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슬렘에서 기독교인으로, 사형수에서 복음 전도자로
모슬렘에서 기독교인으로, 사형수에서 복음 전도자로
  • 스파시올 유세프(우간다 기쁜소식캄팔라교회)
  • 승인 2018.06.08 21: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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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배와 질그릇
 

 

사형수로 26년 간 복역하며 죄를 씻고 싶어
모슬렘의 규례를 철저히 지켰지만 정죄에서 벗어나지 못해
고통하던 스파시올 요세프.
복음을 만나 새 생명을 얻은 그의 간증을 소개한다.

 

나는 우간다 기쁜소식캄팔라교회에 다니는 스파시올 유세프 형제다. 1990년, 내 나이 스무 살 때 돈을 벌기 위해 부모님이 계신 곳을 떠나 수도 캄팔라에 왔다. 캄팔라에서 지낸 지 9개월이 지났을 무렵인 12월 27일, 고향에서 급한 연락을 받았다. 우리 땅을 빼앗으려는 사람들과 싸우다가 남동생이 죽고 어머니는 심하게 다치셨다고 했다. 나는 지체 없이 어머니의 생명을 구하기 위해 고향으로 갔다. 집에 도착해서 보니 동네 사람들이 우리 집 마당에 불을 피우고 남동생의 장례식을 치르고 있었다. 우간다에서는 사람이 죽으면 그 집의 마당에 불을 피우고 3~4일 동안 죽은 사람을 위해 우는 문화가 있다. 그리고 어머니는 병원으로 옮겨져 치료를 받고 계셨다.

동생의 죽음과 복수
이런 일이 왜 일어났는지 알아보았다. 수천 마리가 넘는 가축 떼를 소유하고 있는 제법 부유한 제파 무훈데 가족이 자신들의 땅이 좁아 우리 땅을 침범했던 것이다. 그 일로 당시 고향에서 어머니를 도와 집안을 책임지고 있던 남동생이 그들을 찾아가 따지며 다툼이 일어나자 그들이 동생을 죽이고 어머니를 때리고 우리 집에 불까지 놓았던 것이다. 그리고 새어머니(아버지의 다른 아내) 가족 소유의 가축들도 죽이는 등 우리 땅을 빼앗기 위해 나쁜 짓을 수없이 저질렀다.
당시 나는 ‘이슬라믹 태스크 포스Islamic Task Force’라는 이슬람 기동부대에 속해 있었다. 이 단체는 이슬람 종교를 비하하거나 위험에 빠뜨리는 사람을 공격하는 무서운 집단으로, 군사 훈련도 받으며 이슬람교를 지키는 일종의 자병대(자발적으로 지원하는 군대)다.
사건의 전말을 알고 나니, 그들이 자신들은 부유하고 강하고 우리 집안은 약하다고 생각해 그런 악을 저질렀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우리가 약하지 않다는 것을 그들에게 분명히 가르쳐 줘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우리 가족에게 저지른 엄청난 일에 대해 복수하기로 결심했다. 동생을 죽인 사람들을 추적하기 시작했다.
그들 역시 내가 이슬람 기동부대 소속인 것을 알고 나를 찾았다. 왜냐하면 내가 이슬람 기동부대에게 도움을 요청하면 그들이 다 와서 복수한다는 사실을 알았기 때문이었다. 그들은 나를 죽이기 위해 판가(정글칼)를 들고 나타나 나를 둘러싸고 칼을 던졌다. 나도 판가를 들고 그들을 향해 달려가 싸웠다. 그때 두 사람이 목숨을 잃었다. 나는 사람을 죽인 혐의로 경찰에 체포되었다. 1991년 1월 28일, 지방 법정에 섰다. 그리고 수도 캄팔라에 있는 루지라 교도소로 이송되었다.

사형수에서 기적적으로 살아나다
루지라 교도소 안에는 총 4개의 교도소가 있다. 아직 재판 중에 있는 재소자들이 있는 리만 교도소, 가장 강력한 중범죄자들과 사형수가 있는 업퍼 막시멈 교도소, 일반 재소자들이 있는 막션베이 교도소, 그리고 여자 교도소다.
나는 기소 상태로 리만 교도소에 5년 반 동안 수감되어 있었다. 1996년
10월 23일에 고등법원에서 재판을 받았고, 10월 28일에 두 명을 살인한 혐의로 교수형을 선고받았다. 나는 대법원에 항소했지만 기각되었다. 내가 살 수 있는 마지막 방법은 특권위원회의 의장인 법무부 장관을 통해 대통령에게 탄원서를 제출하고 관용과 긍휼을 구하는 것뿐이었다. 1997년, 대통령께 탄원서를 제출했고, 나는 사형수들만 있는 업퍼 막시멈 교도소에 수감되었다.
1999년, 우간다에서 마지막으로 28명의 죄수에 대한 사형이 집행될 때 나는 하나님의 은혜와 긍휼로 살아남았다. 그리고 기적 같은 일이 일어났다. 헌법 재판소에서 사형에 해당하는 죄를 지었을 경우 무조건 사형을 선고하는 것에 대해 이의를 제기했고, 1999년 11월 13일, 법정은 ‘사형에 해당하는 죄를 지었을 경우 그를 교수형에 처하는 것은 의무가 아니다. 사형수로서 형 집행이 안 된 재소자 가운데 3년 이상 수감된 모든 재소자에게 20년 형으로 대체한다’는 판결이 났다. 무척 감사했다.

