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
아버지!
  • 진행 김소리
  • 승인 2015.04.29 15: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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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집 / 가정의 달

아프리카에서 한 선교사가 하루 종일 복음을 전한 뒤 집으로 돌아가는 길이었다. 버스 안은 퇴근하는 새까만 사람들과 땀 냄새로 가득했고, 선교사는 저리는 다리로 흔들리는 버스에 버텨 서 있었다.
집 근처 정류장에 내렸을 때 지는 해가 만들어내는 붉은 노을에 선교사의 눈이 부셨다. 저쪽 운동장에서 아이들이 뛰고 있는 것이 보였다. 가까이 다가가 보니 선교사의 아들이 친구들 몇몇과 터진 공을 차며 먼지를 풀풀 날리고 있는데, 아주 행복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선교하며 겪는 어려움으로 수심에 찬 얼굴을 하고 있던 선교사는 아들을 바라보며 혼잣말을 그칠 줄 몰랐다.
‘저 아이는 뭐가 저렇게 행복할까? 걱정거리가 없는 걸까? 믿고 의지하는 아버지가 있어 저러겠지. 무슨 문제가 있건 말건 아버지 믿고 마냥 행복하게 뛰는 거겠지. 나에게도 아버지가 계신데, 나를 사랑하는 아버지가 나와 함께하시는데 왜 힘들어했지? 아버지, 저에겐 당신이 있습니다!’
선교사의 마음에 아버지가 살아나 힘 있게 걸음을 내딛었다고 한다.

우리는 아버지와의 사이에 어떤 사연들을 마음에 담고 살아가고 있을까? 가정의 달 5월을 맞아 ‘나와 아버지’ 이야기를 모아보았다.

 
'아버지가 최고였다!'
/고민석(기쁜소식강남교회)

 

