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아니스트 석승환 이야기 Ⅰ _ 내게 능력 주시는 하나님 안에서
피아니스트 석승환 이야기 Ⅰ _ 내게 능력 주시는 하나님 안에서
  • 석승환
  • 승인 2018.07.13 14:21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이달의 간증 | 보배와 질그릇

처음엔 예상치 못한 어려움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 어려움 속에서 하나님을 만났다.
하나님은 전혀 생각지 못한 곳으로 나를 이끌어 가셨다.
어려움을 통하여 하나님이 나와 함께하심을 느꼈고,
어려움을 통하여 인도하시는 방향을 감각해 갔으며,
하나님은 내 모습과 상관없이 말씀으로 나를 만들어 가셨다.

 

부모님은 당시 평생직장으로 여기던 은행에 다니셨다. 그런데 IMF가 은행가를 강타하면서 일자리를 잃은 후, 하나님을 찾아다니셨고, 나는 부모님 손을 잡고 이 교회 저 교회를 옮겨 다녔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하다. 그런 중에 부천 성경세미나에 참석하신 아버지가 온 가족을 데리고 기쁜소식부천교회에 나가기 시작하셨다. 그때가 2001년이었는데, 당시 나는 열두 살이었다. 그 해 학생캠프에 참석해 12월 24일 저녁에 복음을 들었다. “다 이루었다.”(요 19:30) 이 말씀을 듣는데 ‘예수님이 내 죄를 십자가에서 다 씻으셨고, 나는 의인이다. 믿으면 하늘나라에 간다.’며 복음을 받아들이는 것이 어렵지 않았다. 그런데 내 인생이 완전히 달라질 거라고는 상상조차 못했다.
시간이 지나면서 부모님이 교회에 나가시는 횟수가 점차 줄어들었다. 어머니 혼자 한번씩 나가시다가 조금 지나니까 집에서 인터넷으로 말씀을 들으시고, 또 시간이 지나니까 그마저도 그만두셨다. 나와 여동생은 부모님이 교회에 안 가시니까 주말에 집에서 놀 수 있어서 그저 좋았다.

환청이라고 상상도 하지 못했다
중학교 2학년 때는 오전 8시부터 자정까지 수업과 자습을 시키는 학원에 다녔다. 덕분에 학교 성적도 잘 나오고 컴퓨터 게임도 줄었지만, 문제는 다른 곳에서 생겼다. 환청이 들리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귀에 들리는 소리가 환청이라고 상상도 하지 못했다.
환청이 시작된 계기는 사춘기에 접어들어 변해가는 외모가 신경이 쓰이면서부터였다. 한번씩 거울을 보면 내 얼굴이 너무 보기 싫을 정도로 미워 보일 때가 있었는데, 학원에서 내 뒤에 앉은 아이들이 내 외모를 가지고 욕을 하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그러려니 하고 넘어가다가 정도가 너무 심해져서 학원을 그만두었다. 학원을 그만두었더니 학교에서 욕하는 소리가 들렸다. 수업시간, 쉬는 시간, 쉬지 않고 하루 종일 그 소리를 듣고 있었다. 친한 친구들조차 내 뒤에서 욕을 한다고 생각하니 아무도 믿지 못하는 마음이 생겼다. 몇 달 후부터는 집에서 가족이 나를 흉보고 욕하는 소리가 들렸고, 명절에 큰집에 가서도 친척들의 욕하는 소리에 견딜 수 없었다. 그 때 너무  고통스러워 자살도 여러 번 생각했다.

