캄보디아를 물들이는 복음
캄보디아를 물들이는 복음
  • 담당 김양미 편집장
  • 승인 2016.03.28 10:45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해외 교회를 찾아서_캄보디아 프놈펜교회
 
 

교회 역사

20년 전인 1996년 3월 25일, 하철 선교사가 아내와 딸과 함께 베트남을 거쳐 캄보디아에 도착했다. 선교 초기, 하 선교사에게 가장 큰 난관은 단연 언어였다.
 “캄보디아어를 한마디도 몰랐죠. 수소문 끝에 영어를 아는 분을 만나 배우기 시작했어요. 3개월쯤 지나자 선생님이 우리를 가르치는 것이 너무 힘들다며 떠나버렸어요. 우리 영어 실력도 서툴고, 그분도 외국인에게 캄보디아어를 가르쳐본 적이 없어서 어려웠던 것 같아요.” (하 철 선교사)
 당시 캄보디아에는 외국인이 캄보디아어를 배울 수 있는 프로그램이 전혀 없었다. 하 선교사는 한-영사전과 영-캄사전을 펼쳐 놓고 모기장 안에서 단어를 외우며 독학했다. 그해 11월, 박옥수 목사 동남아 전도여행 때 캄보디아에서 첫 집회를 가졌다. 박옥수 목사가 한국 말로 1분 정도 설교하면 하 선교사는 4~5분에 걸쳐 손짓 발짓까지 동원하며 통역해야 했다.
 힘들게 말을 배워 어느 정도 할 수 있게 되자, 하 선교사는 주변 마을들을 찾아다니며 성경 말씀을 전했다.
 “나무 그늘 아래서 사람들을 모아놓고 말씀을 전하는데, 반응이 전혀 없었어요. 마치 돌부처를 앞에 두고 바늘로 찌르는 것 같았어요. 한 시간 말씀을 전하고 나면 온 몸에 힘이 빠져서 아내를 오토바이에 태우고 털털거리며 왔던 기억이 납니다.”
 무엇보다 하 선교사를 힘들게 했던 것은 ‘지식층이 다 죽고 무지한 사람들만 남아서 이렇게 반응이 없는 것인가?’라는 절망적인 생각이었다.
 2년 후, 하 선교사는 폐결핵에 걸려서 일시 귀국했다. 병들어 몸도 마음도 지친 그에게 “하나님! 캄보디아에 복음을 전하실 때에 하 선교사를 사용해 주시기 바랍니다”라는 박옥수 목사의 기도가 소망을 주었다.
 

 

1997년 2월 4일, ‘프놈펜 침례교회’이름으로 종교등록증이 나왔다. 기존 교단에서 인정해 주지 않으면 결코 안 되는 일로, 하나님이 도우셔서 가능했다. 1999년에는 두 명의 형제와 함께 선교학교를 시작했다. 지금은 네 명의 현지 전도자가 있고, 네 명의 선교학생이 훈련받고 있다.
 요즘 캄보디아에서는 IYF 활동이 매우 활발한데, 그 시작은 10여 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2004년 어느 날, 한 형제가 찾아와서 ‘IYF를 NGO 단체로 등록합시다’라고 해요. 당시 저는 NGO가 뭔지 잘 몰랐지만, 형제가 좋은 거라고 하길래 진행해보라고 했죠.”
 그는 하 선교사에게서 복음을 듣고 구원받은 대학생이었다. 그 형제는 현지인 전도자 폴과 함께 일을 추진했고, 하나님이 길을 열어 주셔서 마침내 IYF가 NGO 단체로 등록되었다.
 

