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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일 이맘때에는 하나님이 나를 쓰시겠구나!선교사 수기_케냐 김요한 선교사 편(제1화)
김요한(케냐 나이로비교회 선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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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18.03.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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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에서 태어나고 교회에서 자라다
나의 아버지는 지금 기쁜소식남해교회에서 사역하는 김태호 목사님이시다. 나는 부모님이 마산에서 사역하실 때 태어났다. 그때 당시에는 교회 형편이 많이 어려워서 어머니가 나를 출산할 때 병원에 갈 수 없어서 교회에서 낳았다고 하셨다. 말 그대로 나는 교회 안에서 태어났다. 교회에서 자라면서 말썽을 많이 부렸다. 어릴 때부터 제일 싫어한 것이 두 가지가 있었다. 하나는 공부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목사가 되는 것이었다. 교회의 삼촌과 이모들이 “너는 커서 뭐가 되고 싶어? 너도 아빠처럼 목사님 되어야지?”라고 하는 말이 너무 싫었다. 학교에서 숙제를 내주면 차라리 매 맞는 것을 선택했다. 숙제를 하려면 한 시간 넘게 걸리지만 매를 맞는 것은 5분 안에 끝나기 때문에 매를 맞고 교회 친구들과 노는 게 더 좋았다. 나는 주일학교에서도 제일 산만하고 떠들고 선생님 말씀을 듣지 않는 아이였다. 그때 같이 장난만 치던 친구들이 지금은 선교사가 되어 복음을 전하고, 그라시아스 합창단에서 크게 쓰임을 받고 있는 것을 생각할 때 신기하기만 하다.

착한 목사 아들이 되고 싶었지만
1993년 12월 10일, 부모님께서 미국 LA로 파송을 받으셨다. 말로만 듣던 미국에 간다는 소식에 몹시 설레고 즐거웠다. 그러나 막상 미국에 가서 보니 많은 부담과 어려움이 기다리고 있었다. 당시에는 LA 교회가 멕시코 사람들이 많이 사는 동네에 있었기에, 학교에 가도 기대했던 백인은 한 명도 볼 수 없고 멕시코 사람들과 흑인, 한국 사람들이 많았다. 나는 알파벳도 전혀 모른 채 미국에 갔기에 학교에서도 선생님이 뭐라고 하시는지 전혀 알아들을 수 없어서 혼자서 무척 어려웠다.
자연히 공부하기를 싫어하고 떠도는 학생들과 어울려 다니기 시작했다. 흑인 친구들과 싸워서 정학을 당하기도 하며 학교생활에 전혀 적응하지 못했다. 어린 나이였지만 내 마음과 삶은 하나님과 상관없이 빗나가기 시작했다. 한편 마음에서는 아버지가 목사님이기 때문에 교회에서 반듯한 아이가 되고 싶었다. “요한이는 착해. 역시 목사 아들이야.” 이런 이야기를 듣고 싶었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문제가 터지고 또 문제가 터졌다. 공부도 못 하고, 문제만 일으키는 나 자신이 너무 싫었다. 그렇게 살고 싶지 않았지만, 내가 나를 바꿀 수 있는 힘이 없었다. 모든 것을 포기하고 싶을 뿐이었다. 친구들과 지내면서 자주 “내 인생은 벌써 다 망가졌어.”라고 이야기했던 기억이 난다. 친구들과 나쁜 짓을 하면 내가 총대를 메고 제일 앞에서 일을 저질렀던 기억도 생생하다. 어린 나이였지만 인생을 포기하고 살았다.