환청이 들리고 마음이 고통스러웠던 그때, 하루는 뭔가에 강하게 끌리듯 책장에 꽂혀 있는 성경을 꺼내어 펼쳤다. 하이라이트가 쳐져 있는 “두려워 말라. 내가 너와 함께 함이니라”(사 41:10)라는 구절을 읽는데 마음이 뭉클하게 벅차올랐다. 그 뒤로 성경을 매일 읽는 습관이 생겼다. 어머니가 인터넷으로 박옥수 목사님 설교를 들으시던 기억도 떠올라 인터넷으로 말씀도 찾아서 들었다. 마침 2005년 하반기 성경세미나가 열리고 있었고 그라시아스합창단 공연이 함께 나왔다. 신기한 것은, 하루 종일 내 마음을 짓누르던 환청의 고통이 박옥수 목사님의 말씀을 듣고 그라시아스합창단의 노래를 듣는 동안은 완전히 사라졌다. 그 뒤로 나의 일과는 성경을 읽고, 엠피쓰리로 박 목사님 설교와 그라시아스합창단 노래를 듣는 것으로 가득 채워졌다. 그라시아스합창단의 음악을 듣다가 문득 이런 마음이 들었다. ‘저 사람들이 부르는 찬송가를 피아노로 쳐보고 싶다.’ 찬송가 악보가 너무 어려워서 바이엘 악보를 보고 치는 연습을 시작했다. 피아노를 치면 칠수록 재미있어서 나는 틈만 나면 피아노를 치는 취미가 생겼다.

내 입장이 되어보지도 않고 어떻게 나를 이해해!
환청은 고등학교에 진학하면서 점점 심해졌다. 길거리에서 아예 모르는 사람들이 내 생각과 내 마음속을 어떻게 알았는지 내 생각에 반응하면서 욕을 했다. 말도 안 되지만 환청이 철저히 사실처럼 믿어졌고, 고등학교 3학년 때는 너무 심한 지경에 이르렀다. 나의 모의고사 성적은 서울의 상위권 대학에 진학이 가능했기 때문에 대학에 희망을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6월 모의고사 때부터는 시험시간에도 환청이 들리기 시작했다. 욕하는 소리에 머리가 멍해지면서 두세 문제밖에 풀지 못했고, 결국 8, 9등급의 성적밖에 나오지 못했다. 모든 게 참담하고 그만두고 싶었다. 절망에 깊이 빠져 며칠을 보내다가 박 목사님의 말씀을 들어보고 싶어 주일 말씀 중 하나를 찾아 듣던 중에 “하나님이 보실 땐 축복의 시작이다”라고 하셨던 야이로의 딸 이야기가 크게 들려왔지만 도무지 이해는 되지 않았다.
모의고사 사건 이후에는 공부며 일상생활조차 거의 불가능한 상태까지 이르렀다. 상황이 그 정도가 되니까 심각성을 깨달으신 부모님은 나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여러 곳을 수소문하셨다. 그때서야 부모님과 나는 이런 증상이 병이라는 것을 알았다. 부모님은 이 일의 발단이 당신들께서 하나님을 떠나면서 일어나게 된 것이라 여기며 교회로 발걸음을 옮기셨다. 나도 학교를 잠시 쉬고 병원치료를 받으며 기쁜소식김포교회에 가서 목사님과 교제하는 시간을 자주 가졌다. 김포교회 목사님은 내가 듣고 있는 이 모든 소리가 가짜라고 했다. 그 말씀은 나에게 굉장히 충격이었고 ‘자기들이 내 상황이 되어봤어? 내 입장이 되어보지도 않고 어떻게 나를 이해해!’ 하는 마음만 가득했다.

