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사셀을 위하여
아사셀을 위하여
  • 관리자
  • 승인 2017.03.29 11: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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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스라엘 이야기3

라아쟈졜, 렠흐 라아쟈졜
이스라엘에 처음 갔을 때 한번은 히브리 대학교에서 어학연수를 받는 외국 학생들을 위해 영화를 상영해 주었다. 이스라엘 군인들에 관한 영화로, 영화 속에서 이스라엘 배우들이 화를 내며 이렇게 말하는 장면이 자주 나왔다. “라아쟈졜La azazel!” “라아쟈졜!” 그 모습이 아주 재미있어서 영화가 끝나고 나이 지긋한 유대인 선생님에게 물었다. “라아쟈졜! 선생님, 이게 무슨 말인지요?” 그러자 그 선생님이 웃으면서 “아…, 그건 여러분같이 좋은 외국인 학생들은 절대 해서는 안 되는 말이니 오늘 이 시간부터 잊어버리세요.”라고 하고는 교실에서 나가셨다.
얼마 후, 유대인 시장에 장을 보러 갔다가 시장통에서 상인들이 말다툼을 하는데 한 사람이 화를 내며 “라아쟈졜! 렠흐 라아쟈졜!”이라고 하는 소리를 들었다. 얼마 전에 보았던 영화가 기억나서 화가 난 사람에게 다가가서 “아저씨, 방금 하신 말의 뜻이 무엇이지요?”라고 물었다. 이웃과 싸우고 있던 아저씨는 내가 한 질문에 무척 황당해 했던 기억이 난다.
라아쟈졜La azazel은 우리말로 ‘아사셀을 위하여’라는 말로, 레위기 16장에 기록되어 있다. ‘렠흐 라아쟈졜’이라는 말은 ‘아사셀을 위하여 가버려!’라는 뜻이다. 라아쟈졜이라는 말이 현재는 유대인들 사이에서 험한 욕으로 쓰이고 있는데, 우리말로 번역하면 ‘제기랄, 이런 빌어먹을, 염병할’ 정도로 해석되는 아주 상스러운 일상생활의 욕설이다. 그래서 영어로 된 미국 영화에서 욕을 하는 장면이 나오면 히브리어 자막에 ‘라아쟈졜’이라고 나온다. 현재 이 말은 극도로 화가 난 사람이 욕할 때 혹은 어떤 상황을 저주할 때 쓰는 말로, 누구든지 이 말을 내뱉으면 그것을 들은 사람이 마음이 상하고 때로는 격한 몸싸움으로 이어지기도 한다. 이스라엘 사회에서는 그만큼 상스러운 욕으로 쓰이고 있다.

아사셀이란?
원래 아사셀Azazel, 히브리 음으로 ‘아쟈졜’이라는 단어는 ‘염소’라는 뜻의 히브리어 ‘에즈’와 ‘가다, 급하게 가버리다’라는 뜻을 가진 고대 아람어
‘아쟐’이라는 단어가 합쳐져서 ‘내어놓음, 가버리게 놔둠’이라는 뜻을 가진 고유하고 독특한 단어가 되었다. 앞에서 이야기한 것처럼 현재는 욕설로 쓰이고 있는데, 그 저주스런 욕설을 풀어서 이야기하면 “야, 네가 이 모든 저주를 짊어지고 꺼져버려!”라는 강한 뜻이 들어 있다. 그래서 옛 유대인의 책에는 악마를 표현할 때 그 악마의 이름으로 자주 쓰이기도 했다.
유대교인이 아닌 현대 유대인들, 특히 젊은 학생들은 입버릇처럼 라아쟈졜이라는 말을 남용하지만, 이 말이 레위기의 속죄일의 규례에서 나왔다는 사실을 모르는 이들이 많다. 말은 하지만 그 의미의 출처는 잘 알지 못하는 것이다.
아사셀이라는 단어를 정확히 알려면 레위기 성경을 펴야 한다. 그 중에서도 16장에 나오는 이스라엘 백성이 일년에 한 차례 하나님 앞에서 갖는
‘욤 키푸르’ 즉 속죄일의 속죄제사 이야기로 거슬러 올라가야 그 의미를 정확히 알 수 있다.