내게 잊을 수 없는 한미연합청소년수련회
하루는 학교에 다녀와서 방에 들어갔는데, 모르는 형이 내 침대에 누워 있었다. 나중에 알고 보니 앤디라는 이름의 형이었다. 앤디는 나보다 세 살 많았다. 머리는 노랑색으로 염색하고 큰 티셔츠에 통이 큰 바지를 입은 것이 누가 봐도 문제아 같았다. 집에서는 삶이 잡히지 않아 교회에 잠시 머물게 된 것이었다. 나보다 인생이 더 망가진 사람 같았다. 옆에만 가도 담배 냄새가 나고 눈의 초점도 흐려져 있었다. 같이 몇 개월을 지내다가 형이 한국으로 갔다. 그리고 얼마 뒤 다시 돌아왔는데 완전히 변해 있었다. 머리도 검은 색으로 변하고, 크고 찢어진 바지와 셔츠도 단정한 면바지와 남방으로 변해 있었다. 앤디 형은 너무 변해 있었다. 신기하기도 하고 부럽기도 했다.
1995년 7월 미국의 여름 방학기간에 월드캠프의 전신이 된 첫 ‘한미연합청소년수련회’가 있었다. 한 달 동안 한국에서 이곳저곳을 다니며 한국 문화를 배우고 말씀을 배우는 시간들이었다. 처음에는 한국에 가서 친구들을 만난다는 설레는 마음밖에는 없었다. 수련회에 가서도 맛있는 것을 먹고 노는 데에만 관심이 있었지 말씀에는 전혀 관심이 없었다. 그러나 내게도 잊을 수 없는 수련회가 있었다. 1997년 ‘한미연합청소년수련회’다. 매년 수련회를 그냥 참석한 것 같았지만 하나님이 내 마음을 매년 간섭하시고 낮추시고 준비하셨다. 1997년에도 나는 문제를 일으켰고, 나이는 어렸지만 마음에 많은 한계와 어려움이 있었다. 그런 상황에서 수련회에 참석했고, 그전까지 말씀에 전혀 관심이 없었던 마음이 말씀 편으로 조금 조금씩 기울어졌으며 말씀이 그대로 들리기 시작했다.
하루는 어느 목사님과 개인 상담을 하던 중 목사님이 요한복음 1장 29절 말씀을 전해 주셨다. “이튿날 요한이 예수께서 자기에게 나오심을 보고 가로되,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양이로다.” 주일학교 때 외우기도 하고, 이 말씀으로 구원받았다고도 하며 수없이 들었던 말씀이었는데, 그날은 다르게 들렸다. 그전에는 말씀 위에 내 마음이 있었지만 여러 문제와 어려움들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내 마음을 말씀 아래로 낮추셨다.
“이러므로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죄가 세상에 들어오고 죄로 말미암아 사망이 왔나니, 이와 같이 모든 사람이 죄를 지었으므로 사망이 모든 사람에게 이르렀느니라.”(롬 5:12)
‘한 사람 아담으로 말미암아 죄가 세상에 들어왔고 죄가 가득 찬 세상에 내가 태어났는데, 세상에 가득 찬 이 죄를 예수님이 다 가지고 가셨구나! 세상 죄를 가지고 가셨다면 이 세상에는 더 이상 죄가 없네! 그럼 나에게도 죄가 없네!’라는 마음이 들면서 요한복음 1장 29절 말씀이 내 마음에 그대로 임했다. 말씀이 그대로 마음에 들어오는 것이 무척 신기하고 행복하고 감사했다. 한미연합청소년수련회에서 구원받아 너무 감사했다. 그 후 미국으로 돌아왔는데, 삶에서 큰 변화는 느낄 수 없었다. 그러나 내가 전과 똑같은 김요한이고, 전과 똑같은 삶을 사는 것 같지만, 더 이상 죄인이 아니라 의인이라고 담대히 말할 수 있었다. 나의 모습과 상관없이 요한복음 1장 29절 말씀에 의해서 나는 의인이었다.

   
 

요한아, 너 통역할 수 있지?
1997년에 아버지가 워싱턴 교회로 파송을 받아 가족이 같이 갔고, 2001년에 부모님이 다시 한국으로 가셨다. 누나와 나는 대학교를 다니고 있었기에 남아서 공부를 계속하기로 했다.
처음으로 부모님을 떠나 다른 목사님 밑에서 훈련 받고 인도를 받는 새로운 삶이 시작되었다. 내 인생의 터닝포인트가 되는 시간이었다. 이때부터 하나님이 나를 간섭하시고 훈련을 시키셨다는 마음이 든다. 지금까지는 내 마음으로 살아왔지만, 본격적으로 하나님이 내가 가질 수 없는 새로운 마음을 주시기 시작하셨다.
부모님이 한국으로 가신 후, 첫 미국 겨울 수양회에 참석하였다. 박옥수 목사님께서 수양회 강사로 오셨다. 나는 누나와 같이 목사님께 인사를 드렸는데, 그때 마침 목사님들이 모여서 오전에 누가 말씀을 전해야 할지 의논하고 계셨다. 박 목사님과 같이 미국에 오신 故 이형모 장로님이 말씀을 전하시면 좋겠다고 하셨다. “그런데 통역은 누가 하지?” 하며, 박 목사님께서 갑자기 나를 보시고 “요한이 너 통역할 수 있지?”라고 하셨다. 심장이 멎는 줄 알았다. 그때 나는 대학교 1학년이었고, 한 번도 통역을 해본 적이 없었다. 누나는 공부도 잘하고 영어도 잘했기 때문에 항상 누나가 통역을 했다.
“목사님, 저는 한 번도 통역을 해본 적이 없는데요!”
목사님은 마치 내 이야기를 못 들으신 것처럼 바로 대답하셨다.
“너, 셔츠 있니? 없지? 내 것을 빌려줄 테니 내 방으로 가자!”
목사님은 방에 가시더니 겨울 셔츠를 하나 꺼내 주셨다.