마음을 정하고 소리를 무시하기 시작했다
기쁜소식강남교회에서 연합예배가 있었는데, 예배 후 박옥수 목사님을 찾아갔다. 아버지는 내가 환청이 들려서 왔다고 이야기 드렸다.
“그래, 환청이 들린다고?”
“네, 근데 그게 진짜인지 아닌지 잘 모르겠어요.”
박 목사님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셨다.
“진짜건 가짜건 상관없어. 그것은 사탄의 음성이야. 너, 구원받았니?”
“네.”
“승환아, 예수님은 사탄보다 세다는 걸 알아야 해. 예수님의 음성은 소망을 만들어. 너, 야이로의 딸 이야기 들어봤니?”
박 목사님은 죽었던 야이로의 딸을 살리신 예수님 이야기를 하셨는데, 얼마 전에 내가 인터넷으로 들었던 주일 말씀과 같은 이야기를 듣게 되어 신기했다.
“축복의 시작! 하나님이 보실 땐 축복의 시작이다.”
결국 듣고 있는 소리가 환청이라는 것을 알아가면서, 내가 느끼는 생각과 감각들이 틀렸음이 인정되었다. 나는 그렇게 환청에서 벗어나고 있었다.
목사님과의 교제 후, 얼마 지나지 않아 여름 학생캠프에 참석했다. 캠프에서 나를 알아보는 사람이 있을 거라는 생각을 하는 순간, 욕하는 소리가 다시 강하게 들렸다. 2주간 진행하는 캠프였는데, 한 주를 남겨놓고 더 이상 안 되겠다는 마음까지 들었다. 나는 선생님께 환청이 다시 들려서 병원에 가봐야 할 것 같다고 말씀드렸는데, 선생님은 “승환아, 너의 그 생각은 틀렸어. 너는 다른 사람보다도 더 하나님과 목사님 곁에 있으면서 말씀을 들어야 해!” 하며 나의 생각과 싸워주셨다. 나와 함께 싸워주는 분이 있다는 것에 힘을 얻으면서 환청과 싸우기 시작했다.
“목사님도, 선생님도 내가 틀렸다고 했어. 이 소리가 진짜건 가짜건 사탄의 음성이라고 했어! 다른 사람의 판단처럼 이 소리가 가짜면, 오히려 행복한 것 아닌가?”
가만히 생각을 되짚어보니, 내 판단이 틀려야 내가 행복한 사람이었다. 나를 어렵게 하는 건 들려오는 소리가 진짜라고 인정하는 내 옳음일 뿐이었다. 마음을 정하고 소리를 조금씩 무시하기 시작했다. 들려와도, 아무리 강하게 들려와도 ‘어차피 사실이 아니니까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라고 마음을 먹었다. 신기한 것은 더 강해지던 소리가 어느 순간부터 힘을 잃어가는 것을 느끼면서 마음에 확신이 생겼다.
“이 소리! 가짜가 맞구나!”
너, 피아노 안 해볼래?
학생캠프 마지막 날, 예배당에 있는 그랜드피아노에 눈이 멈췄다. 평소에 만져볼 수조차 없었던 그랜드피아노를 쳐보고 싶었다. 아무도 없는 것을 확인하고 집에서 혼자 연습하던 곡을 연주하는데, 행복감에 젖어 인기척도 듣지 못했다. 캠프의 공연 스태프가 예배당 의자에 누워 자다가 나의 피아노 소리를 듣게 되면서 나는 폐막식에서 공연을 하게 되었다. 폐막식 공연 소식이 김포교회 목사님에게까지 전해졌고, 캠프 이후 목사님이 나를 부르셨다.
“승환아, 너 피아노 안 해볼래?”
그때까지 나는 생명공학도를 꿈꾸며 공부해왔지만, 거짓된 소리조차 구분 못하던 어리석은 내가 하나님이 세우신 목사님의 인도를 따르지 못할 이유가 하나도 없었다. 그렇게 2009년, 나는 목사님의 인도를 받아 새로 설립된 그라시아스음악학교(현 새소리음악중고등학교)에 입학했다.

