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를 믿는 마음에서 벗어나
나를 믿는 마음에서 벗어나
  • 권혁천 (기쁜소식강남교회)
  • 승인 2018.11.29 09: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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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배와 질그릇

자신에게 기댈 만한 것이 있어서 하나님이 일하시는 세계에 들어가지 못했다. 하지만 사랑과 약속으로 버리지 아니하시고 돌아 올 것을 기다리시고 가르치시는 하나님이시기에 자녀로의 축복을 누린다. 아버지 품 안으로 돌아간 탕자는 아버지의 놀라운 세계를 처음으로 누리며 진정한 안식에 든다.

 

고통속에서 구원을 받기까지 

나는 어려서부터 뭔가를 만들고 그리는 것을 좋아했다. 특히 미술도 좋아했지만 뭔가 더 활동적인 전공을 하고 싶었다. 그래서 대학을 건축과로 진학했다. 대학에서 첫 강의를 들을 때 내 마음에 ‘바로 여기다’라는 확신이 들 만큼 건축은 내 마음에 맞았다. 내 꿈은 세계적으로 유명한 건축가가 되는 것이었고 이것은 하나님 앞에 기도했던 나의 소망이기도 했다. 대학교 
4학년 때는 졸업설계전에서 1등도 했고 깊이 있는 건축을 배우기 위해 대학원에도 진학했다. 건축도 중요했지만 교회 안에서 하나님을 믿는 신앙생활도 내게 중요했다. 어렸을 때부터 가족을 따라 교회를 나가면서 하나님을 향한 종교심이 있었고 교회를 설계하는 것도 관심을 가졌다. 별스런 일탈도 거의 해본 적이 없는 모범생의 이미지가 바로 내 모습이었다. 
대학원을 졸업하고 큰 설계사무소에 들어가서 다양한 설계를 접했다. 그때 한국에서 유명한 건물 설계에도 참여하면서 내가 디자인을 해서 그대로 지어진 건물들이 하나둘 생겼다. 교회 안에서 결혼도 했고, 나의 삶에는 특별히 문제될 것이 없었다. 그러던 중에 한국에 IMF 경제위기가 찾아왔다.
그 당시 나는 회사를 그만두고 프리랜서로 일하고 있었는데 IMF 상황을 기회로 삼아 큰 설계 프로젝트를 땄고, 열심히 일한 덕분에 23평 아파트의 소유주가 됐다. 결혼 후 2년 만이었다. 조금만 더 노력하면 가족들과 더 큰 아파트에서 살 수 있을 것 같아 일에 욕심을 냈다. 그런데 프로젝트가 중도에 다른 사람에게 넘어가는 일들이 생기면서 경제적으로 어려워졌고, 설상가상으로 아내와의 관계도 삐걱거리기 시작했다. 생각지 못했던 부부간의 오해와 갈등이 깊어지면서 결국 결혼 2년 반 만에 별거를 했다. 
뜻밖에 찾아온 삶의 위기를 두고 나는 하나님을 많이 찾았다. 하지만 상황은 더욱 악화될 뿐이었고 아내와 처가 식구들로부터 멸시를 받으며 내 마음의 상처도 커졌다. 내 마음에 가득 차는 분함과 미움, 얽혀버린 실타래를 어떻게 풀어야 할지 몰라서 하나님을 많이 찾았지만 아무런 답이 없는 하나님을 향해서 원망도 많이 했다. 그토록 하나님께 봉사하고 섬겼는데 내가 어려울 때 외면하는 하나님을 이해할 수 없었고 ‘하나님이 없는 것 아닌가?’ 하는 불신이 찾아왔다. 26년씩이나 교회라는 울타리 안에서 살아왔는데 도우시지 않는 하나님은 더 이상 필요 없다는 생각을 했다. 그래서 집에 있는 성경과 기독교서적을 다 쓰레기통에 버리고 슈퍼에 가서 담배 한 보루와 맥주 여섯 캔을 사들고 왔다.
여기서 좌절할 수 없다는 다짐을 하면서 나는 당시 선배의 설계사무소에 나갔다. 그리고 마음의 고통을 잊기 위해 미친 듯이 설계를 했다. 자는 시간을 빼고 계속 사무실에서 지내며 일만 생각했기 때문에 설계의 성과가 상당했다. 여의도에 지어진 39층짜리 롯데캐슬 쌍둥이 건물을 비롯해 반포3단지 전체 아파트 설계 등 아주 큰 프로젝트들을 수주했고 1999년에는 전원주택 설계로 한국건축가협회 설계상도 받았다. 기쁜 소식임에도 불구하고 그 누구에게도 말하지 않았다. 수상식 날, 상을 받고 오른손을 바닥을 향해 흔들 만큼 마음이 메말랐다. ‘이게 인생의 바닥인가?’ 하는 생각이 들고 소망 없는 하루하루를 지냈다.