 

2004년 8월, 캄보디아 외무부와 캄보디아 IYF가 양해각서MOU를 체결했다. MOU는 3년마다 재계약해야 하는데, 벌써 세 번째 계약이 성사됐다. 2010년에는 교육부와 MOU를 맺어 월드캠프를 본격적으로 시작했다. 2011년 4월에는 휴먼리소스Human Resources 대학, 2012년 4월에는 벨티그룹과 MOU를 체결했다. 벨티그룹의 리체잉 회장은 2011년 한국 월드캠프에 참석했고, IYF 고문으로 위촉되어 든든한 협력자로 활동하고 있다.
 프놈펜교회는 한국 교회의 인도를 좇아 2015년에 여섯 번의 캠프를 열었다. 2016년에도 역시 여섯 번의 캠프를 준비하고 있다. 올해부터 마하나임 사이버바이블트레이닝센터도 시작했다. 형제 자매들이 성경을 체계적으로 배워 복음의 일꾼이 되고, 내년부터는 현지 교회의 많은 목회자들도 말씀을 배우게 될 것이라고 한다.
 프놈펜교회는 앞으로 해야 할 일이 많은데, 특별히 FM 라디오 방송국과 벨티대학 내에 음악학교 설립을 위해서 기도하고 있다고 한다.

목회자 간증

폴포트군 병사에서 복음의 군사가 되어

 

내가 열 살이던 1970년 캄보디아에 내전이 일어났다. 학교가 문을 닫아 더 이상 공부할 수 없었다. 나는 폴포트군에 잡히지 않으려고 숨어 살았지만 열여섯 살에 잡혀서 군대에 끌려갔다. 그들은 어린 학생들에게 총을 들게 했고, 물건을 훔치는 사람들을 잡으라고 했다. 만약 잡지 못하면 내가 죽어야 했다. 너무 고통스럽고 두려웠다.
 1979년에는 폴포트군과 베트남군 사이에 전쟁이 일어났다. 베트남군이 승리해 폴포트 병사들은 깊은 숲 속으로 숨어 들어가야 했다. 그곳에서의 삶은 너무나 고통스럽고 비참했다. 먹을 것이 없어서 나무줄기를 뜯어 먹고, 동물을 잡아먹었다. 짐승과 다를 바 없는 삶이었다. 아무 희망이 없었다. 시간이 지나 정부가, 숨어 사는 폴포트군 병사들이 고향에 갈 수 있도록 허락해 주었다. ‘이젠 행복할 수 있으리라’는 소망으로 고향에 돌아왔다. 그러나 내 삶은 여전히 어둡고 힘들었다.
 1999년 어느 날, 구원받은 한 형제의 권유로 하철 선교사님을 만났다. 처음에는 하 목사님이 하시는 말씀이 낯설고 이해되지 않았다. 하루는 목사님이 복음을 전하셨다. “우리는 죄인이다. 죄의 삯은 사망이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예수님의 피로 아무 조건 없이 우리 죄를 다 씻으셨다.” 그때 하나님이 복음을 이해할 수 있는 은혜를 베푸셨다. 수년 동안 고통과 괴로움 속에 살았던 내 마음에 죄를 사하신 하나님의 능력이 들어왔다. 그것은 조건이 없는 자유였다. 하나님이 죄 사함의 큰 은혜를 나와 내 가족에게 베풀어 주셨다.
 구원받은 후 어떻게 살아야 할지 몰랐을 때 하나님이 나를 잡아 주셨다. 프놈펜교회에서 우리 집까지 자동차로 세 시간이나 걸렸지만, 하 목사님이 1주일에 한 번 이상 찾아오셔서 말씀을 전해 주셨다. “육신의 생각은 사망이요, 영의 생각은 생명과 평안이니라.”(롬8:6) 이 말씀을 들으며 내가 육신의 생각을 따라 살았다는 사실을 알았고, “예수님, 이제 당신의 마음 따라 살게 해주세요”라고 기도했다. 그 뒤 선교학교에 들어가 훈련받고 전도자가 되었다.
 전도사로 있을 때 프놈펜교회 예배당을 지었다. 하 목사님은 나에게 건축에 필요한 물품 사는 일을 맡기셨다. 계산을 잘못하는 내게는 너무 힘든 일이었다. 물건을 살 때 영어로 된 물품명을 알아듣지 못해 무척 어려웠다. 내가 얼마나 부족한 사람인지 보았다. 그때 “너희 중에 누구든지 지혜가 부족하거든 모든 사람에게 후히 주시는 하나님께 구하라. 그리하면 주시리라.”(약 1:5)는 말씀이 떠올라 기도하기 시작했다. 예배당이 완공될 때까지 기도했고, 하나님이 은혜를 베풀어주셨다. 그후 IYF를 NGO 단체로 등록하는 일에도 하나님이 한 형제와 함께 쓰임받게 해주셨다.
 큰 고통 속에서 나를 구원하시고 복음을 전하는 이 귀한 일에 나를 불러 쓰시는 하나님께 영광을 돌린다. 라이 소폴 목사

