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사(45) - 재침례파
교회사(45) - 재침례파
  • 이한규(기쁜소식동서울교회 목사)
  • 승인 2014.12.05 12: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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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사(45회)

 

 

보다 성경적인 종교개혁을 추구했던 사람들
16세기에 루터와 츠빙글리는 중세 카톨릭교회의 오류를 개혁하고자 했다. 그들이 진행한 개혁의 근거는 성경이었다. 종교개혁이라는 거대한 역사적 지각 변동으로, 오랜 세월 동안 신성불가침한 것으로 여겨졌던 많은 체제들이 붕괴되었다. 그런데 이 과정에서 루터·츠빙글리·칼빈 등의 개혁자들과 달리, 보다 급진적인 개혁을 추진한 이들이 있었다. 대표적인 이들이 재침례파再浸禮派였다. 재침례파 사람들은 루터나 츠빙글리의 개혁 동지이거나 제자들로, 재침례파 운동은 독일을 중심으로 한 루터의 개혁운동, 스위스를 중심으로 한 츠빙글리와 칼빈의 개혁운동과 더불어 또 하나의 중요한 개혁운동이었다. 그러나 이들은 종교개혁사에서 거의 무시되거나 경시되어 왔다.
종교개혁 당시 루터나 츠빙글리의 개혁운동이 유아세례를 받아들인 부분 등 성경에 충실하지 못하다는 비판을 제기한 이들이 있었다. 그들은 당시 진행되고 있던 개혁이 영주領主나 시의회市議會의 도움을 받아 진행되었다고 보고, 보다 성경적인 개혁이 필요하다고 여겨 독자적인 노선을 걷기 시작했다. 바로 재침례파 사람들로, 그들을 칭하는 아나뱁티스트Anabaptist는 희랍어 ‘아나밥티스모스-다시 세례 받는 자’에서 온 말이다. 그 이름은 그들이 지은 것이 아니라, 그들을 공격하고 비난한 사람들이 붙인 것이었다.
재침례파에게 있어서 중세 1,000년은 성령의 사역이 중단된 교회 역사 단절의 시기였으며, 사탄이 지배하는 시대였다. 따라서 기존 교회는 개혁의 대상이 아닌 타도의 대상이었다. 그들에게 있어서 개혁의 목표는 콘스탄틴 황제가 기독교를 공인한 313년 이전의 초대교회 모범을 발견하고 그 상태로 돌아가는 것이었다. 즉, 초대교회로의 복귀Restitution였다.
그들은 자신들이 마지막 시대를 살고 있다고 믿었으며, 재침례파 운동의 지도자들을 하나님이 세우신 예언자와 사도로 받아들였다. 그들은 고난 받는 것을 주저하지 않았으며, 자신들이 받는 고난을 초대교회 시대의 순교자들이 받았던 고난과 동일시했다.