죄 사함 거듭남의 비밀
한번은 사무실의 한 직원이 복사된 인쇄물을 건네더니 읽어보라고 했다. 또 하루는 ‘죄 사함 거듭남의 비밀’이라는 제목의 책을 나에게 줬다. 하지만 내 마음에서 이미 하나님을 버렸기 때문에 관심이 가지 않았다. 어느 날 그가 회사를 그만둔다는 말을 했는데, 그날 나도 모르게 처음으로 그에게 내 마음의 고통을 털어놓았다. 그의 권유로 기쁜소식강남교회의 목사님을 만났는데, 그분이 내게 “권 선생님은 형편에만 빠져 있지, 그런 형편을 주신 하나님의 본 마음은 모르고 있습니다.” 라고 하셨다. 그 얘기에 화가 나면서도 내 마음에 남아서 주일날 처음으로 강남교회를 찾아갔다. 하지만 내가 알던 교회의 모습과 달라서 마음이 가질 않았고 하나님에 대하여도 다시 마음의 문이 닫혔다.

하루는 대학교 강의를 마치고 오는데 강남교회 목사님에게 전화가 왔다. 순간 ‘나는 하나님을 버렸는데 하나님은 나를 버리시지 않는구나’ 하는 마음이 들어서 전화를 받았다. 목사님이 토요일 날, 사무실에서 성경공부를 시작하면 어떠냐고 묻는데 차마 거절하지 못했다. 그렇게 성경공부를 했는데 신기하게 말씀이 내 마음에 남기 시작했다. 가뭄 든 마른 땅이 소나기를 만나면 먼지가 일면서 비에 금방 젖어들듯이 말씀이 내 마음에 흡수되는 것을 느꼈다.  
2000년 12월 셋째 주 토요일에 복음을 듣고 드디어 구원을 받았다. 나는 스스로 죄인이라고 생각했지만 성경은 나를 의롭게 됐고 의인이라고 말씀하는 것을 알았다. 이후 겨울 수양회에 참석해 복음반 말씀을 들으면서 더 큰 충격을 받았다. 하나님이 예수님을 유일한 구원의 길로 준비해놓으신 게 창세기부터 요한계시록까지 모든 페이지에 적혀있었다. 특히 고린도후서 7장의 말씀은 내 마음에 남아 있던 미움과 증오와 고통을 다 씻어주었다.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근심은 후회할 것이 없는 구원에 이르는 회개를 이루는 것이요, 세상 근심은 사망을 이루는 것이니라.” (고후 7:10)
수양회에 다녀와서 교회 성도들 앞에 간증했다. 구원받은 후 형제자매들이 스스럼없이 자기의 어려웠던 경험들을 이야기하는데 나는 비교도 안될 만큼 파란만장했다. 그 이야기들을 듣는데 내 마음이 자유로워졌다. 하나님이 나를 구원하시려고 내 인생을 이렇게 인도하셨다는 것이 정말 감사했다. 

