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의 시각을 바꾸면...
우리의 시각을 바꾸면...
  • 이헌목(기쁜소식양천교회 목사)
  • 승인 2017.01.04 19: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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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기는 삶
 

큰 비의 소리가 있나이다
3년 6개월 동안 비 한 방울 내리지 않은 오랜 가뭄으로 대지는 마르고 날씨는 화창하기만 한데, 하나님의 종 엘리야는 하나님께 받은 마음으로 “큰 비의 소리가 있나이다.”라고 아합 왕에게 외쳤습니다. 엘리야는 다시 아합 왕에게 “비에 막히지 않도록 마차를 갖추고 내려가소서.”라고 했습니다.
비가 올 것이라고 누구도 믿지 않았던 때에 엘리야가 큰 비의 소리가 있다고 한 것처럼, 우리도 형편을 넘는 소리를 외칠 수 있어야 합니다. 믿음의 종들은 자기 판단을 믿지 않습니다. 그래서 보이지 않지만 볼 수 있고, 만질 수 없지만 느껴서 그 사실을 믿음으로 말합니다.
2016년 한 해를 돌아보면, 우리 선교회에서 한 일들은 믿음으로 내디딘 발걸음의 연속이었습니다. 박옥수 목사님이 스와질란드 국왕의 초청을 받아 왕궁에서 복음을 전하시기 이틀 전만 해도 어떤 일이 있을지 전혀 예상할 수 없는 형편이었습니다. 잠비아 정부로부터 기증 받은 땅에서 기공식을 갖기 전날만 해도 대통령께 복음을 전할 수 있는 상황은 전혀 보이지 않았습니다. 케냐의 자치정부수립기념일에 초대받아 갔을 때에도 우후루 케냐타 대통령과 면담을 가질 가능성은 없었습니다. 얼마 전에 에티오피아를 방문했을 때에도 수상을 만날 수 있는 형편이 아니었습니다. 그렇지만 박 목사님은 “내게 광대하고 공효를 이루는 문이 열리고…”(고전 16:9)라는 말씀을 믿는 믿음으로 걸음을 내디뎠고, 약속대로 2016년에는 어느 해보다 놀랍게 복음의 문이 열렸습니다. 걸음을 내딛기 전에는 불확실하고 불가능해 보였지만, 주님이 항상 길을 열어 주셔서 만나는 누구에게든지 복음을 전할 수 있었습니다.
그동안 하나님의 종은 우리 생각과 맞지 않는 말씀들을 자주 했고, 말씀대로 이루어지는 것을 우리는 보았습니다.

무엇이 보이는가?
뉴욕 브룩클린에 위치한 ‘제퍼슨 메모리얼 병원’의 12층에 있는 좁은 병실에 죽음을 앞둔 두 환자가 있었습니다. 암으로 폐를 일부 잘라내 숨쉬기조차 힘든 ‘빈센트’와 사고로 척추를 다친 ‘파커’였습니다. 병실에서 밖을 볼 수 있는 길은 작은 창문 하나였습니다. 파커는 오후에 앉아서 치료를 받는 동안 그 창으로 바깥 풍경을 볼 수 있었지만, 빈센트는 하루 종일 침대에 누워 있어야만 했습니다.
하루는 빈센트가 파커에게 물었습니다. “밖에 뭐가 보이는가?” “응, 오늘은 날씨가 무척이나 화창하군. 아름다운 호수에는 작은 배가 한 척 떠 있고, 그 옆으로 귀여운 오리들이 줄지어 가는군.” 빈센트는 파커가 창문 밖 풍경들을 이야기해 줄 때마다 즐겁게 들었습니다. 덕분에 빈센트의 마음이 좋아지고 몸 상태도 눈에 띄게 호전되어 갔습니다.
어느 날, 파커는 조용히 임종을 맞았습니다. 병실에 혼자 남은 빈센트는 창가 침대로 자리를 옮긴 후, 간호사의 도움을 받아 겨우 몸을 일으켜 창밖을 내다보았습니다. 그런데 이게 웬일인지! 창밖에는 건물의 시커먼 벽 외에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습니다. 호수는 보이지 않았지만, 파커는 빈센트의 마음에 아름다운 호수를 만들어 주었던 것입니다.
마음을 옮긴 사람들은 보통 사람들과 다른 것을 보고 다른 말을 합니다. 슬픔을 만나도 그 속에서 행복을 찾고, 고통 속에서 평안을 찾고, 절망 속에서 소망을 찾을 수 있습니다.

