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자의 인도 안에서 이젠 행복하다
목자의 인도 안에서 이젠 행복하다
  • 유인덕(기쁜소식강남교회)
  • 승인 2017.08.30 13: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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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배와 질그릇

 

 

 

중국으로 간 우리 가족
나는 독실한 기독교 가정에서 외아들로 태어났다. 아버지는 선교단체에서 일하시다가 어느 장로교회에서 어머니를 만나 결혼하셨다. 어머니는 목회자인 아버지와 결혼하시고 기독교단체에서 공동체생활을 하셨지만 항상 죄 때문에 갈등하셨다. 그렇게 지내시다가 1989년 어느 약국에서 약사님
(현재 기쁜소식강남교회 임명덕 집사)이 주신 <죄 사함 거듭남의 비밀>을 읽고 구원받아 서울제일교회(당시)에 나가셨다.
그때부터 집안에서 어머니를 핍박하기 시작했다. 아버지는 어머니가 받은 구원이 잘못되었다고 하시면서 교회에 나가지 못하도록 막으셨고, 장로교회 권사인 할머니도 어머니가 아버지의 앞길을 막는 사람이라며 더 핍박하셨다. 그때 나는 다섯 살로 아주 어린 나이였지만 종교 문제로 매일 싸우는 우리 집이 너무 싫었다. 어머니를 무시하는 집안 분위기 때문에 나도 모르게 어머니를 많이 무시했다.
내가 아홉 살 때, 아버지는 어머니를 우리 교회에 가지 못하게 막으시려고 할머니께 나를 맡겨둔 채 어머니와 1년 동안 해외에 나가셨다. 유럽에서 6개월을 보내고 중국 대련에서 6개월 간 언어연수를 하시며 중국에서 선교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라는 마음을 품으셨다. 중국에 있으면 어머니도 자연스럽게 기쁜소식선교회에 나갈 수 없을 거라고 생각하셨다. 1년 만에 부모님은 한국에 오셨고, 1994년 8월, 열 살 때 나는 부모님을 따라 중국 하얼빈으로 갔다.
신기하게도 그 시기에 기쁜소식선교회에서 중국에 선교사를 파송했다. 아버지가 한국에 가시면, 복음을 전하러 중국을 찾은 기쁜소식선교회의 전도여행팀이 우리 집에 자주 방문해 성경 말씀을 전하고 돌아갔다. 1년 후, 나는 다시 부모님을 따라 북경으로 갔다.
아버지는 인품이 좋은 분이시지만 아버지와 함께 있으면 마음에 쉼이 없고 부담스러웠다. 아버지는 항상 아버지 친구의 자녀와 나를 비교해 말씀하셨다. “아버지 친구 아들 아무개는 이러한데 너는 왜 그러니? 성경 읽어라. 기도해라.” 그리고 내가 궁금한 것들이 있어서 질문하면 피곤하다고 하셨다. 반면에 어머니를 따라 교회에 가면 쉼과 평안을 느낄 수 있었다.

나도 구원받은 그리스도인이 되어
2000년, 중학교 3학년 때 하나님은 내게 많은 일을 하셨다. 아버지가 선교활동을 하시다가 탈북자 관련 일에 연루되어 국가안전부에 잡혀 추방당하셨다. 그 일로 국가안전부에서 우리 집을 찾는다는 소식을 듣고 우리는 급하게 북경에 있던 선교사님 집 바로 아래층으로 이사했다. 그해 여름에는 수양회에 참석했다. 어려서부터 어머니를 따라 교회에 다니며 복음을 자주 들었지만 구원을 확신하지 못했는데, 복음을 다시 들으며 예수님의 보혈로  내 죄가 다 씻어졌다는 사실이 믿어졌다.
그해 겨울 크리스마스가 다가올 무렵 아버지께서 내가 기쁜소식선교회에 다니는 것을 아셨다. 내가

 

박옥수 목사님과 찍은 기념사진을 우연히 보신 것이다. 크리스마스 전야 행사를 준비하다가 그 사실을 듣고 너무 겁이 났지만 목사님과 사모님이 교제해 주셔서 평안한 마음으로 집으로 갔다. 아버지에게 무척 혼날 줄 알았는데 아버지는 조용히 내게 말씀하셨다. 어머니와 이혼하려는데 아버지와 살 것인지 어머니와 살 것인지 선택하라고 하셨다. 나는 어머니와 교회에 다니겠다고 말씀드리고, 아버지와도 함께 살아야 한다고 말씀드렸다. 내가 눈물을 흘리자 아버지도 눈물을 흘리셨다. 그리고 이혼하지 않으셨다.

