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으로 느끼는 진정한 평화(1)
마음으로 느끼는 진정한 평화(1)
  • 이가희
  • 승인 2017.06.08 10:5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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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 일 없이 지낼 때에는 평화의 소중함을 모릅니다. 그런데 전쟁이나 큰 어려움을 겪은 어른들은 평화가 얼마나 중요한지 아시지요. 우리는 자유와 평화를 누리며 사는 것을 당연하게 여기지만, 사실 누군가의 희생 없이는 자유도 평화도 지켜지지 않아요. 호국보훈의 달인 6월을 맞아 평화의 소중함과 참뜻을 생각해 봐요.

총을 들지 않은 군인

데즈먼드 도스는 미국의 가난한 목수인 아버지와 기독교인인 어머니 밑에서 자랐어요. 1939년 제2차 세계대전이 일어나자 그는 육군에 지원했어요. 사람을 죽이는 총을 잡는 것이 싫어서 다친 병사들을 돌보는 의무병으로 활동했어요. 소총 훈련을 받는 날, 그는 총을 잡기를 거절했어요. “저는 하나님을 믿는 사람입니다. 다들 총부리를 겨누며 죽이는 전장에서 저는 살리는 일을 할 겁니다.”라며 끝까지 소총 훈련을 받지 않았어요. 도스의 부대에 속한 군인들과 장병들은 그를 미친 사람 취급했어요. 상관들은 그에게 전투병으로 바꾸라며 그가 총을 잡도록 계속 설득했어요. 군사재판에 넘기겠다고 협박하고, 그를 다른 부대로 보내려고 했어요. 동료병사들은 밤마다 자기 전에 기도를 하는 도스에게 전투화를 집어 던지기도 했어요. 결국 미군은 그를 설득하는 것을 포기했고, 그는 부대 안에서 유일한 의무병으로 태평양 전선에 배치됐어요.

 

핵소고지 전투

1945년 5월, 도스가 속한 부대는 일본 오키나와의 마에다 절벽 반대편에 숨어있는 일본군의 지휘소를 공격하라는 명령을 받았어요. 도스와 200명의 병사들은 절벽을 올라타 진격했지만 언덕에 도착하자마자 그들을 기다리고 있던 일본군들의 치열한 공격을 받아 100여명이 순식간에 쓰러지고 겨우 살아남은 55명만이 후퇴했어요.

도스는 후퇴하는 군인들과 반대 방향인 적진으로 뛰어 들어갔어요. 일본군들이 쏘는 수많은 총알들과 폭탄이 터지는 와중에도 그는 쓰러진 동료들을 일일이 살펴보며 살아있는지 확인했어요. 살아있는 동료가 있으면 들쳐 업거나, 둘러메서 안전한 곳으로 나르기 시작했어요. 한 명, 한 명 들것에 싣고, 밧줄로 묶어 안전한 곳으로 보내기 시작한 한참 뒤, 그는 일본군이 숨어서 수류탄을 던지고 있는 10미터 앞까지 달려가 쓰러진 동료 7명을 차례대로 구해냈어요. 그가 입고 있던 군복은 피에 절어 검붉은 색으로 변했어요. 자신의 생명을 지키는 것을 잊은 채 75명의 생명을 구했어요. 그는 병사들을 구하는 12시간 동안 마음속으로 계속 “하나님, 제발 한 명만 더 구할 수 있게 해주세요.”라고 기도했어요.

도스는 미국으로 돌아와 전투병이 아닌 의무병으로서 최초로 명예 훈장을 받았어요. 그는 상을 받고 “하나님이 나를 보호해 주실 것을 믿었습니다.”라는 말을 남겼어요. 총알과 포탄이 빗발치는 적진에 뛰어들어 동료들을 구한 도스는 하나님을 믿는 믿음으로 마음에 넘치는 평안을 전한 것이랍니다.

 

*제2차 세계대전

1939년부터 1945년까지 유럽, 아시아, 북아프리카, 태평양 등지에서 독일, 이탈리아, 일본을 중심으로 한 추축국과 영국, 프랑스, 미국, 소련 등을 중심으로 한 연합국 사이에 벌어진 세계 규모의 전쟁이에요. 지금까지 인류 역사에서 가장 큰 인명과 재산이 피해를 입었어요.

악동에서 올림픽 대표로

루이스 잠페리니는 어릴 때부터 못 말리는 악동이었어요. 여자아이들을 때리고, 선생님을 밀쳐버리고, 경찰관에게 썩은 토마토를 던지는 등 그의 못된 장난을 견디다 못한 주위 이웃들이 그를 어디론가 멀리 보내버려야겠다고 말할 정도였어요. 그의 형 피트는 잠페리니가 장난을 치고 도망칠 때 달리기가 아주 빠른 것을 눈여겨보고 그에게 육상을 배울 것을 권했어요.