성도 간증

20대를 하나님을 배우며 살 수 있어서 행복하다

 

나는 2013년에 단기선교사로 캄보디아에 왔고, 지금은 벨티국제대학교 영어커뮤니케이션학과
4학년에 재학중이다.
 부모님 앞에서는 착하고 예쁜 딸이었지만 내 생각만 믿고 살았던 나. 캄보디아에서 지내는 동안 내 삶의 결정권이 내게 있지 않고, 삶에서 일어나는 일들이 모두 하나님의 계획을 따라 결정되는 것임을 알았다. 갈릴리 가나 혼인 잔칫집에서 포도주가 모자랐을 때 하인들이 예수님의 말씀대로 움직였던 것처럼 나 역시 목사님의 인도를 따르는 삶이 가장 복되고 아름답다는 사실도 알았다.
 이곳에는 유학생들이 20명 있어서 1인 다역을 한다. 공부, 행사와 캠프 진행, 합창단원 활동, 통역과 번역, 거기에 문서 편집 일까지. 나는 요즘 마하나임 바이블트레이닝센터에서 번역과 통역 일을 하고 있다. 현지인 언니와 함께 30분 분량의 강의를 하루 종일 손으로 적고 더빙하고 편집한다. 일이 더디게 진행되어 지치고 힘들 때마다 아버지 같은 선교사님이 우리를 이끌어 주시는 것이 감사하다. 20대의 젊은 날을, 하기 싫은 일도 하고 못 해낼 것 같은 일들도 하나님을 의지하여 발걸음을 내딛으며 보내는 것이 즐겁다. 하나님이 이루심을 배우며 살 수 있어서 행복하다. 이찬미

행복했던 크리스마스 칸타타 공연 도전

 

나는 공부를 잘하지 못해 중학교만 졸업했다. 그래도 성실하게 일했기에 마을 사람들이 자꾸 결혼하라고 권했다. 어머니가 그 일로 프놈펜교회 사모님과 교제했고, 사모님의 인도로 가족이 프놈펜교회 옆으로 이사했다. 3년 정도 교회 일을 돕다가 지금은 전깃줄을 만드는 공장에 다니고 있다. 공장에서 일하는 것이 힘들지만 퇴근한 뒤 교회에서 합창단원들과 찬송을 연습하는 것이 행복하다.
 작년 12월에는 우리 교회 ‘뻐꾹새 합창단’이 그라시아스 합창단의 크리스마스 칸타타 공연에 도전했다. 캄보디아에는 음악 수업이 없기 때문에 악보도 볼 줄 모르는 우리가 크리스마스 칸타타를 공연한다는 것이 처음에는 믿어지지 않았다.
 공장에서 5시쯤 퇴근해 개인 연습을 하고 6시부터 단원들이 모여 하루 서너 시간씩 노래, 춤, 연기 등을 연습했다. 공장에서 일하다가도 시간이 나면 사람이 없는 곳을 찾아가 노래를 틀어놓고 혼자 춤을 추며 연습하기도 했다. 몸도 힘들지만 우리 실력을 벗어난 곡을 부른다는 것이 너무 어려웠다. 칸타타 3막 가운데 나는 1막에서 백성 역을 맡았고, 2막의 말썽꾸러기 안나 이야기에서는 빵가게 아저씨 역을 맡았다. 모든 곡을 피아노로 녹음해 그것을 계속 들으며 음을 익혔다. 한 번도 춤을 춰본 적 없는 내가 춤도 추고 노래도 하고 연기도 해야 한다는 것이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목사님께서는 ‘캄보디아에 많은 가수들이 있지만 하나님이 기뻐 들으시는 노래는 바로 구원받은 단원들이 모인 뻐꾹새 합창단의 노래’라고 말씀하셨다. 목사님의 말씀이 ‘정말 이 공연을 할 수 있을까? 이건 너무 어렵잖아’ 하고 불평하던 내 생각에서 벗어날 수 있게 해주었다. ‘하나님께서 우리 노래를 통해서 캄보디아 사람들에게 소망을 주시겠다!’는 소망이 내 마음에 생겼다. 
 두 달간의 연습을 마치고 드디어 작년 12월 22일과 25일에 프놈펜과 지방 도시에서 모두 세 번 크리스마스 칸타타를 공연했다. 2천여 명이 관람했는데, 캄보디아에서는 클래식 공연을 접할 기회가 없기 때문에 공연을 본 모든 관객들이 무척 감동하며 행복해했다. 우리가 어떻게 이런 큰 공연을 할 수 있었겠는가. 하나님이 아니면 우리는 결코 무대에 설 수 없는 사람들이다. 하나님의 은혜로 합창단 안에 있다는 것이 감사하다. 띠쓰러이 넝(뻐꾹새 합창단 알토 파트장)