왜 대속죄일이 7월 10일인가?
대속죄일은 유대력으로 ‘티쉬레이월(月)’ 즉 첫 달인 1월의 10일째가 되는 날로, 우리말로 ‘나팔절’이라고 불리는 유대인의 설날인 ‘로쉬 하샨나(유대력 1월 1일)’에서 10일째 되는 날이다. 그런데 성경에는 대속죄일이 1월이 아닌 7월 10일로 기록되어 있다. 그 이유는 이스라엘 백성이 출애굽하면서 첫 번째 유월절을 지나는데, 그날이 유대력으로 7월에 해당하는 니산월(月)의 14일이었기 때문이다. 출애굽기 12장 2절에서,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그 첫 번째 유월절을 지나는 니산월 14일을 달의 시작, 즉 해의 첫 달이 되게 하라고 명하셨다. 유대력으로 7월인 니산월을 1월로 명하심으로, 대속죄일이 들어 있는 티쉬레이월(月)이 거꾸로 7월이 되는 것이다. 그리고 10일째 되는 날이 속죄일이니 성경적으로 7월 10일이 대속죄일이 되는 것이다.
유월절을 달의 첫 달로 삼는 것을 ‘성경력聖經歷’ 혹은 ‘말씀력’이라고 한다. 쉽게 이야기하면 같은 대속죄일이 유대력으로는 1월 10일이 되고, 출애굽 이후를 기준으로 한 말씀력, 즉 성경력으로는 7월 10일이 되는 것이다. 나팔절이 시작되는 날부터 긴 양각나팔을 불기 시작해서 대속죄일에 대제사장이 지성소에서 피를 뿌리는 방울 소리가 울리고 해질 무렵이 되어 속죄일이 마치면, 나팔을 불어서 백성이 죄에서 해방되었고 속죄의 모든 과정을 잘 마쳤음을 온 백성에게 알게 했다.
물론 여기서 유대인의 하루를 계산하는 방법은 유대력이든 말씀력이든
‘해지는 저녁부터 다음날 해지는 저녁까지’가 하루가 된다.

여호와를 위한 염소와 아사셀을 위한 염소
대속죄일에 대제사장은 속죄제사를 드리기 전후로 율법에 기록된 대로 여러 가지 절차를 거친다. 물로 몸을 씻고, 거룩한 세마포 속옷과 고의를 입고 세마포 띠와 관을 갖추고, 자기를 위해 수송아지를 속죄제로 드리고, 향로에 거룩한 향을 채우고, 잡은 수송아지의 피를 속죄소 동편에 뿌리고, 또 손가락으로 속죄소 앞에 일곱 번 뿌려서 죽임 당함을 면해야 한다(레 16:4, 레 16:11~15).
이런 복잡한 과정들 가운데 가장 눈에 띄는 장면은, 속죄제를 위해 두 염소를 취하여 잠시 하나님 앞에 두었다가 제비를 뽑아 하나는 여호와를 위하여 속죄제로 드리고 하나는 아사셀을 위하여 속죄제 이후 광야로 보내는 것이다. 아사셀을 위한 염소는, 여호와를 위해 제비 뽑힌 염소가 죽임 당해 그 피로 지성소와 회막과 단을 위하여 속죄하기를 마친 후 산 채로 아사셀을 위하여 드려진다.
대속죄일에 뽑힌 두 염소는 모두 우리 죄를 담당하신 예수님의 그림자이다. 그래서 영적으로는 같은 의미로, 둘 다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우리의 모든 죄가 사해졌다는 사실을 가르쳐 준다. 여기서 두 염소의 차이점을 들자면, 제물로 드려지는 모양이 다른 것을 통해 하나님이 우리에게 전해주시고자 하는 분명한 메시지를 자세히 알 수 있다.
레위기 16장을 읽어 보면, 하나님께서 아사셀을 위한 염소를 통해 무엇인가를 강하게 강조하고 계심을 느낄 수 있다. 다른 날 드리는 제사 때에나 속죄일에 드리는 속죄제사 때에나 반드시 선택된 흠 없는 제물의 머리에 안수하는 것이 율법의 기본 법칙으로 정해져 있다. 물론 제사에 따라 안수하는 사람이 다를 수 있다. 평민의 제사에서는 죄를 사함받을 사람이, 화목제에서는 화목제를 드리는 사람이, 속죄일에 전체로 드리는 속죄제사에서는 대제사장이 안수한다. 이처럼 제사 형태에 따라 안수하는 사람이 다를 수 있지만, 분명한 사실은 모든 속죄제사의 기본 법칙이 ‘안수, 열납, 속죄, 사함’으로 이루어진다는 것이다. 반드시 제물이 피를 흘리고 죽어야 사함을 얻는 것만큼, 안수를 통해 죄가 제물에게로 넘어가는 것은 기본 중에 기본 법칙이다.
두 염소 모두 대제사장이 안수하여 죄를 넘긴 것이 분명하지만, ‘여호와를 위해 제비 뽑힌 염소’에 관하여는 그 염소가 죄를 지고 피 흘려 죽음으로써 죄 값이 지불된 부분을 강하게 말씀하고 있다. ‘아사셀을 위해 제비 뽑힌 염소’에 관하여는, 아론이 두 손으로 안수함으로써 이스라엘 백성의 모든 죄가 염소의 머리로 넘어간 부분을 강하게 말씀하고 있다. 즉, 여호와를 위해 제비 뽑힌 염소의 내용에서는 우리 죄 값이 지불된 것을 강조하고 있고, 아사셀을 위하여 제비 뽑힌 염소의 내용에서는 우리 죄가 안수함으로 넘어간 것을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하나님은 아사셀을 위하여 제비 뽑힌 염소를 통해, 이스라엘 백성의 모든 죄가 이 염소에게 안수되어 넘어간 것같이 우리의 모든 죄가 예수님에게로 온전히 건너간 것을 나타내고 싶으셨던 것이다. 그래서 안수했다는 많은 기록들 중 이 구절은 ‘아론이 두 손으로 안수했다’고 두 손이라고 분명히 기록되어 있다.


