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님은 나를 그냥 지나치시지 않았다
예수님은 나를 그냥 지나치시지 않았다
  • 김윤옥(기쁜소식캔자스교회)
  • 승인 2017.02.19 21: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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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배와 질그릇
 

1958년에 태어났으니 우리 나이로 하면 어느덧 나는 예순이 되었다. 그다지 오래 산 것 같지 않은데, 세월이 훌쩍 흘러버렸다. 어린 시절에 꿈도 있었고, 좌절도 있었으며, 예수 그리스도가 내 마음에 태어나신 영광스런 날도 있었다. 주님을 홀대하고 산 날들이 있었고, 죽음 앞에 서야 하는 두렵고 서글픈 날들도 있었다. 그리고 나를 찾아오신 예수님. 내 인생을 빛나게 만들어 준 하나님의 종과의 만남. 그 이야기들을 해보려고 한다. 간증을 2회로 나누어 소개한다.

자부심 강한, 가난한 여학생
1958년은 아주 특별한 해였다. 강원도 감자 바위 틈에서 장래의 한 의인이 태어났는데, 그 이름은 김윤옥. 빛날 윤, 구슬 옥-외할아버지께서 내 이름을 지으실 때 내가 하나님의 빛을 가진 보석이 될 것을 미리 아신 듯하다.
2남 3녀 중 둘째로, 평범하고 가난한 집에서 태어났지만 어려움을 별로 기억하지 못하며 철없이 자랐다. 그건 엄마 때문이었다. 무남독녀로 부모님을 일찍 잃으시고 당신의 아이들이 태어나니 너무 귀해서, 당신 몸 상하는 줄 모르고 열심히 돈 벌어서 우리를 뒷바라지하고 우리에겐 아무 일도 안 시키셨다. 결국 나는 뺀질뺀질한 사람이 되었다.
IQ 137의 제법 좋은 머리에 늘 반장을 하고 가끔 전교에서 일등을 했으며, 게다가 예의까지 바르니 나쁜 소리는 거의 듣지 않고 자랐다. 학교에서는 친구도 많고 인기도 아주 좋았다. 노래는 불렀다 하면 미국 팝송이어서, 소풍을 가거나 행사가 있으면 내가 팝송을 부르는 것이 정해진 일이었다. 난 정말 내가 대단한 사람인 줄로 생각하며 엄청난 자부심과 자만심으로 똘똘 뭉치기 시작했다.
사춘기에 접어들 때 부모님이 갈등이 심해서 자주 부부싸움을 하셨는데, 엄마는 어려운 마음을 해결할 방법이 없어서 옆집 아줌마랑 술을 마시기 시작하셨다. 술 취한 엄마의 모습을 자주 보며 불안하고 싫었다. 점점 내가 속해 있는 환경이 원망스러웠다. 경제적으로도 원만하지 않아 가고 싶은 대학들엔 원서도 못 내보고 강원대학교에 들어갔고, ‘이 학교는 내게 어울리지 않는다’는 생각에 잡혀 공부를 소홀히 했다. 나의 환경이 나의 가능성을 삼켜버렸다고 탓하며 살았다.