너희들은 세계 최고의 음악가이다
학기 초, 음악학교의 설립자이신 박옥수 목사님과 우리 1기 신입생들이 함께하는 시간을 가졌다. 박 목사님은 우리들에게 “너희들은 세계 최고의 음악가이다.”라고 말씀하셨다. 그냥 피아노를 배울 수 있다는 것만으로 좋았지, 잘해야겠다는 생각은 아예 하지 않았는데, 그런 내가 ‘세계 최고의 음악가’라니…. 상상도 해본 적이 없는 말씀을 하셨다. 하지만 ‘환청을 진짜라고 주장했던 나보다는 박 목사님의 말씀이 더 옳다!’라는 생각은 내 마음을 조금씩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라시아스합창단의 박은숙 단장님은 “믿음은 속도의 차이다. 남들 20년 공부할 거 믿음으로 몇 년 만에 따라잡을 수 있다.”라고 말씀하셨다. 아직도 이 말씀들은 내 마음 한가운데 자리 잡아 나를 이끌고 있다.
음악학교에서 보낸 3년은 하나님이 불가능해 보이는 형편을 믿음으로 넘어가도록 끊임없이 나를 훈련시킨 시간이었다. 나는 첫 실기 시험에서 겨우 꼴찌만을 면했다. 나를 처음 만난 선생님들은 ‘다섯 살 수준밖에 안 된다’는 아주 부정적 평가를 내리시기도 했다. 지금은 함께 연주도 자주 하지만, 러시아의 이고르 교수님도 나를 처음 만났을 때는 “넌 너무 늦었다”라고 하셨다.
음악을 늦게 시작한 만큼 부딪히는 벽도 참 많았던 것 같다. 학교에서는 ‘찾아가는 음악회’를 자주 했는데, 대부분의 공연에서 MC와 합창을 하면서 피아노를 만져 볼 기회가 거의 없었다. 피아노 솔로 연주자는 내 길이 아닌가 하는 마음이 들어서 아예 작곡으로 전과를 하려고 했다. 작곡은 신체적 기능보다 머리로 할 수 있는 거라 늦게 시작한 나에게 가능성이 있어 보였다. 2학년 즈음에 박은숙 단장님께 의논드리러 찾아갔다.
“선생님, 저는 피아노 전공하는 학생인데, 작곡으로 전과하고 싶습니다.”
“네가 피아노 솔리스트 하고 싶으면 하면 돼.”
박 단장님은 나의 질문과 전혀 상관없는 답변을 해주시고 바쁘게 다른 곳으로 가셨다. 그게 대화의 끝이었고, 나는 다시 마음을 잡고 피아노를 칠 수밖에 없었다. 지금 그 말씀대로 내가 피아노 솔리스트가 되었다는 것이 신기한데 그 당시만 해도 상상조차 할 수 없었다.
나는 음악학교에서 3년간 학생회장을 맡았다. 학생회장 일은 모든 것이 부담스럽고 어려웠다. 중요하게 맡게 된 일은 ‘찾아가는 음악회’의 프로그램을 짜는 것이었다. 나는 악기 종류조차 잘 몰라서 학생 회의를 통해 도움을 얻어보려고 했지만, 회의조차 이끄는 것이 서툴렀다. 음악회 날짜는 다가오고, 프로그램은 안 나오고, 나는 아는 것도 없고, 어떻게 이끌어야 할지도 모르겠고, 거기다 사회까지 봐야 한다니…. 그때는 너무나 막막했다. 그러다가 ‘하나님이 학교를 통해 하시는 일이면 나에게도 할 수 있는 지혜를 주시겠다’는 마음이 들었다. ‘어떻게 하지…’ 머무르던 마음에서 ‘잘 모르지만 일단 내딛자’ 하며 한걸음 내디뎠을 뿐이었는데 공연은 결과적으로 아름답게 끝났다. 그 공연에서 한 학생이 연결되어 학교에 입학하고 구원도 받는 감사한 일도 생겼다. 하나님은 그 후 3년간 계속된 공연도 아름답게 이끌어 가셨다. 새로운 일, 안될 것 같은 일이 수도 없이 왔지만, 하나씩 부딪치면서 믿음이 생기고, 담대함도 자랐다. 어느 순간부터는 부담에 부딪치는 것이 재미있어지기 시작했다.

그라시아스음악학교(현 새소리음악중고등학교) 재학 당시 합창을 같이 했다. 뒷줄 오른쪽에서 세 번째가 석승환

 

그라시아스음악학교(현 새소리음악중고등학교) 졸업식. 하나님의 종의 인도를 믿고 석승환 형제를 뒷받침을 해주시는 부모님.