 

바울과 실라가 빌립보 지하 감옥에 갇혀 있었지만 주님의 마음이 그들에게 임할 때 그들에게서 찬송과 기도가 나왔고, 감옥에서 나올 수 있었습니다. 바울이 로마로 가기 위해 탄 배가 풍랑에 휩싸여 헤어나올 길이 전혀 보이지 않았지만 바울의 마음에 하나님의 말씀이 임해 배에 탄 모든 사람에게 “이제는 안심하라.” 할 수 있었습니다. 시글락이 불타 함께 있던 무리들이 자신을 돌로 치려고 했을 때, 다윗은 마음을 하나님께로 옮겨 형편을 이길 수 있는 용기를 얻어 어려움에서 벗어날 수 있었습니다.
이처럼 믿음의 선진들은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그들이 처한 형편에서 벗어나 하나님의 약속을 실상으로 말하고, 믿고, 형편을 이기는 삶을 살았습니다. 말씀을 믿는 시점에 이르면 마음이 바뀌어 새로운 세계를 보는 눈이 열려서 감옥에서, 풍랑에서, 재로 변한 시글락의 고통에서 벗어날 수 있었습니다.

 

너를 정죄한 자가 어디 있느냐?
우리 영혼의 자유와 진정한 행복은 나를 바라보는 시각이 버려지고 하나님의 시각을 받아들일 때 생깁니다. 우리가 잘하거나 못함으로 자유와 행복이 결정되는 것이 아닙니다. 그렇기 때문에 몸부림치면서 변하려고 해야 할 것이 아니라, 예수님이 우리의 허물을 어떻게 보시는지 알아야 합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의 사랑으로 말미암아 인간의 허물을 우리와 다르게 보고 계시는 것을 발견해야 합니다. 
요한복음 8장에 나오는 간음하다가 잡힌 여자. 그는 손가락질을 받고 욕을 들었으며, 침 뱉음과 온갖 멸시와 천대를 받았습니다. 사람들이 그 여자에게 저주를 퍼부으며 돌로 쳐서 죽이려고 했습니다. 여자도 자신이 살 수 있는 길은 없다고 생각하여 죽음을 기다렸습니다.
그때 여자는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예수님 앞에 끌려왔고, 예수님은 여자를 향하여 너무도 놀랍고 가슴 벅찬 말씀을 하셨습니다. 여자를 치려고 돌을 들고 있던 사람들을 다 물러가게 하시고, 여자를 향해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아니하노니”라고 하셨습니다. 사람으로서는 내릴 수 없는 심판이었습니다. 여자는 귀 기울여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그 말씀을 마음에 받아들였습니다. 놀라운 변화는 거기에서 시작됩니다.
간음 중에 잡힌 여자처럼 우리에게도 허물과 죄가 나타나서 우리를 괴롭게 하고, 때로는 심한 정죄와 가책이 밀려오며, 수치를 감추려고 애를 쓰기도 합니다. 이러한 자신의 모습이 한심스럽기도 하고, 욕을 하고 침을 뱉고 싶을 만큼 더러운 모습에 오랫동안 고통의 세월을 보내기도 합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뭐라고 말씀하고 계십니까? “너를 정죄한 자가 어디 있느냐?” 아무도 없습니다. 그리고 주님은 우리를 향해 뭐라고 하십니까?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아니하노니”
이제 우리도 허물진 우리를 향하여 예수님과 같은 시각을 가져야 합니다. 부끄러운 죄악을 보며 정죄하고 괴로워해야 하는 것이 아닙니다. 죄를 알지도 못하신 예수님께서 죄인이 되어 십자가에서 죽으신 것은, 의를 알지 못하던 우리를 의인으로 삼기 위하심입니다. 우리는 더 이상 괴로워할 필요가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내가 너를 얼마나 좋아하는지, 얼마나 사랑하는지 아직도 못 깨닫겠니? 내가 너를 이만큼 사랑해 주는 것으로 행복하다고 못 하겠니?’라고 말씀하십니다.
이제 우리의 시각을 바꾸면 ‘나는 하나님이 아주 소중하게 보시는 존재구나!’라는 사실을 발견하게 되고, 그러면 우리는 절대로 시시하게 살 수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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