당시 사람들이 상스럽게 여겼던 국제결혼을 하여
그래도 영어를 배우는 데에는 관심이 많았다. 대학교 4학년 때 친구 따라
‘캠프 롱Camp Long’이라는 미군 부대 안의 교회에서 가진 특별 집회에 참석했는데, 특송을 불러 달라고 요청해 노래했다. 그때 나의 남편인 스코트Scott가 나를 처음으로 보았다고 했다. 영어를 배우려는 목적으로 성경공부반에 들었는데, 스코트도 그곳에 있었다. 한 번 두 번 만나면서 친해졌고, 1년 후에는 결혼까지 생각하는 사이가 되었다. 그때만 해도 사람들이 국제결혼에 대해 아주 상스러운 인식을 갖고 있었다. 대학을 졸업하고 중학교에서 역사를 가르치는 선생이 양색시가 된다는 것은 김 씨 가문에 똥칠을 하는 것과 같았다. 아버지께서는 화를 내시며 “민족성도 국가에 대한 자부심도 없는 네가 아이들을 가르치면 아이들을 망친다.”고 교사를 하지 말라고 하셨다.
지금 인도에서 선교하는 오빠(김수연 선교사)가 스코트랑 친구가 아니었다면 나는 결혼을 포기했을 것이다. 나는 오빠와 아주 친했고, 오빠의 의견을 부모님의 의견보다 더 중요하게 여겼다. 오빠가 극구 반대하지 않는 것을 보며 나의 당돌함을 밀고 나갈 자신감이 생겼다.
우연한 기회로 말미암아 외국인과 사랑에 빠지고 나니 내 속에 잠재하고 있던 환경을 도피하고 싶은 마음, 미지의 세계에 대한 동경심이 마치 휘발유에 성냥불을 던진 듯 확 타올랐다. 이미 정해진 내 마음을 돌이킬 수 없는 것을 아신 부모님은 이웃에게 창피해서 결혼식을 못 해주고 간단히 가족들만 모인 데에서 반지를 교환하게 하셨다.

 

내가 떠나오던 날 말없이 바라보며 흘리시던 부모님의 눈물이…
1982년 8월 2일, 나의 행복과 꿈을 이뤄 보려는 소망을 갖고 한 이국인의 손을 잡고 난생처음 비행기를 타고 미국으로 날아왔다. 어렸을 때 자주 새처럼 날아다니는 꿈을 꾸었는데, ‘이렇게 날아오려고 그런 꿈을 꾸었구나’ 하며 나름대로 해몽을 했다. 지금은 그 꿈이 나의 거듭남을 미리 보여준 전주곡이었다고 새롭게 해몽하며 마음으로 슬쩍 날아 본다.
미국에 오니 너무 좋았다. 모든 것이 새로웠다. 당시만 해도 미국은 한국보다 훨씬 선진국이어서 좋은 것이 많았고, 무엇보다 맘만 먹으면 무엇이든지 쉽게 배울 수 있는 조건과 기회가 주어졌다. 이것저것 배우며 신이 났고, 남편도 시댁 식구들도 내게 아주 잘해 주어서 정말 행복하다고 느끼며 즐겁게 생활했다. 남편도 나도 둘만의 생활에 초점을 맞추다 보니 아이를 낳을 생각도 않고 철없이 살다가, 8년 만에 딸 애이미Amy를 낳았다.
태어나서 처음으로 마음속 깊은 곳에서부터 부모님의 마음을 생각해 보았다. 내가 낳은 딸이 내게 얼마나 소중한가를 느끼며, 내가 떠나오던 날 말없이 바라보며 흘리시던 부모님의 눈물이 피눈물인 것을 알았다. 그렇게도 친하던 오빠, 나를 졸졸 따라다니던 현숙이와 혜영이, 그리고 큰누나가 떠난다니 슬퍼서 나오는 눈물이 땅으로 떨어질까 봐 하늘을 쳐다보았다는 막내 동생 두연이를 냉정히 떨쳐버리고, 나의 행복만을 위해 날아가버린 내가 얼마나 이기적인 사람인지 부인할 수 없었다. 부모 마음에 못을 박고 내가 가장 소중히 여기던 오빠와 동생들의 마음을 멍들게 한 사실이 큰 죄가 되어 마음을 무겁게 누르기 시작했다.