구원을 받고 다시 시작한 교회 건축
나는 구원받기 전에 교회를 설계하며 마음에 큰 상처를 받은 적이 있었는데 구원을 받고 마음이 밝아지면서 교회 일에 긍정적인 관심을 다시 갖게 되었다. 당시 강남교회는 강남구에 있다가 양재동으로 옮겨 교회를 지으려고 하는 상황이었다. 그때 나는 강남교회보다 20배 정도 큰 규모의 건물을 설계하고 있었는데 마음에서 자꾸 충돌이 일어났다. 내 마음에 ‘사람들의 욕심을 만족시켜 주는 설계를 하면서 살고 싶지 않다. 하나님이 나를 구원하시고 귀한 복음을 주셨는데…, 딱 1년 만 나의 시간을 드리자.’ 하고 결심했다. 그래서 2001년 회사를 사직한 후 지금 강남교회의 터 위에 컨테이너를 갖다놓고 그 안에서 교회 설계를 시작했다.
교회의 건축부지는 일 년 내내 소음이 들리는 경부고속도로 바로 옆이었고 내 견해로는 이곳에 건물을 짓는 것이 적합하지 않다고 생각했다. 건축을 하려는 부지부터 내 생각과 부딪쳤다. 정상적인 프로세스를 따라 건축이 진행되어야 하는데, 마치 배수진을 친 듯이 무모한 걸음으로 진행하는 것 같아 실무자로서 너무 불안했다. 그런데 교회는 그 땅을 믿음으로 구입했고 나는 그런 결정이 신기했다. 또 교회의 형제, 자매들이 자기를 아끼지 않고 물질을 드려 땅을 구입하고 건축비 작정을 하는 것을 보고 ‘이 믿음의 세계가 도대체 무엇일까?’ 하는 강한 호기심을 갖게 됐다. 당시에 내가 자주 들었던 소리가 “권 형제는 좋은 사람이지 믿음의 사람은 아니다.”라는 말이었는데, 이 뜻이 무엇인지는 잘 몰랐지만 나도 믿음의 사람이고 싶었다. 

강남교회 부지는 1997년에 이미 건축허가와 착공허가까지 받았으나 사업체가 부도나면서 공사가 중지된 곳이었다. 그 땅 지하에 2,400명이 들어가는 예배당을 설계하는 것은 실로 어려운 작업이었다. 설계사무소에서도 이 정도 규모의 예배당을 극장식으로 설계하는 경우는 아주 드물고 나 또한 거의 처음이었기 때문에 두렵고 떨리는 마음이 컸다. 게다가 교회의 위치가 경부고속도로변에 있어 부담감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흙막이 공사를 시작하고 굴토를 하면서 설계의 틀이 조금씩 잡혀갔고 아울러 건축부지 옆에 있는 땅도 주차장 부지 목적으로 구입했다. 그리고 설계도서를 작성하여 구청과 협의를 시작했다. 
나는 일이 잘 될 것으로 확신하고 진행을 했는데 구청과의 협의는 쉽지 않았다. 서울 도심의 입구에 위치한 부지라서 구청에서 개발을 제한하고 있기에 건축이 불가한 상황으로 흘러갔다. 2003년에 하나님이 나에게 한계를 뛰어넘는 선택을 하게 하셨는데, 에스더처럼 죽으면 죽으리라는 마음으로 건축공사를 재개했다. 그때는 현장에서 설계를 해가면서 공사를 했다. 수많은 의사결정들이 부담스러웠지만 교회가 믿음으로 지원해줬고 나는 설계하면서 참 행복했다. 많은 형제 자매들이 같은 마음으로 밤 11시까지 함께 건축을 진행했고 또 전국의 많은 교회로부터 지원도 받아 건축이 신속하게 진행되었다. 마침내 2003년 12월 23일에 기다렸던 헌당 예배를 크리스마스 칸타타 공연과 함께 새 예배당에서 드릴 수 있었다. 

선교학교에 들어가다
강남교회 건축이 끝나고 그곳에서 처음으로 IYF 월드캠프가 열렸다. 행사준비를 돕다가 갑자기 내 자신을 생각해보니 조급한 마음이 들었다. 나의 대학동기들, 선배들이 박사코스를 밟고, 유학을 가고, 내가 볼 때 잘 나가는 것 같았다. 나도 늦기 전에 내 진로를 찾아야했다. 특히 강남교회 건축 때문에 직장도 그만뒀기 때문에 더 조급했다. 그래서 찾아간 모교의 지도교수님이 지방대학교의 교수 자리를 추천해주셨고, 일이 잘되어 서류전형만 남겨 놓고 있었다. 그런데 크리스마스 칸타타 공연을 준비하느라 중국 베이징에 있을 때, 하필 학교에 지원서류를 내라는 연락이 왔다. 서류는 당일까지 제출해야 되는 것이어서 결국 무산됐다. 이후 교수님이 또  한번 추천을 해주셨지만 그때도 어쩔 수 없이 기회를 놓치는 일이 생겼다. 
교회를 건축했고, 내 앞날도 잘 풀려야 되는데 형편은 그렇지 않았다. 그래서 ‘모든 것을 교회만 의지할 수는 없겠다.’ 하는 생각으로 은밀하게 나의 장래를 도모했다. 그런데 하는 것마다 다 걸리고 안 되었다.  ‘도대체 날더러 어떡하라는 거야? 어떻게 해야 하지?’ 