교도소에서 다양한 교육을 받을 수 있었다
교도소 안에서의 생활은 쉽지 않았다. 재소자들 사이에서 자주 폭행과 폭동이 일어났다. 재소자들은 자신이 곧 죽을 수밖에 없는 사형수라는 사실을 잊고 닭장에서 서로 물고 뜯는 닭들처럼 행동했다. 이러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1995년에 이탈리아 출신인 올리브가 재소자들도 교육을 받을 수 있게 허락해 달라고 교도소 고등행정청에 요청했다. 그 결과 1997년부터 재소자들도 교육을 받을 수 있게 되었고, 2000년부터는 초등교육과 고등교육을 받을 수 있는 과정도 만들어졌다. 이뿐 아니라 국가 검정고시 시험도 볼 수 있는 길이 열렸다. 교정청에서 재소자들이 더 많은 활동을 할 수 있게 허락하면서 다양한 교육을 받을 수 있게 된 것이다.
나는 2003년에 고등학교 교육을 받고, 2006년에 국가시험을 보고 고등학교 졸업증을 받았다. 그 외에도 컴퓨터 자격증, 세재 비누 제작 수료증, 상담 및 조언 교육 수료증, 비지니스 운영 및 기업가 정신교육 수료증 등을 받았다. 그리고 영어와 스와힐리어, 18개의 우간다 현지어, 그리고 이슬람어까지 말할 수 있게 되었다. 또한 모범수 및 전체 수감자 대표로 뽑혀 형을 마칠 때까지 6년간 리더로 활동했다.

이슬람교도 내 죄를 용서해주지 못하는구나
나는 모슬렘 가정에서 태어나 자랐다. 이슬람교의 법과 규정과 의식을 지키는 것이 내 삶이었다. 교도소에 수감된 후에도 이슬람교의 의식을 지켰다. 매일 하루에 다섯 차례(오전 6시 30분, 오후 1시, 4시, 7시, 8시) 발과 팔을 물로 씻어 몸을 신성하게 한 후 열심히 기도했다. 그리고 이슬람교에서 받은 교육에 따라 신성한 의복을 갖추고, 죄를 용서받으려고 선을 베푸는 삶을 살기 위해 노력했다. 라마단 기간에는 항상 금식하고, 수많은 종교의식을 열심히 따랐다.
모든 의식을 열심히 다 지켰음에도 불구하고 내 마음에 풀리지 않는 문제가 있었다. 죄를 용서받기 위해 날마다 다섯 차례 정해진 시간에 “아스다 가풀라 라아딤(Asta gafur Llah Lazwim 하나님 나의 죄를 용서해 주십시오)!”이라고 기도했지만 사람을 죽인 죄는 내 마음에 항상 남아 있었다. 사람을 죽인 죄가 날마다 나를 정죄하며 괴롭혔다. 이슬람교를 신실하게 믿고 섬겼지만 그 죄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점점 회의가 찾아왔다.    ‘이 종교도 내 죄를 용서해주지 못하는구나.’ 
2011년에는 교도소 안에서 신학 과정을 가르치기 시작했다. 나는 첫 번째 기수로 신청하여 교육을 받았다. 그리고 이슬람교에서 기독교로 개종했다. 이슬람교에 대한 회의 때문이었다. 하나님을 믿고 신학 대학에서 성경을 배웠다. 하지만 내 마음에서 죄의 문제는 여전히 해결되지 않았다. 하나님을 믿고 날마다 죄를 용서해 달라고 기도했지만 마음에 죄는 그대로 있었다. 기독교로 개종했지만 이슬람교와 기독교의 차이를 느끼지 못했다. 나는 여전히 정죄에 빠져 살아야 했다.

 