두 가지 죄밖에 생각나지 않는 선한 사람인 줄 알았는데…
1990년 6월 말, 애이미가 17개월쯤 되던 때에 남편의 복무지가 독일로 바뀌어 이사하는 길에 한국에 들렸다. 미국을 떠나기 전에 동생 현숙이에게서 도전적인 편지를 받았다. 현숙이는 “언니는 지금 죽으면 천국 갈 수 있어?”라고 물었다. 그 당시 나는 미국의 어느 한인 침례교회에서 성가대 지휘를 맡고 있었기에, 그런 당돌한 질문을 받으니 은근히 화가 났다. 그러나 마음을 누르고 너그러운 언니답게 점잖은 말투로 그런 질문을 하는 것은 무례한 일이라고 타일렀다.
한국에 도착하자 세 동생들이 나를 앉혀놓고 온갖 질문을 하며 공격했다. 나는 늘 그들보다 내가 아는 게 더 많다고 생각하며 살았는데, 성경 이 구절 저 구절을 찾아 주며 얘기하는데 내가 아는 것이 별로 없다는 사실에 충격을 받았다. 무엇보다도 큰 충격은, 막내 두연이가 “누나 마음은 몇 퍼센트가 깨끗하고 몇 퍼센트가 더러운 것 같아?”라고 물었을 때 내가 한 대답이 동생들을 깔깔거리며 웃게 만들었다는 것이다. 가족을 버리고 미국인과 결혼하여 부모님 가슴에 못을 박은 죄! 그리고 4학년 때 소위 반장이면서 교실에 아무도 없을 때 내 짝의 예쁜 보라색 필통을 훔쳤다가 사용할 수 없어서 쓰레기통에 버려야만 했던 죄! 그래서 80%는 선하고 20%는 악하다고 했다. 두연이는 웃음을 멈추더니 “누나는 100% 악해!”라고 했다. 속에서 화가 났다. 난 진짜로 두 가지 죄밖에 생각나지 않는 선하고 올바른 사람이었다.
이튿날인 7월 1일, 현숙이가 기쁜소식원주교회의 문민용 목사님께 나를 데리고 가서 두 시간 동안 복음을 듣게 했다. 문 목사님은 날더러 “아주머니, 아주머니” 하며 내가 듣기를 원하는지 아닌지 상관없이 계속 말씀하셨다. 그때까지 아주머니라는 소리를 한 번도 들어본 적이 없어 이상했고, 빨리 그 자리를 피하고만 싶었다. 그런데 갑자기 히브리서 9장 12절, “염소와 송아지의 피로 아니하고 오직 자기 피로 영원한 속죄를 이루사 단번에 성소에 들어가셨느니라.”라는 말씀을 들으며 가슴 깊은 곳에 불이 번쩍 들어왔다. 예수님의 피로 단번에 영원한 속죄를 이루셨다는 것이 이해가 됐다. 내가 죄를 두 가지만 지은 것이 아니라 100% 죄인으로 태어난 것을 처음으로 알았고, 예수님의 피로 나의 행위와 상관없이 100% 깨끗함을 얻고 구원을 받았다. 아무것도 한 것이 없는데 죄에서 구원해 주시고 세상 죄를 단번에 해결하신 예수님이 너무 멋지고 믿을 만한 가치가 있다고 생각했다.
구원받고 바로 독일로 이사 가서 그 당시 베를린에 계셨던 권오선 목사님과 연결되어 남편도 복음을 듣고 구원받았고, 얼마 후 권 목사님 가족이 우리가 살던 마인츠로 이사와 마인츠에 교회가 생겼다. 약 3년 간의 독일 생활을 마친 후 다시 미국의 캔자스 주로 이사했다. 미국 교회에 다니며 조용히 살고 싶었다.

 

