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이프] 예수님은 나를 그냥 지나치시지 않았다 2
[라이프] 예수님은 나를 그냥 지나치시지 않았다 2
  • 김윤옥(기쁜소식캔자스교회)
  • 승인 2017.03.29 10:08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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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3월호 기쁜소식
보배와 질그릇

 

병원에서는 검사 때마다 건강하다고 했지만, 내 몸 안에서 암덩이가 13년 정도 자라 2015년 12월에 수술했을 때에는 암세포가 뱃속 사방으로 퍼져 열아홉 곳을 더 잘라내야 했다. 수술 후에도 독한 항암치료를 받아야 했고, 그 치료를 위해 가슴과 배에 관을 박아야 하고, 모든 치료가 끝난 후에도 최소 1년은 항암치료를 계속해야 한다고 했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6개월밖에 살 수 없다고 했다. 하지만 하나님은 나에게 당신의 종을 보내 내 인생을 빛나게 만들어 주었다. 2월호에 이어 간증한다.

가족의 사랑과 목사님의 말씀을 담아가지고 온 혜영이
수술을 받은 후 한국에서 여동생 혜영이가 왔다. 인도에 있는 수연 오빠와 한국에 있는 가족들이 나를 간호해 주라고 혜영이를 대표로 보낸 것이다. 말할 수 없이 기쁘고 고마웠다. 가족들의 사랑에 감격하고, 가족들을 염려하게 하고 애태우게 하는 내 처지가 원망스럽기도 했다.
혜영이는, 내가 가진 원망스러운 마음이 하나님으로부터 온 마음이 아님을 계속 이야기해 주었다.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너희를 향한 나의 생각은 내가 아나니 재앙이 아니라 곧 평안이요, 너희 장래에 소망을 주려 하는 생각이라.”(렘 29:1) 이 말씀처럼 나에게 일어난 일이 재앙이 아님을 계속 이야기해 주었다. 오빠를 통하여 인도에서 형제 자매들이 나를 위하여 기도하고 있다는 것과 한국에서도 많은 성도들이 나를 위하여 기도하고 있다는 사실을 동생들을 통하여 들으면서, 암도 교회 안에서 걸리니 감사할 조건이 되었다.
혜영이는 나에게 오기 전에 박옥수 목사님과 통화하면서 들은 목사님이 해 주신 말씀을 나에게 전해 주며, 목사님께 직접 전화해 보라고 권했다. 전화를 드렸지만 바쁘셔서인지 목사님이 전화를 받지 않으셔서 무척 실망이 되었다. 그런데 다음날 목사님이 ‘모르는 전화번호가 찍혀 있어서 전화했다’며 내게 전화를 하셨다. 목사님의 목소리를 들으니 정말 행복했다. 목사님도 나랑 직접 통화하고 싶었다고 하셨다.


죽었던 너희를 살리셨도다!
박 목사님이 “예수님은 한 번도 병자를 그냥 지나치신 적이 없습니다.”라고 하시는데, ‘그럼 나도 그냥 지나가시지 않겠구나!’ 하는 소망이 마음을 덮었다. 목사님이 에베소서 2장 1절의 “너희의 허물과 죄로 죽었던 너희를 살리셨도다.”라는 말씀을 전해 주실 때, 나는 이미 예수님이 나를 그냥 지나치시지 않고 목사님을 통해 말씀을 보내신 것을 알았다. ‘나는 이미 살았구나!’라고 믿어졌다. 속에서 기쁨과 감사가 솟았다.
목사님은 에베소서 2장 8~9절의 “너희가 그 은혜를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었나니 이것이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행위에게서 난 것이 아니니 이는 누구든지 자랑치 못하게 함이니라.”라는 말씀을 설명하신 후, “자매님은 자신의 허물과 연약함을 보지 마세요. 그것들은 예수님이 자매님에게 일하실 수 있는 조건입니다.” 하셨다. 그때 내 마음을 묶고 있었던 행위의 사슬이 풀렸다. ‘나는 육신적이야. 나는 게을러. 나는 하나님을 위해 한 일이 별로 없어. 나는 세상을 좋아해.’ 등등, 하나님 앞에 담대히 나아갈 수 없도록 나를 꽁꽁 묶어두었던 ‘나의 생각’이라는 사슬이 풀렸다. ‘바로 이거야! 구원을 은혜로 받은 것처럼 구원받은 후에도 역시 은혜로 사는 거야!’ 그러고 보니 내가 해야 하는 것은 단 한 가지-말씀을 그냥 받아들이는 것이었다.