어렸을 때 어쩌다 학교에서 100점을 맞으면 아버지 혹은 어머니가 집에 계시길 기대하며 골목길부터 막 뛰곤 했다. 기뻐하시는 부모님을 보면 스스로 얼마나 뿌듯하고 장한지, 정말 좋은 아들이 된 것 같았다.
 내게는 초등학교 6학년, 2학년인 두 아들이 있다. 얼마 전 함께 목욕을 한 뒤에 짜장면을 사주고, 디저트로 아이스크림도 먹이고, 집 근처 미장원에서 머리도 예쁘게 잘라주며 물었다.
 “아들! 오늘 아빠가 너희들을 위해 수억 원을 썼다. 이런 아빠의 은혜를 어떻게 갚을 건지 말해 봐라!”
 둘째 아들이 씩씩하게 말했다. “나중에 돈 많이 벌어서 용돈을 천만 원씩 드릴게요.” 세상 물정을 좀 더 아는 큰아들은 “우리가 잘 자라는 게 은혜 갚는 거 아니겠어요?”라고 천연덕스레 답했다. 사실
아들들과 하루를 함께 하며 때도 밀고, 같이 먹고, 머리도 자르는 시간 자체가 내겐 이미 충분한 보상이었다.
 아버지(기쁜소식강남교회 故 고영복 장로)가 하늘나라로 가신 지 벌써 만 5년이 되었다. 내겐 아버지와 함께한 어린 시절의 기억이 별로 없다. 아버지가 사우디아라비아와 리비아에 돈을 벌러 가셨기 때문이다. 그냥 ‘아버지가 계시구나’였다. 한국에 돌아오셔서 아버지는 몇몇 가지 일을 벌이셨지만 잘 되지 않았다. 넉넉하지는 않았어도 성실하게 일하셨던 아버지 덕분에 초등학교를 졸업할 때까지 어렵지 않게 생활할 수 있었다.
 사춘기에 접어들면서 아버지를 능력 없는 사람으로 보기 시작했다. 지금 생각해보면 아버지가 어려울 땐 ‘어렵다’ 힘들 땐 ‘힘들다’고 하실 수도 있었는데, 당시에는 좀처럼 이야기를 하시지 않았다. 나는 아버지의 마음을 알 수 없었기에 오로지 형편만 보며 아버지에 대해 불평할 뿐이었다.
 중학생 때 친했던 친구 하나가 마당에 멋진 수영장이 있는 집에 살았다. 지금도 그런 집은 드문데, 그 친구 집에는 호화스러운 가구들로 가득 차 있었다. 귀족 같은 부모님과 발레를 연습하는 인형처럼 예쁜 여동생들과 함께 사는 친구가 부러웠다. 맛있는 음식을 많이 줘서 친구 집에 자주 놀러 갔고, 친구 부모님은 공부를 잘했던 나를 환영해 주었다. 나는 어느 날부턴가 꿈을 꾸었다. 친구와 내가 서로 바뀌는 꿈. 꿈에서 깨어나면 얼마나 초라하던지! 동생은 나와 달랐다. 친구들을 집에 데려와서 늘 신나게 놀았다. ‘생각 없는 녀석 같으니라고.’ 능력 없는 아버지를 은근히 무시하며 지냈던 기억이 난다.
 고등학교에 들어가 첫 시험을 망쳤다. 적당히 준비해서 치르는 시험이 중학교에서는 통했지만 고등학교에서 통할 리 없었다. 솔직히 학습에 대한 욕구도, 미래에 대한 꿈도 없었다. 나는 그저 볼품없고 평범한 학생에 불과했다. 내가 이토록 별 볼 일 없는 사람인 게 마치 부모님을 잘못 만난 결과인 양 그렇게 스스로를 속이며 아버지를 향한 미움만 마음속에 키워나갔다.
 고등학교 1학년 어느 가을날, 기우는 오후 해를 받아 약간은 어둑한 골목길에 접어드는데, 저 앞에 시멘트 가루가 묻은 작업복 차림의 중년 남자가 검은 비닐봉지를 들고 걸어가고 있었다. 아버지였다. 지금 같으면 달려가서 덥석 안으며 “아버지!” 하고 불렀을 텐데, 그때는 천천히 뒤따라 걷기만 했다. 그날따라 아버지의 뒷모습이 더 초라해 보여서 우울하고 기분이 나빴다. 집에 도착해 보니 아버지가 마루에 걸터앉아 계셨다.
 “어! 민석아, 이제 오니? 힘들었지? 이거 먹어라.”
 아버지는 환하게 웃으시며 검은 봉지를 건네셨다.
 “뭐에요? 그런데 오늘 왜 이렇게 일찍 오셨어요?”