말씀이 나를 고칠 수 있을 거라는 막연한 소망 속에서
어느 날, 돌아보니 많은 세월이 지났다. 신앙에 진전이 없는 것 같고, 차로 두 시간씩 가야 하는 교회가 멀어서 가기 싫을 때도 많았지만 그래도 교회로 인도하시는 하나님의 은혜가 있었다. 딸도 구원해 주셨다. 하지만 하나님과 정확히 연결되지 못한 채 내 생각에 안 맞으면 언제라도 교회를 부인할 마음으로 내 생각을 따르는 신앙을 했다.
캔자스 주에 산 지 20년이 넘었고, 나는 오랫동안 초등학교에 근무했으며, 남편은 제대한 후 경찰로 일하다가 2015년 12월에 정년 퇴직했다. ‘이제는 좀 편히 쉬며 하고 싶었던 일들을 하겠다’고 계획하던 그때에 하나님이 “사람이 마음으로 자기의 길을 계획할지라도 그 걸음을 인도하는 자는 여호와시니라.”(잠 16:9)라는 말씀을 남편에게도 생각할 수밖에 없게 하셨다.
미국으로 온 이후 나의 건강은 의사를 찾을 필요가 없을 만큼 좋았다. 그러나 갱년기를 만나면서 전에 없던 증세들이 서서히 나타나기 시작했다. 몸 전체가 이유 없이 아프고, 소화도 잘 안 되고 다리에도 무척 자주 쥐가 나서 운전하는 것이 두려울 때도 있었다. 나는 술도 마시지 않고 담배도 피우지 않고 음식도 좋다는 것만 골라 먹었기에 너무 억울했다. 더 이해할 수 없는 것은, 모든 검사 결과가 항상 정상이었다는 것이다. 그래서 의사들도 가족들도 내가 아프다고 할 때 대수롭지 않게 받아들였다. 지난 10년을 그렇게 살았다.
2015년 12월에 몸이 갑자기 악화되었다. 병원엘 몇 번 갔지만 의사 선생님은 유행성 감기나 바이러스 정도로 생각해 감기약과 진통제 등을 주었다. 증상이 사라지질 않고 점점 심해졌는데도 나는 계속 출근했다. 크리스마스를 전후로 모두 들떠서 명절 맞을 준비를 분주히 하는데, 나의 동작은 점점 느려졌다. 사람들이 나를 마치 재미있는 파티를 망치는 방해꾼처럼 사람들이 나를 보는 것 같았다.
오로지 한 가지 기다려지는 것은 해마다 댈러스나 텍사스에서 열리는 겨울수양회였다. 말씀이 나를 고칠 수 있을 거라는 막연한 소망 속에 말씀을 붙잡으려는 마음으로 수양회에 참석했다. 기대했던 것처럼 수양회에 참석하여 말씀을 듣다 보니 마음도 가벼워지고 음식도 좀 먹히고 몸도 훨씬 좋아진 기분이었다. 함께 참석했던 남편과 딸도 내가 좋아지는 모습을 보며 무척 기뻐했다. 수양회에 참석하길 아주 잘했다고 하며 돌아왔다.
실망스럽게도, 돌아온 지 며칠 안 되어 내 몸은 이전 상태로 돌아갔다. 그래도 출근했는데, 쓰러질 것만 같아 남편이 와서 나를 응급실로 데려갔다. 여러 가지 검사를 하고 CT촬영도 한 결과 배에 복수가 찼고 자궁 부위에 종양이 있다고 했다. 담당 의사가 별로 심각하지 않은 얼굴로 위 전문의를 만나 보라고 해서 알아 보니, 환자 예약이 많아서 한 달 정도를 기다려야 한다고 했다. 이 소식을 들은 인도에 있는 오빠와 한국에 있는 동생들은 무척 애가 탔다. 몇 년 전 엄마가 돌아가시기 전에 복수가 찬 모습을 보았기 때문이다.

