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 없이 나를 가르치셨던 어느 장로님
말 없이 나를 가르치셨던 어느 장로님
  • 박옥수 (기쁜소식강남교회 목사)
  • 승인 2015.05.01 12:04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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땅끝까지 복음을, 끝날까지 주님과_184회

 
“주여, 이 사람은 어떻게 되겠삽나이까?”
요한복음 마지막에 보면 예수님이 시몬 베드로를 만나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내 양을 치라”고 말씀하셨다. 예수님과 베드로의 대화 말미에 베드로가 예수님의 사랑하시는 제자가 따르는 것을 보고는 “주여, 이 사람은 어떻게 되겠삽나이까?” 하고 물었다. 예수님이 말씀하시기를 “내가 올 때까지 그를 머물게 하고자 할지라도 네게 무슨 상관이냐? 너는 나를 따르라”고 하셨다. ‘그를 올 때까지 머물게 하든 어떻게 하든 내가 그를 이끌 것이니 너는 상관하지 말고 나를 따르라’고 하신 것이다.
 베드로가 예수님에게 “이 사람은…”이라고 했는데, 우리가 세상에서 주님을 섬기며 살다 보면 주변에 이런저런 많은 사람이 있다.
좋은 사람, 나쁜 사람…. 그런데 때때로 ‘저 사람이 장차 어떻게
될까? 저 사람이 잘할까, 못할까?’라는 생각을 할 때가 있다. 그때 예수님은 “내가 올 때까지 그를 머물게 하고자 할지라도 네게 무슨 상관이냐? 내가 그 사람을 인도할 테니 너는 나를 따르기만 해라” 하신다.

‘어떻게 자신을 저렇게 나타내지 않고 가릴 수 있을까?’
베드로 곁에 많은 사람이 있었고, 베드로가 관심을 가지고 “이 사람은 어떻게 되겠삽나이까?”라고 물었던 사람이 있었다. 나도 주님 안에서 신앙생활을 하는 동안 하나님께서 내 주위에 참 많은 사람들을 두셔서 함께 지내게 하셨다. 주님을 향해 가는 길에 같이 걸어가게 하신 것이다. 그 가운데 예수님 앞에서 귀하고 아름답게 쓰임을 받은 사람들이 많다.
 내가 마음에서 참으로 존경하는 분이 여럿 계시지만, 그 가운데 한 장로님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싶다. 이 장로님은 내가 봉천동에 있던 서울제일교회에서 목회할 때 우리 교회에 나오셨다. 그때 깊이 있게 신앙상담을 하고 싶었지만 그러지 못했다. 몇 번 이야기를 나누다가 얼마 되지 않아 내가 대전으로 목회지를 옮겼기 때문이다. 그 후로 그분을 잊고 지냈다.
 2004년에 내가 다시 기쁜소식강남교회로 왔을 때 교회에 그분이 계셨다. 그냥 나보다 나이도 많고 형님 같은 분이라고 생각하고 지냈는데 보면 볼수록 나와 다른 점이 많았다. 교회에서 무슨 일을 의논하거나 일이 있을 때 그분은 자신의 주장을 내세우거나 이것이 옳다고 강요하시지 않았다. 한 번, 두 번 그분을 경험하면서 느껴지는 것이 있었다. 그분은 분명히 자신이 알고 있는 좋은 방법이 있고 길이 있어도 철두철미하게 자신을 부인하고 숨기며, 자신의 뜻을 가지고 이렇고 저렇고 주장하시지 않았다. 그분은 나에게 아무 말씀도 하시지 않았고, 나보고 이래라저래라 하신 적은 물론 좋다 나쁘다 하신 적도 없지만 내 마음을 가장 많이 가르치시는 분이었다. 나는 ‘어떻게 자신을 저렇게 나타내지 않고 자기를 저렇게 가릴 수 있을까?’ 생각했다.
 

