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데스다
베데스다
  • 관리자
  • 승인 2015.09.04 10: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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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지 순례(32회)

 

 

 

38년 동안 병을 앓아 일어날 수 없었던 한 사람이 “일어나 네 자리를 들고 걸어가라”는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일어나 걸어간 곳, 베데스다. 말씀을 그대로 받아들여 하나님의 능력이 나타났던 2000년 전 그곳을 찾아가 보자.

1957년에 발견된 베데스다 연못 터
예수님이 이 땅에 계시던 시대에 예루살렘에서는 모든 일이 성전을 중심으로 이루어졌다. 헤롯 왕이 유대인들의 마음을 얻기 위해 지었다고 전해지는 당시의 예루살렘 성전. 유대인들의 삶의 중심에 그 성전이 자리 잡고 있었다. 예수님이 하나님의 어린양으로 이 땅에 오셨지만, 예루살렘에 살던 유대교인들은 구약시대의 속죄제사를 계속 드리며 예수님과 상관없는 삶을 살았다.
 제사장들이 레위기에 기록된 대로 희생제물을 잡아 여러 제사를 드릴 때, 성전의 양문羊門 밖 바로 옆에 있었던 베데스다 못은 제사를 돕는 공간으로 사용되었다. 베데스다는 히브리말로 ‘은혜의 집, 자비의 집’이라는 의미를 지니고 있다. 현재의 예루살렘 성 내의 ‘베데스다 연못 기념 장소’는 예수님 시대의 베데스다 연못의 모양은 물론 아니다. 베데스다 연못이 현재는 ‘스데반 문’이라고 불리는, 예루살렘 성의 동쪽 문인 ‘사자문’ 안쪽 가까이에 위치해 있다.
 전쟁으로 인해 수백 년 동안 흙 속에 파묻혀 있던 베데스다 연못의 터가 1888년에 발굴되기 시작했다. 발굴 작업이 끊어졌다 이어졌다를 반복하면서, 1957년에 길이 52m, 폭40m 규모의 북쪽 연못과 길이 57m, 폭 48m 규모의 남쪽 연못이 발견되었다. 이로써 예루살렘 성전의 양문 곁에 못이 두 개였다는 기록이 사실임이 입증되었다. 이것은 쿰란 동굴에서 발견된 두루마리에 기록된 사실과 일치한다. 두 연못 중 하나는 그 용도가 성전에 물을 공급하기 위함이었고, 다른 하나는 제사를 드리는 일에 이용하기 위함이었다.
 직사각형 모양의 연못 터 옆에 오래되어 보이는 낡은 정교회 예배당이 있다. 이 교회는 십자군이 예루살렘을 정복한 후 비잔틴시대 교회의 터 위에 1100년경에 지은 것으로, 예수의 어머니인 마리아의 어머니 ‘안나’가 살았던 곳이라 하여 ‘성 안나 교회’라 불린다. 이곳에서 마리아가 태어나서 오랫동안 살았다는 이야기가 전해지지만, 학자들은 ‘안나라는 여자에 대한 이야기와 마리아의 출생지에 대한 이야기는 정확히 입증된 바 없다’고 한다.

기적의 장소로 기억되는 베데스다
나는 순례객들과 함께 사자문을 통과하여 베데스다 연못 기념 장소로 갔다. 연못 터는 직사각형 모양의 깊은 웅덩이였다. 그 옆에는 비잔틴시대의 유물들이 여기저기 남아 있는 터가 있었다. 그리고 행각이 있었던 곳이라고 추정되는 자리에는 ‘1, 2, 3’ 등 행각 자리 번호가 매겨져 있었다.
 마침 한 순례 그룹의 가이드가 38년 된 병자 이야기를 꺼냈다.
 “38년 된 병자가 자리에 누워 있었지만 진심으로 헌금하고 기도하고, 십일조도 했습니다. 주님을 따르고 섬겼기에 은혜를 입었으니 우리도 이와 같이 합시다. 몸이 불편할지라도 하나님을 위해 온 마음으로 열심히 합시다.”
 가이드의 이야기가 어처구니없어 웃음을 참고 있는데, 그의 이야기를 듣던 많은 순례객들이 “아멘!” 하고 화답했다. 그 모습을 보니 정말 황당했다.
 그리스정교회 교인인 한 아저씨가 연못과 행각 터를 바라보면서 뭐라고 주절주절 이야기하기에 이유를 물어보았다. 자신의 지병을 낫게 해 달라는 기도를 했다고 하였다. 러시아에서 온 어느 뚱뚱한 아주머니는 살을 빼게 해달라는 기도를 했다고 하였다. 이처럼 사람들에게 베데스다는 38년 된 병자처럼 병이 나을 수 있는 ‘기적의 장소’로 기억되어 있다. 38년 된 병자를 낫게 하신 예수님의 능력이 성경에 기록되고 오랜 세월이 지났음에도 불구하고 많은 사람들이 이곳을 치유의 전당으로 여긴다. 어떤 이들은 병에 걸린 가족을 데리고 이곳을 찾아왔다는 이야기도 전해진다.
 유적지는 시대별로 나뉘어 각기 나름의 특징을 지니고 있었다. 성전이 파괴된 후에는 여러 시대를 거치면서 베데스다에 시장이 들어서는 등 사람들이 많이 왕래한 지역으로 변모했음을 짐작할 수 있었다.