 

캄보디아의 ‘뻐꾹새 합창단’
프놈펜교회 합창단은 2015년에 ‘뻐꾹새 합창단Porkukseh Choir’이라는 이름으로 거듭났다. 총 30명의 단원으로 구성되었고, 단원들은 모두 오디션을 통해서 선발되었다. 주일예배는 물론 전도 집회가 있을 때면 공연을 위해 개인 일을 다 뒤로 하고 공연에 함께한다. 아직은 전문적으로 지도해 주는 이가 없지만 하나님이 동남아 최고의 합창단이 되게 해주시리라는 믿음으로 연습한다. 음악 공부를 해본 적이 없었던 이들이 하나님을 앙망하며 노래하고 춤추고 연기하여 아름다운 크리스마스 칸타타 공연을 만들어냈다.

목사인 아버지가 구원받길 기도하며

 

나는 고등학생 때 학교에 붙여진 홍보물을 보고 2014 월드캠프에 참석했다. 가장 즐거웠던 때는 라이쳐스 스타즈 댄스와 세계문화공연 시간이었다. 캠프 이후에 프놈펜교회에서 갖는 모임에 계속 참석하며 말씀을 듣고 구원받았다. 예전에 나는 주변 사람들은 물론 가족에게도 내 마음을 이야기하지 않았는데, 구원받은 후 그동안 내가 나 자신을 믿고 살았고, 그것은 고통하고 실패하는 삶이라는 사실을 알았다. 이제는 사람들과 마음을 열고 이야기할 수 있고, 친구도 생겼다. 무엇보다 미워하던 아버지와 대화하며 마음을 나눌 수 있게 되어 감사하다. 지금 나는 벨티국제대학교 1학년이다. 앞으로 이곳 한국 대사관에서 일하고 싶고, 마하나임 바이블트레이닝센터에서 성경 공부도 하고 싶다. 목사님인 아버지는 월드캠프와  크리스마스 칸타타 공연에 오셨고, 선교사님과도 만나셨다. 우리 교회를 거짓으로 비방하는 사람들의 말 때문에 아직 마음을 다 여시지는 않았지만,  아버지가 구원받고 복음을 섬기며 살게 되길 간절히 기도한다. 쏘리야