그 즈음 수양회 기간이었다. 수양회에서 남미 신재훈 선교사님이 그룹교제를 하는 자리를 우연히 지나가다 어떤 말씀이 내 귀에 크게 들렸다.   “네 마음으로 죄인의 형통을 부러워하지 말고 항상 여호와를 경외하라 정녕히 네 장래가 있겠고 네 소망이 끊어지지 아니하리라” (잠 23:17~18)
“네 마음으로 죄인의 형통을 부러워하지 말고” 하는데 지나가는 내 걸음을 멈춰 세웠다. 그때 죄인의 형통을 부러워 어쩔 줄을 몰라 하는 내 마음이 들켜버렸다. 수양회를 마치고 신재훈 선교사님을 찾아갔고 왜 그 말씀을 하셨는지 질문을 했다. 선교사님은 그 말씀이 고등학교 때 하나님께 받은 말씀이라고 얘기하시면서 그 말씀을 통해 선교사의 길을 가게 되었다고 했다. 선교사님이 ‘지난 삶을 돌아보니 사역을 잘하든 못하든 한 나라의 선교를 위해 사니까 이제는 친구들이 오히려 부러워하는 사람이 되어있다’며 하나님께 감사를 드렸다. 선교사님과의 교제가 많은 생각을 하게 했다. 이후 잠언 23장 17~18절이 나에게는 “너 죄인의 형통이 부러워서 어쩔 줄을 몰라 하는데 너 나 한번 경외해봐. 그러면 네 장래가 있겠고 네 소망이 끊어지지 않아. 나는 창조자야.”라고 들렸다. 
당시 나는 강남교회 뒷마당에 컨테이너를 두고 설계작업실로 쓰고 있었는데, 거기에서 선교학교 강의가 있는 2층 교실이 잘 보였다. 하루는 점심을 먹으면서 전도사님께 “선교학교에서는 무슨 강의를 합니까? 여호와를 경외하는 특강 같은 건 안합니까?” 하고 물었다. 선교학교에는 별도의 교재를 가지고 심도 깊은 강의가 있을 것 같았다. “저 한번 그냥 들어봐도 돼요?” 궁금해서 한번 정도는 들어보고 싶었다. 
주일날 예배를 마치고 엘리베이터를 탔는데 마침 박옥수 목사님과 김성훈 목사님이 계셨다. 박 목사님이 아주 기쁜 얼굴로 내게 “권 형제 선교학교 가고 싶다며?” “여기 선교학교 교장선생님 있으니까 허락받아.” 하시면서 내리셨다. 나는 심장이 멎는 줄 알았다. ‘아니, 내가 언제 선교학교 간다고 그랬나? 그냥 한번 들어보고 싶다고만 했는데. 갑자기 선교학교 입학이 무슨 말이지?’ 그래서 바로 전도사님을 찾아갔다. “전도사님, 도대체 어떻게 얘기를 하신 거예요?” 전도사님은 “선교학교 수업을 들어보고 싶다는 마음은 절대로 사단은 주지 않습니다.” 하시면서 가버리셨다. 한동안은 그 상황을 수습해보려고 애쓰다가 ‘하나님이 나를 이 길로 이끄시나보다.’라는 마음이 들어 선교학교에 입학했다. 첫 수업이 일주일 금식하면서 성경을 한번 통독하는 것인데 나는 엄청난 충격을 받았다. 성경은 예수님에 대하여 첫 페이지부터 마지막 페이지까지 다양한 방식으로 숨겼다 드러냈다 하는 것이었다. 글로 써진 내용의 답이 하나로 딱 귀결되어 떨어진다는 게 매우 수학적이고 완벽했다. 그렇게 1년 간 훈련을 받았다. 마칠 즈음에, 내가 앞으로 설계할 때 영적으로 밝으면 좋겠다 싶어서 박 목사님이 훈련을 시키기로 결정하셨다는 것를 장로님을 통해 들었다. 

영적으로 밝은 건축
‘영적으로 밝은 건축이라, 그것은 과연 무엇일까?’ 