하나님의 은혜로 북경대학교에
들어갔지만 나는 하나님을 등졌다

2003년, 고등학교 3학년 때 중국 전역에 사스가 발생했다. 북경의 모든 학교가 휴교하고 많은 한국인들이 고국으로 돌아갔다. 선교사님은 내게 에스더 4장의 “죽으면 죽으리이다.”를 말씀하시며 복음을 듣지 못하고 죽어가는 사람들이 많으니 우리가 남아서 복음을 전하자고 하셨다. 나는 선교사님 가족과 살며 통역도 하고 복음도 전하면서 지냈다. 
다음해 4월에는 대학 입학시험을 쳐야 했는데, 그동안 학업을 등한시한 것이 많이 걱정되었다. 사모님께 말씀드리자 지금부터 공부하면 된다고 하셔서 그때부터 북경대학 입학을 목표로 공부하기 시작했다. 유학생은 별도로 시험을 쳐야 해서 12월 말부터 한국 유학생들을 위한 입시학원에 다녔다. 공부하는 4개월 동안 하나님이 많은 은혜를 입혀주셨다. 학원에서 처음 모의고사를 보았을 때는 중국어 외의 모든 과목 성적이 형편없었는데, 모의고사를 칠 때마다 모든 과목에서 성적이 평균 10점씩 올라 북경대학 경영학과에 입학했다.
대학에 들어간 후부터 나는 성공해야겠다는 욕망에 사로잡혔다. 몸은 교회에 있었지만 마음은 하나님을 떠났다. 2005년 여름, 하나님은 내가 스스로 공부할 수 없는 연약한 자인 것을 보여주셨다. 기말 시험도 잘 보고 월드캠프에도 참석하고 받을 수 없는 장학금도 받았다. 그러나 나는 하나님을 내 힘으로는 이룰 수 없는 원함을 채워주시는 도구로 여기고 내가 계획한 길을 따라 거침없이 달려갔다.
2005년 가을 학기에 영어를 잘해야겠다는 생각으로 큰마음을 먹고 영어문학분석이라는 과목을 선택했다. 영어에 대한 기초가 턱없이 부족한 내가 수강하기에는 너무 어려운 과목이었지만 ‘지난 학기에도 다 해냈으니 하면 할 수 있다’라는 생각으로 대담하게 선택했다. 지금까지 내가 잘할 수 있었던 것이 하나님의 은혜였다는 사실을 잊고 말이다.
11월에 본 기말고사에서 터무니없는 점수를 받았다, 100점 만점에 7점! 기고만장했던 내가 도저히 감당할 수 없는 점수였다. 미시경제 시험에서도 20점대 점수가 나왔다. 사람들에게 항상 공부를 잘하는 척했던 내게 너무 충격적인 점수였다. 다음 기말고사에서 아무리 좋은 점수를 받아도 두 과목 다 과락할 수밖에 없다는 계산이 나왔다. 그렇다면 4년 전액 장학금을 받지 못할 수도 있겠다는 결론도 나왔다. 절망스러웠지만 그래도 끝까지 버텨야 한다는 각오로 학교에 다녔다.


