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문과 우표
신문과 우표
  • 최순식 자문위원
  • 승인 2015.11.18 20: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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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미있는 발명 발견 이야기 29
요즘은 스마트폰, 컴퓨터, 텔레비전 등이 있어 많은 정보를 빠르게 전할 수 있지만, 그래도 신문은 외면할 수 없는 현대인의 소중한 친구입니다. 우표 또한 전화가 없던 시절, 소식을 전하는 매체로서 큰 역할을 했습니다. 이 달에는 소식과 정보를 전하는 신문과 우표의 탄생에 얽힌 이야기를 알아봅니다.
 
게시판의 벽보에서 시작된 신문
인구가 점점 많아지고 사는 범위가 넓어지면서, 사람들은 새로운 소식을 멀리까지 알리기 위해 고민했습니다. 그런 필요에 의해 만들어진 것이 바로 신문입니다.
기원전 50∼60년 대 로마의 집정관 카이사르는 정부의 발표문을 로마 광장에 붙여 시민들이 보게 했습니다. 중국 당나라 시대(서기 618∼690) 때 현종은 지방 제후들에게 중앙 정부의 포고문이나 법령 등의 내용을 적은 ‘저보’를 보냈습니다. 이러한 것들이 신문의 유래라고 알려져 있습니다. 우리나라의 경우, 조선 선조 때 승정원(지금의 대통령 비서실)에서 만든 조보(朝報)가 신문의 유래라고 할 수 있습니다. 조보는 왕의 명령은 물론, 관리의 승진과 해임, 사신 파견 등의 내용과 함께 측우기로 잰 강우량과 농사에 도움이 되는 정보, 왕실에서 일어난 경조사도 실려 있다고 합니다.
 
더 많은 소식을 더 빠르게
그러나 이렇게 정보를 전달하는 기능을 갖추었다고 해서 그것을 신문이라고 보기는 어렵습니다. 지금 우리가 알고 있는 신문의 형태를 갖추려면, 우선 종이(165년 중국의 채륜이 발명)가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종이에 인쇄를 하는 활자(1445년 독일의 구텐베르크가 금속활자 발명)가 있어야 합니다. 
정기적으로 대량으로 인쇄되어 만들어진 최초의 신문은 1609년 독일에서 만든 ‘아비소’입니다. 그 뒤로 1618년 네덜란드에서 ‘티딩 에이트 페르세이데네 콰티에렌’이, 1622년 영국에서 ‘위클리 뉴스’가, 1963년 프랑스에서 ‘가제트’가 창간되었습니다. 그러다가 1660년에 독일에서 ‘라이프치거 차이퉁’을 매일 발행하여, 최초의 일간 신문이 만들어졌습니다. 그 뒤로 1702년에 영국의 ‘데일리 쿠랜트’와 1777년에 프랑스의 ‘주르날 드 파리’가 발행되었습니다.
그 뒤로 전 세계 곳곳에 수많은 신문사가 생겨, 더 많은 소식과 정보를 실어 나르기 바빴습니다. 1919년에는 최초의 타블로이드(보통 신문의 1/2 정도의 크기인 소형신문) 대중지 뉴욕 데일리 뉴스가 창간되어 발행부수가 백만 부를 넘기도 했습니다.
우리나라는 고종 20년(1883년), 일본에 수신사로 다녀온 박영효가 고종의 허락을 받아, 박문국에서 ‘한성순보’라는 최초의 순간(旬刊 10일마다 발행)신문을 발간했습니다. 1896년에 서재필 박사가 순한글로 인쇄된 ‘독립신문’을 창간한 뒤로 협성회보, 제국신문, 대한매일신보 등이 쏟아져 나왔으며, 조선일보와 동아일보가 창간되어 지금에 이르고 있습니다.

산업의 발달에 기여한 신문
대부분의 신문은 독자들에게 정보와 새로운 소식을 알고자 하는 궁금증을 풀어주는 대가로 구독료를 받아 발간됩니다. 신문은 국내외 사건과 정보를 알리는 구실을 할뿐 아니라, 사회에서 발생되는 여러 가지 문제점들을 해설과 논평으로 풀어주고 있어, 독자들의 이해와 판단에 도움을 줍니다. 또한 기업의 상품에 대한 홍보를 할 수 있어 산업 발전에 크게 기여하고 있습니다.

