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 앞에서 그리스도의 향기니
하나님 앞에서 그리스도의 향기니
  • 조영주
  • 승인 2017.07.28 16: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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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도소에서 온 편지
 

안녕하십니까, 목사님! 저는 1991년 4월에 무기형을 선고받고 지금 26년  넘게 복역 중입니다. 저는 일찍 결혼해서 1남 1녀를 두고 살다가 35세 때 불미스러운 일로 인하여 고귀한 생명을 죽이고 영어의 몸이 되었습니다. 그런 제가 일면식도 없는 목사님께 부족한 글이지만 제 신앙 간증을 적어보려 합니다.
1991년 4월, 성동구치소에 구속수감 되었을 때 ‘고귀한 한 생명을 죽였으니 나도 죽게 되겠구나.’ 하는 자포자기 심정이었습니다. 그런 저에게 한 분이 다가와 하나님에 대한 이야기를 하신 후 기도해 주셨습니다. 제 마음은 편안했고 알지 못하는 무언가가 저를 위로해 주었습니다. 그날부터 하루도 쉬지 않고 성경을 읽었습니다.
1심 재판이 끝나고 무기형을 선고받고 항소하여 영등포교도소로 이감되고 며칠째 되던 날 강태호라는 담당자님이 저를 찾아왔습니다. 제 소지품에 성경에 관련된 책들이 많아서 한번 만나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합니다. 그분은 이틀 뒤에 다시 찾아와 <죄 사함 거듭남의 비밀> 1,2권을 주셨습니다. 그 책을 읽던 중에 지금껏 읽어왔던 다른 목사님의 저서와는 뭔가 다르다는 것을 느꼈습니다. 그 말씀에 도취되어 밤을 꼬박 새우고 성경을 찾아가며 다 읽었습니다. 책 한 권을 다 읽고 난 후에 또 다시 읽는데도 마치 그동안 한 번도 맛보지 못한 색다른 맛을 보는 것처럼 새로웠습니다. 읽는 동안 저도 모르게 ‘아! 아!’ 라는 감탄사가 나올 정도로 희열을 느꼈고, 그 순간만큼은 제 자신이 죄수라는 것도 잊고 날아가는 기분이었습니다. 그날부터 면회 오는 아내에게 목사님의 저서를 구입해서 넣어달라고 했습니다. 신앙생활을 하며 밝아진 제 모습을 보고 아내도 힘을 얻었으며 목사님의 저서도 구입해 넣어주었습니다.
성경을 보면 분명 주님은 자신이 “안식일의 주인이라”하셨고, 또한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하셨으며, 예수 안에 들어온 자는 “새로운 피조물”이기에 죄인이 아니라 의인이라 하시고, 피 흘림이 없이는 죄를 사하지 못한다고 되어 있었습니다. 그러나 정통이라는 교단의 교리는 자범죄는 날마다 회개해야 용서받고 사해진다고 했습니다. ‘내가 스스로 죄를 회개함으로 죄가 사해진다면 예수님이 굳이 십자가에 달려 피 흘릴 이유가 없지 않는가? 또한 예수님께서는 내가 죄를 지을 때마다 오셔서 십자가에서 피를 흘리셔야 하는 것 아닌가?’ 하는 의문이 머리를 복잡하게 하였지요. 그런데 목사님의 책을 읽고 난 후 그 의문들이 한번에 풀리고 죄에서 완전히 해방되면서 하나님의 자녀로서 ‘의인’임을 확실히 알게 되었습니다. 그때가 1991년 10월 8일이며 제가 예수 안에서 새로 태어난 날이었습니다.
영등포에서 4개월 동안 목사님의 저서를 만나면서 성경 읽기에 탄력을 받아 세 번을 읽었습니다. 그때부터는 성경 말씀이 눈에 확 들어오면서 인간을 향한 하나님의 깊은 계획이 죄인을 의인으로 바꾸시는 구원의 메시지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성경에 숨겨진 의미의 신비로움을 알게 된 것입니다.
그 이후 상고심을 받으러 의정부교도소로 이감되었을 때는 강태호 담당자님이 의정부은혜교회에 부탁하여 매달 간행지와 책을 받았고, 그곳에 있는 5개월 동안 제 마음도 천국에 있었습니다. 형이 확정되기까지 14개월 동안 성경을 열세 번 읽으며 미결수에서 기결수가 되면서 전주로 이감했습니다.