선교사 간증

여기가 내 고향이며 내가 살아야 할 곳이다 / 하 철 선교사

캄보디아로 파송받기 한두 해 전, 동남아 전도여행 때 처음으로 캄보디아에 발을 내디뎠다. 저녁 8시만 되면 깜깜해 적막감이 드는 도로, 메콩강변에서 모포만 뒤집어 쓴 채 잠을 자는 사람들, 아이들의 초롱초롱한 눈, 가난하지만 순수한 사람들이 사는 나라, 그것이 캄보디아에 대한 나의 첫인상이었다. 그 해 겨울 수양회 때 박옥수 목사님이 나를 불러 물으셨다.
 “하 목사, 캄보디아를 위해 기도하고 있다면서?”
 “예?”
 내가 너무 놀라자 목사님께서 “그럼 기도해 보고 나에게 이야기하게”라고 하셨다. 정신없이 내려와서 접수처에 앉아 있는데, 김동성 목사님이 오셨다. 
 “하 목사, 캄보디아에 갈 때 컴퓨터 한 대 가져가야지?”
 나는 ‘이미 정해 놓았네. 내가 기도할 필요도 없잖아.’ 하는 마음이 들었다.
 그렇게 캄보디아 선교가 시작되었다. 나의 의지나 뜻으로 말미암지 않고 주님과 교회로 말미암아 선교가 시작되었다는 사실이 이후 선교지에서 문제를 만났을 때 내게 한없는 평안을 주리라고는 그때는 몰랐다.
 2003년 헌당예배를 마치고 아내가 자리에 누웠다. 몸이 점점 나빠져 결국 아내가 한국으로 갔다. 일주일이 지나자 암이라는 연락이 왔다. 수술도 할 수 없다고 했다. 하늘이 무너지는 것 같았다. “하나님! 캄보디아에 선교사로 왔는데, 아내가 암으로 죽는다니 이게 무슨 말입니까?” 앉아서도 “하나님”, 방 안을 거닐면서도 “하나님”, 견딜 수 없어 밖에 나가 하늘을 보면서도 “하나님, 하나님” 하고 하나님을 불렀다.
 그 즈음 내가 호주 수양회 강사라는 연락이 왔다. ‘지금 이런 상황에서 내가 무슨 말씀을 전할 수 있겠나?’ 억지로 성경을 펼쳤다. “주의 영이 계신 곳에는 자유함이 있느니라.”(고후 3:17)는 말씀을 읽었다. “예. 하나님. 내 안에, 내 아내 안에 주의 영이 계십니다. 이 말씀대로 암에서도 자유함을 주셔야 합니다.”그렇게 주님은 내 마음을 이끌기 시작하셨다. 벌써 십여 년 전의 일이다. 아내는 지금 건강하게 복음을 위해 살고 있다.
 내가 폐결핵에 걸려 한국에 갔을 때 나를 뜨겁게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마음을 알게 하셨고, 예배당 건축을 통해서는 종의 입에서 나오는 말씀이 곧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것을 깨우쳐 주셨으며, 아내의 암투병을 통해서는 하나님은 당신의 약속을 반드시 이루시는 분임을 가르쳐 주셨다. 뱃속에 있던 손자가 ‘다운증후군’이라는 진단을 받았을 때도 종은 “재앙은 하나님의 허락 없이 일어날 수 없다. 하나님이 한쪽 팔을 달라고 하면 드려야지 우리가 어떻게 피할 수 있나?”라고 하셨고, 그 말씀을 받아들였을 때 세상에서 가질 수 없는 평안을 누릴 수 있었다. 그리고 하나님은 아주 건강하고 귀여운 손자를 주셨다. 돌이켜보면, 선교를 위해서 나를 이 땅에 보내신 것이 아니라 내 영혼을 사랑하사 내게 주님을 가르쳐 주시려고 캄보디아로 보내셨다는 마음이 든다. 캄보디아는 내 고향이며, 내가 살아야 할 곳이다.
 “2009년에 10개국에서 월드캠프를 했고, 내년에는 30개국에서 월드캠프를 할 것입니다”라는 박 목사님의 말씀을 들으며 “30개국 속에 캄보디아도 들어가게 해주십시오”라고 기도했다. 그 해 우리는 1,000여 명의 학생들이 모인 가운데 첫 월드캠프를 개최했다. 눈물이 나도록 감사했다.
 지난 20여 년의 삶을 돌이키다 보니 감격스럽다. 나를 사랑하사 나를 이곳 캄보디아에 보내신 하나님께 감사드리지 않을 수 없다. 이곳이 아니었다면 결코 맛볼 수 없었던 주님을 가르쳐 주시고 내 삶을 복되게 하신 하나님. 올 한 해도 그 주님을 기대한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