 

 

 

병을 고치기 위해 베데스다에 모여든 사람들
베데스다 연못은 성전에 물을 공급하고, 속죄제사에 사용되는 희생제물을 씻거나 피묻은 옷을 빠는 등의 장소로 사용할 목적으로 만들어졌다. 그런데 요한복음 5장에 보면, ‘가끔 천사가 못에 내려와서 물을 동하게 하는데, 그때 가장 먼저 들어가는 자는 어떤 병에 걸렸든지 낫는다’는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었다. 그래서 많은 병자들이 그곳에 모여들었다. 당시에 못에 물을 한 번씩 채우는 과정에서 다량의 물이 못에 유입되면서 물의 움직임이 있었다고 한다. 그 움직임을 보고 천사가 물을 동動하게 한 것으로 오해했는지는 알 수 없으나, 많은 병자들이 병이 낫는다는 이야기에 이끌려 베데스다 연못에 모여든 것은 사실이다. 병에서 해방되기를 소망하며, 마치 요즘 대학병원에서 번호표를 뽑고 기다리는 환자들처럼 물이 동하기를 기다렸다.
 오랜 세월 동안 물은 사람의 병을 고치는 데에 가장 중요한 요소 가운데 하나로 여겨져 왔다. 고대 그리스에서도 병에 대한 처방으로 맑은 물을 병자에게 마시게 한 사실이 있고, 동양 의학에서도 약재료로 쓰는 물은 보통 물과 구분하여 더 맑고 좋은 물을 길러 사용한 것이 그 예라 할 수 있다. 그런 사실과 상관은 없겠지만, 예수님 시대에 베데스다 연못 물에 치유의 능력이 있다고 여겨진 것은 분명하다.

“일어나 네 자리를 들고 걸어가라.”
나는 베데스다에서 예수님과 38년 된 병자의 이야기를 잠시 생각해 보았다. 38년 된 병자는 병이 심해진 후로는 일어나 걸은 적이 없었다. 거기에 누워서 말하길 ‘물이 동할 때 나를 못에 넣어 줄 자가 없다’고 한 것을 보면, 가족이나 아는 이들의 도움을 전혀 받지 못한 채 버려진 사람인 것을 짐작할 수 있다.
 정상인 사람도 38개월 동안 다리를 전혀 사용하지 않고 누워만 있으면 다리에 힘이 없어 다리를 사용하기 힘들다고 한다. 그런데 오랫동안 전혀 써본 적이 없는 38년 된 병자의 다리는 어떤 힘을 낼 수 있었겠는가 생각해 본다. 정말 그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성경에는 예수님이 그의 병이 오랜 줄 이미 아셨다고 기록하고 있다. 그가 예수님을 만나 자신이 병석에서 일어날 수 없고 할 수 있는 것이 없는 인간임을 고백하며 예수님에게 마음을 토했을 때(요 5:7) 예수님은 그 사람이 한 번도 들어본 적이 없는 말씀, 상상도 해보지 못한 말씀을 하셨다.
 “일어나 네 자리를 들고 걸어가라.”
 이 한마디의 말씀이 병자의 마음에 그대로 들어갔다. 그러자 이 말씀이 그대로 능력을 나타내 그가 자리를 들고 일어나 걸어가는 기적이 일어났다.

 

 

 