봉화와 파발
신문의 발달과 함께 발전한 것이 우편과 통신의 발달입니다. 지금은 인터넷 등의 첨단 통신 수단을 주로 사용하지만, 얼마 전까지만 해도 먼 곳에 소식을 전하기 위해서는 우편제도를 이용했습니다. 우편을 이용한 통신(편지)은 전화나 이메일, SNS 등의 통신 수단보다 시간이 오래 걸린다는 단점이 있지만, 짧은 말로 전할 수 없는 감정이나 마음을 잘 전할 수 있는 통신 수단으로 사랑받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우편 제도가 생기기 전에는 어떻게 소식을 주고받았을까요?
아주 오랜 옛날에는 ‘봉화’와 ‘파발’을 이용했습니다. 봉화는 높은 산꼭대기에 봉화대를 만들어 낮에는 연기로, 밤에는 불을 피워 소식을 전하는 것이었습니다. 특히 봉화대는 적의 침입을 알리는 중요한 군사시설로서 군인들이 24시간 지키고 있었는데, 먼 곳에서 적이 침입해도 빠른 시간에 다른 지방이나 중앙 정부에 알릴 수 있는 훌륭한 통신 수단이었습니다. 파발은 말을 타고 전하는 기발과 사람이 직접 달려가서 전하는 보발이 있었습니다. 편지나 물건을 갖고 출발하면 일정한 거리마다 발소(정류장)가 있어서 그곳에 대기하고 있는 사람에게 편지나 물건을 전달하여 목적지까지 보내는 방법이었습니다.

우편제도를 꽃 피운 우표의 탄생
그런데 이러한 파발 제도는 보내는 사람이 직접 배달꾼을 찾아 맡겨야 했기 때문에 시간도 많이 걸리고 비용도 많이 들었으며 분실 사고도 자주 일어났습니다. 그래서 물건을 보내는 일을 담당하는 우체국을 만들게 되었고, 18세기에는 우편마차가 생겨 한꺼번에 많은 우편물을 배달하기에 이르렀습니다. 
1939년, 영국의 교육자 로랜드 힐은 우연히 젊은 여자와 우체부가 다투는 것을 보았습니다.
“글쎄, 나는 이 편지를 안 받겠다니까요?”
“이 편지는 당신에게 온 건데 안 받으면 어쩝니까?”
“나는 비싼 돈을 내면서까지 그 편지를 받고 싶지 않아요. 그러니 도로 가져가세요!”
당시에는 우편물을 받는 사람이 우송료를 부담해야 했기에 일어난 다툼이었습니다. 힐은 그 장면을 보면서 궁리했습니다.
‘배달료 때문에 우편물을 받기 싫다고? 그래! 용건이 있는 사람이 우편물을 보내는 거니까 우송료는 당연히 보내는 사람이 내야지.’
힐은 그렇게 해서 우편물을 보내는 사람이 우송료를 지불하고, 우송료를 냈다는 것을 표시하기 위한 표를 개발했습니다. 그것이 바로 ‘우표’입니다. 그는 정부로부터 많은 상금을 받았고 ‘우표의 아버지’라는 명예도 얻었습니다.
처음에 우표는 일일이 가위나 칼로 잘라 봉투에 풀로 붙여야 했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우표 사이에 작은 구멍을 내어 손쉽게 잘라 쓸 수 있게 하였고, 뒷면에 아라비아 고무액을 칠해서 물기가 닿으면 종이에 잘 붙게 하였습니다.
▲ 우표를 발명한 영국의 로랜드 힐.
작은 것에서 시작되는 큰 변화
발명이란 비행기나 자동차 같이 반드시 커다란 형체가 있는 것을 만드는 것만이 아닙니다. 비록 작은 것이지만 새롭고, 사람들에게 필요한 것을 만들어내는 것도 훌륭한 발명입니다. 아주 작은 것이라도, 사람들이 생활하는 데에 불편한 것이 없는지 주위를 살펴보면, 생활에 변화를 줄 수 있고 큰 발전을 불러올 수 있습니다. 어린이 여러분도 주변에 대한 애정 어린 관찰력과 상상력을 가지고 발명가의 꿈을 키우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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