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두커피에 복음을 싣고
원두커피에 복음을 싣고
  • 김진영(기쁜소식광명교회)
  • 승인 2016.08.03 11:36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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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월의 간증
 

나는 1973년 충남 당진의 작은 마을 합덕에서 사 형제 중 막내로 태어났다. 아버지는 새어머니 아래서 자라며 받은 서러움과 한을 자주 술로 달래셨고, 그때마다 우리는 아버지의 술주정을 피해 밖에서 밤을 새곤 했다. 추운 겨울날, 그날도 아버지 때문에 집을 나왔다. 둘째 형이 두 손으로 내 귀를 덮어주었는데, 내 귀보다 더 차갑게 느껴졌던 형의 손바닥이 아직도 기억에 생생하다.
 1980년 2월 내가 여덟 살 때 서울 미아리로 이사했고, 두 달 남짓 살다 다시 광명시로 이사했다. 여섯 식구가 누우면 딱 맞는 방 한 칸에 조그만 부엌이 딸린 전셋집이었다. 천정에서는 쥐가 바스락거렸고 부엌에는 벌레들이 많아 밥상과 반찬에 들어가는 일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많은 날들을 연탄가스와 싸우면서도 가난하여 병원 한 번 갈 수 없었던 시절을 보냈다. 가게에서 먹을 것을 훔치다 잡혀 얻어맞은 적도 수차례 있었다.
 중학생 때 나는 문제아였다. 친구들과 몰래 담배를 피우다 선생님께 잡혀 혼나고, 방과 후에는 본드에 취해 살았다. 내가 말썽을 부리면 바쁘신 부모님 대신 셋째 형이 학교에 불려가곤 했다. 어느 날 둘째 형의 일기장을 몰래 훔쳐보았다. 공부 잘하는 셋째에게 문제집을 구해주려고 헌책방에서 책을 훔쳐온 이야기가 적혀 있었다. 책을 들고 뛰며 “아저씨, 책 도둑은 도둑이 아니라면서요. 제가 커서 돈 벌면 꼭 다시 와서 갚을게요.”라고 쓰인, 형의 간절한 마음이 담긴 일기였다. 눈물이 쏟아졌다. ‘동생을 향한 형의 마음이 이런데 자식을 향한 부모의 마음은 오죽할까?’ 그 후로는 큰 사고를 내지 않고 고등학교에 진학했고, 졸업한 후 군에 입대했다.

‘왜 내게 이런 일이’
1996년에 제대한 후 다 찌그러진 컨테이너 하나를 구해 큰형님과 유통업을 시작했다. 상황이 많이 열악했다. 비가 오는 날이면 천장에서 빗물이 뚝뚝 떨어져 대여섯 개의 물받이 그릇을 받쳐놓고 일했다. 사업을 시작한 지 1년도 안 되어 IMF가 찾아왔는데, 그것이 유통업계에는 오히려 절호의 기회가 되어 호황을 누렸다. 1년 후 사업을 확장하여 80평 정도 되는 단독 건물에 들어갔다. 2000년에는 안산에 300평 땅을 사고 2층 건물을 지었다. 탄탄대로를 가는 듯했다.
 그런데 값싼 중국산 제품들이 밀려들어와 국내에서 생산한 제품들이 빛을 잃어갔다. 부채가 하루하루 눈덩이처럼 불어났다. 할 수 없이 땅과 건물을 매각해 빚을 정리하고 작은 건물로 이사했다. 그리고 인터넷 거래로 판로를 옮겼다. 포토샵부터 하나하나 배우며 일에 매진하다 보니 어느덧 월 매출이 1억 원이 되었다.
 대형마트 유통을 담당하셨던 큰형님이 건조대 공장을 인수하자고 하셨다. 좀 더 알아보고 진행하려 했는데 활시위를 떠난 화살처럼 일이 이미 빠르게 진행되었다. 공장을 인수한 지 정확히 석 달 후 일이 났다. 20년 넘게 호형호제하던 거래처에서 어음을 부도낸 것이다. 순식간에 모든 것을 잃었다.
 겨우 화물차 한 대를 가지고 나와 허름한 창고 하나를 얻었다. 그해 겨울, 난로를 피우려고 산에서 통나무를 메고 내려와 내려놓는 순간, 통나무가 왼쪽 발에 떨어졌다. 타박상 정도로 생각하고 집으로 돌아왔는데 고통이 너무 심했다. 그날 뜬눈으로 밤을 새웠다. 병원에 갔더니 발가락이 부러졌다고 했다. 심장이 멎는 듯했다. ‘일해야 하는데 왜 내게 이런 일이....’ 절망뿐이었다. 왼발에 깁스를 하고 절뚝거리며 세상을 한없이 원망했다.