내게 능력 주시는 하나님 안에서는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다
2012년에 ‘뉴욕 마하나임음악원’에 입학했다. 지금 생각해보면 뉴욕 마하나임음악원에서 지낸 3년은 하나님께서 나를 약속으로 이끌기 위해 포석을 깔아두신 시간이었다. 보기에 좋았던 일과 나빴던 일 모두가 지금에 와서는 합력하여 선을 이루어감을 본다.
입학하고 몇 달 후에 뉴욕 월드캠프가 시작했다. 마하나임음악원생 대부분이 합창단과 오케스트라에 합류해 공연했지만, 피아노과였던 나는 공연이 없어 학생으로 캠프에 참석했다. 하루는 캠프 담당 선생님이 공연을 보는 중에 나에게 물었다.
“너는 왜 공연을 같이 안 하니?”
“저는 피아노과라서 할 일이 없어요.”
“승환아, 믿음을 가져!”
사실 같이 연주하고 싶다는 욕심조차 없었는데 그 말이 뜬금없이 마음을 두드렸다. 가을 학기가 시작될 무렵, 박은숙 단장님과 이런 저런 일로 상담하는 시간을 가졌다.
“요즘 무슨 곡 공부해? 콘체르토(오케스트라와 함께 연주하는 장르)는 공부하는 거 없어?”
“아…, 이제 막 시작하는 곡이 있긴 해요.”
“그래? 합창단이랑 공연 한 번 하자.”
“네? 네….”
머릿속으로 이 곡을 공부하는 데 얼마나 걸릴지 계산해보니 적어도 이번 학기 내내 연습해야 할 것 같았다. ‘몇 달 뒤에는 공연을 해야 하는 거구나’ 하고 마음먹었다. 한 3일쯤 지났을까…, 오케스트라 팀이 익숙한 멜로디의 곡을 연습하고 있었다. 그 곡은 내가 막 공부를 시작한 모차르트 협주곡이었다. 뭔가 심상치 않은 기분이 들어 그곳에 가서 물었다.
“혹시 지금 연습하는 곡이 누구의 공연이에요?”
“너잖아. 넌, 몰랐어?”
“아… 네… 언제 공연이에요?
“이번 주 금요일.”
하늘이 무너지는 것 같았다. 몇 달 내내 연습하리라 생각했던 곡을 5일 만에 외워 협연해야 하는데, 대체 어떻게 해야 할지 막막했다. 거기다 5일 중 이틀은 하루 종일 외부에 나가 있어야 해서 연습 스케줄조차 나오지 않았다. 스스로도 가장 자신 없는 모차르트 곡을 앞두고 막막한 심정이었다. 나는 가만히 생각을 해보았다.
‘내게 능력 주시는 하나님 안에서는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다.’라는 마음이 들었는데, ‘에라 모르겠다’ 싶어 부딪쳐 나가기로 했다.
목요일 리허설은 완전히 말아먹었다. 오케스트라와 함께 연주하는 것 자체가 처음이었고, 합창단과 하는 것은 기뻤지만 큰 부담이기도 했다. 거의 70% 이상을 날려버린 리허설을 마치고 마음에 정말 큰 싸움이 일어났다. 포기하고 싶었지만 이미 늦었고, 합창단도 그냥 진행하려는 것 같았다. 그 날 합창단원 한 분과 밤늦게까지 교제를 나누었다. 공연 당일, 무대에 그냥 올라갈 수밖에 없었는데 기적이 일어났다. 그것이 비단 나만 느꼈던 결과가 아님을 하나님이 보여주시듯, 러시아 피아노 교수님이 찾아와 ‘공연이 너무 좋았다’며 나에게 악수를 청하셨다. 그렇게 그라시아스합창단과의 첫 무대가 마무리되었다.

