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생애에서 가장 행복한 여행
내 생애에서 가장 행복한 여행
  • 공순기(기쁜소식진주교회)
  • 승인 2018.11.16 10: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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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도 간증

기쁜소식 진주교회의 오세재 목사는 2017년 베트남 월드캠프에 참석하여, 많은 목회자들이 CLF에서 구원을 받으며 자신들의 교회에 와서 말씀을 전해 달라고 요청하는 것을 보았다. 마침 남진향 선교사가 복음을 전할 사람들을 보내 달라고 요청해, 마하나임 바이블트레이닝센터를 졸업한 교육전도사들을 1년 동안 계속 보내 주겠다고 약속했다. 올해 많은 교육전도사들이 휴가를 내어 베트남으로 전도여행을 떠나고 있다. 말씀을 전할 때에는 눈앞이 캄캄할 때가 많지만, 그만큼 하나님이 역사하시는 것도 경험해 행복한 시간을 보내고 돌아오고 있다. 그 가운데 한 사람의 간증을 소개한다.

내 인생 계획에 ‘2018년에 베트남에 가서 집회를 인도하는 것’은 없었다. 그러나 하나님은 교회를 통해 내 인생에 없는 길을 가게 하셨다. 우리 교회 목사님이 “교육전도사들은 올해 전부 해외에 나가서 집회 강사로 복음을 전하세요.”라고 하셨을 때, 내가 그렇게 할 수 있을 거라는 믿음도 없고, 부담스러워서 그렇게 하고 싶지도 않았다.
예수님은 38년 된 병자에게 “일어나 네 자리를 들고 걸어가라.” 하셨다. 그 말씀에는 그가 걸어갈 수 있는 능력이 들어 있었지만, 병자 마음에서는 ‘나는 오랫동안 누워 있었어. 그런 내가 어떻게 걸어가?’라는 생각이 들었을 것이다. 그런데 그 생각보다 예수님의 말씀이 컸기에 그는 일어났다. 해외로 전도여행을 가라는 말씀 앞에서 내 마음에 병자처럼 ‘난 못해! 능력이 없어. 믿음이 없어. 부담스러워.’라는 생각이 들었지만, 교회에서 계속 들려오는 말씀은 내 생각이 틀렸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나도 38년 된 병자처럼 내 생각을 버리고 교회의 음성을 좇아 6월 24일 베트남으로 떠났다.

베트남은 최근 종교의 자유를 허용하기로 했지만, 나라에서 인정한 모임에 국한된 것이었다. 한국에서 간 어느 단체의 무분별한 포교 활동이 문제가 되어서 국가에서 인정하지 않은 교회는 단속이 더 심해졌다고 했다. 얼마 전 우리 교회 교육전도사들이 전도여행을 갔을 때에는 소수 민족 마을에서 집회를 했는데, 집회 후 공안들의 감시가 심해져서 갈 수 없다고 했다. 우리는 현지 형제 자매들이 모여서 신앙생활을 하는 교회들을 찾아갔다.
나는 매치에 있는 교회에 가서 집회를 인도했다. 교회에서 집회 하는 것을 공안이 알고 있기 때문에 언제 들이닥칠지 모른다고 했다. 혹시 공안이 와서 잡혀도 강사만 추방되고 베트남 성도들에게는 아무 문제가 없도록 준비했다. 교회에 나오는 한 자매의 아버지가 군인인데, 그분이 공안에 신고해서 공안이 자주 찾아온다고 했다. 두려운 마음이 들기보다, 사도행전에서 핍박이 있는 곳에서는 복음이 더 힘있게 전해졌기에 ‘하나님이 이곳에서 일하겠다’는 마음이 들었다.

부담은 다른 곳에 있었다. 월요일 저녁부터 목요일 저녁까지 갖는 전도집회에서 말씀을 일곱 시간 전해야 한다는 것이 정말 부담스러웠다.
첫날 집회가 시작되고, 소수 민족 마을에서 온 청년 형제 자매들이 특별 찬송을 했다. 노래를 잘하지는 않았지만, 마음에서 흘러나오는 아름다운 찬송이었다. 2016년부터 베트남에서도 CLF를 시작했고, 첫 모임에 100명이 넘는 목회자들이 참석했다고 한다. 그 가운데 소수 민족을 이끄는 목회자들이 많아 그 마을들에 찾아가서 복음을 전해 많은 사람들이 구원을 받았다고 한다. 그 뒤 소수 민족 청년들이 하노이 교회를 찾아와 교류하면서 서로 가까워졌고, 내가 참석한 집회 때에도 찬송을 준비했던 것이다.
드디어 말씀을 전할 시간. 첫날이어서 죄에 대해 이야기했다. 주어진 시간이 한 시간이었는데, 준비한 것을 다 이야기하고 나니 45분이 지났을 뿐이었다. 기도하고 마친 후 2부로 그룹교제 시간을 가졌다. 베트남 형제 자매들의 간증도 듣고 상담도 하다 보니, 한 시간이 넘게 훌쩍 지나갔다.