“예수님이 이렇게 당신의 모든 죄를 짊어지고 가신 겁니다”
며칠이 지났다. 나에게 창고를 임대해준 세입자 사무실에 두세 명의 여성들이 가끔 찾아와 성경을 펴놓고 이야기하고 가는 것을 보았다. 이따금 우리 사무실에도 문을 열고 들어와 성경 이야기를 했다. 교회에 전혀 관심이 없는 내 눈에는 예수에 미친 사람처럼 보였다.
 한날은 나를 찾아와 뜬금없이 서울 올림픽공원 체조경기장에서 하는 성경세미나에 같이 가자고 했다. 잘 모르는 곳이라 따라가면 뭔가 잘못될 것 같아 약속하지 않았다. 며칠 후 이번에는 기쁜소식광명교회에서 하는 성경세미나에 가자고 했다. 광명은 내가 사는 동네라 한 번 참석했다. 마음이 복잡해서인지, 아니면 지금까지 쌓인 세상에 대한 원망 때문인지 말씀을 전혀 알아들을 수 없었다.
 며칠이 더 지나고 이번에는 인천에서 갖는 성경세미나에 가자고 했다. ‘인천은 잘 아는 곳이니까 가보자. 그냥 앉아만 있다 오자.’ 하며 따라갔다. 수많은 사람들 가운데 앉아 말씀을 들었다. 머리가 하얀 할아버지 목사님을 보았다. ‘저분은 어떤 분이시기에 처음 보는 사람에게 90도로 허리를 굽혀 먼저 인사하시지? 주위에 사람들도 별로 없는데 말이야.’ 강사 목사님의 남다른 모습에 마음이 열렸다.
 집회 마지막 날, 내 영혼을 구원하기 위해 유년시절부터 지금까지 수고와 아픔을 주신 예수님의 마음을 만났다. 그리고 부활절 칸타타 공연을 보았다. 조명이 어두워지자 중앙 통로에서 예수님이 십자가를 짊어지고 힘겹게 내려왔다. 그 뒤로 병사 하나가 채찍질을 하며 따라오는데, 공연에 심취한 나머지 벌떡 일어나 예수를 때리는 병사를 덮치고 싶은 충동이 일어났다. 집회 중에 들었던 강도 만난 자 이야기가 신기하게 눈앞에 그림처럼 펼쳐졌다. 내가 바로 강도 만난 자이고, 예수님이 나에게 찾아오신 것이 믿어졌다. 썩은 밧줄을 움켜쥐고 선하게 살아보려 했던 어리석은 내가 예수님의 옷자락을 만지는 순간이었다.
 말씀이 끝난 후 김광석 목사님이 다시 한 번 복음을 전해주셨다. 목사님은 나를 와락 끌어안으시며 “예수님이 이렇게 당신의 모든 죄를 짊어지고 가신 겁니다.”라고 하셨다.