 나는 건성으로 한마디 툭 던지고는 비닐봉지를 받아들고 방으로 들어갔다. 봉지 안에는 내가 좋아하는 1000원짜리 투게더 아이스크림이 들어 있었다. 달달한 아이스크림을 한 숟가락 입에 떠 넣었는데, 마음 깊은 곳에서 울음이 터져 나왔다. 몸이 안 좋으셔서 작업복도 못 갈아입고 돌아오신 아버지의 뒷모습에 무시하는 대못을 여러 개 박았기 때문이었다. 만만치 않은 세상을 힘들게 살고 계시는 아버지의 마음을 느끼면서도 ‘감사하다’는 말을 하기가 왜 그렇게 어렵던지…. 입 속에서 녹아드는 아이스크림이 내 마음을 움직이고 있었다. ‘이렇게 살면 안 되겠구나!’ 100점 맞은 시험지를 들고 힘껏 뛰던 그 마음으로 돌아가서 아버지를 기쁘게 해 드리고 싶었다. 그날 이후 학교 성적이 떨어진 적이 없다. 아니 계속 올라갔다. 초라하고 능력 없는 아버지는 사라지고, 감사한 아버지가 내 마음에 들어와 자리 잡았다.
 대학에 들어갈 무렵 아버지가 공사 현장에서 허리를 다치셔서 움직이지 못하셨다. 형은 군대에 갔고, 나는 대학에 들어가야 했고, 동생은 고등학생인데, ‘이러다 우리 집이 공중분해 되는 건 아닐까?’ 하는 생각에 두려웠다. 그 즈음 하나님을 찾고 찾으셨던 아버지가 박옥수 목사님을 만나 구원받으셨다. 그게 다였다. 나는 아직도 나와 동생이 어떻게 대학교를 졸업할 수 있었는지, 우리 가족이 살 집이 어떻게 생겼는지, 새 차는 무슨 돈으로 샀는지 잘 모른다. 우리 집이 가장 어려웠을 때 아버지가 구원받으셨고, 어머니와 다른 가족들이 하나 둘 교회에 나가기 시작하면서 집안 형편이 좋아졌다는 걸 알고 있을 뿐이다. 아직도 신기하기만 하다.
 2004년 분만실 밖에서 큰 아들의 출생을 기다렸다. 간호사가 속싸개로 돌돌 말아 누에고치 같은 아들을 내밀면서 안아 보라는데, 가방과 옷가지를 잔뜩 들고 있다가 바닥에 모두 내던지고 그 작은 아들을 안았다. 참 감사했다. ‘우리 아버지에게 나도 이런 아들이었겠구나!’
 아버지의 즐거움은 시간을 내서 가까운 친척들을 방문해 복음을 전하는 것이었다. 고향인 전라도 곳곳을 다니시면서 친척•친지들에게 말씀을 전하셨다. 구원받은 가족과 친지들을 꼽아 보면 하나, 둘, 셋, … 마흔 셋, 마흔 넷…. 하나님의 은혜가 정말 놀라웠다. 아버지는 5년 전 어느 날 주무시는 중에 평안히 하나님 곁으로 가셨다. 유언을 들을 새도 없이 떠나셔서 아쉬웠지만, 잠언 말씀 안에서 아버지를 다시 만났다. 
 “내 아들아, 나의 법을 잊어버리지 말고 네 마음으로 나의 명령을 지키라. 그리하면 그것이 너로 장수하여 많은 해를 누리게 하며 평강을 더하게 하리라. 인자와 진리로 네게서 떠나지 않게 하고 그것을 네 목에 매며 네 마음 판에 새기라. 그리하면 네가 하나님과 사람 앞에서 은총과 귀중히 여김을 받으리라. 너는 마음을 다하여 여호와를 의뢰하고 네 명철을 의지하지 말라. 너는 범사에 그를 인정하라. 그리하면 네 길을 지도하시리라.”(잠 3:1~6)
나를 향한 아버지의 마음이 성경 안에 가득 담겨 있었다. 사람들을 만나 신앙 상담을 할 때 “선생님, 예수님이 우리 모든 죄를 다 가져가셔서 더 이상 죄를 위해 울부짖을 필요가 없습니다. 모든 것이 끝이 났습니다”라고 이야기하면 “그러면 아무렇게나 막 살아도 됩니까? 죄를 막 지어도 됩니까?”라고 묻는 사람들이 있다. 나는 그런 분들에게 이렇게 말한다. “저는 아버지의 마음을 알게 된 후 그분을 실망시키고 싶지 않아서 흥미 없던 공부도 하게 되었습니다. 선생님은 당신을 그렇게 사랑하시는 분을 실망시키고 싶으세요?”
 우리 아버지는 하나님의 사람이었고, 나도 그렇다. 아버지로 인해 그 신분을 물려받았다. 그때는 ‘감사하다’는 표현을 못 했는데, 천국에서 다시 만나면 ‘아버지가 최고였다’는 이야기를 해드리고 싶다.
돌아보면 실망시키고 싶지 않은 마음이 나보다 아버지에게 더 많았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나를 행복하게 해 주시려고 최선을 다해 사셨던 아버지. 나는 그 아버지의 사랑을 받기만 하면 되는 거였다.
 하나님이 나를 위해 최선을 다해 일하고 계심도 믿는다. 내 인생 속에서 하나님 아버지를 만났다는 사실도 너무 감사하다.

