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참외를 호박이라고 한다
나는 참외를 호박이라고 한다
  • 손인모(기쁜소식성주교회)
  • 승인 2017.09.26 16: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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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배와 질그릇
 

“천국은 마치 밭에 감추인 보화와 같으니 사람이 이를 발견한 후 숨겨 두고 기뻐하여 돌아가서 자기의 소유를 다 팔아 그 밭을 샀느니라.”(마 13:44)
 나는 신앙이 무엇인지 몰라 힘들기만 했는데,  이 말씀이 내 마음에 들어온 뒤로
신앙생활이 쉽고 삶이 행복해졌다.  요즘 난 하루하루가 행복하다.

 

술과 도박에 빠져 살던 청년 시절
나는 경남 합천의 권빈이라는 마을에서 가난한 집안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도로 밑 외딴 오두막집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는데, 하루는 이른 아침에 버스가 집 옆에 굴러 떨어져 사람들이 살려 달라며 우리 집으로 몰려와 온 식구가 크게 놀란 적이 있다. 얼마 후에는 집 반대편으로 지프차가 떨어지는 큰 사고가 났다. 부모님은 우리가 그 동네에 살다가는 죽겠다 싶으셨는지 내가 아홉 살 때 외갓집이 있는 성주로 이사했다.
성주에서도 가난하여 초가집도 한 채 없이 임대로 농사를 지으며 살았다. 아버지는 술과 친구를 무척 좋아하셔서 어머님과 자주 싸우셨다. ‘아버지는 왜 저렇게 사실까? 나는 어른이 되면 아버지처럼은 안 살 거야!’ 하고 맹세했다. 나이가 어려서 술은 안 마셨지만 친구들과 자주 서리를 했다. 수박 밭에 수박이 없어지면 항상 내가 의심을 받았다.
집도 가난하고 농사는 체질에 맞지 않는 것 같아 중학교를 마칠 쯤 돈을 벌겠다고 친구들과 도시로 갔다. 돈을 벌면서 술과 담배와 도박을 배웠다. 월급을 받아도 술 외상값을 갚고 밤새 도박하고 나면 남는 것이 없었다. 도저히 안 되겠다 싶어 시골로 다시 내려와 농사일을 도왔다. 그 무렴 형님(대덕침례교회의 손충모 형제)이 군에서 허리를 다쳐 의가사 제대를 했다. 혼자서는 눕지도 서지도 못할 정도로 심각했다. 아버지는 형을 업고 전국을 다니며 고쳐보려 했지만 소용이 없자 결국 수술을 받게 하셨다.