   
 

나는 바로 그 셔츠로 갈아입고 성경을 들고 모임 장소로 갔다. 심장이 너무 떨렸다. 시간이 되어 이형모 장로님이 말씀을 전하시는데 하나님이 회사에서 일하신 간증을 전문용어로 말씀하셨다. 통역은 고사하고 한국말도 이해할 수 없었다. 추운 겨울에 갖는 수양회였지만, 이마와 등에서 땀이 나기 시작했다. 반은 내가 통역하고 반은 자리에 앉아 계신 형제 자매님들이 내가 틀리고 모르는 단어들을 가르쳐 주면서 한 시간이 지나갔다. 정신을 차리고 형제 자매님들을 둘러보니 다 한인 성도들밖에 없었다. 통역이 전혀 필요없었던 것이다. 굳이 통역이 필요한 사람이 있었다면 맨 뒤에 앉아 있던 타미라는 형뿐이었지만, 그 형도 시작부터 끝날 때까지 비스듬히 앉아서 졸고 있을 뿐이었다.
‘내가 왜 통역을 했지?’
도무지 알 수 없었다.
무대에서 내려오니 중학교에 다니는 어느 선교사님의 딸이 나에게 다가와서 “오빠는 그 단어도 몰랐어!” 하며 놀렸다. 그 순간 너무 화가 나서 한 대 때려주고 싶었다.
그런데 바로 그때 하나님이 내가 가질 수 없는 마음을 주셨다. ‘그래, 지금은 내가 통역을 못 하지만, 내일 이맘때에는 하나님이 나를 통역하는 일에 쓰시겠구나! 내가 언젠가는 박옥수 목사님 통역도 하겠구나.’

   
 

하나님이 나를 이끌어 복음의 일 안에 조금씩 들어가게 하셨다
그때까지 나는 나를 위하고 세상의 욕망을 따라 살았는데, 하나님께서 처음으로 복음을 향한 작은 마음과 말씀을 통역할 수 있는 마음을 만들어 주시고, 복음 안에서 꿈과 소망을 심어 주셨다. ‘나는 이런 마음을 가질 수 없는데 하나님이 나에게 이런 마음을 주셨다면, 하나님이 이루시겠구나.’ 그 후로 나는 단 한 번도 이 말씀을 내가 이루려고 하지 않았다. 미국에 산다고 다 영어를 잘하는 것은 아니다. 또 영어를 할 줄 안다고 다 통역하는 것도 아니다. 그 뒤 뉴욕에 있는 대학에 편입하면서 뉴욕 교회에서 통역할 수 있는 은혜를 입었고, 통역을 하면서 영어도 배우고 실력이 늘었다.
한번은 뉴욕 교회에서 집회를 하는데, 박옥수 목사님께서 오셨다. 누가 통역해야 할지 의논하시다가 나에게 통역할 수 있는 기회를 주셨다. 하나님은 2년 전에 내가 가질 수 없는 복음을 향한 작은 마음을 주시고 세상과 육에 빠져 있던 나를 이끌어 복음의 일 안에 조금씩 들어가게 하셨다. 내가 한 것이 하나도 없지만, 하나님이 새 마음을 주시고 내 삶을 이끄시는 것을 볼 때 무척 감사하고 행복했다.
그 후에도 케냐에 와서 김재홍 목사님, 조성화 목사님, 김욱용 목사님과 같이 지내면서 계속 통역하고 GBS 개국식을 할 때에도 박옥수 목사님의 말씀을 통역할 수 있는 기회를 주셔서 무척 감사했다. 통역하는 동안 말씀을 듣고 하나님의 마음을 얻어 갈 수 있어서 참 감사했다.
이렇게 하여 내 삶과 마음이 교회 안에서 잡히고 하나님과 교회 안에서 내 인생의 새로운 장이 시작되었다. 다음 달에는 내 마음에 약속을 주시고 구체적으로 인도하신 하나님을 소개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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