휴대전화와 청바지
휴대전화와 청바지
  • 글/최순식 자문위원
  • 승인 2015.07.15 22: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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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미있는 발명 발견이야기 25
현대 사회에서 사람들에게 큰 사랑을 받는 발명품으로 휴대전화와 청바지를 꼽을 수 있습니다. 휴대전화 없이 사는 것을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우리 생활 속에 휴대전화의 역할이 커졌습니다. 또한 학생들을 비롯해 편안한 복장을 즐기는 사람들에게 청바지는 꼭 필요한 패션아이템이 되었습니다. 이달에는 필요에 의해 만들어진 휴대전화와 우연히 만들어졌지만 큰 사랑을 받는 청바지의 탄생을 알아봅니다.
 
전선 없이도 통화를
전화의 발명으로 지구촌이 가까운 이웃이 되었다면, 휴대전화의 발명으로는 세계가 한 가족이 되었습니다. 1876년, 그레이엄 벨이 발명한 유선전화(키즈마인드 2014년 1월호 참조)는 전선을 통해 음성을 전달하는 것으로, 전화선만 연결되어 있으면 멀리 떨어진 곳에 있는 사람과도 대화를 주고받을 수 있습니다. 반면 휴대전화는 선이 없어도 전파로 데이터를 전달합니다. 그리하여 언제 어디서나 원하는 곳에 전화를 걸 수도 있고 문서나 사진 등을 주고받을 수 있습니다. 지금은 휴대전화 없는 생활을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휴대전화는 꼭 필요한 물건이 되었습니다.

이동하면서 전화를 한다고?
휴대전화의 발달에 있어서 통신장비 전문 업체인 ‘모토로라’ 이야기를 빼 놓을 수 없습니다. 1928년, 미국의 폴 갤빈이 설립한 ‘갤빈 제작사’는 종업원 5명에, 총 자본금 565달러로 시작한 아주 작은 회사였습니다. 큼직한 배터리가 달린 라디오 제작을 시작으로 1930년에는 자동차용 라디오를 제작, ‘모토로라’라는 상표를 붙여 판매하였습니다. 1947년부터는 회사 이름을 ‘모토로라’로 바꾸고, 2차 세계대전을 거치면서 ‘핸디토키’, ‘워키토키’ 등의 군사용 무선 통신기기를 개발해 전자업계의 리더로 떠올랐습니다. 당시의 무선 통신기기들은 무게가 4킬로그램이 넘어 어깨에 메고 다니며 사용했다고 합니다.
그러다가 1983년에 모토로라의 연구원인 마틴 쿠퍼가 무게가 1킬로그램에 달하는  ‘다이나택8000X’를 개발해 내놓았습니다. 이것은 던져도 깨지지 않는다고 하여 ‘벽돌 폰’이라 불렸으며 ‘가지고 다니는 흉기(兇器)’라는 별명까지 얻었습니다. 이 최초의 휴대전화는 30개의 전화번호를 입력할 수 있었고, 1시간 정도 통화할 수 있는 배터리가 내장되어 있었습니다. 그 당시 4,000달러에 이를 정도로 값이 비싸고 투박하고 무거운 단점이 있었지만, ‘이동하면서 통화할 수 있다’는 놀라운 사실에 인기가 점점 높아갔습니다.
그 뒤로 마틴 쿠퍼는 ‘휴대전화의 아버지’라 불리며 휴대전화 개발에 온힘을 쏟았습니다. 1992년, 뚜껑을 여닫는 플립형 전화기 ‘마이크로택2’가 개발되었는데, 219그램의 가벼운 무게와 편리한 디자인으로 폭발적인 인기를 끌었습니다. 이것은 마침내 휴대전화의 대중화 시대를 열어주었습니다.
▲ 최초의 무선 통신기기들은 군인들이 전투 중에 주로 사용했는데, 무게가 4킬로그램이 넘어 어깨에 메고 다녔어요.
손 안의 컴퓨터
 