네게 온전한 상 주시기를 원하노라
2학년 봄 학기가 시작될 때, 학교 커리큘럼에 따라 미국에서 열리는 국제 콩쿠르에 참가해야 했다. 메트로폴리탄에서 피아노 콩쿠르를 주최한다는 것을 보았다. 문제는 시간이었는데, 콩쿠르까지는 3주 남짓 남았고, 한국에서 갖는 음악캠프를 마치고 미국에 가면 2주밖에 시간이 없었다. 그래도 공부해 둔 곡들이 있으니 2주간 죽어라 연습하자는 마음으로 신청서를 제출했다. 그러나 하나님만의 방법으로 2주간의 시간이 준비되어 있는 줄은 꿈에도 생각지 못했다.
한국 음악캠프를 마치고 미국에 들어가자 기절초풍할 일이 기다렸다. 살면서 그렇게 많은 눈이 온 것을 본 적이 없었다. 마하나임센터의 남자들 모두 하루 종일 제설 작업을 해야 했다. 피아노 연습은커녕 삽질만 하루 종일 하고 있어서 불안해지기 시작했다. 다음 날 주일 예배를 위해서는 제설 작업이 반드시 필요했다. 하루 종일 삽질과 곡괭이질을 한 후에 피아노를 치려니 당연히 팔 컨디션이 좋지 않았다. 엎친데 덮친 격으로, 외부 공연들까지 갑자기 잡혀서 학교 일과 외에는 프로그램을 짜는 일과 공연에 올릴 합창과 아카펠라를 연습하기에도 시간이 모자랐다. 게다가 영어로 간증까지 준비하라는 요청이 들어와 콩쿠르의 생각은 아예 머릿속에서 사라졌다.
그렇게 바쁘게 2주를 보내고 콩쿠르가 하루 앞으로 다가왔다. 콩쿠르 다음 날에도 공연 스케줄이 있었다. 하루 전날 피아노 앞에 앉았는데 ‘지금 와서 연습해봤자 뭐하지?’ 하는 생각이 들어서 그나마 겨우 찾아온 연습시간을 산책으로 날려버렸다. 콩쿠르 당일 날, 음악원에서는 아침마다 마인드 교육을 받는데, 그날 강연하신 목사님께서 “여호와께서 그 날개 아래 보호를 받으러 온 네게 온전한 상 주시기를 원하노라.”(룻 2:12)라는 말씀을 전하셨다.
‘아… 내가 상을 받겠구나.’
콩쿠르에 참가하면서도 순서를 기다리는 동안 다음 날 공연에 관련된 일을 계속 했다. 갑작스럽게 취소된 공연이 있어 다른 프로그램으로 대체해야 하는 급한 일이 생겼기 때문이다. 내 차례가 되어 콩쿠르를 치르고 나왔는데 어떻게 했는지 기억도 나지 않았다.
결과 발표 하루 전날 구역 예배가 있었다. 내게 간증을 시켜서 이런 저런 이야기를 하다 보니 콩쿠르 이야기까지 나왔다. “온전한 상 주시기를 원하노라”라는 말씀은 입에 맴돌고, 도저히 상을 못 받을 것 같은 생각도 들고…. 그 짧은 순간 내 마음에는 엄청난 싸움이 일어났다. 하지만 나도 모르게 “하나님이 상을 주실 거라고 했습니다!”라고 입에서 나와버렸다.
결과가 나왔는데 하나님은 말씀대로 나에게 상을 주셨다. 1등은 아니었지만 나에게 과분한 상이 주어졌다. 하나님이 말씀대로 이루셨다는 사실이 가장 감격스러웠다. 콩쿠르 수상이 계기가 되어 그라시아스합창단과 정식으로 성경세미나와 월드캠프 같은 큰 무대에서 공연을 함께하기 시작했다.