목사님은, 간음 중에 잡힌 여인에게로 날아올 돌덩이들을 예수님께서 다 땅으로 떨어뜨리셨다고 하셨다. 내 마음의 눈에, 영화의 장면처럼 돌이 땅으로 뚝뚝 떨어지는 것이 보였다. ‘아, 나의 암덩어리들도 땅으로 떨어졌고, 수술 후의 고통도 땅으로 떨어지고, 항암 치료의 어려움도 땅으로 떨어졌구나!’ 예수님이 무술인의 폼을 하시고 날카로운 손날로 나를 향하던 재앙의 돌덩이들을 모두 땅으로 떨어뜨리시는 장면이 머리 속에 스쳐갔다.
“너희의 허물과 죄로 죽었던 너희를 살리셨도다!”(엡 2:1) 말씀대로 은혜를 인하여 하나님이 나를 살리셨다. 박 목사님과 통화한 것도 은혜였고, 혜영이가 오기 전에 목사님께 전화한 것도 은혜였고, 가족들이 혜영이를 보내준 것도 은혜였고, 좋은 의사 선생님을 만난 것도 은혜였고, ‘큰 은혜로 나를 살리셨구나!’ 나는 마치 기쁨의 술에 취한 사람처럼, 수술 후 고통이 얼마 느껴지지 않아 진통제를 별로 먹지도 않았다. 내 마음은 마치 소망과 감사로 채워진 풍선처럼 하늘 높은 곳을 둥실둥실 떠다니는 기분이었다. 하나님께서 나를 가장 복된 길로 인도하신다는 말씀이 믿어졌다. 너무 기뻐서 목사님께 다시 전화를 드렸다.
“목사님, 저 다 나았어요!”
“예, 참 기쁩니다.”
목사님은 나의 허물과 연약함을 보지 말라고 다시 말씀하셨다.

어려움들이 땅으로 떨어지기 시작했다
박 목사님과 통화한 다음날 의사 선생님이 병실에 와서 갑자기 항암 치료 계획이 바뀌었다고 하셨다. 내 몸에서 난소암이 자궁으로 전이되었다고 생각했는데, 처음부터 암이 두 곳에서 생겼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어 그것을 확인하려고 잘라낸 암덩어리를 큰 암 센터로 보냈다고 하셨다. 수술이 끝나자마자 바로 항암 치료를 할 계획이었는데, 결과가 나오기까지 3주를 기다려야 했다. 덕분에 몸을 추스를 수 있었다. 큰 수술을 받은 사람이 바로 항암 치료를 시작한다는 것이 상상할 수 없는 일이었지만 죽어 가는 입장에서는 선택의 여지가 없었는데, 예수님은 나에게 박 목사님을 보내셔서 어려움의 돌을 땅에 떨어뜨리고 계셨다.
일단 흉부에 관을 하나 박고 집으로 돌아왔다. 혜영이는 천사처럼 나를 보살폈다. 음식도 맛있게 해 주고 집안 청소도 깨끗하게 해 주었다. 무엇보다 성경 말씀으로 교제해 주고 아름다운 찬송으로 기쁘게 해 주었다. 동생은 “이 일은 재앙이 아니야.”라고 반복해서 말했다. 난생처음 동생과 실컷 마음을 나누며 어린 시절로 돌아가 보기도 하고, 한바탕 웃어 보기도 하며 마냥 행복한 시간을 보냈다.