“우리 현돈이를 언제나 한마음으로 사랑한다.”
/이현돈(기쁜소식성북교회 전도사)

 

아버지도 나름대로 아픔과 상처가 있으셨겠지만 나는 아버지가 참 미웠다. 아버지와 어머니는 원수 같았다. 어머니는 자주 맞고, 집은 아버지 때문에 난장판이 되곤 했다. 나도 많이 맞았다.
 고등학생 때부턴 나도 가만 있지 않았다. 아버지에게 맞서고 반항했다. 군대에 가서도, 인도에 단기선교를 가서도, 선교학교를 마치고 전도사로 교회에 파송받은 후에도 아버지가 너무 싫었다.
 작년 겨울 학생캠프 때였다. 어느 여학생이 나를 찾아왔다.
 
 “전도사님, 상담 받고 싶어요.”
  “그래? 무슨 일로?”
  “저, 사실은요. 정말 행복하고 평안해요. 그래서 문제는 없어요. 그런데 상담하면 좋으니까 왔어요. 그냥 아무 말씀이나 해주세요.”
  “왜 그렇게 행복해?”
  “오늘 들은 히브리서 10장 10절 말씀이 제 마음에 굳게 세워졌어요. 시편 119편 89절 말씀이 히브리서 말씀을 뒷받침해 줘요. ‘주의 말씀이 영원히 하늘에 굳게 섰사오며’ 너무 행복해요!”
 그날 밤 나는 잠을 이룰 수 없었다. ‘분명 같은 장소에서, 같은 말씀을 들었는데, 왜 나는 그 학생만큼 행복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 때문이었다. 그래서 하나님께 기도했다. “하나님, 저도 그 학생처럼 말씀을 들으면 행복하게 해주십시오.”
 학생 캠프를 마치고 겨울 수양회에 참석했는데, 김성훈 목사님이 ‘하나님이 생각하는 행복과 우리가 생각하는 행복의 기준이 다르다’는 말씀을 전하셨다. ‘돈을 많이 벌고, 건강하고, 모든 일이 잘 풀려 아무 문제가 없는 것’이 하나님이 보실 때는 행복이 아니라고 하셨다. ‘그럼 내가 무시 받고, 일이 안 풀리고, 못난 게 행복이네?’ 하는 생각과 함께 어린 시절의 기억들이 떠올랐다. 아버지가 호통을 치시는 장면, 울고 계시는 어머니, 벽을 보고 울음을 참고 있던 나. 하나님이 “현돈아, 그거 행복이야”라고 말씀하시는 것 같았다. 나는 그때의 안 좋았던 감정들이 선명하게 떠올라 “아닙니다! 그건 행복이 아닙니다!”라고 외쳤다. 하나님은 다시 “그거 행복이다!”라고 하셨다. 나는 더 이상 고집을 부릴 수 없어서 내 마음, 내 감정을 다 내려놓았다.  “알겠습니다. 이해는 안 가지만 하나님이 행복이라면 행복입니다.”
 그때부터 이상한 일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기쁜소식강남교회의 전요한 전도사님을 우연히 만났는데, 뜬금없이 내게 ‘아버지에게 존경한다고 말해봐’라고 했다. 나는 아버지에게 문자를 보냈다. “아버지, 아버지의 인생을 존경합니다.” 한 시간 후 답장이 왔다. 아주 긴 글이었지만 요약하면 ‘고맙다. 앞으로 훌륭한 목사님이 되거라’였다.
 실은 올 봄부터 ‘행복’에 대해 공부하기 시작했는데, 기쁜소식성북교회 담임 목사님이었던 김진성 목사님이 행복을 주제로 마인드강연을 해보라고 하셨다. 강연을 준비하면서 부모님께 사랑한다고 말하는 동영상들을 보는데, 문득 ‘나도 아버지에게 사랑한다고 말해 볼까?’ 하는 마음이 들었다. 그래서 또 문자를 보냈다. “아버지, 사랑합니다.” 이번에도 한 시간쯤 후에 답장이 왔다. “나도 우리 현돈이를 언제나 한마음으로 사랑한다. 깊은 밤 잘 자거라.”
 다음날 어느 집에서 성경공부를 하고 있는데, 아버지에게서 전화가 왔다. 어쩔 수 없이 수신 거부를 하고 전화를 받을 수 없다는 문자를 얼른 보냈는데, 겁이 났다. 아버지의 전화를 안 받으면 10통에서 50통까지 계속 전화하시고, “네가 뭔데 아버지 전화를 안 받냐?” 등의 문자를 수없이 보내시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그날은 이상했다. 전화하시지 않고 다음과 같은 문자를 보내셨다. “알았어. 수고한다. 시간나면 전화해라.” 무척 신기했다. 그날 저녁 아버지에게 전화를 드렸다.
 “요번에 설날에 집에 오냐?”
 “예, 아버지.”
 “그래. 집에 와서 좀 쉬어야지.”
 아버지 마음속에 많은 것이 들어 있음이 느껴졌다. 경상도 사나이인 아버지는 그런 마음을 잘 표현하지 못하고 사신 것뿐이었다. 설에 집에 가서 문을 열자마자 난생처음 아버지에게 큰절을 했다. 내가 얼마나 교만했었는지 보였고, 아버지와 명절을 보내며 행복을 느꼈다. 우리 가족은 명절 때마다 싸웠기에 명절이 싫었는데, 이번엔 너무 달랐다.
 설날 아침 아버지가 내게 말씀을 전하라고 하셨다. 나는 이사야 61장을 펴고 ‘우리를 위해 아름다운 소식을 준비해 놓으신 하나님’을 전했는데, 아버지가 기뻐하셨다. 이것저것 챙겨주시면서 뭔가 하나라도 더 주시려 애쓰시는 아버지를 보니 눈물이 나왔다. 아버지는 박옥수 목사님께 ‘목사님이 하시는 일마다 잘되길 바란다’는 이야기를 전해 달라고 하셨다.
 돌이켜보면, 아버지가 가족과 나를 사랑하셨음을 발견하게 된다. 가족 때문에 많은 어려움과 유혹들을 이겨내고 사신 흔적들이 보인다. 내가 인도 나갈랜드로 단기선교를 가겠다고 했을 때 아버지는 나를 믿어 주셨다. 대출받아 항공료를 내주셨고, 떠나는 날 새벽에 공항까지 바래다 주셨다. 돌아가시는 아버지의 뒷모습을 잊을 수 없다. 얼마 전 아버지에게 “사시면서 언제가 가장 행복하셨어요?”라고 물었더니 “아들을 낳았을 때와 네 돌잔치를 했을 때다”라고 하셨다. 그리고 아버지는 진심으로 내가 훌륭한 목사가 되길 바라고 계셨다.
 하나님은 ‘행복’이라고 하셨다. 내가 어떻게 느끼고 생각하든 상관없이 말이다. 그것이 맞았다. 요즘 부쩍 아버지 생각이 많이 난다. 서로 상처만 주고받는 ‘아버지와 아들’이었는데, 하나님이 마음을 바꾸시고 새로운 눈을 주셔서 사랑을 느끼며 살 수 있는 사이가 된 것이 너무 감사하다. “아버지, 고맙습니다! 사랑합니다!”

