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恨을 품고 살 인생이었지만, 이제는 웃는다
한恨을 품고 살 인생이었지만, 이제는 웃는다
  • 정정숙(기쁜소식분당교회 사모)
  • 승인 2017.06.28 21: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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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페셜 간증 시리즈 가족이야기2

내 인생에 네 명의 남자가 있었다. 아버지, 오빠, 남편, 아들. 아버지도 돌아가시고, 오빠도 젊은 나이에 세상을 떠나고, 아들도 죽었다. 마지막으로 남편이 남았다. 짐이 얼마나 무겁던지
어린 나이에 아버지와 오빠의 죽음을 보면서 무척 슬펐다. 이른 봄 꽃샘추위에 꽃이 피지도 못하고 시커멓게 떨어져버린 것처럼 나의 어린 시절도 그랬다. ‘사람은 죽으면 어디로 갈까?’ 남편과 아들을 잃은 엄마는 가끔 먹지 못하는 술을 드시며 눈물을 흘리셨다. 일찍부터 인생에 허무함을 느꼈고, 재미있는 것도 없었다.
스물 네 살 때 많이 아팠다. 다니던 직장을 3개월 동안 쉬고 하루는 일어나 목욕탕에 갔는데, 몸이 많이 약해졌던지 샤워기를 트는 순간 쓰러졌다. 누군가 나에게 물을 끼얹어 주며 말을 걸었다. 정신을 차리고 일어나 거울을 보니 이마에 멍이 들어 있었다. 대충 씻고 집으로 갔는데, 빌렸던 비디오테이프를 반납하려고 나갔다가 목욕탕에서 만났던 분들을 다시 만났다. 나중에 알았지만, 선교학교에서 훈련받는 분들이었다. 박옥수 목사님이 인도하는 전도 집회에 따라왔던 것이다. 그분들이 얼마나 집회에 가자고 권하던지, 나 같은 사람에게 그토록 마음을 쏟아 주는 게 고마워서 따라갔다.
집회에 참석해서 말씀을 들었지만 무슨 말인지 알아듣지 못했다. 그래도 내 인생에는 길이 없었기에 매일 교회에 찾아갔다. 한 달 동안 말씀을 들었지만 여전히 무슨 말인지 몰랐다. 목사님과 신앙 교제를 마치고 나오면 청년 자매들이 매번 “아가씨, 구원받았어요?”라고 물어 ‘구원’이라는 단어가 마음에 새겨졌다. 얼마 지나지 않아 수양회가 있었고, 나도 그곳에 가보고 싶었다.
충북 영동에 있는 자라목 솔밭. 검은 차광막이 쳐진 ‘복음반’ 에서 말씀을 들었고, 어느 순간 내 죄의 짐이 내려놓아졌다. 내 등에는 큰 짐이 하나 있었다. 그 짐이 얼마나 무겁던지 그것을 벗겨줄 사람을 찾았는데, 그날 나는 그 짐을 비로소 내려놓은 것이다. “이것을 사하셨은즉 다시 죄를 위하여 제사드릴 것이 없느니라.”(히 10:18) 내 죄를 다 씻어 주신 예수님…. 한없이 평안했다. 수양회를 마치고 돌아와 매일 교회에 갔다.

끝이 없는 어두운 긴 터널
스물 여덟, 추석을 앞두고 내가 다니던 기쁜소식진주교회 목사님의 주선으로 지금의 남편과 선을 보았다. 교회가 소개해 준 사람이었기에 결혼하기로 마음을 정했다. 얼마 후, 우리는 교회 사택에서 방 한 칸을 주셔서 신혼생활을 시작했다.
3개월쯤 지났을까, 남편이 퇴근길에 술을 마시고 왔다. 그것이 남편이 20년 동안 술에 빠져서 지낸 삶의 시작이었다. 시간이 흐를수록 남편은 술에 더 깊이 빠졌다. 수없이 이혼을 생각하고, 미워하고, 마음에서 남편을 죽였다. 남편 때문에 내 인생이 망가졌다며 원망 속에서 살았다.
끝이 없는 어두운 긴 터널…! ‘언제쯤 이곳에서 나갈 수 있을까?’ 정말 벗어나고 싶었다. 그 삶이 너무 싫었다. 어느 곳에서도 쉬지 못하고, 힘들고, 마음이 지쳤다.
1999년 5월, 남편의 고향인 합천으로 이사를 갔다. 그리고 그 해 9월에 둘째 아들이 죽었다. 나는 정신이 거의 나간 사람이 되었다. 남편은 상태가 심해지고, 딸도 힘들어했다. 나는 아무 소망 없이 교회를 다녔다.
 