마치 나만의 수양회를 하고 있는 듯했던 뉴욕 방문
미국 사람들에게서 배운 것 중 하나가 아파도 참고 열심히 일하는 것이었는데, 더 이상 출근할 수도 없었다. 내가 나를 위해 할 수 있는 것이 하나도 없어서 내가 다니는 캔사스교회의 이동옥 목사님께 전화를 드렸다 목사님은 “하나님께서 허락하시는 모든 일이 선합니다.”라고 하며, 뉴욕에 있는 이강태 장로님에게 가서 침을 맞으면 좋을 것 같다고 하셨다.
목사님의 말씀을 따라 뉴욕에 가서 15일 간 침을 맞았다. 침을 맞으며 몸이 좋아지는 것을 느꼈다. 무엇보다도 입맛이 좋아져서 음식을 먹을 수 있어서 보는 사람마다 내 얼굴이 좋아졌다고 했다. 얼굴만 아니라 마음에도 살이 붙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염려와 두려움보다 감사와 소망이 생기기 시작했다. 장로님은 항상 침을 놓기 전에 하나님께서 나를 얼마나 사랑하시는지를 상기시켜 주며 하나님과 마음이 흘러야 하는 부분, 말씀을 마음에 심어야 하는 부분을 교제하여 주셨다.
장로님이 노란 종이에 적어 주며 하루에 30번씩 암송하라고 하신 내용들이 있었다. 박옥수 목사님께서 아들 박영국 목사님이 미국으로 파송 받아 갈 때 하루에 30번씩 기억하라고 하셨다는 다섯 가지: 1)하나님은 나를 도우신다 2)하나님은 내 기도를 듣기 원하신다 3)하나님은 내가 복음 전할 때 나를 통하여 구원하시기 원하신다 4)하나님은 항상 나와 함께하신다 5)하나님은 나를 통하여 역사하기를 원하신다. 그리고 박영국 목사님이 사람이 왜 믿음을 갖지 못하는지에 대해 말씀하며 이야기한, 씨가 열매를 맺으므로 마음에 먼저 심어야 할 세 가지 씨: 1)아니야, 하나님은 나를 사랑하셔 2)하나님은 한 번도 나를 나쁜 길로 인도하신 적이 없어 3)하나님은 나를 가장 복된 길로 인도하셔. 이 내용들을 마음에 심고, 외우고 묵상했다. 하루에 30번씩 되풀이하며 내 마음에 녹음기처럼 틀어놓았다.
뉴욕교회에서 지내는 동안 매일 교회 부엌에서 봉사하는 자매님들을 보며, 그들의 헌신적인 삶이 하나님을 분명히 경험한 데에서 나온 결과임을 알 수 있었다. 처음으로 주일 예배, 수요 예배, 그리고 부인회까지 참석하며 마치 나만의 수양회를 하고 있는 기분이었다. 하나님께서 나를 뉴욕에 보내신 것이 분명했다.
주일 예배 때 박영국 목사님이 “우리가 답지를 하나님께 맡기지 않고 스스로 추측하여 작성하는데, 몇 번 계속해서 답이 맞으면 다음 번에도 맞을 거라고 생각하지만 사실은 틀릴 확률이 점점 높아지는 것이다. 그러나 답지를 하나님께 맡기면 확실히 100점을 맞을 수 있다”고 하셨다. 충격이었다. 내 꾀에 속아서 살아온 내 인생의 결과가 보였다.

 