2주 후 혜영이는 한국으로 돌아갔고, 하나님이 계속해서 돕는 이들을 보내 주셨다. 시누 셋이 일주일씩 교대로 비행기를 타고 와서 나를 간호해 주었다. ‘나는 시누들에게 이렇게 할 수 있을까?’ 의문이 갈 만큼 정성스럽게 보살펴 주어 내 마음을 감동시켰다. 직장 동료인 한 미국인 친구는 매주 한 번씩 와서 발 마사지를 해 주었다. 미국인들은 다른 사람에게 마사지를 잘 해 주지 않는데, 그분은 마사지를 전문적으로 배운 분이어서 혈액순환이 잘 되어야 항암 치료를 받을 때 회복이 빠르다며 퇴근하고 와서 한 시간씩 발 마사지를 해 주었다. 지금도 와서 해준다. 매주 위로의 카드를 보내 주는 분도 있었다. 학부형들을 비롯해 많은 사람들이 계속 음식을 해 와서 그것을 교회로 가지고 가서 나눠먹기도 했다. 하나님은 여러 방법으로 내게 은혜에 대하여 가르쳐 주셨다.
3주 후, 암 덩어리를 조사한 결과 두 가지 암이라는 판정이 나왔다. 항암 치료의 계획이 완전히 바뀌고, 한 번 더 하기로 했던 수술도 안 해도 되고, 방사선 치료도 안 해도 된다고 했다. 주님을 찬양할 수밖에 없었다. 18주 동안 하면되는 항암 치료가 시작되었다. 듣던 대로 쉽지 않았다. 그렇지만 내 머리 속에는 항상 어려움이 땅으로 떨어지는 그림이 있어서 힘든 가운데에도 별 문제가 안 됐다.
내가 언제 항암 치료를 받아 보겠나 하는 태도로 일주일에 한 번씩 치료받으러 가는 날을 특별한 날로 만들었다. 병원까지 두 시간 운전해서 가야 했는데, 우리 가족은 마치 여행하는 것처럼 생각하며 옷도 예쁘게 차려입고 즐거운 마음으로 갔다. 나는 언제 죽어도 기쁘게 죽을 수 있는 마음을 하나님께서 주셨다. 간호원들도, 의사 선생님도 우리 가족 만나는 것을 즐거워했다. 우리가 항상 기뻐했기 때문이다.

아무것도 할 수 없어서 말씀을 따르는데, 사람들은 기적이라고 했다
치료를 시작한 지 3주가 되면서 머리카락이 빠지기 시작했고, 전신이 아프고 먹는 것이 쉽지 않았다. 속이 울렁거리고 위를 깎는 것 같은 통증이 찾아왔다. 전에 박옥수 목사님이 이야기하셨던 ‘음식은 맛이 있어서 먹는 것이 아니라 안 먹으면 죽으니까, 몸이 음식을 필요로 하니까 먹어야 하는 것’이라는 말씀이 떠올랐다. 목사님이 다시 전화해 주셔서 음식을 먹기 힘든 상황을 말씀드리자 “맛이 없어도 계속 먹어야 해요. 자동차는 휘발유가 맛이 있다 없다 하지 않고 그냥 꿀꺽꿀꺽 마셔요. 그래야 자동차답게 움직일 수 있으니까요.” 하셨다. 우리는 평범한 진리를 잊고 산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때부터 무조건 먹었다. 아침에 눈을 뜨면 먹고, 간식 먹고, 점심 먹고, 또 간식 먹고…. 입에서 약물 냄새가 나든 입맛이 없든 계속 먹었다. 몸무게가 늘기 시작했고, 면역도 좋아졌다. 수술할 때 피를 아주 많이 잃어서 헤모글로빈 수치가 4로 내려가 말을 하려고 해도 목소리가 나오지 않았는데, 헤모글로빈 수치도 자꾸 올라갔다. 적혈구와 백혈구 수치도 잘 유지되어서 항암 치료를 받으면서 한 번도 수혈 받지 않고, 백혈구를 만들게 하는 주사도 맞지도 않고, 다른 사람들이 맞는 여러 가지 주사도 맞지 않았다.
간호원들은 기적이라고 했다. 내가 무엇을 해서 그렇게 건강한지 그 방법대로 계속 하라고 했다. 하나님의 방법, 말씀을 따르는 방법이었다. 아무것도 할 수 없어서 말씀을 따르는데, 사람들 눈에는 기적으로 보이는 것이었다.

“목사님, 위경련 아무것도 아니네요!”