유아세례를 거부하고 다시 침례를 주었기에
재침례파라는 이름이 불려진 유래는 이렇다. 그 시기에는 거의 모든 사람이 유아세례를 받은 후 성인이 된 다음에는 입교 문답만 했으므로, 성인에게 세례를 주는 경우는 거의 없었다. 그런데 재침례파들은 죄를 사함받고 거듭난 사람들에게 다시 세례를 베풀었기 때문에 재침례파란 이름으로 불려진 것이다.
유아세례가 카톨릭에 자리잡게 된 과정은 다음과 같다. 2세기 말에 이레니우스는 침례가 영혼을 깨끗케 하는 것이라고 했으며, 오리겐은 출생의 오염을 씻기 위해 유아세례를 받는다고 했다. 초대교회 시대에, 예수님께서 니고데모에게 ‘물과 성령으로 거듭나야 한다’고 하신 말씀에서 ‘물’을 ‘세례’로 오해하여 세례를 받음으로 구원받는다고 여긴 이들이 있었던 것이다.
캐롤Carrol 박사의 「피 흘린 발자취」에 의하면, 침례를 받음으로 구원받는다는 잘못된 교리가 초대교회에 들어와 뿌리를 내리면서 어떤 교회의 인도자들은 침례가 구원의 방법인 것처럼 가르쳤다. 그러다 보니 침례를 일찍 받을수록 좋다는 결론에 이르렀고, 그 결과 유아세례가 생겼다는 것이다. 이처럼 이왕이면 일찍 구원받는 게 좋겠다고 생각하여 받아들이기 시작한 유아세례가 교회의 전통이 되어버렸다. 그러나 251년에 참된 교회들은 잘못된 유아 침례를 받아들이는 교회와는 교제를 끊겠다고 선언했다고 캐롤 박사는 말하고 있다.
AD 416년, 로마카톨릭은 유아세례에 관한 법령을 만들었다. 이 새로운 법률로 말미암아 유아세례는 의무가 되었다. 국가교회주의자들은 그 법령을 거부하는 이들에게서 그리스도인이라는 이름을 빼앗았다. 그때부터 참된 그리스도인들은 산골짜기나 동굴 속에서 피난처를 찾아야 했다. 유아세례가 법령으로 제정된 지 10년 뒤인 AD 426년부터 10세기 이상 기독교회의 암흑기가 시작되어 참된 그리스도인들은 무시무시한 박해를 받았다.

칼빈과 츠빙글리 등도 이단적인 운동으로 취급해
츠빙글리는 교회의 개혁을 추진하면서 유아세례에 동의하고 이를 시행했는데, 구약의 할례에 대한 약속을 근거로 삼았다. 스위스 형제단 지도자들은 이것이 못마땅했다. 그들은 성경에 유아세례에 대한 근거가 없으며, 8일 만에 행하는 할례를 유아세례와는 근본적으로 동일시할 수 없다고 보았다. 그들은 유아세례를 인정하지 않았다. 어린아이에게는 죄를 깨닫고 회개하여 복음을 받아들일 만한 지적·영적 능력이 없기 때문에 유아에게 침례를 줄 수 없다고 했다. 죄를 깨닫고 진정으로 회개하여 죄에서 구원받은 사람에게만 베푸는 침례를 주장했다. 그들은 유아세례를 받음으로써 자동적으로 속했던 교회에서 떠나 다시 침례를 받은 이들끼리 별도의 교회를 구성했다.
그들은 세상과 교회를 완전히 구별해 순수한 초대교회를 이상으로 삼아 개인과 교회의 거룩한 신앙을 추구했다. 재침례파의 개혁 이념이나 교회관, 국가관, 세례관 등은 로마카톨릭은 물론이고 종교개혁을 통해 새롭게 세워진 개혁 교회와도 달랐다. 그들은 성경은 성령의 감동으로 읽고 이해할 수 있기 때문에 전통이나 신학 교육은 불필요하다고 주장했고, 유아세례를 거부했으며, 성경에 명확히 설명되어 있지 않은 것은 절대 해서는 안 된다고 주장했다. 이러한 태도로 인해 로마카톨릭뿐 아니라 루터·츠빙글리·칼빈 등의 온건한 개혁자들에게도 이단적인 종파 운동으로 취급받아 탄압과 박해를 받았다. 특히 칼빈은 재침례파를 로마카톨릭과 동일한 이단적 집단으로 간주하고 이들의 교리를 비판했다. 그는 자신의 저서 「기독교 강요」에서 한편으로는 로마카톨릭을, 다른 한편으로는 재침례파를 공격했다. 한편, 국가에서는 재침례파를 무정부적인 반란 집단으로 여겼다.