전주로 오는 동안 6학년과 3학년인 어린 자식들과 긴 세월을 헤쳐나갈 아내가 걱정되어 ‘무기형이란 무거운 짐을 언제 다 벗어버릴 수 있을까?’ 하는 생각에 마음이 무거웠습니다.
하지만 말씀은 “두려워 말라. 내가 너와 함께함이니라. 놀라지 말라. 나는 네 하나님이 됨이니라. 내가 너를 굳세게 하리라. 참으로 너를 도와주리라. 참으로 나의 의로운 오른손으로 너를 붙들리라.”(사 41:10) 하시고 “아무것도 염려하지 말고 오직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 그리하면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리라.”(빌 4:6~7) 하셨기에그 말씀을 암송하면서
‘주님. 이제 저는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을 당신의 자녀가 되었으니 저의 주가 되신 당신께서 앞날을 인도해 주시고 저희 가족도 지켜 주시옵소서.’라고 기도하며 내려왔습니다.
전주에 내려와서는 인쇄 공장에 나갔습니다. 공장에 나간 지 한 달 정도 되었는데, 형제 한 분이 자신은 기쁜소식선교회 성도라며 저를 찾아왔습니다. 의정부은혜교회의 목사님께서 저를 만나보라고 하신 것입니다. 그런데 그곳에서 기독교 신자들이 기쁜소식선교회를 배척했습니다.
그런 가운데 기회가 왔습니다. 1993년 5월이었습니다. 전주교도소에서는 해마다 봄, 가을로 성경퀴즈대회와 암송대회가 있었습니다. 기독교신자라면 누구나 출전할 수 있고 예선을 걸쳐 12명이 당일 본선에 올라갑니다. 저는 출전하기 위해 열심히 공부했습니다. 그리고 주님의 은혜로 1등의 기쁨을 누렸습니다. 상금으로 받은 10만 원으로 장기수들과 어려운 동료들에게 필수품을 돌렸습니다. 하나님을 믿는 자나 믿지 않는 자들이 저를 다르게 보고 관심을 가졌습니다.
저는 그 기회를 놓치지 않고 가을 암송대회를 준비했습니다. 주님께 간절히 기도하며 두 달 동안 하루 4시간만 잠을 자고 일할 때나 쉴 때나 제 입술은 암송을 쉬지 않았지요. 머리가 뜨거웠습니다. “너희가 기도할 때에 무엇이든지 믿고 구하는 것은 다 받으리라 하시니라.”(마 21:22)는 말씀이 제 마음에 강하게 임했고 ‘아멘’이 절로 나왔습니다. 또 1등이었습니다.
“너희는 구원얻는 자들에게나 망하는 자들에게나 하나님 앞에서 그리스도의 향기니”(고후 2:15)라는 말씀을 떠올리며 받은 상금으로 예전처럼 동료들과 함께 기쁨을 나누었습니다. 그렇게 주님의 은혜로 몇 회 동안 1등을 유지했더니 예전에 저에게 이단이라고 하던 형제들이 다 없어졌고 오히려 저의 신앙생활을 신뢰하며 성경 말씀을 물어오곤 했습니다. 그뿐 아니라 어느새 제 별명이 성경 박사, 조 박사, 조 목사가 되었답니다. 담임 목사님도 저를 신뢰하며 복음을 받아들였고 예수 믿으면 ‘의인’이라 말했습니다. 담임 목사님은 집회를 통해서 “예수를 믿으면 죄인에서 의인이 되는 것이며 지금 죽어도 지은 죄와 상관없이 천국에 갈 수 있다는 확신과 믿음을 가져야 한다.”라고 말씀을 전했는데, 그때는 말로 형언할 수 없는 기쁨의 눈물을 흘렸답니다.