복음 전도자의 길을 아버지와 함께 걷고 싶다
/이한솔(아이티교회 선교사)

 

내가 7살 때 아버지는 근무하던 학교를 그만두고 마하나임신학교에 입학하셨다. 연극의 막이 바뀌듯 그날부터 전혀 다른 세상이 펼쳐졌다. 아버지는 잘 다려진 하얀 와이셔츠 같은 분이셨다. 언제나 교회가 우선이었고 가족은 그 다음이었다. 내가 ‘메이커 운동화 한 켤레만 사달라’고 조르면 ‘형제 자매들의 아이들도 메이커 신발을 못 신는데 목사 아들이 무슨 메이커 신발이냐’며 나무라셨다. 교회에 아버지를 빼앗긴 느낌이었다. 형편은 흔한 장난감 한번 못 살 정도로 늘 어려웠다. 분기마다 내야 하는 학비는커녕 다달이 내는 급식비나 우유 값조차 없었다. 아버지에게 필요한 걸 이야기하면 그때마다 가족을 모아 기도회를 하셨다. 하나님을 찾으셨다. 나는 그런 아버지를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다.
 하루는 학교에서 담임 선생님이 ‘학비를 내기 어려운 학생들은 학비 감면 신청서를 가져가라’고 하셨다. 친구들의 시선에 예민했던 나는 부끄러움을 무릅쓰고 신청서를 받아들었다. 그런데 선생님이 “야! 네 아버지 목사 아냐? 목사들은 돈 많잖아”라고 하셨다. 교실은 웃음바다가 되었다. 신청서를 들고 내 자리로 돌아가는데 가시 면류관을 쓰고 가는 기분이었다. 집에 돌아가자마자 아버지에게 독기 서린 말들을 쉬지 않고 내뱉었다. “언제까지 이렇게 살아야 해요? 아버지가 목사인 게 너무 싫어요. 차라리 아버지가 없었으면 좋겠어요!” 아버지는 말버릇이 그게 뭐냐며 나를 때리셨다. 맞아도 아프지 않았다. ‘아버지는 내가 선생님들에게, 친구들에게 어떤 취급을 당하는지 알고 있기나 하세요?’ 섭섭한 마음이 걷잡을 수 없이 커져 갔다.
 아버지는 ‘나는 가족은 버려도 교회는 버릴 수 없다’고 이야기하셨다. 교회가 아니었다면 가정도 없었을 것이라는 마음에서 하신 말이었지만 나에게는 ‘가족이 중요하지 않다’는 이야기로 들렸다. 그래서 더욱 아버지를 향해 마음의 문을 잠갔다. 집에만 들어가면 아버지와 부딪쳤다. 더 이상 고분고분 따를 마음이 없었던 나는 브레이크가 고장난 트럭처럼 만나는 사람마다 들이받았다. 내 분노의 화살은 결국 교회와 하나님께로 돌아갔다. ‘교회만 아니었다면….’
 술, 담배, 친구에 빠져 학창시절을 보냈다. 대학에 들어갔지만 책상에 앉아 있는 게 곤욕이어서 1주일 만에 학교를 포기했다. 기술도 없어서 공장에 들어가 단순 노동을 했다. 어머니뻘 되는 아주머니들과 교도소에서 출소한 사람들 틈에 끼어 일하고 있는 나 자신이 너무 비참했다. ‘스무 살. 한창 꿈을 키울 나이인데…’ 하루하루를 괴로워하며 지내고 있는데, 교회 형이 굿뉴스코 해외봉사단에 참여해 보라고 했다. 그래서 2006년 2월 아프리카 카메룬으로 떠났다.
 카메룬은 열악했다. 가난했고 곳곳에 질병이 퍼져 있는 데에다 미신을 숭배하는 사람들이 가득했다. 그런데 그들은 나눠줄 줄 알았고, 다른 사람을 배려했다. 충격이었다. 나는 늘 ‘아버지 때문에, 교회 때문에’라는 핑계를 대며 원망하고 살았는데, 카메룬 사람들은 훨씬 더 열악한 환경 속에서도 나를 이해하려 했고, 내게 나눠주려 했다. 나는 그들에게 더듬더듬 복음을 전했다. 아버지가 늘 강대상에서 전하셨던, 내가 지루해 하며 하찮게 여겼던 바로 그 이야기를 전했다. 그런데 놀랍게도 말씀이 사람들을 변화시켰다. 가난에 찌든 사람들, 질병으로 부모를 잃은 사람들이 복음 앞에서 행복한 사람이 되어 갔다. 나는 왜 아버지가 복음 전도자의 삶을 그렇게 가치 있게 생각하셨는지 알 것 같았다. 세상에서 가장 불행하고 어두운 사람들을 가장 행복한 사람으로 만드는 것이 복음이었다.
 돌아보면 아버지는 내게 무관심했던 분이 아니었다. 나는 어렸을 때 예배란 예배는 다 참석해야 했는데, 중학교 2학년 때 주일 저녁 예배를 빠지고 놀러간 적이 있었다. 아버지는 노발대발하셨고, 그런 아버지가 무서워 처음으로 집을 나갔다. 집을 나간 지 3일째 되던 날, 친구가 아버지에게서 전화가 왔었다고 하며 ‘모든 것을 용서할 테니 집으로 돌아오라’는 아버지의 말을 전해주었다. 용기를 내어 집으로 발걸음을 돌렸다. 가다 보니 집 근처 벽마다 이상한 전단지가 붙어 있었다. “아들아! 모든 걸 용서하니 걱정하지 말고 어서 돌아오너라!”돌아오지 못하고 방황하고 있을 아들을 위한 아버지의 마음이었다. 아버지는 집에 돌아온 나에게 ‘밥은 먹었냐?’고 물으며 우셨다. 표현은 서툴지만 마음은 한없이 따뜻하신 분이셨다.
 2007년 나는 마하나임신학교에 입학했고, 아버지와 같은 길을 걷게 되었다. 2011년 11월에 사랑하는 아내와 결혼했는데, 그 날 많은 하객들이 결혼식에 참석했다. 대부분 아버지를 통해 구원받은 분들이었다. 사람들이 “저는 전도사님 아버지에게 복음을 듣고 구원받았어요”라고 하며 내 손을 꼭 잡고 축하한다고 했다. 감사했다.
 2012년 아이티 선교사로 파송 받았다. 신학교를 졸업하기까지 일이 많았다. 학교에서 세 번 도망쳤고, 모든 걸 포기하기도 했다. 내가 아이티로 파송 받던 날 아버지가 이렇게 말씀하셨다.
 “아들아, 나는 이제 죽어도 여한이 없다. 네가 이 귀한 복음의 일을 함께하니 아버지는 그 누구도 부럽지 않다. 하나님께 감사하다.”
 아이티에는 내가 아버지의 마음을 오해했던 것처럼 하나님의 마음을 오해하며 고통스럽게 사는 많은 사람들이 있다. 2010년에 일어난 대지진으로 수많은 아이티 사람들이 목숨을 잃었는데, 복음 외에 그 어떤 것으로도 절망에 빠진 사람들을 치유할 수 없음을 날마다 느낀다. ‘나는 지옥 같은 삶을 살았는데 구원받고 보니 내가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사람이네요’라고 간증하는 사람들이 많아지고 있다.
 아버지가 복음을 위해 사시지 않았다면 내가 이런 행복을 누릴 수 있었을까? 아버지가 기쁜소식선교회 목사인 사실이 정말 감사하다. 지금 아버지는 나의 가장 든든한 후원자이자 벗이자 멘토다.
나도 아버지처럼 나를 돌아보지 않고 죄 속에서 고통스럽게 사는
사람들을 위해 살고 싶다. 사람들에게 진정한 하나님의 마음을 전해주는 복음 전도자의 길을 아버지와 함께 걷고 싶다.