재침례파의 태동과 발달
재침례파 운동은 한 사람을 중심으로 일어난 개혁운동이 아니었다. 스위스·독일·체코의 모라비아 지방·네덜란드 등지에서 산발적으로 일어났던 운동이다. 그래서 이 운동은 몇 가지 유형과 분파로 나눌 수 있다.
콘라드 그레벨Konrad Grebel(1498?-1526)과  펠릭스
만츠Felix Mantz(1498-1527)를 중심으로 한 스위스 형제단, 신학자로서 재침례파 운동의 뛰어난 이론가요 지도자였던 휩마이어Balthasar Hübmaiar
(1480?-1528)를 중심으로 한 운동, 한스 뎅크Hamns Denk와 필그림 마르펙Pilgrin Marpeck을 중심으로 한 남부 독일에서의 재침례파 운동, 모라비아 지방의 후터 공동체, 네덜란드와 북부 독일에서 있었던 메노나이트Mennonite 등이 그것이다. 이들 간에는 공통점도 있고 상이점도 있었다. 거의 비슷한 시기에 여러 지역에서 일어났지만, 스위스 취리히에서 일어난 ‘스위스 형제단’이 재침례파의 시원始原이라 할 수 있다.
스위스 취리히에서는 츠빙글리의 지도 아래 1523년에 공개토론회를 개최하면서 교회 개혁을 위한 노력이 구체화되고 있었다. 츠빙글리는 다정다감한 인품, 예리한 판단력, 아름다운 음성, 뛰어난 화술을 골고루 가진 인물이었다. 그는 복음주의적 개혁자로서 사람들을 이끌어 가는 강력한 힘을 가지고 있었다. 강단에서 헬라어 성경을 펴놓고 직접 해석하여 재능 있는 많은 젊은이들을 이끌었다. 그런데 그의 개혁 노선이 점점 보수적인 경향을 나타내자 그의 주위에서 헬라어 고전을 연구하던 많은 젊은이들이 점차 츠빙글리와 다른 견해를 갖기 시작했다. 콘라드 그레벨, 펠릭스 만츠, 안드류 카스텔버거 등이 그런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츠빙글리의 개혁운동에 만족하지 못했다.
1523년부터 그레벨 등 스위스 형제단과 츠빙글리 사이에는 견해차가 나타나기 시작했다. 그것은 교회의 본질 및 유아세례에 대한 이견異見이었다. 미사 및 성상聖像들에 대해서도 점진적인 개혁을 주장하는 츠빙글리나 시의회와 달리, 스위스 형제단은 철저하고 즉각적인 개혁을 주장했다. 1524년에는 분열이 일어났다. 츠빙글리는 성상이나 미사의 폐기를 시의회와 절충하려 했으나 그레벨은 관료들이 교회를 지배해서는 안 된다고 믿었다. 국가관과 교회관 등에서 분명한 차이가 나타난 것이다. 그레벨과 그의 동료들은 그리스도의 피로 모든 죄를 씻고 거듭난 성도들로만 구성되는 참된 교회를 세워야 한다고 주장했다. 결국 츠빙글리와 스위스 형제단은 결별한다.