아사셀을 위한 염소의 본질
아사셀을 위하여 제비 뽑힌 염소 이야기의 핵심은 ‘우리 죄가 어디에 있느냐?’이다. 이스라엘 백성의 죄가 그들에게 있느냐, 아니면 염소에게 있느냐? 아론에 의해 안수되어 넘어갔다면 죄가 염소에게 있는 것이다. 이것이 아사셀 염소의 본질이다. 우리 죄가 우리에게 있는가, 예수님에게 있는가?
이사야 53장 6절에는 우리 무리의 죄악이 메시아인 예수님에게 담당되었다고 분명히 기록되어 있다. 그렇다면 우리 죄는 우리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에게 넘어간 것이 분명하다. 세례 요한은 예수님을 소개하며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양이로다.”라고 했다. 예수님을 소개할 때 “보라, 하나님의 아들이로다. 보라, 메시아로다. 보라, 유대인의 왕이로다.”라고 소개할 수 있는데, 그는 굳이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양’이라고 소개했다. 이것은 ‘우리의 모든 죄가 예수님에게 안수되어 넘어갔어. 이제 우리 죄가 우리에게 있는 게 아니라 예수님에게 있는 거야. 그것을 봐!’ 하고 우리 죄가 우리에게 있지 않고 예수님에게로 옮겨졌음을 강하게 외치고 있는 것이다. 즉 아사셀 염소의 본질은 그 염소가 백성의 모든 죄를 넘겨받아 지고 가버렸다는 것이다. 이것은 예수님의 그림자다.

아사셀의 협곡으로
레위기 16장 21절에는 아론이 두 손으로 안수하여 이스라엘 자손의 모든 불의와 모든 죄를 염소의 머리에 두었다고 정확히 기록하고 있다. 이 염소는 예수님의 그림자로, 우리가 저지른 돌이킬 수 없는 부정하고 불의한 모든 것이 예수님에게로 건너가서 우리에게 있지 않다는 것이다. 이제 이 염소는 미리 정한 사람의 손에 이끌려 광야로 간다. 즉, 예수님이 우리 죄를 지고 가셨음을 나타내고 있다.
예루살렘에서 유대광야 쪽으로 내려가다 보면 약 십여 킬로미터 되는 지점에 ‘아사셀의 협곡’이라 이름 붙여진 광야의 협곡이 있다. 출애굽한 후 모세 시대에는 아사셀 염소가 유대광야가 아닌 다른 광야로 내몰렸겠지만, 그 이후 성전 시대에는 아사셀의 염소가 유대광야로 내몰렸다. 어떤 이는 성전 시대에 아사셀 염소가 내몰린 아사셀 협곡이 지금의 아라드 근방인 유대광야와 네게브사막이 이어지는 접경지대로 그곳까지 내몰려서 놓였다고 주장하는데, 이 또한 가능성이 있다고 사람들은 말한다.
아라드에 있는, 유대광야가 끝나는 협곡에 가끔 가서 밑을 내려다볼 때가 있다. 아찔하게 보이는 그 협곡으로 염소가 내몰리면 굴러 떨어지기도 했을 텐데, 한번 미끄러지면 염소의 힘으로는 절대 올라올 수 없다. 굶어 죽든지 짐승의 밥이 되어 죽든지 거기서 생을 마감해야 했다. 지금도 유대광야에는 표범이나 줄무늬 하이에나 등이 사는데, 그 당시에는 어떠했을까? 줄무늬 하이에나나 사막 늑대 떼를 만나면 염소는 절대 살아 돌아올 수 없었다.
나는 해마다 대속죄일에 전국적으로 금식을 선포하고 종일 하나님 앞에서 금식하는 유대인들을 보아 왔다. 하루는 “왜 지금은 속죄제사를 안 드립니까?”라고 물으니, 유대인들이 제사를 드릴 성전과 제단이 없어서 그렇다고 대답해 주었다. 지금도 유대인들은 성전을 짓고 속죄제사를 부활시키려는 꿈을 꾸고 있다. 그때 아사셀을 위한 염소도 다시 나타날 것이다. 그러나 예수님이 이미 아사셀을 위하여 제비 뽑힌 염소처럼 세상의 모든 죄를 지고 가셨음을 그들이 믿기를 하나님께서 얼마나 원하시는가! 이스라엘 사람들이 그것을 알기를 진심으로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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