뉴욕 마하나임 음악원 재학 당시

차이콥스키 콩쿠르
2013년은 피아노 실력이 늘지 않아 큰 슬럼프가 찾아왔다. 선생님은 레슨 때마다 같은 이야기를 하며 꾸중하셨고, 그런 상황이 1년 가까이 지속되니까 꼭 바보가 된 것 같았다.
오랜만에 쉬는 날이라 학교 밖으로 나가려고 했지만 아침부터 비가 쏟아져 꼼짝없이 학교 복도만 서성거리던 날이었다. 마침 복도를 지나가시던 박은숙 단장님과 마주쳤다.
“뭐하고 있어? 큰 국제 콩쿠르들의 목록 만들어 와.”
“네? 네.”
갑작스런 일이 생긴 터라 영문도 모른 채 컴퓨터실에서 3시간에 걸쳐 세계적인 국제 콩쿠르를 쭉 정리했다. 당시 내 실력으론 상상도 못할 만한 수준의 콩쿠르들이었다. 정리한 것을 드리기 위해 단장님을 찾아갔다.
“음…, 여기도 나가보고, 여기도 나가보고….”
“… 네?”
단장님은 2015 차이콥스키 국제콩쿠르를 가리키시며
“여기는 가서 무·조·건 1등 하는 거야!”
“네? 네….”
“다른 곳은 기대 안 해. 차이콥스키 이전의 대회는 경험 쌓는 걸로 하고….”
“… 네! 차이콥스키 가서 1등 할게요. 하나님이 주실 거예요.”
“그래! 하나님이 주실 거야.”
차이콥스키 콩쿠르는 내가 파일로 정리한 콩쿠르 중에서도 최고 수준의 콩쿠르였다. 이상하게도 너무 말이 안 되는 이야기라 오히려 하나님의 뜻이라는 믿음이 생겼다. 나는 학교 피아노 선생님께 차이콥스키 콩쿠르에 나가려고 한다는 메일을 썼다. 선생님은 레슨 때, 내 얼굴을 보시고 너무 황당해서 그냥 웃으셨다.
“승환아, 진심이지?”
“네, 진심인데요.”
그날 레슨에서도 나는 여전히 선생님이 지도해주신 작은 부분도 해내지 못했다. 그런데 참 이상했다.
‘하나님, 저는 선생님 말도 못 알아듣고, 피아노도 잘 모르겠고, 그만둬야 하나요?’
‘너, 차이콥스키 콩쿠르에서 1등해.’
나는 분명 형편없는 실력을 가지고 있는데, 하나님은 전혀 개의치 않으시고 당신이 원하는 대로 나를 계속 이끌어나가시는 것 같았다.
기말시험까지도 여전히 헤매고 있었다. 하지만 하나님은 여전히 단장님을 통해 나를 이끌어 가셨다. 그 해 겨울, 단장님의 인도로 2015년 차이콥스키 콩쿠르를 준비하기 위해 3개월간 러시아로 떠났다.