“집이 있으라 하매 집이 있었고...”
집회가 끝난 후 기쁜소식광명교회에 나갔다. 내 인생이 새로 시작됐다. 나를 전도한 황미녀 자매가 무척 고마웠다. 어느 순간부터 사랑하는 마음이 생겼다. 나는 초혼이었고 아내는 이혼의 아픔이 있었다. 가족에게 황 자매와 결혼하고 싶다고 말씀드리자 충격에 빠졌다. 물론 당사자인 황 자매도 무척 당황하며 결혼할 수 없는 이유를 이야기했다. 주변의 반대가 굉장히 심했지만 내 마음은 평안했다. 나는 마음속으로 수없이 기도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처럼 나를 데리고 나가 밤하늘의 별들을 보여주셨다. 수많은 별들 중에는 나의 부모님도 계셨고, 나의 형제들도 있었다.
 목사님과 여러 차례 상담한 뒤, 2014년 겨울 기쁜소식광명교회에서 박성국 목사님의 주례로 결혼식을 올렸다. 방 한 칸의 작은 아파트에서 거동이 불편하신 장인어른을 모시고 신혼생활을 시작했다. 나는 사업에 대한 미련 때문에 가지고 있던 허름한 사무실을 정리하고 남은 물건을 아파트 입구에서 펼쳐 놓고 팔았다.
 어느 날, 아내가 커피 장사를 하자고 했다. 선뜻 내키지 않았지만 파라솔을 사고 커피를 준비해 저수지에서 장사를 시작했다. ‘누가 길거리에서 그런 커피를 사먹으랴 ….’ 커피 파는 일도 신통치 않고 돈벌이도 시원치 않아 자동차 안에서 잘 읽지 않던 성경을 펼쳤다.
 “빛이 있으라 하매 빛이 있었고 …”(창 1:3)
 말씀이 신기했다. ‘이게 뭐지? 있으라 하니 생겨나네? 그럼
“집이 있으라 하매 집이 있었고”라고 믿으면 하나님이 주시겠구나.’
 박성국 목사님이 기도로 필요한 돈을 받았다는 간증이 생각났다. “무엇이든지 기도하고 구하는 것은 받은 줄로 믿으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그대로 되리라.”(막 11:24) 이 말씀을 의지해 기도하며, 이루어지지 않을 것 같은 생각을 따라가지 말고 낙담하지 말라고 하신 목사님 말씀이 떠올랐다. ‘목사님에게 일하신 주님께서 내게도 일하시겠구나!’
 아내에게 바로 집을 보러 가자고 하여 공원 옆에 있는 아파트에 갔다. 작은 방이 두 개인 스무 평 남짓의 아담한 집이었다. 1층이어서 몸이 불편하신 장인과 함께 지내기에 더없이 좋은 곳이었다. 돈이 없어서 엄두도 낼 수 없는 집이었지만 우리 사정을 알고 있는 부동산 아주머니가 돈을 빌려주셨다. 그리고 부족한 나머지 돈은 어머니가 보태주셨다. 말씀 하나를 마음에 받았는데, 하나님이 집을 주셨다. 놀라웠다.

 

풀어놓아 다니게 하라
집이 생기자 커피숍을 갖고 싶었다. 파라솔을 펴놓고 커피를 파는 것이 마음에 내키지 않았다. 열심히 장사해 월세를 갚아나갈 마음으로 커피숍 할 곳을 찾아다녔다. 마음에 드는 가게가 있었지만 월세가 턱없이 비쌌다.
 어느 주일 예배 때 박성국 목사님이 죽은 나사로에 대해 말씀하셨다. 예수님이 “나사로야, 나오라!”(요 11:43) 하실 때 온몸에 전율이 흘렀다. 예수님이 나사로에게 하신 말씀이 꼭 나에게 하시는 말씀 같았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풀어 놓아 다니게 하라.”(요 11:44) ‘이거구나! 커피숍에 묶여 있지 말고 예수님이 풀어 놓아 다니라고 하시는구나. 그래, 커피카를 해보자!’ 이동식 차량에 커피숍을 차려 커피를 파는 커피카. 내 마지막 자존심을 지켜주던 외제차를 팔아 중고 라보 커피카를 샀다. ‘쎄라비’ 카페의 탄생이었다.