말씀을 그대로 믿는 시대를 다시 여신 예수님
구약 성경의 말라기 시대 이후로 예수님이 오시기까지는 어떠한 성경 기록도 없다. 이처럼 성경이 전혀 기록되지 않은 400여 년의 이 시기를 보통 ‘암흑기 시대’라고 부른다. 암흑기 시대의 공통적인 특징은, 옛 선지자 시대와 달리 하나님의 말씀을 마음에 그대로 받아서 백성들에게 전해줄 하나님의 사람이 없었다는 것이다. 옛 선지자 시대에는 엘리야, 엘리사, 에스겔 등과 같은 선지자들이 있어서 그들이 하나님께 받은 말씀을 백성들에게 그대로 전해주었다. 백성들 가운데 그 말씀을 그대로 받아들인 사람은 그가 누구일지라도 하나님의 능력이 그를 통해 나타났다.
 엘리사 시대에 사마리아 성에 아이를 삶아먹을 만큼 혹독한 기근이 있었을 때, 엘리사가 하나님께 받은 “내일 이맘때에 사마리아 성문에서 고운 가루 한 스아에 한 세겔을 하고 보리 두 스아에 한 세겔을 하리라.”(왕하 7:1)라는 말씀 한마디로 기근이 끝났다.
 그러나 암흑기에 접어들면서 유대 땅에는 거짓 선지자들이 득실거렸다. 또, 바리새인들이 이 시기에 창궐해 유대 사회에 크게 자리 잡았다. 바리새인은 히브리말로 ‘해석자, 풀이하는 자’라는 뜻으로, 이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그대로 받아들이는 대신 말씀을 펴놓고 나름대로 해석하며 거기에 주석註釋을 달았다. 자신이 스스로 깨달은 바를 성경 말씀에 첨가하는 일을 한 것이다.
 이런 시대의 마지막에 예수님이 나타나셨다. 예수님은 사람들이 말씀을 마음에 그대로 받고 믿어, 믿는 자 속에 하나님의 능력이 나타나는 시대를 다시 여셨다. 38년 된 병자가 “일어나 네 자리를 들고 걸어가라.”는 예수님의 말씀을 마음에 그대로 받아들였을 때, ‘아, 내가 말씀대로 걸을 수 있겠구나!’ 하는 마음이 일어났다. 그리고 말씀에서 힘이 와서, 한 번도 해본 적이 없는 불가능한 일을 말씀대로 할 수 있었다. 그래서 말씀을 깨닫고 해석하는 바리새인들과 예수님의 말씀을 그대로 받아서 믿는 사람들 사이에 많은 부딪힘이 있었다.

하나님이 세우신 종을 통해 하신 말씀은 얼마나 귀한가!
옛 선지자 시대에 유대인들은 가물어 비가 오지 않을 때 하늘만 쳐다보며 비를 기다리지 않았다. 선지자의 입을 쳐다보며 비가 오길 구했다. 그들은 비가 하늘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세우신 선지자의 입에서 오는 것임을 정확히 알고 있었다. 선지자의 입술에 하나님의 말씀이 있었기 때문이다. 선지자는 하나님이 아니지만, 그의 말은 곧 하나님이 주신 말씀 자체였다.
 얼마 전에 유대교의 최고 지도자인 대大랍비 한 사람이 죽었다. 그의 장례식에 십만여 유대교인들이 참석해 검은 옷을 입고 슬퍼했다. 장례식 중에 한 제자가 나와서 조서를 읽으며 하늘을 향해 통곡했는데, 조서의 내용은 이러했다.
 “하나님 아버지, 왜 우리 아버지를 데려가셨습니까? 우리는 이제 길을 잃었습니다. 이제 우리는 어디 가서 하나님 당신의 음성을 듣습니까? 우리 아버지, 당신의 종을 돌려주십시오.”
 비록 죽은 그가 참된 선지자가 아니라 해도, 영적 인도자에 대해 유대인들의 마음에 각인되어 있는 절대적인 위치를 엿볼 수 있는 대목이었다.
 이처럼 선지자를 소중하게 여기는 오랜 이스라엘의 역사에서, 정작 하나님의 참된 종들이 왔을 때에는 그 말씀을 배척하고 자신의 길을 고집한 것 또한 유대인들의 특징이었다. 하나님이 세우신 사람들의 이야기를 청종치 않는 죄를, 하나님이 두 번 세 번 반복해 말씀하시는 대목들이 성경 곳곳에 수없이 나온다. 하나님의 사람들이 전한 하나님의 말씀을 받지 않고 거역하며 거스른 죄가 하늘에 사무쳤고, 하나님이 그 죄를 가장 큰 죄로 여기셨음을 알 수 있다.
 우리가 가게에서 먹다 남은 피자 조각이나 치킨 조각도 버리지 않고 포장해서 가져가는데, 하물며 하나님이 교회에 세우신 당신의 종을 통해 하신 말씀은 얼마나 귀한 것인가! 그런데도 쉽게 듣고 잊어버리고, 또 마음에서 귀히 여기지 않아, 예배를 마침과 동시에 버리고 내 생각을 쫓아간 적이 얼마나 많았던가 생각해 본다.

말씀을 믿는 세계를 나타내는 베데스다
예수님 당시의 모습은 아니지만, 나는 이곳 하늘 아래 베데스다 연못 터 어딘가에 계셨을 예수님을 마음속으로 더듬어 보았다. ‘그때 38년 된 병자를 일으키셨던 예수님이 여기 어딘가에 계셨구나! 이 하늘 아래….’ 그분이 내 안에 나와 함께 계신 것이 말할 수 없이 감격스러웠다. 베데스다는 ‘병을 치유하는 곳’이 아니라, 38년 된 병자처럼 ‘내 생각과 상관없이 하나님의 말씀을 마음에 그대로 받아들여 믿을 때 말씀이 그대로 능력이 되어 나타나는 세계’를 가르쳐 주는 곳이라는 사실을 기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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