목사님을 꼭 한 번은 뵙고 싶었습니다
세월이 흐르고, 그토록 미웠던 남편이 불쌍해 보였다. 남편은 술을 마시고 광패를 부렸지만 항상 내 옆에서 잤다. 술 냄새, 발 냄새…, 정말 싫었다. 부모도, 형제도, 아내도, 딸도, 이웃도, 직장 동료도 좋아하지 않았다. 방에 틀어박혀 술만 먹는 남편이 참 외롭겠다는 마음이 들었다. 술을 끊게 하려고 이렇게도 저렇게도 해보았지만 안 되었다. 알코올병원에도 입원시켜 보았지만 헛수고였다.
길이 없었다. ‘마지막으로 박옥수 목사님께 가보자.’는 마음이 들었다. 변하지 않을 것 같은 청소년들이 목사님을 만나 새 삶을 시작하는 것을 보면서 ‘목사님이면 되겠다’는 소망이 한 줄기 빛으로 내 마음을 비추고 있었다.
몇 년이 흐르고, 2013년 12월이었다. 진주에서 그라시아스합창단의 크리스마스 칸타타 공연이 있던 날, 박옥수 목사님이 진주에 오셨다. 그리고 그날 밤에 목사님이 합천 교회를 방문하셨다. 칸타타 공연을 보고 집으로 가고 있는데, 교회 목사님이 나에게 전화해서 교회로 오라고 하셨다.
교회 사택으로 가니, 여러 목사님들과 교회 성도들이 둘러앉아 있었다. 우리 교회 목사님이 박 목사님께 교회 성도들을 한 사람 한 사람 소개했다. 나를 소개할 때 나는 “목사님, 저는 목사님을 꼭 한 번은 뵙고 싶었습니다!”라고 말씀드렸다. 목사님이 가까이 오라고 하더니 이유를 물으셨다. 남편 이야기를 말씀드리자 목사님이 다음날 새벽에 남편을 데려오라고 하셨다.

말씀이 온전하다고 하면 온전하네요
이튿날 새벽, 교회의 한 형제님이 남편을 태우러 차를 가지고 왔다. 너무 고마웠다. 마침내 목사님과 남편이 마주앉았다. 남편이 술에서 벗어나려고 해도 안 된다고 이야기하자, 목사님이 물으셨다.
“심 형제, 구원받았는가?”
“네, 귀신이 잡아가도 구원은 받았습니다.”
“심 형제가 모르는 게 하나 있어. 자네는 말씀을 한 번도 믿은 적이 없어. 히브리서 10장 14절에 ‘저가 한 제물로 거룩하게 된 자들을 영원히 온전케 하셨느니라.’라고 했어. 이 성경 말씀을 봐. 말씀에는 뭐라고 되어 있어? 거룩하게 된 자들을 영원히 온전케 했다고 되어 있는가?”
거기까지 이야기하고 목사님이 남편에게 다시 물으셨다.
“심 형제, 거룩해?”
“예, 거룩합니다.”
“그러면 심 형제는 온전한가?”
남편은 대답을 하지 않았다. 자기 모습을 보니 온전하다는 말을 할 수 없었던 것이다. 양심을 따라서는 도저히 할 수 없는 대답이었다. 목사님은 상 위에 있는 물을 마시면서 이렇게 말씀하셨다.
“자, 심 형제. 내가 지금 술을 한 잔 마셨어. 그리고 잔을 탁 놓으면서 ‘그래도 나는 온전해!’ 하는 거야. 이게 믿음이야. 심 형제가 지금까지 술을 마신 것도 맞고, 20년 동안 형편없이 산 것도 맞아! 그러나, 말씀이 뭐라고 하는지 그것을 받아들이는 게 믿음이야!”
20분 남짓 이야기가 이어지고, 남편은 마침내 성경 말씀을 받아들였다.
“제가 지금 술을 먹었지만, 말씀이 온전하다고 하면 온전하네요.”
“심 형제, 자네 믿지 마. 자네는 끝났어.”
목사님은 갈라디아서 2장 20절 말씀을 남편에게 설명해 주셨다. 그리고 남편에게 신학교에 들어오라고 하셨다.