나는 점점 망가져 가고 있었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전에 없던 이상한 증상이 나타났다. 대중공포증이었다. 알 수 없는 두려움이 엄습해 100여 명이 듣는 필수 수업을 도저히 들을 수 없을 정도였다. 나 자신을 조절해 보려고 부단히 노력했지만 결국 교실에서 도망쳐 나와 학교를 배회하며 절망했다. 나는 끝까지 망하고 싶지 않았다. 어떻게 하면 내가 받은 점수를 무효화 시키고 장학금을 계속 받을 수 있을지 고민했다.
내가 생각한 방법은 휴학이었다. 휴학하면 받은 점수가 무효가 되고 장학생 신분을 계속 유지할 수 있을 것 같았다. 하지만 북경대학은 휴학 조건이 까다로워서 정당한 사유가 있어야 했다. 나는 정신과의사를 찾아가 우울증 때문에 더 이상 공부하기 힘들다며 휴학에 필요한 증명서를 부탁했다. 나는 의사가 건넨 우울증 진단 설문지에 솔직하게 답변했다. 그런데 실제로 우울증이 심각하다는 결과가 나왔다. 휴학을 신청하던 날, 택시 안에서 많이 울었다. 다시는 복학할 수 없을 것만 같았다. 학교에 다니는 것을 가장 큰 자랑으로 삼았는데, 이제는 학교 때문에 가장 슬프고 부끄러운 사람이 된 것이다.
휴학한 후 나는 극심한 절망에 빠져 불면증에 시달렸다. 8일 동안 잠을 자지 못했다. 하루 여덟 시간 수면론을 주장하며 한 번도 밤을 새본 적이 없던 내게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었다. 영원히 잠을 잘 수 없을 것 같았다. 어머니와 함께 종합병원에 가서 수면제를 맞고 집으로 돌아와 잠을 청했다. 그런데도 잠이 오지 않았다. 내가 자고 싶다고 잠을 잘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그때 정확하게 알았다. 하나님이 잠을 잘 수 없게 하시면 나는 결코 잠을 잘 수 없는 사람이라는 것을. 목사님과 사모님은 나를 하얼빈 교회로 데리고 가셨다. 신기하게도 하얼빈에 도착하면서부터는 잠을 잘 수 있었다. 하얼빈 목사님은 내게 한국에 가서 12월 26일에 시작하는 3차 단기선교 훈련에 참석하면 좋겠다고 하셨다. 나는 한국에 가는 것이 너무 싫었지만 휴학을 하고 나자 학생비자가 취소되는 바람에 12월 25일까지만 체류가 가능하여 어쩔 수 없이 한국으로 갔다.
12월 25일에 북경에서 마지막 주일 예배를 드리고 인천행 비행기에 올랐다. 내 앞에 무슨 일이 기다리고 있을지 두려웠다. 10년 넘게 중국에 살았기에 그게 당연할 줄 알았는데, 하나님이 허락하시지 않으면 살 수 없다는 것을 알았다. 하나님은 내가 원치 않는 길로 나를 이끄셨다.