러시아로 떠나다
러시아에 갈 때 걱정이 참 많았다.
‘내 실력으로 러시아 음악원의 수준높은 교수님께 과연 배울 수 있을까?’ 하는 부담이 일단 앞섰고, ‘여기서도 잘 못하면 이제 피아노는 진짜 끝이다’라는 생각마저 들었다. 젊고 경험이 많지 않은 미국 선생님조차 내 실력을 탐탁지 않아 하셨는데, 오랜 경험을 가진 러시아의 큰 교수님은 나에게 뭐라 하실까 하는 걱정에, ‘다른 것보다 말귀라도 좀 알아들으면 좋겠다’ 하는 마음으로 기도를 많이 했다.
러시아에서 보낸 3개월은 나에게 중요한 터닝 포인트가 되었다. 마치 하나님이 미국에 있는 동안 막혀 있던 귀와 이해력을 뻥 뚫어 주시는 것 같았다. 그간 미국의 선생님께서 하신 말씀들이 뭐였는지 그제야 이해가 가기 시작했다. 레슨 받고, 연습하고, 너무 행복한 시간이었다. 너무 행복한 것이 문제였을까. 하루 종일 공부하는 재미에 빠져 사람들과 거의 교류를 않고 지냈다. 혼자 피아노를 치다 보면 이런 상황이 많은데, 연습만 계속하다보니 점점 고립되면서 결국 사고가 터졌다. 2013년 12월에 들어가 2014년 2월이 되어서 3개월에 접어들었다. 미국에서 4월 초에 성경세미나가 있으니 들어오라는 연락이 왔다. 비자 만료 기간까지는 아직 시간이 조금 남았고 성경세미나 시작 전까지 레슨을 좀 더 하고 가겠다고 말씀드렸다. 이것이 문제가 될 거라고는 꿈에도 생각 못했다. 한 달 더 비자를 연장하려면 버스를 타고 핀란드로 나갔다가 ESTA비자로 다시 들어와야 했는데, 3월 14일이 비자 만료 기간이라 3월 13일에 핀란드로 출국하면 되겠구나 싶었다.
한번만이라도 러시아 목사님과 사모님에게 여권을 확인받고 의논을 드렸더라면 생지지 않았을 문제가 일어난 것이다. 실제 비자 만료일은 3월 4일이었는데, 14일로 잘못 본 나는 13일에 핀란드로 가다가 결국 국경에서 잡힌 것이다. 나는 밤새 심문을 받다가 다시 상트페테르부르크로 쫓겨나오고서야 10일간 불법체류가 되어버린 내 현실을 깨닫게 되었다. 이후 형사재판에서 5년간 러시아 추방이라는 결정이 내려졌다. 믿음으로 1년 뒤에 차이콥스키 콩쿠르에 나가 1등 할 거라며 다녔는데, 이젠 참가조차 할 수 없다니 하늘이 무너지는 것 같았다.
‘이 멍청아. 누가 비자 만료일을 잘못 보고 추방을 당하냐!’
죄책감이 한없이 몰려왔다. 나는 러시아에서 공부를 마치고 미국으로 돌아가 이런 이야기를 듣고 싶었다.
“와, 승환이 러시아 잠시 다녀오더니 실력 많이 늘었네!”
“네, 하나님이 도우셔서 이렇게 실력이 늘었습니다.”
하지만 이런 떳떳한 모습이 아닌, 가장 멍청하고 부끄러운 모습을 가진 채 돌아가야 했다. 한 달 더 공부하고자 했던 의욕도, 원함도 어디론가 사라졌다.
‘러시아에서 왜 그렇게 사람들과 마음을 나누지 않고 지냈을까…. 내가 왜 그랬을까… 왜 그렇게 내 자신만 믿고 고립되어 지냈을까….’ 후회가 끊임없이 나를 괴롭혔다. 그러다가 문득 정신이 번쩍 들었다. ‘내 생각을 믿다가 이 지경이 되었는데, 지금 이 생각들을 또 믿을래?’ 나는 후회와 죄책감이 잡아당기는 손을 뿌리치기 시작했다. 그리고 러시아를 떠나기 전에 교회에서 마지막으로 간증하는 시간을 가졌다.
“저는 내년 차이콥스키 콩쿠르에서 1등 할 겁니다.”

너는 범사에 그를 인정하라
생각과 정죄는 끊임없이 나를 찾아왔다.
‘너 마음도 안 열고, 혼자 지내니까 그렇게 된 거야.’
‘넌, 너 자신을 너무 믿어. 그래서 하나님이 치신 거야.’
‘넌 이제 끝났어. 사람들이 뭐라고 하겠어? 참 부끄럽다.’
미국에 돌아가 처음 참석한 모임에 음악원 동기들, 새로 들어온 후배들, 그라시아스합창단원들까지 모두 모여 있었다. 가시방석에 앉아 내 모습이 드러나는 것조차 부끄러웠다. 박영국 목사님이 잠언 말씀을 읽으셨다.
“너는 범사에 그를 인정하라. 그리하면 네 길을 지도하시리라.”(잠 3:6)  눈이 번쩍 뜨였다. ‘범사에 그를 인정하라고? 그러면 비자 만료기간을 잘못 본 것이 내 실수가 아니라 하나님이시다!’ 러시아에서 참석한 마지막 예배에서도 똑같은 말씀을 들었다. 두 번이나 같은 말씀을 들으니 하나님이 내게 하시는 말씀이라는 마음이 강하게 들었다. 이 일이 온전히 하나님의 계획이라면, 내가 부끄러워하거나 정죄에 빠지면 안 되는 거였다. 며칠 뒤, 아침 모임에서 박은숙 단장님께서 또 다시 잠언 3장 6절을 말씀하셨다. 말씀을 들어보면, 하나님께서 나에게 5년간의 추방을 주신 것이다. 마음에 조금씩 힘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2편은 8월호에 소개됩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