하나님 앞에 내 마음을 엎드렸다
교회 근처에 있는 등산로 입구의 쉼터에 자리를 잡고 장사를 시작했다. 자리를 잡기 무섭게 치열한 자리싸움을 맛보아야 했다. 단속 당하고 쫓기고, 단속 당하고 또 쫓기고를 반복했다. 쉽지 않았다. 돈을 벌고 싶은 마음을 따라가다 보니 더 힘들었다.
 ‘성도가 많은 곳에 가면 돈을 벌 수 있을 거야.’ 마음에 가득 찬 욕심을 숨기고 아내에게 성경세미나에 커피카를 끌고 가고 싶다고 했다. 하지만 내 마음을 다 아시는 하나님이 내게 그라시아스 합창단의 마음을 보여주셨다. 집회 마지막 날, 일주일 간의 성가 공연을 끝내고 피곤할 법도 한데 자신들의 짐과 무거운 음향기기와 스피커 등을 직접 트럭에 싣는 그라시아스 합창단의 단원들. 커피카에 앉아 그들의 모습을 지켜보며 머릿속이 멍해졌다.
 ‘돈만 아는 놈! 욕심만 가득 찬 놈!’
 나 자신을 향해 욕이 치밀어 올랐다. 너무 부끄러웠다. 그 자리에 주저앉아 하나님 앞에 엎드렸다. 그리고 얼굴도 잘 모르는 그라시아스 합창단 단원들에게 내 마음을 담은 음료를 무료로 드렸다. 단원들은 음료 한 잔에 연신 감사하다고 했다. 그것이 그라시아스 합창단과의 첫 만남이었다.
 그 후로 마음을 조이던 돈에 대한 압박이 온데간데없이 사라졌다. 그리고 합창단의 공연을 볼 때면 전에 느끼지 못했던 감동이 밀려왔다. 눈물을 흘릴 때도 많았다. 어느새 우리 부부는 합창단의 열렬한 팬이 되었다. 합창단이 가는 곳이면 어디든 따라다니기 시작했다. 하나님을 찬양하고 무대에서 내려오는 100여 명의 단원들에게 우리가 준비한 음료를 줄 수 있다는 것이 큰 행복이요, 기쁨이었기 때문이다.

 

선교회와 함께하세요
2015년 5월, 큰 사고가 났다. 충북 단양에서 있었던 소백산 철쭉제행사에 라보 커피카를 타고 갔다 오다 고속도로에서 뒹굴었다. 아내의 말을 무시하고 늦은 시간에 오다가 난 사고였다. 순식간에 고속도로가 아수라장이 됐다. 사고가 나면 대부분 죽는 곳이라는데, 옆으로 넘어진 차에서 멀쩡하게 나오는 우리 부부를 보고 사람들이 기적이라고 했다.
 “풀어 놓아 다니게 하라”는 말씀을 좇아 시작한 일인데, 하나님이 커피카를 하지 말라고 하시는 것인지 아니면 더 좋은 것을 주려고 그러시는 것인지 혼란스러웠다. 그때 “그거 아무것도 아니야. 그거 좋은 거야.”라고 하신 목사님 말씀이 생각났다. “그래! 이건 좋은 거래. 좋은 거야!” 사고를 계기로 우리 부부는 하나님과 한층 더 가까워졌다. 하나님이 더 좋은 것을 주신다는 말씀을 믿고 커피카를 1톤 차량으로 바꾸었다. 하나님의 선물 ‘쎄라비C’est La Vie(이것이 인생이다)’가 재탄생했다.
 작년에 대전에서 있었던 대전도집회 때, 그라시아스 합창단이 무척 보고 싶어서 무작정 커피카를 몰고 아내와 기쁜소식한밭교회로 향했다. 우리를 사랑하고 반겨주는 그라시아스 합창단이 정말 고마웠다. 집회 이튿날, 박옥수 목사님이 여러 사역자들과 함께 쎄라비에 오셔서 장사하는 데 애로사항이 무언지 물으셨다.
 “목사님, 커피카 영업은 합법이지만 장사할 곳이 제한되어 있어서 단속 때문에 어렵습니다.”
 “그럼, 이런 주차장이 있는 교회는 어떤가요?”
 “교회 행사는 단속이 없으니 문제가 없습니다.”
 “그렇다면 선교회와 함께하세요.”
 목사님의 한마디 말씀에, 단속으로 수없이 쫓겨 다녔던 시간들이 더 이상 서러움이 아닌 기쁨으로 다가왔다. 가슴이 뭉클했다.

