착한 일을 이루시는 하나님
착한 일을 이루시는 하나님
  • 박영준(부산대연교회 목사)
  • 승인 2016.02.26 15: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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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도의 삶

예수의 날까지 이루실 줄을 확신하노라
로마서 5장에 우리가 연약할 때, 죄인 되었을 때, 원수 되었을 때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일하셨다는 말씀이 나옵니다. 이 말씀이 우리 마음에 참 행복을 가져다줍니다. 우리가 무얼 잘하고 열심히 할 때가 아니라, 주님과 전혀 상관없이 죄를 짓고 원수의 길에 서 있을 때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일하셨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할 일은 그 사실을 믿는 것뿐입니다. 그래서 내 모습과 상관없이 나는 거룩하다고, 의인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구원, 하나님의 의, 은혜는 내 모습과 전혀 상관없이 주어지는 값진 선물입니다.
 야곱은 형 에서와 자신의 모습을 비교해 보면서, 자신으로서는 아버지를 기쁘게 할 수 없다는 사실을 정확하게 알았습니다. 그랬기에 어머니 리브가의 말을 그대로 받아들이고 따를 수 있었습니다. 베데스다 연못가에 있었던 많은 병자들 가운데 38년 된 병자만 ‘나로서는 안 된다’는 마음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구원자에게만 소망을 두었습니다.
 우리로서는 안 되기에 예수님이 해놓으신 일을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물에 빠진 사람이 도움만을 기다리는 것과 같습니다. 그런데 오늘날 많은 성도들이 신앙생활을 하면서 자신의 행위가 좋아야 할 것이라는 생각을 가집니다. 신앙은 우리가 노력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되는 것입니다.
“너희 속에 착한 일을 시작하신 이가 그리스도 예수의 날까지 이루실 줄을 우리가 확신하노라.”(빌 1:6) 이 말씀에 따르면 착한 일을 시작하신, 곧 우리를 구원하신 하나님이 앞으로의 일도 이루신다고 되어 있습니다. 우리가 의롭게 되는 것도 우리 조건에 달린 것이 아니고, 그리스도인으로서 살아가는 삶 또한 우리가 아닌 주님으로 말미암아 이루어진다는 사실을 성경은 정확하게 보여 줍니다.

 

 