‘아니었구나. 아버지가 나를 사랑하셨구나.’
/서현진(광주제일교회)

 

두 딸 중 장녀로 태어난 나는 부모님의 사랑을 듬뿍 받고 자랐다. 그래서인지 늘 고삐 풀린 망아지처럼 철없이 지냈다. 아버지는 사람들을 만날 때 자주 나를 데리고 다니셨다. 나와 공기놀이, 고무줄놀이도 해주셨고, 학교에서 돌아오면 밥도 차려 주셨다. 생선살을 발라서 밥 위에 얹어 주시던 모습이 지금도 생생하다. 아버지의 자식 사랑은 각별하셨다.
 어려서 나는 마음이 약했다. 작은 부담을 넘지 못했고 어려운 일들을 피하며 살다 보니 점점 더 약해졌다. 사람들에게 상처받는 일도 잦아졌다. 다른 사람의 이야기를 받아들이기 힘들었고, 나만의 생각 속에 갇혀 지냈다. 자라면서 얼굴에 여드름이 많이 나고 뚱뚱해져 외모 콤플렉스도 심했다. 부모님이 나에게 실망하실까 두려워 어려움을 부모님께도 말씀드리지 못하고 혼자 끙끙대며 살았다.
나는 겉으로는 멀쩡했지만 속에 만들어진 ‘생각’의 세계가 나를 파괴시켜 갔다. 특히 아버지를 보는 눈이 달라졌다. 아버지는 나를 무척 사랑하셨지만 내 생각 속에서의 아버지는 무섭고 불편한 분이었다. 아버지가 나를 사랑하지 않으실 거라는 생각에 괴로웠다.
 대학생이 되었을 때 나는 약한 마음에서 벗어나고 싶어서 ‘굿뉴스코 해외봉사단’에 지원했다. 아버지는 딸이 갑자기 아프리카로 봉사를 가겠다고 하니 걱정을 많이 하며 반대하셨다. 다리를 부러뜨리겠다고 엄포도 놓으셨다. 하지만 '자식 이기는 부모 없다'는 말대로 아버지는 내게 져주셨다. 탄자니아로 파견국이 결정되어 함께 가는 단원들과 준비물을 챙기고 돌아오던 날, 아버지가 피문어 말린 것을 한입 크기로 일일이 잘라 비닐에 돌돌 말아서 내게 주시며 “더운 나라에 가면 이런 게 그렇게 먹고 싶다더라. 가지고 가서 땀을 많이 흘리거나 입이 심심할 때 하나씩 몰래 꺼내 먹어라” 하셨다. 깜짝 놀랐고, 흐르는 눈물을 주체할 수 없었다. ‘아니었구나! 아버지가 나를 사랑하셨구나!’ 그때는 아버지에게 감사하다는 말을 하지 못했다. 그렇게 탄자니아에 가서 가장 많이 했던 생각이 ‘부모님은 나를 아무 조건 없이 사랑해 주셨구나! 이렇게 허물 많은 나를 사랑하셨구나!’였다.
 세월이 흘러 교회 안에서 선을 봤다. 결혼식 날짜를 정하는 자리에서 아버지는 몇 개월 정도 미뤘으면 좋겠다고 하셨다. 그런데 아버지는 또 내게 져주셨다. 그리고 결혼에 필요한 돈을 어디서 구하셨는지 ‘됐다!’ 하며 환한 얼굴로 들어오셨다. 그때 아버지의 기뻐하시던 모습을 지금도 잊을 수 없다. 결혼식 전날 아버지 팔짱을 끼고 입장하는 연습을 했다. 나는 원래 눈물이 많아서 결혼 전날 밤 기도를 많이 했다. “하나님, 눈물 나지 않게 해주세요. 하나님, 그리고 저의 부모님이 구원받게 해주세요.” 간절한 기도를 드렸다.
 단독주택 2층에서 신혼살림을 시작했다. 나는 하나님과 교회의 사랑 속에서 행복하게 지냈지만 아버지는 딸 걱정에 밤잠을 설치셨다고 했다. 단독주택은 겨울에 매우 춥다. 2층으로 올라가는 계단도 가파르고 겨울에는 계단이 꽁꽁 얼어서 위험했다. 아버지는 이 모든 것에 마음을 쓰고 계셨다. ‘창문 사이로 들어오는 바람을 어떻게 막지? 손자가 태어나면 위험한 계단을 어떻게 하지? 여름이 되면 에어컨을 달아 줘야겠구나. 김치 냉장고가 없네.’ 아버지는 늘 내 일로 고민하셨다. 첫 아들 준용이를 낳았을 때 아버지는 남편에게 “권 서방, 내게 기쁨을 줘서 고맙네”라고 마음을 표현하셨다.
 지금 나는 두 아이의 엄마가 되었다. 부모가 되고 나서야 비로소 조금씩 아버지의 마음을 알아가지만 아직도 잘 모른다. 그냥 아버지의 사랑을 받으며 감사하게 살고 있다. 아버지의 사랑에 보답할 길이 없다. 내가 행복하게 지내는 것이 아버지의 기쁨이기에 그 사랑을 누리며 교회 안에서 행복하게 산다. 그리고 사랑하는 아버지, 어머니가 구원받기를 간절히 기도한다. 하나님의 사랑 안에 들어와 복된 삶을 사실 아버지를 소망하며 오늘도 기도한다.