이후 나는 선교의 길을 가지 않고 자유롭게 건축설계 활동을 계속했다. 그때 조그만 설계사무소를 만들어 선교회 안에 있는 다수의 교회 건물들을 설계했다. 강릉교회, 대전 한밭교회, 대구, 천안, 울산, 전주, 인천교회 등과 같이 큰 교회뿐만 아니라 작은 평수의 지역교회들도 대부분 설계했다. 교회 건축설계뿐만 아니라 디자인이 필요한 대전도집회 무대, 컬처행사, IYF 월드캠프 무대들도 많이 작업했다. 그러던 중 뜻밖에 미국 메디슨 스퀘어가든 성경세미나를 참석했는데, 그때 미국 마하나임 건물의 단열문제를 조사하다가 결국 단열공사까지 맡게 되어 3개월을 미국에서 지냈다. 한국에 돌아와 우연히 광주송정교회를 방문했는데 그날은 교회가 들어설 건물의 대수선허가를 받은 날이었다. 내가 한창 미국에서 공사중일 때 박 목사님이 광주송정교회 목사님에게 “대수선허가를 먼저 받으면 그때 설계하는 형제 보내줄게.”라고 말씀하셨다는데 나만 우연히 갔을 뿐, 대수선허가를 받은 날에 내가 도착한 것은 하나님 안에서는 딱 맞춰진 예정된 일이었다. 10일 가까이 송정에 머물며 교회설계를 모두 마쳤다. 
서울에 올라오니 선교회 영상선교부로부터 케냐 방송국 디자인을 해달라는 부탁과 케냐에 같이 가자는 제안을 받았다. 케냐를 갈 상황이 안 돼 거절을 하다가 계속된 부탁으로 딱 3주 일정으로 케냐를 방문했다. 그런데 막상 시작해보니 아프리카는 3주 안에 일이 되는 곳이 아니었다. 결국 내 의사와 상관없이 케냐에서 6개월을 지내며 방송국뿐만 아니라 케냐교회를 건축하는 일도 참여하게 되었고 그러면서 나는 아프리카 사람이 다 되어버렸다. 
방송국 설치를 모두 마치고 한국에 돌아왔는데 당시 사무소에서 설계를 돕던 두 명의 직원들이 경제적인 문제라 마음고생을 심하게 하고 있었다. 순간 기분이 상해버렸다. 나는 해외에서 하나님을 위해 일을 하고 돌아왔는데 한국의 사무소는 어려움 속에 있는 것을 보자 하나님이 원망스러워졌다. 하지만 선교회 안에 하나님이 일하시는 것이 분명히 보였기 때문에 견디는 마음으로 건축설계 일들을 계속해갔다.   

