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윗의 인구 계수
다윗의 인구 계수
  • 김재홍(기쁜소식 인천교회 목사)
  • 승인 2018.11.14 21: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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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곱의 사다리

“여호와께서 다시 이스라엘을 향하여 진노하사 저희를 치시려고 다윗을 감동시키사 가서 이스라엘과 유다의 인구를 조사하라 하신지라. (중략) 요압이 왕께 고하되 ‘이 백성은 얼마든지 왕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백 배나 더하게 하사 내 주 왕의 눈으로 보게 하시기를 원하나이다. 그런데 내 주 왕은 어찌하여 이런 일을 기뻐하시나이까?’ 하되”(삼하 24:1~3)

요압의 악
사무엘하에서 다윗이 이스라엘의 인구를 조사하려고 하자 군대장관 요압이 반대했다. 왜냐하면 누가 봐도 선한 일이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하나님이 다윗에게 이스라엘과 유다의 인구를 조사하게 한 이유는 이스라엘 백성을 향해 진노하여 그들을 치려는 목적이었다. 인구를 조사하는 일 자체는 악한 일처럼 보이지만 하나님의 뜻을 따라서 하는 일이고 하나님의 목적을 이루기 위한 일이기 때문에 선한 일이었다.
인간적인 옳음에 사로 잡혀 있는 요압과 같은 사람은 결코 이런 영적인 인도를 받을 수 없고,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일에 쓰임 받을 수 없다. 왜냐하면 인간적인 옳음이 영적인 일을 늘 방해하여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다윗의 반대편에 설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사울의 군대장관 아브넬이 다윗에게 화친을 청하러 사람을 보내 ‘내 손이 당신을 도와 온 이스라엘로 당신에게 돌아가게 하겠다’ 했을 때 다윗은 아브넬의 청을 받아주었다. 아브넬이 다윗에게 직접 왔을 때 그를 위하여 잔치를 베풀고 선대하여 평안히 가게 하였다. 그 이유는 사울의 집과 전쟁하면 할수록 이스라엘 백성이 많은 피를 흘리기에 아브넬을 선대하면 전쟁을 빨리 종식시킬 수 있고 여러모로 많은 이득을 얻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아브넬이 다윗 편으로 전향한 것은 굉장히 반가운 일이었다.
그러나 전쟁에 나갔다가 돌아온 요압이 이 사실을 뒤늦게 알고는 다윗 왕 앞에 나가서 “어찌하여 저를 보내어 잘 가게 하셨나이까? 왕도 아시려니와 넬의 아들 아브넬의 온 것은 왕을 속임이라. 왕의 출입하는 것을 알려 함이니이다.”라고 하면서 다윗 몰래 사람을 보내어 아브넬을 데리고 돌아오게 했다. 요압은 그를 만나 조용히 이야기하려는 듯이 저를 데리고 성문으로 들어가서 배를 찔러 죽였다. 그 이유는 자기 동생 아사헬의 피 때문이었다. 요압의 동생 아사헬의 죽음은 자신을 믿는 마음 때문에 스스로 죽음을 자처했다고 할 수 있다. 아사헬은 자기 발이 빠른 것 하나만 믿고 아브넬을 추격했는데, 아브넬은 자기를 추격해 오는 아사헬을 향하여 “나를 쫓아오지 마라. 내가 너를 죽이면 네 형의 낯을 어떻게 보겠냐?”며 말렸다. 하지만 아사헬이 아브넬의 말을 듣지 않아 결국 죽임을 당했다. 그래서 그것은 아사헬의 책임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요압은 아브넬이 동생을 죽였다는 이유로 복수했던 것이다. 요압은 자신의 사사로운 감정과 자신이 옳다는 생각 때문에 아브넬을 죽이고 사울의 집과 전쟁이 오래가도록 만드는 큰 악을 저질렀다.