몸의 고통이 너무 심해서 두려움이 찾아올 때도 여러 번 있었다. 가장 어려웠던 것이 급성 위경련 증상이었다. 하늘이 노랗고 땀이 쏟아지고 떼굴떼굴 구를 만큼 아프고, 꼭 심장마비로 죽을 것 같았다. 할 수 있는 것은 엉엉 우는 거였고, 응급실을 몇 번 방문해야 했다. 한번은 너무 겁이 나서 박 목사님을 찾았다. 한국에 안 계시고 독일에 계신다고 해서 그곳에 연락하니 이미 러시아로 떠나셨다고 했다.
선교사님들의 도움으로 목사님과 화상 전화가 연결되었고, 목사님이 25분 동안이나 말씀을 전해 주셨다. “자매님, 위경련은 암 환자에게만 일어나는 현상이 아니고 다른 사람에게도 일어나는 일입니다.” 목사님은 성경에 있는 이야기들이 병이나 문제로 시작해서 예수님을 만난 후 병이 낫고 문제가 해결되는 것으로 끝난다고 하시며, 그런 성경 말씀들을 예로 많이 들려주셨다. 목사님의 말씀을 듣고 안심하며 말씀드릴 수 있었다. “목사님, 위경련 아무것도 아니네요!”
목사님은 예레미야 31장에 나오는 ‘새 언약’에 대해 말씀하시며, 새 언약은 예수님만 일하셔야 하는 언약이라고 하셨다. 한없이 감사하고 행복하고 안심이 되었다. 주님이 ‘아프지만 나았다’는 목사님의 간증이 나의 간증이 되게 해 주셨다.
그 후에도 목사님은 내가 어려울 때마다 여러 번 전화를 해 주셨다. 세계를 동네 다니듯 바쁘게 다니시는데도, 없는 시간을 쪼개어 연락해 주시며 병자를 불쌍히 여기시는 예수님의 마음을 보여주셨다. 은혜라는 단어에 대해 조금씩 이해하기 시작했다. 정말 내가 한 것은 손톱만큼도 없는데, 100% 일방적으로 내게 주어진 돌이킬 수 없는 축복. 바로 그것이었다. 나는 은혜를 입은 자였다. 목사님은 임진각에서 평화 음악회를 마치고 내려오며 전화해 주셨고, 피지에 다녀온 후 전화하셔서 ‘그곳이 그야말로 땅끝인데 남태평양의 섬들에 복음이 전해지고 있다’며 행복해하며 전도 상황을 말씀해 주셨다.
“목사님, 제 헤모글로빈 수치가 10이래요!” 하자 목사님이 굉장히 기뻐하시며 “그 수치면 완전히 정상이에요!” 하셨다. 그 말씀을 들으니 한 수치 더 올라간 기분이었다. 아주 좋아지고 있는 내 모습이 믿어지지 않을 때도 있어서 자주 사진을 찍어 목사님께 보내드렸다.
LA에 오셨을 때도 전화해 주셨다. “예수님께서 승천하실 때 우리에게 필요한 모든 도구를 주고 가셨어요. 그 도구들을 찾아서 쓰기만 하면 되는데, 사람들이 찾아 쓸 줄을 몰라서 어렵게 살아요.” 목사님은 항상 소망의 말씀을 해 주셨다. 수술을 받은 후 어려움도 두려움도 찾아왔지만 절망에 빠진 적은 한 번도 없었다. 목사님이 소망으로 생명으로 인도해 주셨기 때문에 아프고 어려워도 기쁘고 힘이 났다. 오직 여호와를 앙망하는 자는 새 힘을 얻는다(사 40:31)는 말씀대로 새 힘이 나를 이끌어 주었다. 약을 먹지 않고 통증을 이길 힘도, 항암 치료를 넘을 수 있는 힘도, 음식을 먹을 힘도 주었다. “그가 내 우편에 계시므로 내가 요동치 아니하리로다.”(시 16:8)라는 말씀처럼 하나님이 나를 잡고 계셨다. 머리 속에 또 하나의 그림이 그려졌다. 나는 아무것도 모르는 강아지이고, 나의 주인은 나를 마냥 사랑스럽게 여겨 내 목에 줄을 매어서 내가 요동할 때마다 줄을 당겨서 주인이 원하는 자리로 안전하게 옮겨 주시는 모습이었다. 나는 요동하지만 요동할 수 없는 자가 되어 있었다. 가장 안전한 줄에 매어 있었다.