회중이 한 일은 아무것도 없었다
“만일 이스라엘 온 회중이 여호와의 금령 중 하나라도 그릇 범하여 허물이 있으나 스스로 깨닫지 못하다가 그 범한 죄를 깨달으면 회중은 수송아지를 속죄제로 드릴지니, 그것을 회막 앞으로 끌어다가 회중의 장로들이 여호와 앞에서 그 수송아지 머리에 안수하고 그것을 여호와 앞에서 잡을 것이요”(레 4:13~15)
모세가 애굽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이끌어냈습니다. 성경학자들은 당시 이스라엘 백성이 장정만 60만 명, 여자와 아이까지 포함하면 200만 명 정도 되었다고 말합니다. 그렇게 많은 사람들의 죄를 씻을 때 하나님이 주신 방법이 레위기 4장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먼저 회중이 죄를 깨달은 후 수송아지를 한 마리 끌고 오면, 회중을 대표하는 장로들이 백성을 대신하여 수송아지의 머리에 안수합니다. 백성들이 일일이 안수하지 않아도 장로들이 대표로 안수하면 하나님은 온 회중의 죄가 수송아지에게 넘어간 것으로 보십니다. 그 다음에 제사장이 수송아지를 잡아 속죄제사를 드립니다.
여기에서 중요한 것은, 그 많은 회중이 자신들의 죄를 씻는 일에서 자신들이 한 일은 아무것도 없다는 것입니다. 그들이 놀고 있든지 자고 있든지 상관없이 장로들이 안수함으로, 수송아지가 죽음으로 그들의 죄가 사해지는 것입니다.
 신약 성경에서는 세례 요한이 인류의 대표자로서 하나님의 어린양인 예수님에게 안수하고, 예수님이 죽으심으로 온 인류의 죄가 사해지는 이야기가 나옵니다. 구약에서 신약까지 성경은 구원과 그 후의 삶이 우리와 상관없다고 정확하고 자세히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잘할 때가 아니라 연약할 때, 죄인이었을 때, 원수 되었을 때 예수님께서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서 죽으셨습니다. 이를 믿음으로써 우리가 구원받았고, 예수님이 우리 마음에 들어오셨습니다. 구원받은 많은 성도들이 “우리가 뭘 할 수 있나? 예수님이 하셔야지”라고 말합니다.
 그런데 실제 삶에서는 예수님께서 그들 대신 일하시는 것이 나타나지 않습니다. 왜 우리를 구원하는 일을 이루신 예수님이 더 이상 일하시지 않습니까? 성도들이 그 마음을 자기 생각에 내주고 그 생각에 끌려가기 때문입니다. 착한 일을 시작하신 이가 앞으로의 일도 다 이루시는데, 이 말씀에 대한 믿음이 없기 때문에 스스로 뭔가를 해야 할 것 같은 생각으로 살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또한 고난도 받게 하심이라
사도 바울이 감옥에 있었을 때 에베소 교회, 골로새 교회, 그리고 빌립보 교회에 편지를 썼습니다. 그것이 에베소서, 골로새서, 빌립보서입니다. 에베소서와 골로새서는 ‘신실한 자들에게 편지한다’는 내용으로 시작하는데, 빌립보서에는 ‘신실한 자들’이라는 말이 없습니다. 왜 그런지 생각하며 빌립보서를 자세히 읽어보았습니다.
 빌립보 성도들은 처음에 큰 문제나 어려움 없이 편안하게 살았습니다. 그 후 고난과 어려움이 찾아오고, 그 속에서 그들이 점점 신실한 자로 변해가는 것을 볼 수 있었습니다. 하나님이 고통과 어려움을 통해 빌립보 성도들을 하나님만을 바라보는 신실한 자들로 이끌어 가신 것입니다.
“그리스도를 위하여 너희에게 은혜를 주신 것은 다만 그를 믿을 뿐 아니라 또한 그를 위하여 고난도 받게 하심이라. 너희에게도 같은 싸움이 있으니 너희가 내 안에서 본 바요 이제도 내 안에서 듣는 바니라.”(빌 1:29~30)
 하나님께서 이루시는 착한 일 속에는 고통도 있고 어려움도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주신 소원이 우리 마음에 들어온다면
하나님은 모든 것을 다스리는 왕의 성품도, 섬기고 희생하는 종의 성품도, 모든 전쟁에서 이기는 승리자의 성품도 가지고 계십니다. 성경을 보면 이러한 성품들이 하나님의 마음을 받은 인물을 통해 나타납니다. 요셉에게는 하나님이 주인의 마음을 넣으셔서 그를 이끌어 애굽의 치리자로 만드셨습니다. 다윗은 왕으로서 어디를 가든지 이기게 그의 마음을 이끌어 가셨습니다. 예수님은 종의 형체를 가지고 이 세상에 오셔서 사람들을 섬기시고 인류의 죄를 지고 돌아가셨습니다.
 하나님의 마음이 사람들에게 들어가면 주인, 승리자, 종 등 하나님의 성품을 가지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이런 일은 하나님이 이끌어 가시는 것이지, 절대로 인간이 이루는 것이 아닙니다. 
 “너희 안에서 행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니 자기의 기쁘신 뜻을 위하여 너희로 소원을 두고 행하게 하시나니”(빌 2:13)
 하나님께서 구원받은 우리를 만들고 이끌어 가십니다. 성도 한 사람 한 사람의 마음에 하나님의 기쁘신 뜻을 위하여 소원을 두게 하십니다. 하나님께서 하시고 싶은 일을 우리 마음에 나타내셔서 우리로 하여금 요셉처럼 주인의 삶을, 다윗처럼 승리자의 삶을, 예수님처럼 희생하며 섬기는 삶을 살게 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주신 소원이 우리 마음에 들어온다면 그렇게 살기에 충분합니다.
 우리가 구원받은 것이 100% 하나님의 은혜였던 것처럼, 착한 일을 시작하신 하나님께서 우리 삶도 100% 이끌어 가십니다. 그 사실을 믿고 사는 삶이 처음에는 서툴지만, 자신에게 기대를 두지 말고 우리 마음에 소원을 두고 행하시는 하나님의 마음을 따라 살아가는 여러분이 되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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