상하고 통회하는 마음을 주께서 멸시치 아니하시리이다
2005년 12월 25일 저녁에 한국에 도착하여 26일부터 시작하는 단기선교사 훈련을 받았다. 나는 철저하게 나에게 매여 있었다. 나 자신을 보며 절망했고 항상 나 자신을 의식했다. 많은 말씀을 들어도 내 귀를 스쳐지나갈 뿐 마음에는 한 마디도 들어오지 않았다. 그런 나와 상관없이 하나님은 조건 없는 은혜로 나를 단기선교사로 부르셨다. 처음에는 파견 국가로 인도를 선택했는데, 한 목사님이 “가나도 영어권이고 중국 사람도 많이 있으니 가나로 가라”고 하셨다. 나는 아프리카에 간다고는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그렇지 않아도 마음도 약하고 몸도 약한데 아프리카에 가면 말라리아에 걸려 죽을 것만 같았다. 하지만 나도 가나 단기선교사의 일원이 되었다.
출국하기 하루 전날, 수요예배 때 내 마음에 처음으로 말씀이 들어왔다. 바로 시편 51편 16~17절 말씀이었다. “주는 제사를 즐겨 아니하시나니 그렇지 않으면 내가 드렸을 것이라. 주는 번제를 기뻐 아니하시나이다. 하나님의 구하시는 제사는 상한 심령이라. 하나님이여, 상하고 통회하는 마음을 주께서 멸시치 아니하시리이다.”
다음 날 새벽, 공항으로 가는 버스 안에서 알 수 없는 평안함과 소망이 내 마음에 있었다. ‘하나님이 나를 상하게 하셨는데 이러한 나를 멸시치 아니하시는구나. 하나님은 내가 무엇을 하는 것을 기뻐하시지 않는구나. 이러한 내게 하나님이 조건 없는 은혜를 베푸시겠구나.’ 두렵기만 하던 아프리카를 향해 처음으로 소망이 생겼다. 가나를 향해 떠나는 비행기 안에서부터 나는 성경을 읽기 시작했다. 7점을 받아 다시는 공부하지 말아야겠다고 생각했던 영어로 말이다.
나는 나 자신을 세우고 누구보다 설치기를 좋아하는 사람이었다. 가나에 가서도 마찬가지였다. 가나 선교사님은 자주 우리에게 “사람은 두 번 구원받아야 한다. 죄에서 구원받아야 되고, 자신을 믿는 마음에서 구원받아야 한다.”고 하셨다. 나는 나 자신을 믿었기에 나 자신을 믿는 것이 무엇인지 그 의미조차 몰랐다. 말씀을 들으면 다 내 생각으로 이해해서 들었다.
‘아, 오늘 말씀은 이런 의미였지.’ 복음을 전할 때에도 논리정연하게 전했다. 그리고 항상 사람들을 구원받게 하려고 노력했다. 학교에서 공부하듯이 열심히 하면 되는 줄 알았다.
하나님은 내가 두려워하던 말라리아를 세 번이나 허락하셨다. 마지막으로 말라리아에 걸렸을 때는 마음이 너무 고통스러워 한 단기선교사에게 다가가 교제했다. 그는 한참 가만히 있다가 “사탄에게 깊이 속고 있으면서도 속고 있는 줄도 모르는 사람이 불쌍한 사람이지.”라고 했다. 그 말을 듣고 큰 충격을 받아 하나님에게 나를 불쌍히 여겨 달라고 간절히 기도했다. 그 후 하나님이 은혜를 입혀주셔서 내가 복음을 전해 사람들이 구원받는 복된 역사가 일어났다. 그리고 하나님이 내게 약속의 말씀도 주셨다. 하지만 은혜를 입으면서 내 마음은 하늘 높은 줄 모르고 높아져 갔다.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단기선교 활동이 끝나갈 무렵, 1년 전에 나타났던 증세가 다시 나타났다. 절망스러웠다. 끊임없이 올라오는 생각에 사로잡혀 어두운 마음으로 귀국했다. 하나님은 나를 긍휼히 여기시고 다시 중국에서 선교사님의 보살핌 속에서 지내게 했다.

 

사탄이 넣어주는 생각에 사로잡혀 지내던 어느 날, 하나님이 내게 은혜를 입혀주셨다. 인터넷으로 기쁜소식강남교회 주일 예배 말씀을 듣다가 부자와 거지 나사로 이야기 중에 ‘부자는 죽어서 지옥에 갔는데 거기서도 마음을 꺾지 않아 가족들도 동일한 길을 걷게 되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나는 멸망해도 내 가족들은 멸망하면 안 되겠다. 항복하자.’라는 마음이 들었다. 교회와 목사님 앞에 나가서 내 마음을 이야기하고 항복을 선언하자  하나님의 종의 말씀이 바로 능력으로 내 마음에 임했다. 중국의 어느 목사님이 요한복음 11장 43절의 “나사로야 나오라”라는 말씀을 하시고, 그 말씀이 내 마음에 임하는 순간 하나님을 향한 감각이 회복되고 악한 영이 떠났다.
그날 밤 기도할 때 하나님이 십자가의 참된 의미를 가르쳐주셨다. 하나님이 악한 나를 십자가에서 진멸했다는 사실과 그렇기에 더 이상 심판이 없고 이제 내가 산 것이 아니라 내 안에 주님이 사셨음을 알았다.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마 6:33) 하나님이 가장 귀하게 여기시면서 우리에게 꼭 주고 싶어 하신 것은 당신의 나라와 당신의 의라는 사실을 마음 깊이 알게 하셨다. 내게 더 이상 소망이 없었기에 소망을 하늘에 두며 그 말씀대로 하나님에게 구했다.
 