 

나에게 이런 날도 있구나
집에 돌아와서 남편은 마를 갈아 달라고 했다. 국수 그릇에 가득 갈아서 주었더니, 그걸 먹고는 꼬박 하루를 자고 일어났다. 뒷날은 죽을 달라고 했다. 그리고 사흘째 되던 날, 마하나임신학교로 올라갔다.
남편이 서울로 가기 전날 밤, 잠이 오지 않았다. 나는 마음에 독을 품고 살았다. 구원을 받았지만, 내가 어떤 사람인지 몰랐기에 예수님이 고마운 줄도 모르고 살았다. “어찌 저런 남편하고 살까? 참 귀하다. 마누라 하나는 잘 얻었네!” 간혹 이런 소리를 들었기에 내가 좋은 아내인 줄로만 알았다. 하지만 나는 중심이 표독한, 거짓된 사람이었다. 지난날의 내 모습을 돌아보며 그런 나를 인정하고 나니 마음이 참 평안했다. 그런 나를 위해 죽어 주신 예수님이 고마웠다.
2014년 3월, 기쁜소식강남교회에서 신학생의 삶을 시작했다. 더없이 평안하고 행복했다. 결코 벗을 수 없을 것 같았던 멍에를 벗겨 주시고 살게 하시니 마음이 얼마나 가볍던지. ‘나에게 이런 날도 있구나…!’ 작은 어려움은 있었지만, 내 인생은 따스한 봄날의 꽃길이었다. 사막 같았던 내 마음에 물이 흘러 부드러운 땅이 되고, 햇살이 비취고 새싹들이 돋아났다.
쓸모없어서 오히려 없는 게 나을 것 같은 우리 부부를 박 목사님은 마음으로 대해 주셨다. 과분한 대접이었다. 꽁꽁 얼어붙었던 내 마음이 녹고 열렸다. 사랑에 굶주렸던 내 마음에 따스한 마음이 전해질 때마다 자주 울었다. 나에게 마음의 아버지가 생겼다.

내가 왜 힘들어하지?
6개월쯤 지나면서 남편이 힘들어하기 시작했다. 신학교에서 같이 훈련받던 형제님들은 교회를 섬기다가 왔기에 남편과 여러 면에서 차이가 있었다. 남편은 못난 자신을 느끼면서 ‘나는 사역자가 될 자격이 없어’ 하며 합천으로 내려갔다.
내 마음에는 하나님이 그어 주신 분명한 선이 있었다. 내 생각을 믿고 살았던 삶은 끝없는 고통이었고, 인도와 보살핌을 받는 삶은 따뜻한 행복이었다. 내 생각을 믿고 살았던 지난 20년! 그 고통을 뼈에 새겼기에, 생각을 좇는 길을 두 번 다시 가고 싶지 않았다. 자기생각을 쫒아가는 남편을 따라갈 수도 없었다. 얼마 후 남편은 돌아왔고, 훈련을 마치고 기쁜소식원주교회 전도사로 파송을 받았다.
산을 끼고 있는 기쁜소식원주교회 예배당이 참 좋았다. 산이 많은 경남 산청이 내 고향이어서 나는 산을 좋아하고, 자연이 좋다. 목사님과 성도들이 우리 부부를 반갑게 맞아주셨다. 그런데 원주에서도 남편은 자주 자신의 부족함을 느끼며 마음이 흔들렸고, 그럴 때면 합천으로 가버렸다. 세 번째 합천으로 갔을 때에는 얼마나 눈물이 나던지 펑펑 울었다.
예배당에 멍하니 앉아 있는데 ‘내가 왜 힘들어하지?’라는 마음이 들었다.
‘남편이 가버려서일까? 내 신앙에 문제가 있다고 간섭을 받아서일까?’ 그렇지 않았다. 나를 버리지 못하는 데에서 오는 고통이었다. 강대상에 걸려 있는 십자가를 바라보면서 하나님이 나를 버리신 것이 생각되었다.
‘하나님이 버린 나를 부둥켜안고 내가 슬퍼하고 있구나. 그래, 이젠 버려진 걸 받아들여 보자!’
합천으로 가서, 낙망 속에 빠져 있던 남편에게 ‘박 목사님께 한번 가보자’고 했다. 남편도 목사님을 뵙고 싶어 했다. 목사님께 전화를 드리니, 같이 올라오라고 하셨다. 길이 없는 우리 부부에게 길이 되어 주시는 목사님을 생각하니, 또 눈물이 났다. 목사님은 남편 이야기를 듣고는 “자네, 내 밑에 좀 와 있겠는가?”라고 물으셨다. 제발 그렇게 해 달라고 부탁드렸다.