“인모야, 산 사람 소원 한 번 들어주면 안 되나?”
어려운 집안 형편을 뒤로하고 1981년에 나는 군에 입대했다. 10개월 만에 첫 휴가를 나왔더니 집안 식구들이 일요일에 대구에 있는 교회에 나간다고 했다. 형님도 허리가 다 나아서 아주 밝아져 있었다. 평소에 말이 없던 아버지도 가족이 밥상에 둘러앉으면 나에게 “하나님을 믿어야 된다. 구원받아야 된다.” 하며 말이 많아지셨다. 전과 달리 집안 분위기가 평화롭고 화목해진 것을 느낄 수 있었다. 두 번째 휴가를 나왔을 때는 아버지가 술도 끊으셨다. 어머니도 변하셨다. 전에는 늘 악몽을 꾸고 귀신이 보여서 머리맡에 부엌칼을 두고 주무실 정도였는데, 구원받은 후로는 행복해 하셨다. 그리고 얼마 후, 형님이 대구중앙교회에서 결혼식을 가졌다. 내 인생에서 교회에 첫발을 디딘 날이었다.
1984년 2월에 군에서 제대했다. 직업훈련소에 가서 기술을 배울 생각이었는데, 농사일을 거들다가 허리를 다쳐 오도 가도 못하는 신세가 되었다. 통증이 너무 심해 잠을 잘 수 없었다. 그 당시 대구중앙교회에서 오창명 목사님과 어느 집사님이 심방을 자주 오셨는데, 나는 말씀을 듣는 것이 너무 싫어서 도망을 다녔다. 아버지가 한 번만 교회에 가자고 하셨지만 거절했다.
그렇게 지내던 어느 날 아버지께서 위암 말기 판정을 받으셨다. 그렇게 미워하고 원망했던 아버지가 3개월밖에 못 사신다고 생각하니 아버지가 너무 불쌍하고 인생이 허무했다. 그런데도 아버지는 기뻐하며 나에게 계속 전도하셨다.
얼마 후 아버지께서 삼일 간 식사를 하지 않으셨다. 암 때문에 고통이 심해서 그러신 줄 알았는데 어머니가 “인모야, 죽은 사람 소원도 들어준다는데, 너희 아버지가 살면 얼마나 살겠노? 산 사람 소원 한 번 들어주면 안 되나? 아버지는 네가 구원받고 교회에 나가는 것이 소원이다. 그래서 삼 일 동안 밥도 안 먹고 기도하고 계신다.”라고 하셨다. 나는 충격을 받았다. ‘구원이 뭔데 아버지가 위암 말기의 고통 속에서 저러실까?’ 그 주일 나는 식구들과 함께 교회에 갔다.
그리고 얼마 뒤 함양에서 있었던 여름 수양회에 참석해 복음을 듣고 구원받았다. 예수님이 나의 모든 죄를 다 씻어주셨다는 사실을 생각하니, 돌아오는 버스 안에서 창밖으로 보이는 만물이 그렇게 아름다울 수 없었다. 구원받고 4개월이 지날 즈음에 ‘예수님이 내 죄뿐 아니라 내 병과 질고도 다 담당하셨구나.’라는 믿음이 들어왔고, 얼마 지나지 않아 허리가 깨끗이 나았다. 모든 나쁜 습관들도 다 끊어졌다. 신기했다. 뿐만 아니라 친구들을 만나면 예수님 이야기가 저절로 나왔다. 내가 구원받고 2개월 뒤 아버지가 세상을 떠나셨다. 아버지는 돌아가시기 1주일 전까지 친척과 친구들을 찾아다니며 전도하셨다.


목자를 무시하며 살았던 시절
구원받고 복음이 좋아서 1986년에 대구중앙교회에서 1년간 선교학교 수업을 받았다. 하지만 매일 사람들을 만나 전도하는 삶이 부담스러워 포기하고 시골로 다시 내려왔다. ‘나는 안 돼’라고 생각했고, 당시에는 인도자의 말씀을 크게 여기는 마음이 없었기에 나 스스로 결정하고 말았다. 그 후 1988년에 결혼했다. 나는 게을러서 농사가 체질에 맞지 않는다고 생각했는데, ‘하나님이 농사를 짓게 하시면 하자. 사람들이 싫어하는 농사라도 하나님과 함께 하면 행복하겠다.’라고 마음먹고 농사를 시작했다. 고추, 참외, 벼 등 복합 영농을 하던 것을 정리하고 참외 농사만 하기 시작했다.
1993년에 성주에도 교회가 개척되었고, 10여 명의 형제 자매들과 함께 신앙생활을 했다. 당시 나는 기도하여 응답을 잘 받는 사람이 신앙생활을 잘하는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가끔 내가 말씀을 깨닫고 기도해서 응답을 받으면, 우리 교회를 인도하던 전도사님에게 “전도사님도 어려울 때 나처럼 기도해서 응답 받아 사세요.”라고 하며 무시했다. 하나님의 종을 따르는 것을 알지 못했기에 교회가 믿음으로 복음의 일을 하려고 하면 형편을 내세우며 가로막고 싸웠다. 형제 자매들과 다투는 것도 끊이지 않았다. 20년을 그렇게 살면서도 나는 내가 믿음이 좋은 줄 알았다.
교회에서 예배당을 짓기 위해 땅을 사놓고도 10년이 지나도록 짓지 못했다. 건축허가가 나지 않아서 못 짓는다고 생각했는데 부담 때문에 짓지 못한 것이었다. 지금 돌아보면, 목자를 무시하고 가치 없는 나를 크게 여기고 살았기에 나는 줄곧 복음을 가로막는 일만 했던 것이다.