마음이 한계에 부딪치다 
결국 내 마음은 한계에 부딪쳤다. 2010년에 나는 더 늦기 전에 건축사 국가고시 시험을 봐야 하는데 선교회 일들이 중첩되다 보니까 마음에서 이것을 나눌 만한 힘이 없었다. 문제가 있을 때 그것을 목사님께 들고 나가서 상의하면 풀릴 수 있는데 그때는 그런 마음이 만들어지지도 않았고, 내가 해야 한다는 의무감이 더 컸었다. 그러다 보니까 몸도 마음도 한계에 부딪칠 수밖에 없었고 결국 마음이 죽어버렸다. 그러다 어느 날 목사님 앞에 갔다. 늘 도면만 들고 나가다가 그 날은 상할 대로 상한 내 마음을 들고 나갔다.
“목사님 제가 오늘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더 이상 설계를 못하겠습니다.” 
“설계를 하기 싫은가?” 
“하기 싫은 게 아니라 더 이상 할 마음이 일어나지 않습니다. 마음이 즐겁지 않고 다 방전됐습니다.” 
목사님은 나를 빤히 쳐다보다가 의자를 뒤로 빼면서 내게 말씀하셨다. 
“권 형제. 왜 이제 왔어? 진작 왔어야지.” 
그 말은 나에게 쇼크였다. 내가 복음의 일을 한다고 생각하고 어려움을 견디며 긴 시간을 보냈는데 목사님은 내게 ‘진작 왔어야지.’라는 예상과 전혀 다른 말씀을 하셨다.
“권 형제, 이거 쉬운 거야. 권 형제가 신앙을 대충대충하니까 어려운거야.”  그 얘기를 듣자마자 내 마음에서 화가 났다. 
“목사님, 저는 대충하지 않았습니다. 이것은 제게 아주 치열한 문제입니다. 가족에게 복음을 전해도 잘 되지 않고, 또 목사님이 해주신 말씀을 받아서 믿음으로 발을 내딛으면 한두 번 되다가도 그 다음에는 잘 안되고, 도대체 믿음의 길을 어떻게 가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제가 볼 때 이것은 아무리 봐도 로또입니다. 제가 주변의 사람들을 봐도 다 똑같은 마음들을 갖고 있는 것 같습니다.”
목사님은 큰소리로 내게 다시 말씀하셨다. 
“아니야. 그렇지 않아! 권 형제는 예수님을 안 믿어서 그래.” 
나는 다시 화가 났다. 
“목사님, 그럼 도대체 얼마나 믿어야 됩니까? 목사님만큼 믿어야 됩니까?” 
목사님은 내게 다시 말씀하셨다. 
“권 형제의 문제는 예수님을 안 믿어서 그래. 굉장히 쉬운 거야. 잘 들어봐. 권 형제 구원받았지? 혹시 ‘내가 구원 안 받은 건 아냐?’ 하고 의심해본 적 있어? 없지? 그래. 구원의 세계는 형편이 바뀌어도 변하는 게 아니야. 신앙의 세계도 구원의 세계하고 똑같아. 권 형제가 부모님께 복음을 전해보려고 노력하니까 돼? 믿음으로 살아보려고 애써보니 돼? 안 되잖아. 권 형제가 하는 게 끝이 나야 하나님이 권 형제를 위해 일할 수 있어. 이것은 구원하고 똑같아. 권 형제가 죄를 안 지으려고 노력하는 동안에는 구원을 받을 수가 없어. 이것이 사람의 힘으로 안 되는구나. ‘우리는 죄에 갇혔구나’ 하고 마음에서 끝이 났을 때 그때 예수님이 우리의 죄를 다 씻었다는 소식이 드디어 우리의 마음에 올 수 있는 거야. 그게 구원이야. 신앙의 세계도 똑같아. 앞으로 권 형제가 자기 생각과 말씀을 놓고 따져보고 나누어야 돼. 거기서부터 시작해봐.” 
그때 내 눈에 불이 들어왔다. 안 되는 것을 내가 알았다. 해봤으니까. 그래서 목사님의 말씀을 듣고 내가 하려는 마음을 처음으로 내려놓았다.
“목사님, 저 건축사 공부하고 싶습니다.” 
목사님은 진행 중이던 프로젝트들을 안 해도 되도록 정리해주고 건축사 시험공부를 할 수 있도록 길을 열어주셨다. 그래서 열심히 공부했고 2년 만에 건축사자격을 취득했다. 
목사님과의 교제 이후 나는 부모님께 복음을 전하려는 것도 내려놨고 그냥 큰아들로 돌아갔다. 예전에는 전투적인 이념가처럼 가족들하고 싸웠는데 다 내려놓았고 동생에게는 형으로, 누나에게는 남동생으로 돌아갔다. 그때 마침 동생이 자기 집을 설계해달라고 부탁해서 판교에 근사하게 집을 설계해줬고 그 일로 동생하고 많이 가까워졌다. 

이후 케냐 방송국의 소개로 아프리카에 뜻밖의 길이 열리게 되었다. 케냐 나이로비에서 가장 큰 사파리파크 호텔이 있는데 그곳으로부터 컨벤션센터 디자인을 제안 받았고, 그 일로 케냐를 방문했다가 덜컥 현지 회사를 설립하게 되었다. 케냐의 호텔 측으로부터 앞으로 같이 일하자는 제안을 받아 아프리카에서 새로운 인생의 도전을 하게 되었다. 