전주에서 거의 14년을 지냈는데, 기결수로 시작하기 전 예수 안에서 새로 태어난 인생이니 출소하면 교도소 선교활동을 하면서 영혼을 구원하는 주의 일을 해야겠다는 마음으로 4년 과정 신학 공부도 하고, 또 재능기부를 위해 이발자격증을 취득하여 동료들의 두발을 손질해주면서 복음을 전했습니다. 많은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했는데, 특히 불교신자들이 예수님의 품에 많이 안겼습니다. 그동안 퀴즈대회와 암송대회를 하면서 요한계시록을 제외한 신구약 성경을 전부 암송할 수 있었는데 하나님께서 주신 한약 39가지(구약)와 양약 27가지(신약), 총 66가지의 약을 먹은 덕분인지 지금껏 아픈 곳 없이 건강하게 생활을 하고 있답니다.

 

2004년 11월에 전주에서 부산으로 이감을 갔습니다. 부산에서는 수용자 운동화를 만드는 공장에 출력했는데, 인원이 150명 정도 되는 큰 공장이었습니다. 첫날 공장에서 저를 보고 반갑게 달려온 형제가 있었습니다. 전주교도소에서 저와 같이 지내다 1년 전에 부산으로 내려온 형제였습니다. 그 공장에서는 매주 금요일에 구역예배를 드리는데 그동안 인도하던 전도사님이 2주 전에 출소하여 찬송을 몇 곡 부르는 것으로 예배를 드려왔다고 했습니다. 하나님이 이곳 사정을 알고 저를 보내준 것 같다며 감사드린다고 했습니다.
구역 예배에는 60~65명이 참석하는데 기쁜소식선교회를 이단시한다며 전주에서처럼 지혜롭게 이끌어가야 한다고 조언했습니다. 저는 낯선 지역이라 두려움도 있었지만 “그날 밤에 주께서 바울 곁에 서서 이르시되 담대하라. 네가 예루살렘에서 나의 일을 증거한 것같이 로마에서도 증거하여야 하리라 하시니라.”(행 23:11)라는 말씀을 떠올리며 예배를 인도했습니다. 예배를 드린 지 4~5개월 후에는 자신이 죄인이라고 말하는 형제는 없었습니다. 부산에서 4년을 보내고 나니 어느덧 수감된 지 18년이 되었습니다.
2008년 12월에 영등포 교도소로 올라왔습니다. 거기서는 광고디자인을 신청했는데, 마침 저희 공과 주임님이 교회 장로님이라서 주임님에게 우리 공과 28명 중 18명이 기독교 신자이니 잠깐이라도 예배를 드렸으면 좋겠다고 말했습니다. 주임님은 좋은 생각이지만 말씀은 누가 전할 것이냐고 묻기에 제가 하겠다고 하고 1년간 말씀을 전할 수 있었습니다.
2009년 12월 말, 1년 과정의 훈련생 생활이 끝나가는 데도 가석방 소식은 없었습니다. 상담을 했더니 자신들은 잘 모르겠다며 모범수용자 집결지인 홍성교도소로 보내주더군요.
한 해가 바뀌고 2010년 새해가 시작된 지 얼마 되지 않아 20년 가까이 못난 남편 징역 뒷바라지에 힘써왔던 아내가 자궁암과 대장암으로 주님의 품으로 갔습니다. 자신이 암에 걸렸다고 하면 제가 더 힘들어할까 봐 아이들과 함께 숨겨왔다는 말을 듣고 가슴이 찢어질 듯 아팠습니다. 제가 출소할 때까지만이라도 아내와 자식들의 건강만큼은 꼭 지켜주실 것을 기도해 왔었습니다. 한동안 그 충격으로 말을 잊고 살다가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요 11:25~26)라는 말씀을 묵상하며 새로운 마음으로 다시 시작할 수 있었습니다.
그렇게 홍성에서 7년을 살았습니다. 많은 형제들에게 복음을 전하며 생활하고 있습니다. 올해 4월 초에는 저희 사동 방마다 기쁜소식 간행물이 들어와 무척 반가웠지요. 제 신앙의 성장을 위하여 목사님의 저서인 ‘성막’을 비롯하여 2010년 이후로 발행하신 책도 읽어보고 싶습니다. 저희 생활이 주님의 은혜 가운데서 아름답게 이루어 갈 수 있도록 목사님의 기도를 부탁드리오며 두서없이 쓴 부족한 글 여기서 줄이겠습니다.
목사님 존경하고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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