신랑을 잘 만나서 비행기도 타보네
2015년 11월, 우리 부부는 기쁜소식분당교회로 옮겨갔다. 박영주 목사님이 우리 부부를 평안하게 대해 주셨다. 자신에게 눌리고 갇혀 살던 남편이 차츰 마음에 평정을 찾고, 목사님에게 마음을 열었다. 박영주 목사님은 우리 부부를 쉬게 해주셨다.
2016년, 미국에서 갖는 그라시아스합창단의 크리스마스 칸타타 순회공연에 우리 부부를 스태프로 불러 주었다. 나는 그때까지 제주도도 가 본 적이 없었다. 목사님이 미국에 가는 모든 것을 준비해 주셨다. 영어를 못 하는 우리 부부가 국제미아가 될까봐, 우리가 어떻게 해야 하는지 비행기표에 우리말로 상세히 적어 주셨다.
중국을 거쳐 미국으로 가는 비행기였는데, 날씨 변화로 인해 인천에서 세 시간 늦게 출발했다. 비행기를 타니 무얼 적으라고 종이를 주는데, 무엇을 적어야 하는 건지 알 수 없었다. 마침 우리 옆자리에 한국 사람이 있어서 도움을 청하자 도와주었다. 중국에 도착하니, 우리가 타고 갈 비행기는 다음날 저녁에 출발한다고 했다. 우리는 중국말을 전혀 모르는데, 우리를 도와주었던 분이 묵어야 할 호텔이며 다음날 어디에서 비행기를 타야 하는지 세세히 가르쳐 주었다. 헤어지면서는 자기 전화번호를 적어 주면서 어려운 일이 있으면 연락하라고 했다. 참 고마웠다. 우리 부부의 약함을 아시고 하나님이 예비해 주신 분이었다.
처음으로 타 본 비행기. 구름 위에 올라 아래를 내려다보는데, 하얀 구름이 얼마나 예쁘던지…. 눈 덮인 겨울 산 같기도 했다. 하나님이 만드신 자연이 무척 아름다웠다. 남편이 나에게 “신랑을 잘 만나서 비행기도 타보네.” 하는데, 우리는 서로를 쳐다보면서 마음껏 웃었다.
드디어 미국에 도착했다. 남편이 내 짐을 일일이 챙겨 주었다. 무뚝뚝한 경상도 사람이었는데 얼마나 변했는지…. 남편의 마음 씀이 나를 쉬게 했다.

꿈도 꾸지 못했던 아름다운 여행
부푼 꿈을 안고 간 미국. 우리는 마하나임학교에서 생활했다. 그곳에서는 하루하루가 굉장히 바빴다. 교회 몇 자매님들은 매일 부엌에서 시간을 보냈다. 한국에서 링컨스쿨 학생들도 오고, 여름 수양회도 갖고, 그라시아스합창단 단원들도 지내고…. 음식을 준비하느라 몸은 피곤했다. 복음을 위해 부엌에서 일하는 자매님들이 귀하게 보였다.
저녁이 되어 학교 마당에 있는 벤치에 앉으면 반딧불들이 날아다녔다. 마하나임은 청정지역이서 공기가 맑았다. 하나님이 만드신 자연을 마음껏 느낄 수 있었다. 이른 아침에 성경을 들고 마당에 나가면, 다람쥐가 떨어진 과자 부스러기를 주워먹다가 나와 눈이 마주치면 얼른 도망갔다.
크리스마스 칸타타 공연이 가까워지자 형제 자매들이 모두 모여서 사람들을 공연에 초청하는 편지를 썼다. 나도 늦은 시각까지 함께 편지를 썼다.
9월 14일, 드디어 크리스마스 칸타타 순회공연이 시작되었다. 어느 도시에서나 음식을 준비하는 부엌은 정말 바빴다. 정해진 시간 안에 음식이 나가야 하기에 나도 뛰어다니며 일을 거들었다.
공연을 볼 기회가 세 번 있었다. 한국 사람들과 달리 뜨겁게 반응하는 미국 사람들을 보니 피곤이 다 풀렸다. 그들의 모습이 마음에 얼마나 감동을 주던지…! 그 바쁜 중에도 뉴욕 교회 목사님이 우리 부부를 하루 관광하게 해주셨다. 신경 쓸 일이 한두 가지가 아닐 텐데 그렇게 우리를 챙겨 주시는 목사님의 마음이 또 나를 행복하게 했다.
한 달 동안 부엌일을 도우며 미국을 순회했다. 공연을 준비하는 교회나 주변의 교회들이 마음을 하나로 합해서 서로 도우며 움직였다. 그라시아스합창단의 공연을 보고 성탄 메시지로 복음을 들으면서 수천 명의 관객들이 눈물을 흘리며 감동하는데, 그 뒤에는 눈에 보이지 않는 곳에서 몸과 마음을 다 드려 뒷받침하는 손길들이 있었다. 그것을 알아서인지, 감동하는 관객들을 보면 마음이 더 뜨거웠다. 복음을 섬기는 미국의 선교사님들과 형제 자매들이 아름답게만 보였다. 하나님이 어려운 형편을 도우신 이야기들을 들으면서 감사한 마음이 더 깊어졌다.
미국에서 보낸 3개월. 넓은 땅, 수많은 사연들, 깊은 감동, 뜨거운 감사…. 내 생에 그런 날이 있을 거라고는 꿈도 꾸지 못했던 아름다운 여행이었다. 하나님의 은혜요, 교회의 사랑이었다.