말씀을 듣고, 하나님이 세계 곳곳에서 역사하시는 엄청난 소식들을 들으며
수술을 받고 나서, 그리고 항암 치료를 받는 동안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별로 많지 않았다. 침대에 누워서도 할 수 있는 일은 말씀을 듣는 것이었다. 매일 말씀을 들었고, 아침부터 저녁까지 하루종일 말씀을 들었던 적도 있다. 굿뉴스TV를 보며 우리 선교회에서 매일 어떤 일들이 일어나고 있는지 알게 되면서 내 마음이 점점 선교회에서 하는 일과 박 목사님이 복음을 위해 하시는 일에 연결됨을 느꼈다. 인터넷을 통하여 박옥수 목사님, 그라시아스합창단, 그리고 여러 목사님들을 따라다니며 기쁘고 흥분되고 놀라운 일들을 함께 경험했다. 인도에도 가고, 스와질란드에도 가고, 잠비아에도 가고….
말씀을 듣고, 하나님께서 세계 곳곳에서 역사하시는 엄청난 소식들을 들으며 내 마음이 교회와 박 목사님과 점점 합해지는 것을 느꼈다. 이전에도 많은 행사와 소식들을 간접적으로 들었지만 별로 관심이 없었던 사람이었기에, 내 마음이 바뀌고 있는 것을 스스로 알 수 있었다. 말씀은 사람을 바꾸고, 행복하게 하고, 교회와 같은 마음을 갖게 하는 것이 분명했다.

항암 치료를 우등으로 끝냈다고 사각모를 쓰고 암 졸업식을 가졌다
마침내 18주의 항암 치료를 하나님의 은혜로 무사히 마쳤다. 대부분의 암 환자들이 면역력이 감소되어서 독감이나 폐렴에 걸릴까봐 무척 염려하는데, 나는 한 번도 그런 어려움 없이 치료를 끝냈다. 말할 수 없이 감사하고 기뻤다. 벅차게 기뻐하던 남편과 딸이 날 보고 항암 치료를 우등생으로 끝냈다며, 몇 달 전에 딸 애이미가 석사과정을 마치고 졸업할 때 입었던 가운과 사각모를 쓰고 항암 치료 졸업식을 하자고 했다. 내가 생각해봐도 장학금을 타야 할 만큼 좋은 성적으로 끝낸 것 같아 사각모를 쓰고 가운을 입고 암 졸업식을 가졌다. 논문도 안 쓰고 졸업했는데, 이제 이 간증문으로 논문을 대신한다.
학교를 졸업한 딸이 집에 와서 3개월 동안 온 마음으로 나를 보살펴 주었고, 내가 항암 치료 끝내고 2주 후에 직장 때문에 메릴랜드 주州로 갔다. 딸의 이사를 도우려고 남편도 함께 메릴랜드로 떠나고 나는 처음으로 혼자 집에 있게 되었다. 여러 달 동안 마치 갓난아이 돌보듯 나를 조심스럽고 정성스럽게 보살펴 준 사랑하는 남편과 딸이 함께 떠나는 모습을 보며 나의 고마움이 그들에게 전해지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한참 손을 흔들었다. 뜨거운 눈물을 삼키며 감사함에 벅차 가슴이 아팠다. 모두 내가 혼자 어떻게 있을지 염려했지만 하나님께서 항상 나와 함께하신다는 말씀 까닭에 전혀 염려가 되지 않았다. 오히려 스스로 정상적인 생활을 연습해 볼 수 있는 좋은 시간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남편이 메릴랜드에서 돌아온 후 남편과 함께 비행기를 타고 뉴욕으로 갔다. 뉴욕에서 월드캠프가 열렸는데, 말씀을 전하러 오시는 박 목사님을 직접 뵙고 싶어서 주위의 반대를 무릅쓰고 비행기 표를 샀다. 사람들은 모두 내가 폐렴에 걸릴까 두려워했다. 하지만 나는 목사님이 나를 말씀으로 이끌어 주신 것이 너무 감사해서 직접 뵙고 “감사합니다.”라고 말씀드리고 싶었다.