재침례파 지도자들, 그들이 받은 박해
1498년경 취리히에서 출생한 펠릭스 만츠는 에라스무스, 하인리히 불링거 등과 마찬가지로 카톨릭 사제의 사생아였다. 그는 1522년경에 츠빙글리가 주도하는 신약 연구 모임에 참여했고, 로마카톨릭에서 개종했다. 1524년 츠빙글리의 개혁운동에 불만을 갖게 된 그는 그레벨과 함께 재침례파 운동의 중심 인물이 되었다. 그는 연설에 있어서는 그레벨을 능가했는데, 유아세례를 비판하고 재침례를 베풀다가 체포되어 투옥되었다. 그리고 기독교의 질서와 관습에 반대하고 재침례 운동을 전개했다는 이유로 사형선고를 받아 1527년 익사 당했다. 그의 재산은 시의회에 의해 몰수되었다. 그는 초기 재침례파 운동의 지도적 인물로서 신교도에 의해 순교 당한 최초의 재침례파 교도였다.
츠빙글리는 새로운 변화에 당황해 재침례파를 비난하는 설교를 시작했다. 그들이 유아세례를 반대할 뿐 아니라 정부에 대해 가진 견해도 온당치 않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취리히 시의회는 스위스 형제단이 행하는 재침례를 법질서를 교란시키는 행위로 보아 법적 조치를 강구했다. 1525년 재침례 문제로 공개 토론회를 열었고, 토론의 내용과 관계없이 츠빙글리의 승리를 선언하고 유아세례를 시행할 것을 명하고 재침례를 엄격히 금했다. 사흘 뒤, 시의회는 재침례파 지도자들을 추방하고, 그레벨과 만츠에게는 학교 강의나 모임에 참석하는 것과 가르치는 것을 금지시켰다. 재침례파 지도자들은 그러한 결정이 하나님의 말씀에 반反하는 세속적 권세의 발동으로 확신했다.
인문주의자였던 콘라드 그레벨은 츠빙글리를 만남으로써 생의 전환점을 맞았다. 방황하던 그는 복음과 개혁의 열정에 사로잡혔다. 하지만 1523년부터 교회 개혁에 있어서 츠빙글리와 견해를 달리했고, 결국 결별했다. 그레벨은 재침례를 베푼다는 이유로 여러 번 투옥되었다. 그는 건강이 악화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침례를 베풀고 모임을 인도했다. 결국 그는 종신형을 선고받았는데, 어떤 사람의 호의로 다른 수감자들과 함께 탈옥했다. 그러나 건강이 좋지 못했던 그는 1526년 여름, 당시 유행하던 페스트로 사망했다.
조지 블라우룩George Blaurock은 카톨릭 신부였다. 그는 츠빙글리와 많은 토론을 가졌고 교회 개혁에 열정을 보였지만 츠빙글리의 개혁에 전적으로 동의하지는 않았다. 그는 재침례파 운동에 가담했고, 이전에 자기가 가졌던 신앙이 잘못되었음을 깨닫고 다시 침례 받기를 원했다. 그 모임에 자기 외에는 성직자가 없었기 때문에 그는 모임을 지도하던 평신도인 그레벨에게 요청해 침례를 받았다. 그 후 블라우룩은 자진해서 다른 사람들에게 침례를 주었다. 시의회의 결정 이후에도 재침례파 인도자들은 곳곳을 돌아다니며 개울에서 사람들에게 침례를 주었다. 블라우룩은 그레벨이 병사病死하고 만츠가 순교한 후 그 뒤를 이어 약 2년 반 동안 재침례 운동을 주도했다. 그는 스위스 형제단에서 ‘제2의 바울’이라고 불렸을 만큼 대단한 활동가였다. 블라우룩은 여러 번 체포당하고 추방당했으며, 1529년에 다시 체포되어 화형火刑 당했다. 죄목은 교황이 내려준 사제직을 버리고 새로운 세례를 설교하고 카톨릭교회의 신앙과 의식을 거부했다는 것이었다.

인도자들의 죽음과 함께 사라진 재침례파 운동
재침례파 운동이 점점 퍼져나가자 취리히 시는 모든 재침례파 사람들을 잡아서 물에 빠뜨려 죽이라는 법을 발표했다. 이후 많은 사람들이 잡혀서 죽었다. 이런 움직임은 유럽 각국으로 확산되어 유사한 법이 발효되었고, 그에 따라 많은 사람들이 잡혀 죽었다.
재침례파 지도자들의 격렬하고 비타협적인 태도와 그들의 가르침에 함축된 혁명적인 내용 때문에 재침례파 사람들은 각 도시에서 차례로 추방되었다. 그 일은 오히려 재침례 운동을 촉진시켰다. 그러나 만츠, 그레벨, 블라우룩 등 지도자들이 대부분 옥사하거나 사형 당하면서 스위스 형제단은 지도자를 상실했고, 재침례 운동은 사라지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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