그날 밤, 집회를 돌아보면서 나름대로 말씀을 준비했지만 내가 얼마나 부족한 사람인지를 절실히 느꼈다. 그렇다고 해서 더 이상 할 수 있는 것도 없었다.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기도뿐이었다. 베트남에 오기 전에 들었던 말씀도 계속 묵상했다. 이사야 54장 1~4절 말씀이었다. “잉태치 못하며 생산치 못한 너는 노래할지어다. … 두려워 말라. 네가 수치를 당치 아니하리라….” 말씀을 생각하면서 혼자 되뇌었다. “하나님이 노래하라고 하셨지요? 두려워 말라고 하셨지요?”
다음 시간에는 무슨 말씀을 전해야 할지 마음 졸이며 생각하고 있는데, 하나님이 가나 혼인 잔칫집 이야기를 생각나게 하셨다. 포도주가 모자랐지만 예수님이 계셨기에 전보다 더 좋은 포도주가 생겨서 그 집에 기쁨이 넘친 것처럼, 내가 준비한 것은 바닥나고 내 안에 계신 예수님이 새 포도주를 만들어 주시겠다는 마음이 들었다. 그리고 예수님의 말씀을 따랐던 하인들처럼, 주님이 내게 부어 주시는 대로 이야기하면 되겠다는 마음이 들었다.
그 마음으로 말씀을 전하니까 할 말들이 생각나고,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깊고 풍성하게 말씀을 전할 수 있었다. 주님이 내 마음에 할 말을 넣어 주신다는 마음이 들어서 정말 행복했다. 하루에 두 번 집회를 가졌는데, 말씀을 전하는 시간 외에는 ‘다음에는 무슨 말씀을 전할까?’만 생각했다. 하루 종일 말씀만 생각하다 보니 시간이 금방 흘러갔다.

집회 중간에 신축된 베트남 수양관을 방문했다. 저녁 집회를 마치고 밤에 차로 수양관으로 가서 자고, 다음날 아침에 수양관을 둘러보았다. 아름다운 별장 같았다. 주위는 산으로 둘러싸여 있고, 연못이 있고, 연못 가운데에는 누각 같은 것도 있었다. 베트남 사람들은 꽃과 나무를 좋아해서 수양관 주변은 곳곳이 정원으로 가꾸어져 있었다. 수양관은 4층 건물로 지어졌는데, 600명이 머물 수 있는 규모였다. 4층 예배당은 공연도 할 수 있게 무대가 꾸며져 있으며 복층으로 만들어서 더욱 멋스러웠다. 베트남 선교학생 열두 명이 마무리 공사를 하고 있었고, 소수 민족 형제 자매들도 와서 함께 봉사하고 있었다. 한국의 수양관이 형제 자매들의 손으로 지어졌던 것처럼, 베트남 수양관도 그렇게 지어지고 있었다. 부족한 부분들을 하나님이 채우시는 간증들도 성도들의 마음에 하나하나 채워져 가고 있었다.

집회에 참석한 사람들 가운데 소수 민족 마을에서 온 어느 가족이 있었다. 아버지와 딸은 구원받았지만 어머니는 구원받지 못했는데, 집회 중에 복음을 듣고 구원을 받았다. 그분이 집회 때 자신이 구원받은 간증을 해 더욱 은혜로웠다. 남편은 신장이 좋지 않았는데, 발가락이 부어서 걷지 못할 정도였다. 상담 시간에 그분과 교제할 기회가 있었다.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막막할 때 며칠 전에 읽었던 말씀이 떠올랐다. “주 여호와께서 학자의 혀를 내게 주사, 나로 곤핍한 자를 말로 어떻게 도와줄 줄을 알게 하시고….”(사 50:4) 하나님이 나로 하여금 그분을 돕게 하시겠다는 마음이 들었다. 박옥수 목사님이 자주 들려주시는 ‘아프지만 나았다’는 간증과 허인수 목사님이 암에서 나은 간증을 이야기했다. 형제님이 이야기를 듣고 얼굴이 밝아지고 마음에 쉼을 가져서 감사했다.

하루하루 앞이 캄캄했고, 주님께 은혜를 간구하며 종일 말씀을 생각했으며, 하나님이 돕고 나를 이끌어 주시는 것을 보았다. 그 모든 것을 합해서 보니, 내 생애에서 가장 행복한 여행이 되었다. 복음 안에 모든 것이 준비되어 있었다. 복음을 전할 때 기쁨이 충만했고, 덤으로 귀한 대접도 받았다.
교회가 이끌 때 어려움을 당할 것 같아서 피하려고 할 때가 많지만, 부딪쳐 보면 그 속에 하나님의 역사와 함께 기쁨과 감사가 들어 있다는 마음이 든다. 베트남으로 전도여행을 갈 수 있도록 나를 이끌어 주신 교회가 감사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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