내가 제일 좋아하는 오트밀 쿠키를 만들어 가지고 친정아버지를 뵈러 가는 마음으로 뉴욕으로 갔다. 목사님을 뵙는 순간 한없이 기뻤다. 목사님도 무척 기뻐하셨다. 예수님께서 내가 병에서 나은 것을 기뻐하심을 알 수 있었다. 남편과 함께 목사님 옆에 앉아 점심을 먹으며 하나님께서 목사님을 통하여 나에게 하신 일을 간증하며 하나님께 영광과 찬양을 드리지 않을 수 없었다.
뉴욕에서 돌아온 지 3주 만에 직장으로 돌아갔다. 집에 누워서 하루를 보내며 회복하는 암 환자 노릇을 할 수도 있었지만 그것이 내게 전혀 도움이 될 것 같지 않았다. 내 몸이 정상이면 정상적인 생활을 하는 것이 당연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직장에 돌아가니 처음에는 두뇌 회전이 느렸다. 그런데 뇌도 다른 근육과 같이 쓸수록 좋아지는 것을 느꼈다. 기억력도 차츰차츰 좋아지고 집에 있는 것보다 운동도 훨씬 많이 되었다. 교장 선생님은 내가 암 환자였다는 것이 도무지 믿어지지 않는다고 하시며, 전교생이 모인 가운데 박수로 환영해 주셨다. 학교 내에는 항상 아픈 아이들이 있는데도 내 면역력이 옛날보다 훨씬 좋아져서 아주 건강하게 생활하고 있다. 내 몸은 완전히 정상이고 암 수치도 지극히 정상이다. 어느새 직장으로 돌아간 지 4개월이 지났다.

   


사람이 이렇게 기쁘게 살 수 있구나…
2016년 12월을 맞이하며 한 해 동안 내게 있었던 일들이 파노라마처럼 지나갔다. 2015년 12월에는 살아야겠다는 마음으로 한 마디 말씀을 잡아 보려는 의지로 아픈 몸을 이끌고 달라스 수양회에 참석했는데, 2016년 12월에는 병이 다 나은 모습으로 하나님께서 내게 베푸신 은혜를 모두에게 알리고 싶은 마음으로 온통 설레며 수양회에 참석했다. 물론 박 목사님과 사모님을 다시금 뵈올 것도 기대하며.
수양회 장소에서 박 목사님을 뵈었을 때 목사님이 매우 반가워하셨고, 내가 더 길게 대화하고 싶어하자 우리 가족을 숙소로 초대하셨다. 한국에서 주일 예배 말씀을 전하고 바로 오셔서 많이 피곤하실 텐데도, 쉬는 대신 적은 시간을 쪼개어 우리에게 주셨다. 나는 어떻게 해서라도 도움을 입어야 하는 입장이었기에, 눈치도 보지 않고 거의 두 시간 동안이나 목사님이 해 주신 말씀을 꿀처럼 삼켰다. 고구마도 주시고, 요구르트도 주시고 해서 주시는 것마다 맛있게 먹었다. 목사님이 주시는 것을 사양하지 않고 무엇이든지 받고 싶었다. 목사님은 내가 무척 좋아하는 책 <마음을 파는 백화점> 영어 번역본을 꺼내어 사인까지 하신 후 남편에게 주셨다. 남편도 딸도 마음에 감동을 받고 마음 문이 활짝 열리는 것을 보았다.
목사님은 하나님께서 내게 일하시는 것을 보며 나보다도 더 기쁜 것 같다고 하셔서 내 마음은 더욱 기뻤다. ‘사람이 이렇게 기쁘게 살 수 있구나.’ 하며 행복했다. 마음의 표현이 점점 단순해지는 기분이다. ‘나는 감사해! 나는 기뻐! 나는 행복해!’ 그 외에 내 마음을 표현할 더 좋은 단어들이 없는 것 같다.
목사님이 내게 물으셨다. “자매님, 나는 궁금한 게 하나 있어요. 자매님은 어떻게 내 말을 그대로 믿을 수 있었어요?” 나는 오히려 깜짝 놀랐다. 목사님이 너무 쉬운 질문을 하셨기 때문이다. “목사님, 죽어 가는 판에 믿고 안 믿고 따질 상황입니까? 선택의 여지가 없었습니다.” 목사님은 그런 상황에서도 사람들이 다 믿지는 않는다고 하며 내가 은혜를 입었다고 하셨다. 은혜를 입히신 하나님께 또 감사했다. 목사님의 음성이 내게 왔을 때 나는 내가 할 일이 없다는 걸 알았다. 내가 이미 목사님의 믿음 안에 있다는 사실 때문이었다. 그래서 나는 믿으려고 애쓰지 않아도 되었다. 마치 엄마가 이 없는 아기에게 음식물을 씹어서 먹이는 것처럼, 목사님이 풀어서 해 주시는 말씀을 그냥 받아들이기만 하면 되었기에 너무 쉽고 감사했다.