영적인 옮음까지도 버려야 한다
우리가 가지고 있는 옮음은 양면성이 있다. 한 쪽 편에서 볼 때는 옳지만 모든 면으로 옳은 것은 아니다. 인간의 옳음은 그 어떤 옳음이라도 완전하지 않다. 하나님의 옳음만이 완전하기에 자신이 보기에 아무리 옳아 보여도 그 옳음을 버려야 한다. 그런데 요압은 인간적인 옳음을 버릴 줄 모르고 자신의 옳음을 쫓아 살면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수많은 피를 흘리게 하는 큰 악을 저질렀다. 신령한 세계에 들어가려면 우리가 가지고 있는 옳음은 마땅히 버려야 할 뿐만 아니라 영적인 옳음까지도 버릴 줄 알아야 한다.
“성령이 아시아에서 말씀을 전하지 못하게 하시거늘 브루기아와 갈라디아 땅으로 다녀가 무시아 앞에 이르러 비두니아로 가고자 애쓰되 예수의 영이 허락지 아니하신지라.”(행 16:6~7)    
사도 바울이 아시아에서 복음을 전하려고 했을 때 예수의 영이 허락지 않았다고 했는데, 사도 바울은 이것이 성령의 인도라는 것을 어떻게 알았을까? 우리는 말씀을 전하지 못하게 하는 일을 만나면 ‘이것은 사탄의 역사다. 사탄이 복음을 가로막는 것이다’라고 생각할 것이다. 그런데 사도 바울은 어떻게 예수의 영이 허락지 아니하는 것이라고 깨달을 수 있었을까?
신앙생활을 하다 보면 여러 가지 경험과 이론이 쌓이기 때문에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성령의 인도를 받기보다 자신의 경험과 영적인 지식을 따라 행하는 경우가 많다. 영적인 세계에서는 경험과 지식을 따라야 하는 것이 아니라 매순간 영의 인도를 받아야 한다. 신앙의 경험을 따라 얻은 영적인 옳음을 버려야 신앙이 되는 것이다. 그런데 대부분의 신앙인들이 자신이 알고 있는 영적인 기준이 옳고 영적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버리지 못해서 성령의 인도를 따르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사도 바울은 아시아에서 말씀을 전하려는 영적인 옳음을 버렸기 때문에 성령의 인도를 받아 마게도냐로 갔다. 마게도냐 지경 첫 성인 빌립보에서 루디아에게 복음을 전해서 그와 그 집이 구원을 받고 빌립보 감옥의 간수가 구원받아 빌립보교회가 세워지는 큰 역사를 경험할 수 있었다.

놀라운 영적인 경지에 이르려면
신앙은 영의 인도를 받는 것이 중요하다. 영적이지 못한 사람일수록 영의 인도를 받는 인도자의 인도를 받아야 한다. 다윗은 영의 인도를 받아 이스라엘 백성을 계수하려고 한 것인데, 영적이지 않은 요압은 그 이유를 알지 못했을 뿐 아니라 자신의 인도자인 다윗 왕을 판단하여 따르지 않으려고 했다.    
“다윗이 인구 수를 조사한 후에 그 마음에 자책하고 여호와께 아뢰되, ‘내가 이 일을 행함으로 큰 죄를 범하였나이다. 여호와여 이제 간구하옵나니, 종의 죄를 사하여 주옵소서. 내가 심히 미련하게 행하였나이다.’ 하니라.”(삼하 24:10)
다윗이 악을 행한 것은 하나님이 감동시키셔서 한 것이다. 그 목적은 이스라엘 백성이 여호와 앞에 악을 행하고 하나님을 떠나기 때문에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치시려 함이었다. 다윗이 이런 영의 인도를 받았다는 것은 놀라운 영적인 경지에 이르렀다는 것이다.
“다윗을 왕으로 세우시고 증거하여 가라사대 ‘내가 이새의 아들 다윗을 만나니 내 마음에 합한 사람이라. 내 뜻을 다 이루게 하리라’ 하시니”(행 13:22)
하나님의 영이 다윗의 마음을 감동시켜서 악을 범하게 만들었는데, 다윗이 자신의 생각과 판단을 버리고 하나님과 마음을 합하여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일에 쓰임을 받았다는 것은 자신이 옳다는 생각과 판단을 제하는 굉장히 신령한 경지에 들어가 있다는 것이다. 인간적인 옳음과 영적인 옳음 둘 다 버리고 영의 인도를 받는 다윗이 있었는데도 불구하고 요압이 복을 받지 못한 것은 다윗을 무시하고 자신의 옳음을 쫓아간 결과라고 할 수 있다.

하나님의 종과 마음을 합하면
이 시대에도 하나님께서 영의 인도를 받는 신령한 당신의 종을 교회 안에 세우셨는데 요압과 같이 미련하게 행하고 종을 업신여기는 자들이 있다. 뿐만 아니라 요압의 길에 서 있어서 요압과 같이 불행한 삶을 사는 자들이 있다. 요압의 길에서 떠나 영의 인도를 받고, 하나님과 마음을 합한 하나님의 종과 마음을 합하면 이것이 곧 하나님과 마음을 합하는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의 뜻이 다 이루어지는 것을 경험하는 다윗과 같은 복된 삶을 살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