“하나님의 은혜로 꼭 들어가세요”
2016년 3월, 서울시에서 ‘전국 3천 대의 푸드카 가운데 여의도한강공원에서 영업할 푸드카 30대를 모집한다’는 공고가 떴다. 서울시 거주자에게는 10점, 청년 창업자에게는 10점의 가산점이 있었다. 우리는 둘 다 해당사항이 없었다. 신청한 차들에 대한 품평회가 한 달 동안 치러졌다. 전국에서 온 푸드카들이 순차적으로 시험을 보았고, 우리 차도 품평회를 준비했다. 심장이 두근두근하며 몹시 떨리는 순간, “하나님의 은혜로 꼭 들어가세요.”라고 하신 박성국 목사님의 말씀을 생각하며 기도했다.
“우리 부부의 조건으로는 가능성이 없지만 전문 평가단과 시민 평가단이 심사할 때 하나님이 은혜를 베풀어 주실 줄 믿습니다. 아멘.”
 한 달 후, 합격했다는 연락을 받았다.
 “하나님, 감사합니다. 어찌 이런 바보 같은 저에게….”
 요즘은 금요일과 토요일 밤에 ‘한강 밤도깨비 야시장’ 행사장에 나간다. 시청 홍보팀에서 우리를 인터뷰한 영상을 페이스북에 올려주었는데, 그것을 보고 여러 모임이나 단체들이 우리가 장사하는 곳에서 번개팅을 잡아 차를 마시고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나와 아내는 기회가 될 때마다 그들에게 그라시아스 합창단의 공연들을 소개하고 초청했다.

 

 

사람들을 만나면 입술이 부드러워진다
평일에는 기쁜소식광명교회 인근 등산로의 쉼터에서 장사한다. 오고가는 사람들에게 나를 이끌어주시는 하나님을 이야기하다 보면 시간 가는 줄 모른다. 등산로 입구에는 사람들이 많이 모이기에 기성 교회에서도 나와 커피를 무료로 주며 전도지를 나눠준다. 처음에는 커피 파는 데에 방해된다고만 생각했다. 그러나 지금은 내가 그들에게 복음을 전한다. 예수 그리스도의 피가 우리의 모든 죄를 영원히 사하신 사실을 모른 채 전도지를 뿌리는 모습을 보면 마음이 몹시 안타깝기 때문이다.
 나는 입이 둔한 사람인데, 이상하게도 사람들을 만나면 돌처럼 굳어진 입술이 부드러워져서 복음을 전한다. 얼마 전에는 어느 교육단체장에게 복음을 전했다. 하나님이 그분의 마음에 일해주실 거라 믿으며 기도하고 있다. 오늘도 등산로 입구에서 여러 사람과 마음을 나누며 우리 가정을 복되게 이끌어 주시는 주님을 이야기한다.
 구원받은 후 고마우신 부모님께 복음을 전했다. 어린 시절, 술 때문에 집안 분위기가 늘 침체되고 어두웠다. 술을 드시지 않은 아버지의 모습은 온화하고 자상하셨기에 아버지는 내 마음에 커다란 버팀목이었다. 내가 사업에 실패해 고향으로 내려가셔야 했던 부모님을 생각하면 죄송해 눈물이 나온다. 부모님은 성당에 다니며, ‘예수님이 우리 죄 때문에 십자가에서 돌아가신 것은 알지만 살면서 짓는 죄는 내가 빌어서 씻어야 되는 것 아니냐’고 하셨다. 그때마다 히브리서 10장 14절의 “저가 한 제물로 거룩하게 된 자들을 영원히 온전케 하셨느니라.”라는 말씀과 로마서 3장 23~24절 등을 찾아 보여드렸다. 지난 어버이날에는 박옥수 목사님의 설교집 <죄 사함 거듭남의 비밀>을 선물했다. 얼마 전에 가보니 두 분이 책을 읽고 계신다고 했다. 무척 감사했다. 하나님이 부모님의 마음에 일해주시길 기도하고 있다.
 교회와 복음을 만나지 않았다면 나는 여전히 욕망에 사로잡혀 어둠 속에서 방황하고 있을 사람이다. 어쩌면 이 세상 사람이 아니었을 수도 있다. 하나님의 세계에 대해 완전히 무지했던 나에게 찾아오셔서 새 인생을 주신 주님, 쎄라비에서 만나는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시고 복음을 위해 삶을 드리는 그라시아스 합창단 단원들에게 음료 한 잔을 건넬 수 있는 행복을 주신 주님이 감사하다. 나와 아내와 가족들을 항상 빛 가운데로 인도해 주시는 주님께 영광을 돌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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