26년 만에 출소, 그리고 우간다 월드캠프
2017년 4월 27일, 26년 간의 수감 생활을 마치고 출소했다. 일주일 후 주일이 되어 어느 교회의 주일예배에 참석했고, 그곳에서 제인이라는 분을 만났다. 그는 내가 교도소에서 출소한 것을 알고 사회에 적응할 수 있도록 여러 면에서 도와주었다.
2017년 7월, 중동의 바레인에서 일하는 제인의 친구로부터 제인에게 연락이 왔다. 그는  메시지로 월드캠프 전단지를 보내주며 “우간다 마케레레 대학교에서 월드캠프가 열리는데, 꼭 가서 들어봐. 그곳에 하나님의 말씀이 있어. 그들은 참된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사람들이야.”라고 문자를 보냈다. 제인은 나에게도 월드캠프를 소개하며 함께 참석하자고 권유했다.
나는 제인 친구의 말이 사실인지 확인하고 싶었다. 그래서 월드캠프 시작 하루 전날인 7월 28일에 직접 마케레레 대학교에 찾아갔다. 행사장에 가서 보니 실제로 무대를 설치하고 의자를 배열하고 있었다. 월드캠프가 열리는 것을 확실히 믿을 수 있었다. 그리고 다음날 제인과 함께 월드캠프에 참석했다. 우리는 첫날 아침부터 월드캠프가 끝나는 날까지 모든 프로그램에 참석하여 말씀을 들었다.
월드캠프는 나에게 엄청난 충격을 주었다. 무엇보다 강사인 박옥수 목사님이 전하는 말씀을 들으면서 무척 놀랐다. 그리고 하나님께 정말 감사했다. 마음이 시원했고, 참된 평안을 얻었다. 내가 어떻게 죄인이 되었는지, 내 죄가 어떻게 눈보다 더 희게 씻어졌는지에 대해 들었고, 그 사실을 믿을 수 있었다.
“이 뜻을 좇아 예수 그리스도의 몸을 단번에 드리심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거룩함을 얻었노라.”(히 10:10)
“저가 한 제물로 거룩하게 된 자들을 영원히 온전케 하셨느니라.”(히 10:14)

나는 이제 예수님의 피로써 거룩하게 되었고, 의롭게 되었고, 또한 영원히 온전하게 되었다.
내 모든 죄가 사라졌다. 더 이상 죄로 인해 고통받을 필요가 없었다. 예수님께서 이미 내 모든 죄를 사해주셨기 때문이다.
나는 평생을 정죄 속에서, 고통 속에서 살았다. 이제는 내가 죄를 위해 할 일이 없다. 죄를 사해 달라고 울며 기도할 필요도 없고, 두려움과 정죄 속에 살 필요도 없다. 전에는 항상 정해진 시간인 오전 6시 30분, 오후 1시, 4시, 7시, 8시에 기도해야 했다. 이제는 내가 하나님 앞에 기도하고 싶을 때면 언제 어디에서나 자유롭게 기쁜 마음으로 기도한다.

 

처음으로 웃고 행복을 느꼈다
월드캠프에서 내 생애 처음으로 그라시아스합창단의 공연과 크리스마스 칸타타 공연을 보았다. 굉장히 기쁘고 행복했다. 처음으로 크게 웃었고 행복하다는 마음이 들었다. 나는 스무 살 이후로 웃어 본 적이 한번도 없었다. 26년 간의 교도소 생활을 마치고 출소한 뒤에도 웃어본 적이 없었다. 항상 근심과 슬픔 속에 있었다. 그렇게 살던 내가 월드캠프에서 그라시아스합창단의 공연과 크리스마스 칸타타 공연을 보면서 처음으로 웃은 것이다. 함께 참석한 제인에게도 말했다. “어른이 되고 처음으로 웃었어요. 그리고 행복을 느꼈어요.”
마인드교육 시간에 ‘레드우드Red Wood’에 대한 강연을 들었다. 레드우드는 100미터가 넘게 아주 높이 자라는 나무지만 뿌리는 아주 얕게 뻗는다. 그런 레드우드가 태풍과 강한 바람에도 견딜 수 있는 이유는 뿌리가 다른 나무의 뿌리들과 서로 연결되어 있기 때문이라고 했다. 강연을 들으며 나는 또 놀라운 사실을 발견했다. ‘내가 아무리 약하고 악하고 그래서 넘어질 수밖에 없는 사람이라도 예수님과 연결되고 하나님의 종과 연결되고 교회와 연결된다면 어떤 어려움이 와도 절대 넘어질 수 없겠구나.’ 모든 말씀이 놀랍고 감사했다.

 

앞으로 내 생애를 복음을 전하는 일에 드리고 싶다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 월드캠프가 끝난 뒤로 나는 기쁜소식캄팔라교회 주일예배에 참석하고 있다. 제인도 역시 구원받아 주일예배에 나온다. 이제 기쁜소식캄팔라교회는 나의 교회가 되었다. 그리고 마하나임바이블칼리지에도 입학해 성경을 배우고 있다. 이제는 이곳에서 참된 하나님의 말씀을 배우고 앞으로 선교학교에도 입학하여 복음을 위해 살고 싶다.
전에는 교도소에서 나왔다는 사실을 숨기고 다녔다. 내가 두 사람을 죽였다는 사실을 알면 사람들이 나를 피할 것 같고 내 근처에 오기를 두려워할 것 같았기 때문이다. 나의 과거를 숨기고 마하나임바이블칼리지에 입학했는데, 첫 수업 시간에 목사님께 물었다.
“목사님, 사람을 많이 죽인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의 죄도 하나님 앞에 용서를 받을 수 있나요?”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흘리신 보혈은 사람을 죽인 죄도 충분히 용서할 수 있습니다.”
‘와! 이런 복음이 있는가!’
하나님의 사랑이 정말 놀랍고 감사했다. 이제는 내 마음에 평안이 있고 소망이 있다. 앞으로 남은 생애를 내 마음에 참된 평안과 자유를 준 복음을 전하는 일에 드리고 싶다. 하나님께 감사와 영광을 드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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