말씀을 크게 여기는 마음을 만들어주셨다
2013년, 박옥수 목사님이 선교학생들과 함께 경북 지역 교회들을 순회하실 때 기쁜소식의성교회에 오셨고, 그곳에 나도 가서 말씀을 들었다. 그때 목사님은 기쁜소식청송교회에서 예배당을 지은 간증을 들려주었다. 성도 두 사람 중에 한 사람은 단기선교 가서 남은 성도가 한 사람뿐이었는데도 하나님이 기뻐하시니까 예배당을 지었다고 하셨다. 인공위성으로 한반도를 찍으면 남한은 밝고 북한은 캄캄한데, 하나님이 우리 교회가 있는 곳을 그처럼 밝게 보신다고 하셨다. 나는 ‘우리 교회는 작고 형제 자매가 별로 없어서 건축은 못 해.’라고 생각했는데, ‘하나님이 성주에도 예배당 짓는 것을 기뻐하시겠다’는 마음이 들었다.
2014년 여름에 예배당 건축을 시작했다. 참외를 한창 수확할 시기라서 무척 바빴지만, 하나님이 공사를 한 부분 한 부분 도우시는 것을 보며 무척 행복한 여름을 보냈다. 우리 집을 지을 때보다 더 행복했다. 예배당을 짓고 나니, 예수님이 오실 때까지 교회 마당을 쓸며 풀을 뽑고 살아도 행복할 것 같았다. 그런데 몇 개월이 안 지나서 목사님을 들이받는 옛날 버릇이 나왔다. 또 목사님과 부딪혔다. ‘교회에서 마당 쓸고 풀 뽑으며 겸손하게 살려고 했는데 왜 안 될까?’ 하루는 우리 교회 김영욱 목사님이 나에게 교회에 나오지 말라고 하셨다. 너무 화가 나서 일주일 내내 생각했다. 예배당을 지을 때 물심양면으로 함께했던 것을 생각하니 속이 너무 상했다. 그래서 목사님을 찾아가 속상한 마음을 이야기하자 목사님이 무척 기뻐하셨다. 그 전에는 나의 좋은 모습, 내가 잘하는 모습을 들고 목사님께 나갔는데 그날은 내 속 마음을 들고 나가자 기뻐하신 것이다. 그때부터 교회의 음성이 들리기 시작했다.

예수님을 1순위로 두고 복음을 전하며 너무 행복했다
2015년 2월 26일, 예배당 건축을 마치고 헌당예배를 드렸다. 그날 박옥수 목사님은 마태복음 13장 44절의 “천국은 마치 밭에 감추인 보화와 같으니 사람이 이를 발견한 후 숨겨 두고 기뻐하여 돌아가서 자기의 소유를 다 팔아 그 밭을 샀느니라.”(마 13:44) 말씀을 전하셨다. 목사님은 “신앙은 발견하는 것입니다. 보화를 발견하는 사람은 너무 기뻐서 자기 소유를 다 팔아 밭을 삽니다. 나는 그 보화를 발견하고 그 보화로 삽니다.”라고 하며 “우리 선교회 안에 어려운 일도 많지만 나처럼 행복한 사람이 어디 있습니까? 신앙은 너무 쉽고 재미있습니다.”라고 하셨다.
내 행복은 형편에 따라 바뀌는데 박 목사님은 언제나 행복하다고 하셨다. 그날 말씀을 듣고 몇 년 전의 일이 생각났다.
예배당을 짓기 전에 있었던 일이다. 성주에서는 4,500농가가 참외 농사를 짓는데, 그 해 참외 농사가 끝나고 대구 신문에 ‘성주 참외 경사났네’라는 기사가 떴다. 그 해에 농사가 잘 돼서 성주의 전체 매출이 상당히 올랐는데, 매출 1위가 손인모라고 나왔다. 학교에 다닐 때 늘 꼴찌만 하던 내가 4,500명 중에 1등을 하자 기분이 굉장히 좋았다. 동네를 다니며 자랑하고 다녔는데, 신기하게도 잠자리에 누우면 행복했던 마음은 온데간데없고 공허하고 허무했다. 참외 농사가 좋아서 참외가 내 인생의 전부인 양 살았고 최고의 자리에 올라갔지만 행복하지 않았다. 목사님 말씀을 들으며 그때가 다시 떠올랐다.
‘그래, 농사가 망하더라도 한번 목사님처럼 행복하게 살아보자. 목사님은 예수님과 복음을 보화로 여기며 사시니까 나도 예수님을 1순위에 두고 참외를 2순위로 밀어내고 복음을 전하며 살아보자.’ 하고 마음을 정했다.
헌당 예배를 마치면서 박 목사님이 참외 농사를 짓는 형제들이 농사가 잘 되어서 복음이 전해지게 해달라고 기도해 주셨다. 형제 자매님이 “우리는 놀아도 우리 참외가 돋보이고 잘 될 거야. 그러니 복음을 위해 살자.” 하고 간증했다. 그때부터 나도 복음을 전하기 시작했다. 비닐하우스 옆에 있는 허름한 컨테이너를 카페처럼 개조하고, 우리 농장에 기술을 배우러 오는 사람들에게 ‘농사는 기술만 알아서 되는 것이 아니라 마음을 배워야 한다’며 복음을 전했다. 당시 농사 규모가 5천 평(현재는 7천 평, 국제 규격의 축구장 면적의 3배 가량)쯤이라 할 일이 엄청 많았지만 누구라도 찾아오면 참외는 뒤로 하고 말씀을 전했다. 3개월 정도 복음을 전하는 동안 구원받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지만 그래도 정말 행복했다.