우리나라는 1984년 5월부터 한국이동통신(지금의 SK텔레컴)이 처음으로 휴대전화 서비스를 시작했는데, 첫 해에 가입자는 1,600여 명 밖에 안 되었고 수도권 지역에서만 사용이 가능했습니다. 전국 어디서나 휴대전화를 사용할 수 있게 된 것은 1991년부터입니다.
그때부터 우리나라의 전자제품 회사들도 단순한 통신 기능에서 벗어나 여러 가지 기능을 가진 휴대전화 개발에 몰두했습니다. 그리하여 문자서비스뿐 아니라 카메라, MP3, DMB, 인터넷, 게임 등의 기능을 더해 ‘손 안의 컴퓨터’를 개발해낸 것입니다. 
지금 이 시간에도 전 세계의 휴대전화 연구원들은 좀 더 다양하고 새로운 기능을 가진 기기를 만들기 위해 연구실의 불을 밝히고 있습니다. 앞으로는 어떤 놀라운 기능을 가진 휴대전화가 탄생할까요? 여러분이 원하는 기능과 디자인을 머릿속으로 그려보십시오. 머지않아 여러분이 상상한 제품들이 쏟아져 나올 것입니다.
▲ 휴대전화의 아버지, 마틴 쿠퍼
천막 장사꾼 스트라우스
요즘은 길거리나 옷가게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청바지! 청바지처럼 부자나 가난한 사람이나, 남자나 여자, 노인이나 젊은이 등 누구나 가리지 않고 입는 옷은 없을 것입니다. 처음에 청바지는 푸른 천막천으로 만들어 ‘블루진’이라고 불렸습니다. 어째서 천막천으로 옷을 만들었냐고요? 그것은 미국의 천막천 생산업자 리바이 스트라우스의 아이디어가 빛을 발한 결과입니다.
1830년부터 미국 서부 샌프란시스코에서는 엄청난 양의 금(金)이 쏟아져 나왔습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금맥을 찾기 위해 몰려들자 시에서는 갑자기 늘어난 인구문제를 해결하려고 애썼습니다. 그러나 부족한 주택 문제를 해결하기가 쉽지 않았습니다. 집을 구하지 못한 사람들은 들판에 천막을 치고 생활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1847년에 독일에서 미국으로 건너온 젊은 스트라우스는 뉴욕에서 형의 일을 도우며 지내다가 금맥을 찾아 샌프란시스코로 향했습니다. 며칠 동안 광부들을 쫒아 다닌 스트라우스는 금맥을 찾는 일이 쉽지 않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금맥을 찾는다는 게 보통 일이 아니군. 이 일은 저들에게 맡기고 나는 저 많은 사람들에게 꼭 필요한 것을 찾아 만들어 팔아야겠다.”
그리하여 스트라우스는 들판에서 지낼 천막을 만들고 수레를 덮는 데에 쓸 천막천을 만들어 팔기로 했습니다. 친구들과 힘을 모아 공장을 세우고 튼튼하고 좋은 천막천을 만드는 데에 온힘을 기울였습니다. 마침내 그의 천막천은 없어서 못 팔 정도로 인기를 끌었습니다.

천막천으로 바지를
어느 날, 군대에서 쓰는 물건을 대주는 납품업자가 스트라우스를 찾아왔습니다.
“군대에 납품할 천막천을 주문하려합니다. 수량과 가격은….”
그 사람은 엄청난 양의 천막천을 좋은 가격으로 주문했습니다. 스트라우스는 즉시 빚을 내어 재료를 구입하고 직원들도 늘렸습니다. 그리고 주문 양을 맞추기 위해 부지런히 천막천을 만들어냈습니다. 그는 창고에 산더미처럼 쌓여가는 천을 보며 흐뭇해했습니다.
“나는 곧 부자가 될 거야! 이제 금광도 살 수 있겠어!”
그런데 스트라우스에게 날벼락이 떨어졌습니다. 천막천을 녹색으로 만들어야 하는데 납품업자가 잘못 주문하는 바람에 청색으로 만든 것입니다.
“군에서 청색은 도저히 받아줄 수 없다고 합니다. 제가 큰 실수를 했습니다.”
“어쩔 수 없지요. 저도 미리 견본을 보여주고 난 다음에 생산을 했어야 했는데….”
스트라우스는 그를 탓하기보다 자신의 경솔함을 후회했습니다.
그는 시장을 누비며 푸른 천막천을 팔려고 했지만 아무도 관심을 보이지 않았습니다. 빚쟁이들을 피해 맥주집 구석 자리에 앉아 있던 스트라우스의 눈에 한 광부들의 모습이 들어왔습니다. 그들은 창가에 앉아 이미 누더기가 된 바지를 깁고 있었습니다.
“그래, 바로 저거야! 광부들의 바지는 질겨야 돼. 천막천보다 질긴 천이 또 있을까?”
스트라우스는 푸른 천막천으로 바지를 만들어 시장에 내놓았습니다. 광부들은 짙은 색에 질기고 값싼 그 바지를 좋아했습니다. 스트라우스는 푸른 빛깔 작업복에 ‘블루진’이라는 이름을 붙였습니다. 세상에서 가장 편하고 질긴 ‘청바지’가 탄생한 것입니다.
청바지는 광부들뿐 아니라 젊은이들에게 큰 인기를 끌며 스트라우스를 돈방석에 앉혔습니다. 지금도 청바지는 활동이 많은 전 세계 젊은이들에게 사랑을 받으며 꾸준히 팔리는 패션 아이템입니다.
▲ 잘못 만든 푸른 천막천으로 바지를 만들어 부자가 된 리바이 스트라우스. 실패를 딛고 더 큰 성공을 거두었죠.
실패는 성공의 어머니
어린이 여러분! 실패를 성공으로 바꾼 스트라우스의 이야기는 지금도 전설처럼 전해지고 있습니다. 스트라우스뿐 아니라 실패를 딛고 성공을 거머쥔 발명가들의 이야기가 많습니다. 여러분도 살아가면서 실패할 수도 있고 넘어질 수도 있습니다. 넘어지면 마음이 아프기도 하고 절망에 빠질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럴 때 다시 일어나는 용기가 필요합니다. 진정한 용기는 실패를 겪었을 때 더욱 필요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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