그는 곧 고등학교의 육상선수권대회에서 금메달을 땄고, 사람들은 그를 ‘토랜스의 회오리바람’이라고 부르며 칭찬했어요. 그는 미국 육상 대표선수로 뽑혀 19세에 최연소 올림픽 국가대표로 1936년 베를린 올림픽에 출전했어요. 그는 비록 메달은 따지 못했지만, 젊었기에 자신감이 있었고 많은 사람들도 그가 세계 최고의 육상선수가 될 것이라고 생각했어요.

 

전쟁 포로가 되다

올림픽이 끝난 후 제2차 세계대전이 일어났고 그는 육군 항공대에 입대해 폭격기 승무원으로 태평양 전선에 배치됐어요. 하지만 그가 탄 폭격기가 고장이 나 태평양 한가운데로 추락하고 말았어요. 잠페리니를 포함해 3명만 겨우 살아남았고, 그는 2명의 동료들과 구조를 기다리며 47일 동안 버텼어요. 도중에 1명은 결국 죽었고, 그들은 운이 없게도 적군이던 일본 해군에게 발견되어 포로수용소로 들어갔어요. 잠페리니가 올림픽 육상 선수였다는 것을 알고 일본 육군 중사인 와타나베 무츠히로는 그를 다른 포로들보다 더욱 심하게 괴롭혔어요. 일본군과 달리기 시합을 시킨 뒤 져도 때리고, 이기면 더 심하게 때리는 등 그는 수많은 모욕과 괴로움을 참아야 했어요. 그와 함께 수용소생활을 한 피츠제럴드 중령은 “저들에게 이기는 건, 전쟁이 끌날 때까지 살아남는 거야. 그게 우리의 승리야.”라고 말하며 수용소 생활을 버틸 수 있게 해주었어요.

 

알코올중독자가 되다

1945년, 마침내 전쟁이 끝나고 죽은 줄로만 알았던 잠페리니가 돌아온 것을 보고 온 미국이 놀랐어요. 그는 전보다 더 큰 영웅 대접을 받으며, 많은 상과 훈장, 인터뷰 요청을 받았어요. 그는 곧 결혼도 하고 새로운 인생을 시작하는 듯 했지만 일본군에게 당한 고문의 후유증으로 매일 밤 악몽에 시달렸어요. 그는 괴로워하며 술만 마시다가 결국 알코올중독자가 됐어요. 특히 자신을 괴롭힌 와타나베가 너무 미워서 그를 죽이러 일본에 가려고 일본행 비행기 티켓 값을 모으기도 했어요.

어느 날 밤, 그는 악몽을 꾸다가 자기도 모르게 아내의 목을 조르는 일이 벌어졌어요. 그의 아내는 알코올중독자가 된 남편과 이혼하려고 결심했다가 우연히 참석한 성경집회에서 하나님을 알게 되어 잠페리니를 데리고 교회에 나갔어요. 그는 교회에서 말씀을 들으며 태평양 한복판에서 하나님께 기도했던 것이 생각났어요. 그는 그 뒤로 하나님을 믿게 되었고 매일 자신을 괴롭히던 악몽과 미움에서 벗어날 수 있었어요.

모든 사람들의 마음속에는 위대함이 있다

그는 1950년에 선교여행으로 일본으로 가서 전범교도소에 수감되어 있던 옛 간수들을 찾아가 그가 만난 하나님을 이야기했어요. 와타나베도 만나려했지만 와타나베는 끝까지 그를 만나기를 거부했어요. 잠페리니는 그 후로 기독교 전도자로 일하다가 92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어요. 그는 “이 세상에 절망은 없다. 희망과 믿음만 있으면 뭐든 해낼 수 있다.”는 명언을 남겼어요. 그는 자신의 이야기를 영화로 만들겠다는 요청에 답하며 “내가 얼마나 위대한 사람인가에 대한 영화는 만들지 마시오. 사람들의 마음속에 위대함이 있다는 걸 깨닫는 영화를 만들어주시오.”라고 부탁했다고 해요.

그는 유망한 육상선수로 자신만만하게 살다가 전쟁포로가 되면서 모진 고문을 이기고 살아 돌아왔어요. 하지만 미워하는 마음을 이길 수 없어 알콜중독자로 살다가 결국 하나님을 만나 자신을 괴롭힌 원수를 용서하며 진정한 마음의 평화를 이뤘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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