 

나는 골칫덩어리에 술주정뱅이가 맞구나
하루는 대기업에서 근무하다 정년퇴직하고 성주로 내러온 선배를 만났다. 참외 농사를 배우고 싶어 친구 농장을 찾아갔더니 친구가 극구 말리더라고 하며 내게 물었다.
“인모야, 나도 참외 농사를 배우고 싶은데 너는 어떻게 생각하냐?”
“형님, 참외 농사만큼 재미있는 것이 없습니다. 하십시오. 제가 다 가르쳐 주겠습니다.”
선배와 한창 이야기하던 중에 선배가 불쑥 옛날 이야기를 꺼냈다.
“네 아버지가 우리 아버지와 자주 술을 마시셨는데, 그때마다 둘째 아들 때문에 골치가 아파 죽겠다고 하셨어. 인모가 골칫덩어리라고 말이야.”
그때까지 나는 아버지가 문제고 나는 아버지보다 낫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내가 골칫덩어리였다는 사실을 그제야 알았다. 나름대로 신앙생활 잘하고, 믿음으로 살고, 내가 없으면 교회가 안 된다고 생각했는데, 아니었다. 나는 교회를 망치고 하나님의 일을 방해하는 사람이었다. 복음을 전하는 동안 하나님은 나 자신이 어떤 사람인지도 알게 하셨다.
헌당 예배 후 3개월 뒤인 6월 어느 날, 박 목사님이 손자들과 참외를 따러 오셨다. 김영욱 목사님이 박 목사님 옆에서 계속 간증하라고 일러주셔서 말씀대로 따라했다. “목사님, 15년 전에 목사님이 그라시아스합창단이 세계 최고의 합창단이 될 거라고 하셨을 때 저도 그 믿음을 흉내 내서 외쳤더니, 그라시아스합창단이 세계 최고가 됐을 때 저도 성주에서 최고의 참외 농사꾼이 됐습니다.” 참외를 따시던 목사님이 아주 큰소리로 “아멘!” 하며 무척 기뻐하셨다. 참외를 다 따고 교회로 가는 중에도 계속 간증했다. “목사님, 저희 아버지가 술주정뱅이여서 저는 어릴 때부터 ‘나는 아버지처럼 안 살아야겠다’고 다짐했는데 저도 크니까 술을 좋아하더라고요.” 목사님은 고개를 끄덕이며 들으셨다.
그날 박 목사님이 서울로 올라가던 길에 기쁜소식수원교회에 들러 “성주의 손인모 형제가 술주정뱅이였는데 완전히 바뀌었습니다.”라고 이야기하셨다고 한다.
‘나는 술주정뱅이까지는 아니고 그냥 술을 좋아했고, 아버지가 술주정뱅이셨는데....’
다시 생각해 보니 내가 술주정뱅이가 맞았다. 하나님이 잡아주시지 않았다면 나는 아버지보다 더 심각한 술주정뱅이가 됐을 것이기 때문이다.
박 목사님 사모님도 참외를 따다가 “손 형제 얼굴이 많이 밝다! 예전에는 삐딱했는데....”라고 하셨다.
내가 골칫덩어리에 술주정뱅이에 삐딱한 사람이라는 것을 인정하자 마음이 아주 자유로웠다. 전에는 믿음 좋고 신앙 잘하고 성경 잘 깨닫는 사람이라고 생각하니까 신앙이 어려웠는데, 내가 못난 사람이라는 것을 아니까 말씀이 마음에 그대로 들어와서 변할 수 있는 사람이 되었다. 박 목사님이 참외 농장에 다녀가신 후로 나에 대한 기대가 사라지고 하나님만을 소망하게 되었다.