‘자신이 얼마나 허무하고 무익한 존재인지를 아셨구나!’
그분은 중동에서 건설업에 뛰어들어 돈을 많이 벌었다고 한다. 그 돈을 가지고 한국에 와서 이런저런 일을 하다가 사기도 당하고 여러 어려움을 겪으면서 돈을 다 잃었다. 나중에는 겨우 밥만 먹을 정도의 삶을 사셨다. 아마 그분이 돈이 많고 무엇이든지 뛰어났다면 그 안에 진주같이 아름다운 마음을 갖지 않았을지 모른다. 돈이 있었으면 흥청망청 살며 자기를 높였을지 모르는데, 하나님께서 많은 재산을 빼앗아가셨다. 재산만 가져가신 것이 아니라 재산과 같이 있던 ‘내가 돈을 벌었다’는 자신을 믿는 마음, 자신이 잘났다는 마음, 그런 마음을 장로님의 마음에서 낱낱이 뽑아가셨다.
 내가 그분을 볼 때 장로님이시지만 어린아이 같았다. 정말 자신이 나타나지 않는 것을 볼 때 내 마음에 너무 놀랍고 감격스러웠다. 나는 그 장로님 앞에 서면 자유롭기도 했지만, 장로님이 늘 나를 꾸짖는 것을 마음에서 느꼈다. 나는 그 장로님과 달랐다. 나는 어떤 일을 하다 보면 내 속에 빠질 때도 있고, 내 의견이 옳다고 주장할 때도 있고, 내 이야기가 내 안에 아직 많이 남아 있었다. 물론 예수님을 믿고 난 뒤 내가 악하고 추한 것을 발견하고 나를 믿는 마음이 많이 죽은 것이 사실이지만, 그래도 나는 그 장로님 같지 않았다.
 장로님은 꼭 예수님처럼 보였다. 하나님께서 나로 하여금 복음을 깨닫게 하시고 나를 복음 전도자로 만드셔서 많은 사람들에게 구원의 말씀을 전할 수 있는 은혜를 주셨다. 그에 비해 장로님은 나처럼 남을 가르치시지는 않았지만 어느 누구에게서도 볼 수 없는 모습을 지닌, 바로 예수님 같은 분이었다. 물론 장로님도 사람이기에 허물이나 부족함이 없을 수 없겠지만, 자신의 선함이나 자랑이 전혀 나타나지 않았다.
 ‘이분은 인생을 살며 돈을 모으고 돈을 잃고 하면서 자신이 얼마나 허무하고 무익한 존재인지를 아셨구나!’
 장로님은 하나님이 주신 눈으로 자신을 바라보셨고, 자신을 정확히 알기에 자신을 나타내기를 부끄러워하셨으며, 자신을 나타내지 않으려고 애쓰고, 그 마음 안에서 자신이 죽은 것을 확실하게 믿으신 분이었다.

장로님처럼 주님만을 나타내는 종들이 많이 일어나…
내게 많은 것을 가르치셨던 장로님이 어느 날 주님 품으로 가셨다. 장로님이 세상을 떠나신 후 세월이 흘러가면서 우리 기억에서 장로님이 멀어져 가지만 나는 장로님을 잊을 수 없다. 우리 교회에 좋고 귀한 장로님들이 많이 계시지만, 그분처럼 단순하게 자신을 부인하고 자신을 나타내지 않고 예수 그리스도의 아름다움만 풍기는 분은 아직까지 보지 못했다.
 장로님이 세상을 떠나셨을 때 나는 눈물을 흘리지 않았다. ‘내가 귀한 보배를 잃었구나!’ 하는 마음이 들었다. 그리고 장로님의 아들 가운데에서나 우리 교회의 다른 분들이 그분처럼 일어나서, 아무 말씀은 하지 않지만 삶을 통해 그리스도를 나타내기를 소망했다. 그래서 내가 잘했다고, 내가 잘났다고, 내가 옳다고 하는 생각을 가진 사람들을 말없이 꾸짖어 주어 나를 믿는 마음이나 내가 옳다고 생각하는 마음을 부끄럽게 하기를 바랐다. 그 장로님처럼 주님만을 나타내는 귀한 종들이 많이 일어나서 복음을 향해 달려나간다면 더 이상 바랄 것이 없다는 마음이 든다.
 나는 설교하는 사람이다. 설교하다 보면 옳은 이야기를 할 때도 많고, 인간의 의지가 섞여나올 때도 많고, 나를 옳게 보이려고 하는 말이 나도 모르는 사이에 종종 튀어나온다. 이 교회 안에 순수한 예수님의 마음이 흐르지 않고 내 주장과 생각이 나올까봐 두렵지만, 나도 모르는 사이에 내 생각이 나올 때가 많다. 그럴 때마다 아무 말 없이 나를 가르쳐 주신 장로님, 그런 분이 다시 우리 교회에 계셔서 나만 아니라 우리 교회의 장로님들, 집사님들, 형제 자매님들에게 참된 그리스도인의 삶을 보여 주고 참된 그리스도인의 길을 가르쳐 주길 바란다. 말만 하는 사람 말고 그리스도인의 삶이 보이는 장로님의 마음이 필요하고 그리워진다.
 근래에 우리 교회에서 여러 형제 자매들이 하나님의 은혜를 입는다. 내가 몰라서 그렇지, 우리 교회에 그런 분들이 있을 줄 믿는다. 내 마음에 예수님도 계시지만 형님 같은 분, 나를 붙들어 주고 가르쳐 주는 그런 분들이 계셔서 연약하고 부족한 내가 하나님을 바로 섬기며 복음을 잘 전할 수 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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