아프리카 케냐, 성공을 위해 간 그곳은 누가복음 15장의 ‘먼 나라’였다
건축가로서 성공의 꿈을 품고 새롭게 도전한 아프리카 케냐, 그곳은 당시 내 마음에서 가나안땅이었다. ‘나는 안 되지만 주님이 하면 된다’는 믿음으로 굉장히 대담하게 많은 일들을 했다. 초반에는 일들이 잘 되어갔다. 사파리파크호텔에서 의뢰받은 프로젝트들은 모두 좋은 결과를 내었고 그런 일들이 KICC(케냐국제회의장) 같은 정부기관에 소개되면서 정부와 같이 일하는 기회가 생겼다. ‘진짜 하나님이 돕는구나! 이게 믿음의 세계로구나!’ 하는 확신이 들었다. 이후 정부기관과 더욱 가까워지면서 그들로부터 관급공사를 맡기 시작했다. 
2015년에 WTO(세계무역기구) 총회행사를 케냐가 유치하게 되었는데, 행사의 가장 중요한 공사를 정부로부터 받았다. 이 또한 하나님이 내게 길을 열어주신 것으로 믿었다. 그런데 행사를 한 달 앞두고 경영진들이 비리혐의로 대부분 경질되고 공사비 지급이 정지가 됐다. 아니나 다를까 행사 후에도 참여했던 모든 업체들이 공사비를 하나도 지급받지 못했다. 부정부패조사가 끝날 때까지는 정부가 지급을 정지한다는 것이었다. 상당한 공사잔금을 못 받으면서 일들이 어려워지기 시작했다. 케냐의 무슬림 연립주택도 설계하고 공사를 진행해왔는데 자금난 때문에 중지되었고 분쟁도 커져갔다. 아침에 눈 뜨기 싫을 만큼 힘든 날들이 많았다. 어떤 날은 하나님이 안 도우신다 싶어서 마음이 서러워져 한없이 울었다. 사람들에게 일이 잘된다고 내 입으로 말한 기억이 생생하게 나는데, 이런 어려움에 빠지니까 사람들 보기가 부끄럽고 힘들었다. 

2017년 7월에 케냐에서 월드캠프가 열렸다. 나는 그때까지도 이런 어려움에 계속 시달리고 있었다. 박 목사님이 월드캠프에 참석하기 위해 케냐에 오시고 행사 첫 날 저녁에 나는 목사님과 교제할 수 있는 시간을 갖게 됐다. 목사님 앞에서 나도 모르게 이 한마디가 나와 버렸다.
“목사님, 제가 지쳤습니다.”
목사님은 더 이상 얘기를 안 들으시고 말씀하셨다. 
“권 형제, 내가 말을 끊어서 미안한데 왜 성공을 복음 바깥에서 찾아? 형제들이 내 말을 무시해. 그러면 내가 어떻게 이끌어줘?”
그때 내 마음이 무너졌다. 사실 ‘말을 무시하는 형제’가 바로 나였다. 당신의 말을 듣지 않는 안타까운 마음을 내게 말씀하시는데 그것은 목사님의 진심이었다. 
“나 봐. 하나님이 돕는 것 보잖아. 나는 복음을 듣고 목사가 되려고 하지 않았어. 다만 복음을 전하다보니 하나님이 나를 목사로 세우시고 오늘까지 도우셨어. 대통령들이 나를 만나고 싶어하고 땅을 주려고 해. 권 형제, 이제 복음만을 위해 살아. 그럼 하나님이 권 형제를 나처럼 만 가지로 도우실거야.”
목사님은 이어서 내게 잠비아에 가서 건축학교를 시작하고 거기서 학생들을 가르치라고 말씀하셨다. 그 다음날 나는 목사님을 다시 찾아가서 질문을 드렸다. 
“목사님, 복음만을 위해 살라고 말씀하셨는데 어떻게 하는 게 복음만을 위해 사는 건지 다시 듣고 싶습니다.” 
그런데 목사님은 아무런 말씀을 안 하셨다. 내가 말을 잘못했나 싶어서 몇 시간 후에 같은 질문을 다시 드렸다. 그런데 여전히 목사님은 말이 없으셨다. 답답한 마음에 나이로비교회 목사님과 오늘 있었던 일을 얘기하는데 갑자기 내 마음에 불이 들어왔다. 복음만을 위해 살라 하시고 그 방법으로 내게 잠비아에 가서 건축학교를 하고 학생들을 가르치라고 이미 말씀해주셨는데 나는 ‘복음만’이라는 단어에 속아 또 다른 생각 속에 있었다. 그 날 내 마음이 목사님의 마음과 전혀 다른 곳에 있음을 발견했다. 