남편이 강대상에 서서
예수님을 증거하는구나…!

얼마 전에 기쁜소식용산교회와 기쁜소식노원교회에서 남편을 강사로 초청했다. 집회 첫날, 강대상에 선 남편을 보니 가슴이 뭉클했다. 저절로 눈물이 났다. 남편이 입을 열어 예수님을 이야기했다. ‘우리 남편이 강대상에 서서 예수님을 증거하는구나…!’
기쁜소식노원교회 집회를 준비하면서는 남편이 음식을 거의 먹지 못했다. 자신처럼 부족한 사람이 집회 강사로 말씀을 전한다며 많이 부담스러워했다. 성경도 읽고, 설교 말씀도 듣고, 박옥수 목사님의 저서들도 보았다. 하루는 집회 전에 기쁜소식노원교회의 목사님이 남편에게 전화해, 이런 이야기를 들려주셨다.
“전도사님, 바보 명궁 아시죠? 바보 아들이 활을 쏘면 아버지가 뛰어가서 활에 꽂힌 곳에 동그라미 과녁을 그립니다. 무조건 명중이지요.”
사실, 우리 부부는 바보 같은 사람들이다. 그런데 남편이 말씀을 전하면 하나님이 거기에 동그라미를 그려 주시기에 행복하게 살고 있다.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오천 명을 먹이신 예수님. 우리가 그 보리떡 같지만 예수님이 축사하시니 많은 사람이 먹고도 남는다. 남편을 생각하면 자꾸 이 말씀이 떠오른다.
요즘 남편은 마음이 쉬고 있다. 온전한 말씀이 마음을 주장하여 생각에 눌려 살던 데에서 벗어나 자유와 평안을 누리며 산다. 자신이 얼마나 형편없는 사람이었는지 알기에, 버려진 자신에게 베풀어준 하나님의 사랑과 교회의 은혜를 전하며 지낸다.

그곳에 예수님이 오셔서
간증을 적으면서 하나님이 나에게 베푸신 은혜가 얼마나 큰지, 그 은혜에 마음이 푹 젖어 정말 감사한 시간을 가졌다.
돌아보면, 술에 빠져 지낸 20년 동안 남편은 점점 거칠고 포악해져 갔다. 쉬지 않고 술을 마실 때에는, 눈을 쳐다보면 서늘한 광기가 느껴져 그 눈빛이 정말 무서웠다. 알코올 중독자는 몸에서 음식을 받지 않기에 술로 술을 푼다. 그래서 남편의 다리는 거의 뼈밖에 없었다. 걸어가는 모습을 뒤에서 보면 힘이 없어서 곧 넘어질 것 같았다. 교회에서 추태를 부린 적도 한두 번이 아니었다.
“사람이 되어서 어찌 저럴 수 있을까? 저 사람은 안 돼!!” 누가 봐도 회복될 가능성이 없어 보였다.
남편이 보통 사람처럼 살아만 줘도 고맙다는 마음이 들었다. 아침에 일어나 가족이 마주앉아 밥을 먹고 남편이 맑은 정신으로 지내만 줘도 은혜라는 마음으로 살았다. 그런데 지금은 남편이 성경을 읽고, 기도하고, 복음을 전한다.
한을 품고 슬퍼할 인생이었는데 하나님이 웃게 하셨다. 결코 행복하지 못할 것 같았던 그곳에 예수님이 오셔서 우리를 행복하게 하셨다. 나는 저주받은 여자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것은 하나님의 사랑과 인자였다. 
신학교에 오면서 두고 온 딸이 항상 그립고 보고 싶다. 왠지 안쓰럽고 미안하다. 이제는 모든 것을 하실 수 있는 하나님께 기도하며 부탁드린다. 우리에게 평안을 주셨듯이 우리 아이에게도 그렇게 해주시라고….
우리 부부를 사랑하시고 우리에게 복되고 아름다운 새 삶을 주신 하나님, 그리고 교회와 하나님의 종에게 마음 깊이 감사를 드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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