암이 13년 정도 된 것 같고, 암세포가 뱃속 사방에 퍼져서…
2주 동안 행복한 경험을 마음에 담고 뉴욕에서 돌아왔다. 얼굴도 마음도 활짝 펴진 나를 보며 남편도 딸도 무척 기뻐했다. 하지만 그 기쁨이 오래 가질 못했다. 몸이 이전 상태로 돌아가기 시작했다. 이번엔 아주 급속도로 악화되었다. 배가 빵빵하게 불러오고, 속은 목구멍까지 꽉 찬 기분이어서 먹을 수도 없고 숨쉬기도 불편했다. 모든 냄새가 나를 괴롭혔고, 앉기도 눕기도 힘들었다.
내시경을 했는데, 헬리코박터파일로리 박테리아가 발견됐다고 해서 항생제를 복용해야 했다. 약을 복용한 지 3일 만에 부작용 증세가 매우 심각해서 다시 응급실로 옮겨져 CT촬영과 골반 초음파 검사를 했다. 의사 선생님과 간호사가 검사 결과를 가지고 병실로 찾아와 눈물이 글썽글썽한 눈으로 내 손을 잡고 힘들게 말했다. “정말 너무 안타깝습니다. 난소암에 걸렸고 당장 수술해야 합니다. 복수도 많이 찼고, 암 덩어리도 큰 것이 두 개나 보입니다.” 남자 간호사는 울음을 멈추지 못하고 병실 밖으로 나갔고, 의사 선생님도 내 손을 계속 잡고 눈물을 흘렸다.
세상이 노랗게 변하는 것 같았다. 옆에서 기절할 듯이 우는 딸을 바라보면서 뉴욕에서 들은 말씀이 떠올랐다. “답지를 하나님께 맡겨.” “하나님은 나를 가장 복된 길로 인도하셔.” 그때를 위하여 하나님은 나를 미리 뉴욕에 보내 준비해 주셨다. 마음에서 ‘하나님, 제 딸을 맡깁니다. 하나님, 제 남편을 하나님께 넘깁니다’라는 기도가 나왔다.
즉시 처음 타보는 구급차에 실려 두 시간 거리인 암 전문 병원으로 옮겨졌다. 암 전문의를 만나 어떤 일들이 일어날 것인지 대충 들었다. 암이 13년 정도 된 것 같고, 복수로 인하여 암세포가 뱃속 사방에 퍼져서 많은 부위를 잘라내야 하는데 대장도 부분적으로 잘라내야 할 확률이 크다고 했다. 다른 것은 잘라도 대장은 제발 자르지 말라고 당부했다. 어떻게 살 것인지 상상이 안 되었다. 의사 선생님은 수술 후에도 약 50%의 환자들만 치료를 마칠 수 있는 아주 독한 항암치료를 받아야 하고, 그 치료를 위해 수술로 가슴과 배 두 곳에 관을 박아야 하며, 방사선 치료까지 받아야 하고, 모든 치료가 끝난 후에도 최소 1년은 예방으로 항암치료를 계속해야 한다고 했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6개월밖에 살 수 없다고 했다.

 

나를 구속하신 하나님이 너는 내 것이니 두려워 말라고 했어!
모든 것이 예기치 않은 폭풍처럼 몰려와서 정신이 하나도 없고, 한 가지 분명한 것은 살고 싶은 마음이었다. 수술실로 들어가면서 생각나는 말씀이 있었다. 병원에 가기 일주일 전에 캔사스 교회 사모님이 이야기해 주신 이사야 43장 말씀으로, 나는 하나님의 것이며 내가 물 가운데로 지나도 불 가운데로 행하여도 하나님께서 나와 함께하신다는 약속이다. 남편과 딸이 안타까워하는 모습을 보고 이사야 43장을 기억하며 내일이 오기를 기다리는 마음으로 눈을 감았다.
수술하던 날은 나의 58번째 생일 하루 전이었다. 그것은 내 생각의 세계에 대한 큰 테스트였다. 내가 고등학교에 다닐 때, 친한 친구의 중학생 여동생이 나에게 “언니, 내가 손금 봐줄게.” 하며 내 손바닥을 보더니 “언니는 57살밖에 못 살겠다.”라고 했다. 농담처럼 뱉은 그 아이의 소리가 평생을 따라다녔다. ‘내가 행여 57세에 죽는 것은 아닌가?’ 구원받은 후에도 그 생각이 늘 찾아왔다. 57세의 364일을 무사히 넘겼는데 마지막 날에 엄청난 대수술을 받아야 한다니, 누군가 날 테스트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를 구속하신 하나님께서 너는 내 것이니 두려워 말라고 했어!’ 다시 말씀을 기억해야 했다.
눈을 떴는데, 내가 살아 있었다. 말할 수도, 움직일 수도 없었지만 살아 있다는 사실이 한없이 기쁘고 감사했다. 쓸데없는 생각에 오랫동안 매여서 두려워하던 데에서 풀려난 것도 감사했다. 의사 선생님은 내 몸에서
5리터의 복수가 나왔고, 큰 암 덩어리 두 개를 잘라냈다고 했다. 크기가 각각 12×14cm와 8×9cm로, 합쳐서 5kg이 빠져나왔다고 했다. 몸에서 열아홉 곳을 잘라냈지만 대장에는 손을 댈 필요가 없었다고 해서 정말 감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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