“너는 의사의 말을 100% 믿어야 해”
다시 복학해서 학교를 잘 다니고 있는데, 어느 날 다시 문제가 생겼다. 목 근육이나 얼굴 근육 등이 내 의지와 상관없이 떨리거나 움직였다. 지금은 종합병원에서 진찰한 결과 심하지 않은 틱장애라는 진단을 받았지만, 당시 내게는 큰 충격이었다. 그 현상을 해석하기 위해 혼자 생각에 사로잡혔다.
‘내가 의도하지 않았는데 왜 근육이 떨리지? 이건 분명히 중국에서 나를 감시하는 사람들과 조직이 보내는 신호일 거야. 공안일까, 국가안전부일까?’ 마치 모르스부호처럼 근육이 두 번 떨리면  나를 감시하는 조직이 내게 보내는 의미 있는 신호라고 생각했다. 미친 생각이지만 그런 생각에 사로잡혔고 불면증이 다시 찾아왔다. 생각에 이끌려 정상적인 삶을 살 수 없는 사람이 되었다. 더 이상 학교도 다닐 수 없어서 2010년 초 한국에 나왔다. 한국에 와서도 불안한 생각에 끌리다 보니 항상 초조했다. 불안한 생각들이 머리에서 사라지지 않았다. 잠도 자기 힘들었다. 어머니는 기쁜소식강남교회에 나를 맡기셨다. 누가 봐도 정상이 아니었는데, 박옥수 목사님은 그런 나를 보고 “인덕이는 정상이야.” 하시면서 교회에서 중국어를 번역하는 일을 돕도록 인도해 주셨다.
그 후 공익근무를 하던 어느 날 마음이 너무 불안해서 구역장 집사님에게 말씀드리자 다시 박 목사님과 상담받도록 해주셨다. 그때 박 목사님이 말씀하셨다.
“인덕아, 내 이야기 잘 들어. 네가 너 스스로 암 환자라고 생각한다고 하자. 그런데 의사가 너에게 말라리아 환자라고 한다면 너는 암 환자니, 말라리아 환자니?”
“의사가 말라리아 환자라고 하면 말라리아 환자예요.”
“그래, 너는 의사의 말을 100% 믿어야 해. 너는 말라리아 환자야.”
그리고 성경을 펴서 요한복음 14장 27절 말씀을 읽어주셨다.
“평안을 너희에게 끼치노니 곧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내가 너희에게 주는 것은 세상이 주는 것 같지 아니하니라. 너희는 마음에 근심도 말고 두려워하지도 말라.”
‘내가 의사의 말을 100% 듣는다면, 내가 느끼는 감각이나 내 생각은 하나도 중요하지 않구나. 말라리아에 걸렸을 때 약을 먹으면 금방 낫듯이 내가 목사님의 말씀을 100% 들으면 낫겠구나.’ 하며 목사님이 하신 말씀을 하나님이 내 마음에 심어주셨다.
“너는 의사의 말을 100% 들어야 해.”라는 목사님의 한 마디가 내 마음에 크게 자리 잡았다. 그때부터  내 안에서 올라오는 불안한 생각보다 목사님이 해주신 말씀을 크게 듣고 믿었다. 그렇게 하자 신기하게도 전에 없던 평안이 마음에 자리잡기 시작했다. 박 목사님이 나를 진정으로 위해 주신다는 마음이 있었기에 그분 말씀에서 쉼을 얻었다.

내 상태가 좋아진다는 것은 내 마음이 하나님의 마음과 가까워지는 것
그 후로 삶에 많은 변화가 찾아왔다. 공익근무를 정상적으로 할 수 있었고 밝고 평안한 마음과 온전한 정신으로 살 수 있었다. 박 목사님이 주일예배 말씀을 여러 번 들어보라고 하셔서 말씀을 다시 들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내 상태가 좋아진다는 것은 내 마음이 하나님의 마음과 가까워지는 것이라는 마음이 든다. 그렇지 않으면 나는 생각에 끌려갈 수밖에 없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공익근무를 마칠 때쯤 진로 문제 때문에 다시 목사님을 뵙고 상담했다. 목사님이 “인덕아, 너는 너의 생각과 하나님의 말씀 사이에 선을 그을 수 있니? 네가 네 생각과 하나님의 말씀을 정확하게 분별할 수 있으면 너는 놀라운 사람이 돼.”라고 하시며, 공익근무를 마치면 선교회 산하의 부서에서 근무하면서 말씀을 많이 들으면 좋겠다고 하셨다. 그동안 내가 보기에 좋은 길을 선택하며 살았는데, 결과가 모두 좋지 않았기 때문에 목사님의 인도를 받았다. 그때부터 지금까지 임마누엘 선교부에서 일하고 있다.

