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보는 것이 다 사실일까?
내가 보는 것이 다 사실일까?
  • 키즈마인드
  • 승인 2015.12.17 1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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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국의 수린 군도에 사는 모겐족은 평균 시력이 4.0∼9.0이나 된다고 해요. 이렇게 놀라운 시력의 비결은자연에서 생활하며 먼 들판과 구름을 많이 쳐다보기 때문이라고 해요. 그러면 그들은 잘못 보는 것이 없을까요?  이번 호에서는 우리 눈에 대해 알아보고 무엇을 어떻게 볼 것인지 생각해봐요.

우리 눈의 한계
시력이란, 우리가 눈을 통해 사물을 보는 능력을 말해요. 빛의 도움을 받아 망막에 상이 맺히면 망막의 시신경을 통해 대뇌로 전달되어요. 그렇게 전달된 자료를 통해 사물을 인식하는 것이지요. 그런데 우리 눈은 아무리 잘 보려고 해도 보는 능력에 한계가 있어요. 때로는 아무리 잘 보려고 해도 착각을 하기도 하지요.
 
 
이와 같이 우리 눈이 실제와는 다르게 보는 것을 착시라고 해요. 거리에 따라, 혹은 주변 조건에 따라 같은 크기의 사물이 다르게 보이기도 하고 같은 색깔이 다르게 느껴지지요. 중요한 것은 ‘이렇게 약한 감각능력을 가진 눈을 100% 믿을 수 있는가?’ 하는 거예요.

어떤 면을 보느냐
같은 장면이라도 어디에 초점을 두고 보느냐에 따라 전혀 다른 결과를 불러오기도 해요.
아래 사진을 보면 아랍인으로 보이는 한 군인이 미군의 포로로 잡혔어요. 포로는 지친 듯 주저앉아 눈을 감고 있어요. 그런데도 미군은 경계를 풀지 않고 포로의 머리에 총부리를 겨누고 있어요. 아랍의 한 방송사는 이 사진을 뉴스로 내보내 “미군이 너무했다. 저항할 힘도 없는 포로를 잔인하게 대하다니!” 하고 공분을 일으켰어요. 
 
다음 사진을 보면, 미군이 포로로 잡힌 아랍 군인에게 물을 먹여주고 있어요. 이 장면은 미국 방송사인 CNN에 보도되어 “나라도 사상도 다른 적군이지만 미군은 포로에게도 따뜻한 배려를 베풀었다.”는 여론을 일으켰어요.
 
그런데! 옆에 두 장면은 실제로는 하나의 사진이에요. 똑같은 장면을 어떤 각도로 어디에 초점을 맞추고 보느냐에 따라 느낌과 결과가 전혀 달라지지요.
 
이처럼 우리가 ‘본다’는 것은 불완전하고 얼마든지 혼동할 수도 있고 사람마다 다르게 느낄 수도 있어요. 그래서 우리는 우리가 본 것을 100% 사실이라고 믿어서는 안 돼요. 그런데도 우리는 “내가 이 두 눈으로 똑똑히 봤어!” 하며 자기가 본 것을 사실로 여기고 주장할 때가 많아요. 그래서 사람들과 다툼이 일어나기도 하고 중요한 일을 그르치기도 하지요.
그렇다면 어떻게 보는 것이 가장 잘 보는 것일까요?

무엇을 보느냐가 아닌 어떻게 보느냐
1. 신체의 눈
사람에게는 세 가지 눈이 있어요. 그래서 똑같은 사물과 상황을 두고 어떤 눈으로 어떻게 보느냐에 따라 우리 인생은 크게 달라지지요.
첫째는 사물을 있는 그대로 볼 수 있는 신체의 눈이에요. 눈은 겉으로 보면 까만 눈동자 부분과 흰 자위밖에 안 보여요. 그런데 알고 보면 아주 복잡한 구조로 이루어져 있어요. 망막, 모양체, 홍채 등 여러 기관이 각각의 역할을 담당하며 우리에게 날마다 새로운 정보를 만들어주지요.
우리는 자라면서 많은 것을 봐요. 눈을 통해 뇌로 전달된 데이터들은 새로운 지식을 만들어내지요. 그런데 앞서 이야기한 것처럼 우리 눈은 불완전한 감각기관이기 때문에 사실을 잘못 받아들이기도 쉬워요. 예를 들어 밤하늘에 반짝이는 별이 우리 눈엔 작게 보이지만, 실제로 별은 우리가 살고 있는 지구만큼 어마어마하게 큰 것이 많아요. 우리는 너무 멀리 있거나 너무 가까이 있는 것은 제대로 볼 수 없어요. 게다가 아주 천천히 바뀌는 것은 감지하지 못하고요. 이렇게 우리가 작다고 생각하는 것이 작지 않은 경우가 많고 우리가 옳다고 생각하는 것이 틀린 경우도 많아요. 그렇기 때문에 ‘내가 본 것이 항상 맞는 것은 아니구나!’ 하는 사실을 명심해야 해요.