“아버지, 저 너무 힘들었어요.”
/김미자(기쁜소식영천교회)

 

우리 아버지는 올해 82세시다. 평생 가족들을 위해서 최선을 다해 사셨지만 마음의 표현은 거의 하지 않으셨다.
 아버지의 삶은 순탄하지만은 않았다. 나는 1남 4녀 중 둘째다. 내 위로 나보다 세 살 많은 오빠가 있는데그 오빠는 내게 감추고 싶은 대상이었다. 내가 중학생 때 우리 집에 종종 낯선 사람들이 찾아오곤 했는데, 그러면 부모님들은 그분들에게 용서를 빌며 사정하셨다. 때로는 오빠를 위해 굿도 하셨고, 절에 가서 빌기도 하셨다.
 밤마다 오빠를 찾아다니며 우시는 부모님을 보면서 ‘나는 잘 해야겠다’고 다짐했다. 그때부터 나는 내 마음을 포장하며 살았다. ‘잘 해야겠다. 기쁘게 해 드려야겠다’는 결심이 내 마음을, 내 삶을 병들게 했다.
 고등학교 3학년 때 오빠와 함께 자취를 했다. 오빠는 방위로 군 복무를 하고 있었는데, 군에서도 탈영해 헌병들이 낮밤으로 찾아왔다. 오빠가 저지르는 이런저런 일들로 너무 무서웠지만 아버지께 말씀을 드릴 수 없었다.
 오빠를 향한 분노와 미움이 극에 달했을 때 나는 구원을 받았다. 죄 사함을 받고 교회에 다니면서도 나는 사람들에게 마음을 닫고 살았다. 혼자 고립되어 살다 보니 많은 어려움을 당할 수밖에 없었다. 아버지에게 복음을 전하고 싶었지만 그냥 ‘구원받으시라고, 그래야 천국에 간다’고 이야기하는 게 다였다.
 그렇게 지내다 얼마 전 실버 수양회에서 김재홍 목사님이 하시는 간증을 들었다. ‘아버지를 만난’ 간증이었다. 김 목사님은 하나님의 은혜로 수양회에 참석하신 아버지와 새벽 시간에 마음의 이야기를 나눌 수 있었고, 그때 목사님 아버지도 아들의 마음을 알게 되셨다는 이야기를 하셨다. 나는 그날 김 목사님의 간증을 들으면서 그동안 아버지에게 나의 진짜 속마음을 표현하지 않고 생각만을 고집했던 모습이 비춰졌다. 나는 누구에게든 내 이야기를 하는 것이 무서웠다. ‘듣기 싫어할 거야’라는 생각을 했다.
 김재홍 목사님의 말씀이 내 마음에 박혀 있던 벽돌을 빼냈고, 나를 아버지에게로 내몰았다. 아버지는 내가 하나님 이야기를 하면 뒤로 돌아 앉으시거나 밖으로 나가시던 분이다. 나는 아버지에게 이야기를 시작했다. ‘내가 학창시절에 오빠 때문에 힘들었던 일, 오빠를 내 인생을 가로막고 망치는 존재라고 생각하며 미워했던 시간들, 아버지가 힘들어 하실까봐 이야기할 수 없었던 사연, 착한 딸로 포장해서 사느라고 힘겨웠던 날들…’에 대해 말씀드렸다.
 “아버지, 저 너무 힘들었어요. 너무 고통스럽게 살았다구요. 그런데 예수님 때문에 행복해졌어요. 아버지도 예수님을 믿으세요. 예수님은 아버지를 사랑하셔요.”
 아버지는 다 들어주셨다. 그리고 내 손을 꼭 잡아주셨다. 나는 그날 아버지에게 복음을 전해드렸고, 아버지는 하나님의 말씀을 처음으로 끝까지 들어주셨다. 나는 ‘우리 아버지는 안 돼! 이야기해도 듣지 않으셔!’라고 생각했다.
 아버지가 마음을 닫고 계셨던 것이 아니라 내가 아버지를 향해 닫고 살았던 것을 고백한다. 아버지가 아직 구원받지는 않으셨지만 하나님이 아버지를 위해 일하고 계심을 믿는다. 그래서 행복하고 감사하다.

“내가 뭔데 이렇게까지 사랑해 주십니까?”
/윤종수(기쁜소식마산교회 목사)

 