 

그 후 기쁜소식강남교회 청년회와 함께하며 많은 은혜를 입었다. 2015년 초에 교회에서 청년회 주최로 집회를 열면 좋겠다고 했다. 나는 조장으로 행사를 준비했는데, 장소를 대관하고 준비하는 과정이 어려웠다. 그때 문영준 목사님이 ‘사도행전에 보면 매 장의 시작은 어렵지만 하나님이 항상 끝을 아름답게 하셨다’고 말씀해 주셨다. 그 말씀이 믿어졌다. 그 뒤 하나님이 일하셔서 아주 좋은 장소를 대관할 수 있었고, 집회에도 사람들이 많이 참석해 말씀을 들었다. 10월에 가졌던 청년 집회 때에는 처음으로 내가 마인드강연을 했다. 대중 앞에 서거나 내 이야기를 하는 것을 부끄러워하는 사람인데, 교회와 함께하다 보니 어느새 나로서는 할 수 없는 일들을 하고 있는 나 자신을 보았다. 그 뒤로 마인드강사 자격증도 따고, 중고등학교에서도 여러 번 마인드강연을 했다. 
 
“인덕이는 좋은 애야”
어느 날 결혼 이야기가 나왔을 때 근심되는 부분이 있어서 박 목사님께 말씀드렸다.
“저에게 이런 저런 부족함이 있는데 이런 제가 결혼해도 괜찮을까요?”
“너, 지금 좋잖아. 사람이 감기에 걸릴 수 있는데 나으면 아무 문제 안 돼. 괜찮아.”
드디어 2016년 2월 기쁜소식강남교회에서 결혼식을 올렸다. 기성 교회에 다니는 여러 가족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아버지께서 혼주로 참석하셨고, 박 목사님의 주례사를 들으셨다. 무척 감사했다. 결혼식이 끝나고 아내가 나에게 이야기했다. 주례를 해주신 박 목사님과 사진을 찍을 때 박 목사님이 아내 옆에 서서 “인덕이는 좋은 애야.”라고 두 번 말씀하셨는데, 마치 아버지가 해주시는 말씀 같았다고 했다.
요즘 나는 태어나서 한 번도 느끼지 못한 행복을 느끼며 살고 있다. 결혼하고 1년이 지난 지금, 하나님은 내게 많은 일을 하셨다. 필리핀에 마인드강사로 초청받아 가고, 그동안 어머니를 많이 핍박하셨던 89세의 할머니께도 복음을 전해 할머니가 구원받으셨다. 할머니는 기쁜소식강남교회 실버회에서 주최한 실버 잔치에 참석하셔서 박 목사님 말씀도 들으셨다. 아버지도 ‘하나님이 아들에게 복을 주고 계시고, 또 좋은 며느리도 주셨다’고 하시며 무척 기뻐하신다. 하나님이 우리 가족 모두를 구원으로 인도하실 줄 믿는다.

내 인생을 하나님께 맡길 때
나는 사탄이 주는 생각에 쉽게 이끌려 넘어질 수밖에 없는 사람이다. 그렇기에 하나님은 나를 교회와 하나님의 종을 통해 항상 붙들고 계신다. 내 인생을 교회에 맡기면 주님이 교회를 통해 나를 지켜주시고 또 복되게 하시겠다는 마음이 든다.
양을 진정으로 위하는 자는 양에게 꼴을 먹이고 양을 지키는 목자인 것처럼, 양 된 나를 복된 길로 인도하시고 지켜주시는 분은 하나님과 하나님의 종이다. 양이 자신을 가장 잘 위하려면 자신을 목자에게 맡기고 인도를 받아야 하는 것처럼, 사탄에게 속을 수밖에 없는 나도 교회의 음성을 듣고 하나님에게 나의 남은 인생을 맡길 때 하나님이 세상 끝날까지 나를 지켜주실 것을 믿는다. 이 귀한 복음을 전하는 일에 하나님이 나같이 쓸모없는 사람을 써주시는 게 영광스럽고, 우리를 사랑하시는 하나님과 교회에 깊이 감사드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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