2. 사고의 눈
우리 얼굴뿐 아니라 머릿속에도 눈이 있다는 것을 아나요? 바로 사고의 눈, 생각하여 보는 눈을 말해요.
예를 들어 아침에 집을 나서는데 땅바닥에 얼음이 얼어 있는 것을 보았어요. 그것은 신체적인 눈으로 얼음을 본 것이지요. 그런데 우리 머릿속에서는 ‘어머, 얼음이 얼었네. 오늘 기온이 영하로 떨어졌구나. 미끄러지지 않게 조심해야겠네.’ 하는 생각을 하지요. 이것은 생각하는 사고의 눈으로 보는 것이에요. 사람에게 이러한 사고의 눈이 없다면, 겉으로 보이는 것만 받아들여서 판단하기 때문에 삶이 발전할 수 없어요. 또한 다른 사람의 마음을 살필 수 없어서 원만한 대인관계를 형성하기 어려워요. 신체적인 눈도 시력이 좋아야 많은 것을 볼 수 있고 멀리 있는 것도 정확하게 볼 수 있듯이, 사고의 눈의 능력이 좋아야 상황을 정확하게 보고 대처할 수 있어요. 

 3. 믿음의 눈
세 번째 눈은 바로 믿음으로 보는 눈이에요. 우리가 눈으로 보고, 생각하고 사고하여 보는 것도 중요하지만 우리 눈으로 볼 수 없는 것을 믿는 믿음의 눈이 꼭 필요해요.
헬라어에는 ‘보다’의 뜻을 가진 단어가 여러 개 있는데, 그 중에 눈으로 단순히 사물을 보는 것을 ‘블레포(blepo)’라고 해요. 깊이 생각하고 사고해서 보는 것을 ‘데오레오(theoreo)’라고 하지요. 그리고 하나님의 눈으로 보게 하시는 것을 보는 것을 ‘호레오(horeo)라고 해요.
요한복음 20장에 보면, 예수님이 십자가에 돌아가시고 시신을 무덤에 넣고 돌문으로 막았어요. 예수님이 죽으신 지 사흘 째 되는 날, 이른 아침에 마리아가 예수님의 무덤을 찾아갔어요. 이때 마리아는 돌문이 옮겨진 것을 보았어요. 이때는 헬라어 성경에 ‘블레포’라고 되어 있어요. 단순히 돌문이 옮겨진 사실만 보았다는 것이지요. 그 다음에 베드로는 예수님의 무덤이 비었다는 소식을 듣고 달려와서 무덤에 예수님을 쌌던 세마포와 수건만 남아 있던 것을 보았어요. 이때는 ‘데오레오’라는 단어를 썼어요. 베드로가 예수님의 무덤이 빈 것을 보고 ‘예수님의 무덤이 왜 비었지? 어째서 세마포와 수건만 남아있지?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하며 생각하며 보았다는 뜻이지요. 그리고 다시 마리아는 무덤에 찾아와 부활하신 예수님을 보았어요. 이때는 ‘호레오’라는 단어를 썼어요. 바로 하나님이 마리아에게 보여주신 영적인 세계를 마리아가 보았기 때문이에요.

 

이러한 믿음의 눈을 가진 사람은 하나님의 말씀 안에서 자기 모습을 보고 자기에게 일하실 것을 믿고 살아요. 자신의 눈으로 자기 모습을 보면 형편없지만 하나님의 눈으로 자신을 보면 ‘하나님은 나를 의롭게 하시고 영원히 온전하다고 하셨어’ 하고 자신을 온전한 사람으로 볼 수 있어요. 또한 자신이 처한 형편을 신체적인 눈으로 보면 ‘나는 왜 잘하는 게 없을까?’ ‘나는 몸이 너무 약해서 문제야.’ 하고 실망할 수밖에 없어요. 그런데 믿음의 눈을 가진 사람은 ‘하나님은 나를 어떻게 보시지?’ ‘그래, 나는 부족하지만 하나님이 도우시면 되잖아.’ ‘내가 지금은 약하지만 하나님이 건강하게 해주실 거잖아.’ 하고 소망을 가질 수 있어요.
 
여러분에게는 세 가지 눈이 고르게 자라고 있나요? 여러분의 몸과 눈이 자라듯이 사고하는 눈이 자라고 믿음의 눈이 밝아져서 보다 가치 있고 뜻 깊은 인생을 살기를 바라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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