고등학생 시절, 선생님들이 대부분 나를 포기하셨을 만큼 나는 문제아였다. 반 친구들도 나와 어울리지 않았다. 괴롭고 희망도 보이지 않아 자살을 시도했지만 미수에 그쳤다. 그리고 19살에 우리 교회를 만나 구원받았다. 예수님이 나를 찾아오신 거였다. 강도 만난 자가 거반 죽어 누워 있던 ‘거기’에 내가 이르렀을 때였다. 생명을 얻은 기쁨에 행복했다.
 몇 년 뒤, 복음 전도자가 되고 싶어 마하나임신학교에 입학했다. 장로였던 아버지, 목사였던 어머니는 노발대발하며 신학교에 찾아와 박옥수 목사님께 욕을 퍼부으셨다. 무슨 일이 터질 것 같아 나는 목사님께 그냥 좀 피해 계시라고 말씀드렸다. 목사님은 무슨 말이냐고 하시며, 오히려 나서서 우리 부모님 앞에 절을 하셨다. 그리고 무릎을 꿇고 우리 부모님과 차분하게 대화를 이어가셨다. 세 분은 두 시간쯤 이야기를 계속하셨고, 아버지가 이렇게 말씀하셨다. 
 “제가 오늘 처음 목사님을 만났습니다. 제가 이제껏 들어왔던 목사님과 실제 목사님은 너무 다릅니다. 목사님이 저희 이야기를 들어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우리 아들을 지도해 주세요. 부탁드립니다.”아버지는 웃으며 가셨고, 목사님께 고맙다는 인사를 여러 번 하셨다. 내가 뭔데 목사님이 무릎을 꿇으시나….
 14개월 후, 목사님의 소개로 도현아 자매와 맞선을 보았다. 아버지는 도 자매 집안이 우리 집안과 비교가 안 된다고 생각해 박 목사님께 이렇게 말씀하셨다.
 “결혼은 맞게 해야 합니다. 우리 종수는 많이 부족합니다. 도 양이 시집오면 좋고 감사하지만, 남의 집 귀한 따님 인생을 망치고 싶지는 않습니다. 이 결혼은 없던 것으로 해주시면 좋겠습니다.”
 그러자 목사님은 이렇게 답하셨다.
 “저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종수는 좋은 신랑감입니다. 10년 뒤엔 모든 사람이 도 자매가 윤 형제와 결혼하길 잘했다고 할 겁니다.”
 은혜롭게 결혼이 결정되었다. 장인, 장모님도 나를 좋아해 주셨다. 마음 깊은 곳에서 눈물이 났다. 형편없는 문제아였던 나 같은 게 뭐라고 좋은 신랑감이라고 하시나….
 결혼하고 스물일곱의 어린 나이에 아프리카 케냐 선교사로 파송받았다. ‘나 같은 사람이 선교를 할 수 있을까?’ 하는 생각에 자주 사로잡혔다. 그래서 목사님이 케냐에 오셨을 때 “목사님, 저는 너무 어립니다. 사역 경험도 없고, 일도 못 하고, 케냐에 잘못 온 것 같습니다”라고 말씀드렸다. 목사님은 이렇게 말씀하셨다. “내가 자네에 대해 많이 생각해 보았네. 자네가 말한 대로 형편은 그렇네. 하지만 자네의 장래를 놓고 생각할 때 지금 아프리카에서 하나님을 의지하며 사는 것이 훨씬 복되겠다는 마음이 드네. 자네는 아프리카 1호 선교사야. 하나님을 바라보고 담대하게 살아.” 마음에서 눈물이 났다. 내가 뭔데 나 같은 인간의 장래를 생각하시나….
 아프리카에서 16년을 보냈다. 하나님의 은혜를 입었고, 많은 역사를 경험했다. 그런데 언젠가부터 ‘아프리카에서 일어나는 복음의 역사는 네가 고생하고 수고했기 때문이야. 너, 정말 희생 많이 했잖아. 누구도 할 수 없는 일을 해냈어!’ 하며, 하나님이 이루신 일들이 하나둘 내 것이 되었다. 교회와 목사님을 무시하는 마음이 자라갔다.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교만한 인간이 되어 한국으로 돌아왔다. 박 목사님은 냉정하게 나를 책망하셨다. 3년이 넘도록 내 중심의 모습을 지적하셨다. 책망을 듣는 것이 싫어 마음을 닫고 목사님을 미워했다. 하루는 목사님과 마주앉아 교제했다.
 “자네, 강도 만난 자가 ‘거기’에 이르렀지? 거기가 어딘 줄 아는가?”
 “예. 예루살렘에서 여리고로 내려가는 길목입니다.”
 “아니야. ‘거기’는 나 스스로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곳을 말해. 자네 마음이 거기에 이르면 하나님이 자네를 찾아가셔. 자네는 할 수 있는 게 많잖아. 내 말을 한번 깊이 생각해 보게!”
 나는 19살 때 ‘거기’에서 예수님을 만났다. 목사님의 책망을 듣던 그날, 그 위치에서 ‘떠나 있는 나’를 발견했다. 사탄이 준 생각에 이끌려 은혜와 사랑만을 입고 사는 ‘거기’를 오래 전에 떠나 있었다.
 작년 이맘때쯤 박 목사님을 뵙고 내 마음을 표현했다.
 “목사님, 저는 목사님이 너무 원망스러웠습니다. 하지만 지금은 목사님의 진심을 압니다. 목사님이 냉정하게 책망해 주시지 않았다면 저는 지금도 사탄에게 끌려 다니고 있겠지요. 이제는 목사님께 마음을 다 열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고맙습니다, 목사님!”
 박 목사님은 고맙다고 하시며, 사람들과 계속 교제하며 복음을 위해 담대하게 살라고 하셨다.
 작년 여름, ‘세계 대학 총장 포럼’이 진행되고 있을 때 부산 누리마루에서 큰아들 한식이가 박 목사님과 마주쳤다. 당시 아들은 목사님에게 섭섭한 마음이 있었다. 목사님이 자기 아버지를 책망하며 어렵게 한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당시 내 마음이었다. 목사님이 한식이를 옆에 앉히고 “한식아, 너 어디어디에서 살았냐?” 하고 물으셨다.
 “케냐 나이로비, 미고리, 이집트, 남아공에서 살았습니다.”
 “고생 많이 했다. 하지만 네 나이 때 하는 고생은 유익한 거야.
내가 네 아빠를 많이 야단쳤다. 네 아빠가 나를 원수로 생각할 거야. 그런데 네 아빠 마음이 많이 좋아졌다. 하나님이 아빠 마음에 일하고 계셔. 요즘 죄 짓고 세상 유혹에 빠지는 아이들이 많은데, 너나
동생 경식이는 세상에 물들지 말고 교회 안에서 믿음을 배워라.”
 그날 굳어 있던 아들의 마음이 다 녹아내렸다. 둘째 경식이도 눈물을 흘리며 교만했던 마음에서 돌이켰다. 지금 우리 아이들은 하나님•교회•하나님의 종을 신뢰하며 기쁘게 신앙을 배우고 있다.
누가복음 15장에 나오는, 아버지와 한마음이 된 탕자. 내게도 마음의 아버지가 계시다. 나도 둘째 아들처럼 아버지와 한마음이 되었다. 언젠가 내가 아버지를 끌어안을 날이 온다면 “네가 뭔데 이렇게까지 사랑해 주십니까?”라고 외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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