복음을 1순위로 두었을 때 얻은 첫 열매

 

복음을 1순위에 두고 살기 시작한 후 내가 복음을 전해 처음 구원받은 사람이 이상우 형제다. 어느 날 이웃 농장에서 참외 일을 도와주다가 컨테이너에서 술로 살아가는 이상우 씨를 찾아갔더니, 그가 술에 완전히 취해 걷지도 못할 정도로 비틀거리면서 나를 붙잡고 매달리며 말했다.
 “형님, 나 좀 살려 주십시오. 여기서 구해 주십시오.”
 “자네, 내 말 들을 건가?”
 “예, 듣겠습니다.”
나는 그에게 설교집 <죄 사함 거듭남의 비밀>을 주고 읽으라고 했다.
얼마 뒤 박 목사님이 참외를 따러 우리 농장에 오셨을 때 그에게 목사님을 책의 저자라고 소개하며 인사하게 했다. 그는 술을 더 이상 마실 수 없을 때까지 술만 마시는 사람이었다. 그렇게 살았던 이상우 씨도 여름 수양회에 참석해 구원받았다. 목사님의 마음을 받아 발을 내디딘 후 5개월 만에 얻은 첫 열매였다. 그를 아는 사람들은 술주정뱅이가 변해서 농사를 잘 짓는 것을 보고 놀라서 이유를 알아보다가 나를 찾아온다. 형제를 통해서 하나님이 일하시는 것이 정말 감사하다.
중소기업 공장장으로 근무하다가 퇴직하고 성주로 온 김인규 씨 부부도 이상우 형제를 통해 교회와 연결되어 구원받았다. 농사가 잘 되지 않아 부부가 너무 힘들어서 ‘참외 고수를 만나서 배워야겠다’고 생각하던 차에 이상우 형제를 만났는데, 그가 나를 소개해 준 것이다. 나는 부부에게 “참외 농사 쉽습니다. 같이 하면 됩니다.” 하고 내 농사법을 설명해 주었다. 일주일에 한 번씩 교회에 나오면서 형제 자매들의 행복한 모습을 보고 마음이 열려 아내가 먼저 수양회에서 구원받았고, 뒤이어서 남편도 구원받았다.

“신문사에 가 봐요”
하루는 김영욱 목사님이 성주신문사에 가 보라고 하셨다. 3년 전 예배당을 지을 때 그 바쁜 와중에 월간 <기쁜소식>에 <손인모의 참외 이야기>를 연재했는데, 목사님이 기억하고 성주신문에 그 글을 소개하면 좋겠다고 하신 것이다. ‘나 같은 사람이 쓴 글을 누가 신문에 실어주겠나?’ 하고 생각했지만 목사님의 말씀을 따라 성주신문사에 찾아갔다. 글을 한 편 들고 가서 주고왔는데, 일주일 뒤에 신문에 내 글이 실렸다. 그리고 외부 집필위원으로 선정되어 언제든지 글을 기고할 수 있게 되었다. 목사님의 마음을 따라 나가니까 하나님이 이루시는 것이 놀랍고 감사했다. 2016년에는 내 칼럼이 성주신문에 5회 연재되었고, 이어서 박 목사님의 칼럼을 소개하고 싶어 제안하여 지금까지 연재되고 있다. 농사가 잘 되든 안 되든 상관없이 복음을 전하고 사람들에게 농사법을 교육했을 때 사람들이 소망을 갖는 것을 보며 행복했다.
 
