 올라뮌데Orlamünde 교회의 초청을 받아 그곳에 부임해 그곳을 급진적 개혁의 시범으로 삼고자 했다. 그는 교회 음악과 미술품들을 마음을 산란케 하는 것들이라 하여 제하고, 성직자의 결혼을 허용했으며, 유아세례를 인정하지 않았다.
1524년, 농민전쟁Peasant War이 발발하고 위험에 처한 칼슈타트는 루터에게 도움을 청하는 서신을 보낸다. 루터는 그를 받아들여 자신의 집에서 8주 동안 기거할 수 있게 해주었다. 칼슈타트는 자신의 의견을 철회한다는 선언을 했지만, 그의 뜻을 진정으로 굽히지는 않았다. 후에 칼슈타트는 삭소니를 떠나 스위스로 건너가 알트스태튼Altstaetten과 취리히에서 지방 장관직을 얻었다. 1534년에는 바젤Basel로 가서 히브리어 교수로 지내다 1541년에 병으로 숨을 거두었다.

루터의 아내 카타리나 폰 보라
1525년 6월 13일, 루터는 카타리나 폰 보라Katherine Von Bora와 결혼한다. 당시 그의 나이 42세였다. 신부는 16세 연하의 전직 수녀였다. 루터가 결혼하겠다고 했을 때 동료들은 모두 반대했다. 그들은 루터가 결혼하면 온 세상과 사탄이 웃을 것이며, 그동안 이루어 놓은 일을 물거품으로 만들 수 있다고 걱정했다.
카타리나는 1499년에 태어나, 10살 때 아버지가 재혼하면서 독일 님브센Nimbschen에 있는 수녀원에 들어갔고, 16세 때 서원하여 수녀의 길을 걸었다. 종교개혁의 불길이 번져갈 때 루터의 저서를 읽은 그녀는 ‘과연 진정한 신앙생활이 무엇인지’ 다시 생각하게 되었다. 결국 카타리나를 포함한 수녀 아홉 명은 자신들이 가는 길에 의혹을 가지고 루터와 상담을 나누었다. 루터는 ‘말할 것도 없이 수녀원을 벗어나는 것이 옳다’고 하며, 나름대로 그들을 도울 준비를 하였다. 카타리나는 1523년에 동료 수녀들과 함께 수도원을 탈출했다. 후에 루터는 그녀를 다른 사람에게 소개해 주었으나, 그녀는 루터와 결혼하기를 소망했다.
루터의 결혼은 독신생활을 크리스천의 이상理想으로 본 1,000년의 전통을 깨는 사건이었다. 루터는 통념에 굴하지 않았다. 루터는 자신이 결혼하려는 목적이 늙으신 아버지에게 손자를 안겨드리기 위해서, 또한 결혼을 머뭇거리는 사람들에게 자신이 설교한 것을 몸소 실천하여 본을 보이기 위해서라고 하였다.
“나는 내가 가르쳐 온 것을 실천으로 확증하고 싶었다. 복음에서부터 오는 그 커다란 빛에도 불구하고 소심한 이들을 많이 보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이 행동을 뜻하셨고, 또 일으키셨다. 나는 사랑에 빠졌다거나 욕정으로 불타는 것도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나 나는 내 아내를 사랑한다.” “나는 나의 결혼식으로 천사들을 웃게 하고, 악한 영들을 울게 했다.”
‘루터의 결혼으로 그의 아버지는 행복했을 것이고, 교황은 아주 화가 났을 것이며, 하늘의 천사들은 즐거워했을 것이고, 사탄은 통곡했을 것이다. 그의 결혼은 복음을 들은 루터의 확신에 찬 증거임이 틀림없다’는 말은 적절한 표현이었다.
루터와 카타리나의 결혼생활은 행복했다. 두 사람이 결혼하고 1년 정도 되었을 때, 루터는 “그녀는 나에게 상냥하고, 모든 부분에서 순종하며, 내가 바랐던 것 이상으로 예리하고 영특하여, 이제 나는 나의 가난을 대부호로 소문난 크레수스Krösus 왕의 부귀와도 바꿀 마음이 전혀 없다”라고 말했다. 그녀를 자신의 은사Carissima로 칭하기까지 했던 루터는 카타리나를 ‘내가 진실로 사랑하는 캐테(카타리나의 애칭, 캐테는 독일어로 ‘묶는 사슬’이라는 뜻을 가짐)’라고 불렀다. 루터는 바쁘게 살아가는 아내 카타리나가 영적으로 침체되지 않도록 따뜻한 조언과 교제를 아끼지 않았는데, 무엇보다도 성경을 규칙적으로 읽도록 권면했다. 카타리나는 주부의 일만 한 것이 아니라, 신학적인 대화에도 적극 참여했다. 성경을 많이 읽어서 루터로부터 “당신은 로마교황청의 누구보다도 성경을 많이 알고 있구려”라는 이야기를 들을 정도였다.
루터는 살림에는 전혀 신경을 쓰지 않았다. 그 일은 전적으로 카타리나의 몫이었다. 루터의 명성이 높아지는 만큼 많은 손님들과 적잖은 학생들이 수시로 루터의 집을 찾아왔는데, 겉보기에 나약한 카타리나는 그 모든 일을 지혜와 신앙으로 기꺼이 감당했다. 많은 식솔들 까닭에 루터 부부는 결혼하고 10여 년간 풍족하게 살지 못했지만, 카타리나는 큰 규모의 살림을 잘 감당했다.
카타리나에게도 걱정거리가 있었다. 루터의 건강 문제였다. 건장해 보이는 외모와 달리 루터는 지병이 많았다. 특히 담석증은 루터를 계속 괴롭혔다. 루터의 건강을 돌보는 일도 카타리나의 중요한 몫이었다. 루터가 글쓰기에 집중할 때에는 서재에서 식사도 거른 채 며칠씩 두문불출했기에, 남편의 건강을 걱정하는 아내로서 그것이 마음 편한 일은 아니었다.
루터는 아내에 대한 사랑을 잘 표현하지 않는 과묵한 사람이었지만, 평생 아내에 대한 아름답고 따뜻한 사랑을 마음속에 간직하고 살았다. 루터는 “만일 내가 아내를 잃는다면 비록 여왕이라 할지라도 나는 다른 여자와 다시 결혼하지 않으리라” 하고 말했다.
루터는 정숙하며 지혜로운 아내의 훌륭한 내조를 받으며 개혁 운동을 계속해 나갔다. 많은 사상적 대적들이 늘 곁에 있었던 루터에게 아내의 따뜻하고 예리한 조언은 정금같이 귀한 것이었다. 두 아이를 잃는 슬픔을 겪기도 했지만, 카타리나는 여섯 자녀의 어머니로서 자신에게 주어진 무겁고 힘겨운 역할을 위기의 시대에도 최선을 다해 감당했다. 그럼에도 그녀는 공개적으로 드러나지 않았는데, 그러한 삶은 루터의 여성관과 가정관에 일치하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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