그 다음날, 하나님께서 내게 수양회에 참석한 거의 2천 명 되는 형제 자매들 앞에서 간증할 시간을 주셨다. 몹시 떨리고 생각나지 않는 것도 많아 말의 순서가 엉망인 것 같았지만, 하나님께서 내게 하신 일을 간증할 기회를 주신 것이 감사했다. 한번은 박 목사님이 사도행전 9장 3절에 나오는 하늘로서 빛이 사울에게 비췬 것을 말씀해 주시면서, “자매님에게도 하나님께서 빛을 비추어 주셨기 때문에 자매님이 입을 열면 그 빛이 다른 사람들에게도 비춰집니다.”라고 하셨는데, 그 말씀의 의미를 마침내 알게 되었다. 나의 할 일은 말을 잘하고 못하고가 아니라 입을 여는 것이라는 것을.

다윗이 노래한 시편 119편 49~50절은 나에게 새 노래가 되었다
나는 평소에 박옥수 목사님을 특별히 신뢰하거나 기쁜소식선교회에 전적으로 소속되어 있다고 느끼지 않았지만, 단지 이곳에서 구원받았기에 신앙생활을 계속 해왔다. 교회를 의심해 본 적도 있고, 교회를 비방하는 소리를 들을 때면 ‘그럴 수도 있겠다’라고 생각한 적도 많다. 박옥수 목사님도 ‘기쁜소식선교회라는 큰 단체를 이끌고 계시니 대단히 훌륭한 지도자임에는 틀림없다’라는 차원으로 생각했다.
그런데 암이라는 큰 문제 속에 있는 나에게 목사님은 예수님의 마음을 보여 주셨고, 내 마음을 하나님과 연결시켜 주셨다. 전선이 연결될 때 전기가 흐르듯 내 마음이 목사님과 연결되니 하나님의 마음이 흘러들어오기 시작했고, 하나님의 말씀이 들리기 시작했다. 그 말씀이 내게 소망을 주고 기쁨을 주고 어려움을 이기게 했으며, 무엇보다도 생명의 길로 인도해 주었다.
난소암보다 더 무서운 암은 ‘나의 생각’이라는 암이었다. 그 암을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방사선으로 치료해 주시니, 나는 이제 자유와 기쁨과 감사의 언어로 방언을 하고 있는 기분이다. 다윗이 노래한 시편 119편 49~50절은 나에게 새 노래가 되었다.
“주의 종에게 하신 말씀을 기억하소서. 주께서 나로 소망이 있게 하셨나이다. 이 말씀은 나의 곤란 중에 위로라. 주의 말씀이 나를 살리셨음이니이다.”
얼마 전, 사역자 이동이 있어서 우리를 하나님 앞으로 이끌어 주셨던 이동옥 목사님 부부가 떠나시고 임명철 목사님 부부가 오셨다. 송별식 때 정자양 목사님이 말씀을 전해주셨다. 세 분의 말씀을 통역하면서 감명이 깊었다. 내가 통역하는 것이 아니라 내 안에서 하나님이 통역하셔서 나도 감동을 받으며 기쁨에 젖어 통역했다. 피곤한 줄 모르고 통역을 마치고 보니 두 시간 반이 흘러 있었다. 전에는 통역하다가 힘들 때가 많았는데, 나에게 새 힘이 주어졌다.
내게 암덩어리를 주셔서 나의 행위와 상관없이 일방적으로 은혜를 베푸시고 당신의 일을 나타내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린다. 그리고 하나님의 마음을 보여 주시고 내 마음을 하나님의 마음과 연결시켜 주신 박 목사님께 감사드린다. 또한, 나를 위해 기도해 주신 모든 분들에게도 감사드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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