“혼자만 은혜 입어 잘사는 것도 죄입니다”
교회에서 참외 농사를 짓는 농가가 나를 비롯해 다섯 가정(현재는 여덟 농가)이었다. 그런데 작년에 두 농가가 농사를 완전히 망쳤다. 김영욱 목사님이 “박 목사님이 참외 농사하는 형제 자매들이 다 잘 될 거라고 하셨는데, 손 형제만 잘 된다는 것은 말이 안 됩니다. 혼자 농사 잘 짓는 것은 죄입니다. 농사법을 다른 사람에게도 알려주십시오.”라고 하셨다. 나는 내가 무엇을 잘했다기보다 그저 은혜를 입어서 농사가 잘 됐을 뿐이라고 생각했는데, 목사님은 내가 죄인이라고 하셨다. 박 목사님의 삶을 다시 생각해 보았다. 목사님은 다른 사람의 행복과 기쁨을 위해 사시는 분이었다. 그에 비해 나는 복음을 1순위에 놓긴 했지만 여전히 나의 행복과 나의 기쁨을 위해 살았던 것이다. ‘이제는 목사님처럼 남을 위해 살아야겠구나’ 하고 마음을 정했다. 그리고 올해 초, 마태복음 13장 44절 말씀에서 이름을 딴 ‘보화’라는 모임을 만들어 농사에 실패한 사람들 10명을 모아서 내 농사법을 그대로 따라할 수 있게 교육하기 시작했다.

나는 세계 최고의 마인드를 가진 농부다
그 무렵 박 목사님이 대학생 모임에서 ‘성주에 참외 농사를 하는 손인모 형제가 있는데 그는 세계 최고의 마인드를 가지고 농사를 짓고 강의하러 다니며 성주 참외를 이끌어 가고 있다’고 말씀하셨다는 이야기를 전해들었다.
‘내가 무슨 세계 최고야? 성주 참외를 이끌어 간다고? 참외 강의도 하지 않는데?’
교회에 가서 김 목사님께 말씀드리자 “그 말씀이 맞습니다. 그렇게 될 것입니다.”라고 하셨다. 생각해 보니 나처럼 행복하게 농사짓는 사람이 없었다. 농사가 워낙 힘들다 보니 자식들이 농사를 짓는다고 해도 극구 말리는데, 나는 내가 농사짓는 것이 행복하니까 아들에게도 행복한 내 마음을 말해 주고 있었다. 남을 위하는 행복한 마음으로 농사를 짓는 것이 바로 세계 최고의 마인드가 아닌가! 박 목사님이 말씀하신 대로 나는 세계 최고의 마인드를 가진 농부가 맞았다.
얼마 뒤에는 성주군청에서 참외를 홍보하기 위해서 ‘성주군이 뽑은 올해의 참외 베스트 10’을 선정했는데, 그 가운데 내가 뽑혔다. 시상식에 참석해 인증패도 받았다. 그리고 신품종을 소개하는 행사장에 모인 700명의 농부들 앞에서 강의도 했다. 강의가 끝나자 많은 사람들이 찾아와 명함을 달라며 나에게 농사법을 배우고 싶다고 했다. 어떤 분은 작년에 신문에 난 내 칼럼을 보고 꼭 만나보고 싶었다며 무척 반가워했다. 박 목사님이 말씀하신 대로 되지 않은 것이 없었다. 무척 신기했다.
내 짧은 생각, 내가 옳다는 생각으로 살았을 때는 행복도 없고 열매도 없었고, 주변 사람들을 고통스럽게 하는 자였다. 그 후 박 목사님의 말씀을 들으면서 ‘나도 목사님처럼 살아보자’ 하고 마음을 옮겼을 뿐인데 지금은 예배 때마다 간증할 정도로 하루하루 간증이 넘친다.

성경에서 얻은 지혜로 농사를 짓는다
내 농사법을 ‘태평농법’이라고 이름을 지었다. 사람들은 열매를 잘 맺게 하려고 작물에 열심히 손을 대는데, 나는 성경의 지혜로 하다 보니 태평하게 두어도 농사가 잘 되기 때문이다. 성경에는 네 가지 밭의 비유가 나온다. 가시 밭, 돌짝 밭, 길가 밭에는 아무리 좋은 씨를 뿌려도 결실하지 못하지만 옥토 밭에 뿌리면 결실하는 것을 보며, 어떤 밭에 씨를 뿌리느냐가 중요하다는 사실을 알았다. 그리고 시편 1장 3절 “저는 시냇가에 심은 나무가 시절을 좇아 과실을 맺으며 그 잎사귀가 마르지 아니함 같으니 그 행사가 다 형통하리로다.” 말씀에서는 내 마음이 말씀에 근거를 두어야 한다는 사실을 알았다. 로마서 11장 16절의 “제사하는 처음 익은 곡식가루가 거룩한즉 떡덩이도 그러하고, 뿌리가 거룩한즉 가지도 그러하니라.” 말씀으로는 뿌리의 중요성을 알았다. 그래서 뿌리가 좋아질 수 있다면 어떤 방법이든 다 받아들여 적용시켰다.
박 목사님이 그라시아스합창단에게 세계 최고의 합창단이 될 것이라고 하셨을 때 ‘나도 성주에서 최고다’라는 믿음으로 참외 최고수들을 찾아다니며 묻고 배웠다. 일본에 가서 농장을 견학하면서도 뿌리의 중요성과 밭을 옥토로 만들기 위해 퇴비를 만드는 과정들을 배워 그대로 따라했다. 농사짓는 것은 결코 쉽지 않은 일이다. 천 가지 이상 되는 조건이 맞아야 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농사가 잘 안될 때는 목사님과 교제하고 기도를 받으며 내 문제를 하나님께 넘기고 나는 쉬었다.
 

 

신앙은 호박 뿌리에 참외 가지를 접붙이는 것이다
얼마 전에는 교회를 떠난 한 형제가 나를 찾아왔기에 이렇게 이야기해 주었다.
“열매를 계속 맺는 참외가 있고, 맺다가 안 맺는 참외가 있어. 성경에도 잎만 무성한 무화과 나무에 열매가 없자 예수님이 저주하니 나무가 말랐지? 왜 열매를 맺지 못하는지 알아? 그건 뿌리가 없어서 그런 거야. 뿌리가 좋은 나무는 열매를 맺을 수밖에 없어. 나도 전에는 뿌리가 없는 신앙을 했어. 그때는 주위 사람에게 고통을 주고 교회를 대적하고 망하게 하는 일만 했지. 그런데 어느 날 박 목사님이 사시는 삶을 마음으로 만나서 그 마음을 받아서 사니까 내가 변하고 나를 만나는 사람들이 살아나는 거야. ‘내 젊음을 팔아 그들의 마음을 사고 싶다’는 굿뉴스코 해외봉사단의 모토처럼 내 소유를 팔아 다른 사람을 위해 살게 됐어. 목사님처럼 나도 살아보자 하니까 그때부터 손인모가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나에게서 예수님이 나타나고 계속 열매가 맺더라고.”
그 형제가 간증을 듣고 충격을 받아 마음을 돌이키는 것을 보며 무척 감사했다.
나는 참외를 호박이라고 한다. 참외 뿌리는 약해서 겨울 한파를 견디지 못해 죽어버리는데, 호박은 어디에 심어도 뿌리가 강해서 잘 자라기에 호박 뿌리에 참외를 접붙여서 키우기 때문이다. 신앙도 마찬가지인 것 같다. 신앙은 백 미터를 뛰는 단거리 경주가 아니고 42,195킬로미터를 뛰는 마라톤 같은 장거리 경주다. 내가 이 세상을 떠날 때까지 믿음으로 신앙을 지속하려면 나로서는 절대 안 되기에 예수님에게 접붙임이 되고 하나님의 종의 삶과 접목되어야 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종의 마음과 연결되고부터
박 목사님이 올 6월에 참외를 따러 오셨을 때, “손 형제, 참외 농사만 짓지 말고 해외에 나가서 마인드강연도 하고 복음도 전해.”라고 하셨다. ‘나 같은 사람이 무슨 강연를 해.’ 하고 그냥 넘겼는데, 교회의 인도로 8월에 멕시코 월드캠프에서 한 시간 동안 강의를 했다. 멕시코 교회의 형제 자매들이 온 마음으로 교회를 섬기고, 선교사님들이 이번 캠프가 마지막인 것처럼 자신의 모든 것을 드려 준비하고, 하나님이 당신의 종을 통해 복음을 힘있게 나타내시는 것을 보며 무척 감사하고 감격스러웠다.
2년 전 헌당예배 때에는 우리 교회 형제 자매들이 15명 남짓이었는데,
2년 사이에 배 이상 늘었다. 많은 사람이 우리를 통해 연결되어 구원받는 것이 놀랍다. 나로 말미암은 것이 하나도 없다. 나는 다만 하나님의 종이 사시는 삶을 흉내냈을 뿐인데, 하나님의 종의 마음과 연결되고부터 하나님이 나에게도 놀랍게 역사하는 것이 감사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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