아버지 품 안의 안식에 들어간 탕자처럼

케냐에서 지낸 5년 동안 나는 열심히 일해 온 결과를 똑똑히 보았다. 그것은 누가복음 15장의 탕자가 간 먼 나라에서의 삶이었다. 누구보다도 잘 아는 이야기이건만 정작 그 위치에 있게 될 줄은 생각도 못했다. 나는 말씀에서처럼 내 분깃을 갖고 내 생각에 보기 좋은 성공을 찾다가 실패했다. 목사님과의 교제 후 나는 마음을 정했다. 남은 인생이 얼마나 주어질지 모르겠는데 그 시간을 목사님이 말씀하신 방향으로 한번 가보고 싶어졌다. 저 분의 말씀을 들어야겠다는 마음이 내 중심에서 일어났다. 케냐에서 목사님은 내게 분명한 결론을 내주셨다. 복음 바깥에는 성공이 없다고 말이다. 그 후 나는 케냐에서의 일과 사업을 내려놓고 목사님이 가라고 하신 잠비아로 향했다. 그 다음부터 내게 놀라운 일들이 시작됐다.
잠비아를 가려고 케냐공항에서 비행기를 기다리는데 새벽에 박 목사님의 전화를 받았다. 목사님이 전화를 주셔서 “잠비아에 가게 되면 시간 내서 도미니카를 한번 다녀오게.”라고 하시고 IYF 활동을 적극 도우시는 도미니카 산티아고 전 시장님을 만나서 해야 할 일들을 설명해주셨다. 잠비아에 도착한 후 도미니카를 갈 계획을 알아보는데 여건이 거의 불가능했다. 관광비자로 잠비아에 들어왔기 때문에 미국 비자를 신청하는 데 문제도 있었고 또 거대한 허리케인이 도미니카에 다가오고 있었다. 그런데 발을 내딛으니까 안 될 것으로 여겼던 미국비자도 받고 또 도미니카를 가는 비행기도 태풍이 도착하기 전에 안착할 수 있었다. 정말 받은 마음으로 길을 나서니까 말씀대로 되는 것을 보았다. 도미니카에서 전 시장님을 만나 음악학교를 설립하는 부분을 상의하고 아울러 전 시장님이 추진하는 5성급 호텔 건축의 설계를 부탁받았다.

잠비아에 돌아온 후 나는 광고를 통해 모인 건축학교 지망생들을 만났다. 이미 마인드교육 중이었고 그날부터 학생들과 면담하고 또 이들을 어떻게 가르쳐야 할지를 잠비아 목사님들과 상의했다. 그렇게 해서 38명의 학생들을 뽑아서 입학식을 거쳐 건축계획, 건축시공, 건축구조, 그리고 성경과 마인드교육 과정을 가르치기 시작했다. 예전에 대학에서 건축 강의를 해본 것이 큰 도움이 됐다. 건축학교는 본격적으로 건축이 진행되는 시공현장에서 진행되었다. 현장에 교실을 만들고 오전 수업과 오후 실습으로 운영했다. 실습을 할 수 있는 건축현장이 눈앞에 있으니까 학생들의 마음자세도 달라지고 또 교제를 통해서 학생들이 모두 구원을 받았다. 학생 중 3명은 이미 태국 IYF센터 건축현장에 가서 공사를 돕고 있고, 건축학교 학생들이 점점 IYF센터 건축의 주체가 되고 있다. 학교 이름도 박 목사님을 통해 벧엘 건축학교로 정해졌고 조만간 이들은 에스와티니에 보내져 건축을 지원하게 된다.   

말씀의 씨가 심겨질 수 있는 열린 건축으로 복음의 지경이 넓어져
에스와티니는 음스와티3세 국왕이 목사님을 통해 복음을 들으시고 마음을 열어 이미 IYF에 10헥타르(약 3만250평)의 땅을 기증하셨다. 그곳에 IYF센터를 설계하는 일에도 하나님이 놀라운 일들을 보여주셨다. 나는 에스와티니 IYF센터를 설계할 때 박 목사님이 ‘공원처럼 만들자’고 하신 한 마디를 품고 디자인을 시작했고 국왕과 목사님이 앞으로 지어질 IYF 센터를 실감할 수 있도록 동영상 작업도 했다. 이 일로 목사님과 같이 국왕께 직접 건축보고도 드렸는데 국왕께서는 무척 기뻐하며 기공식에 정부의 주요 인사와 귀빈도 보내주셨다. IYF센터 건축은 에스와티니 국가의 기쁨이 되었다. 내년 1월부터 에스와티니 IYF센터 건축이 시작될 예정이다.  
그 뿐만이 아니다. 캄보디아 월드캠프 중에도 목사님은 IYF를 물심양면으로 돕는 벨티그룹의 회장님을 소개해주셔서 벨티대학교 건축 설계를 할 수 있도록 내게 기회를 열어주셨다. 최근에 캄보디아를 방문하여 벨티대학교의 새 건축부지를 보고 왔다. 현재 대학교의 설계를 진행 중인데 목사님께서는 앞으로 캄보디아에 건축할 일이 많다고 하며 건축학교 학생들을 보내자고 하셨다. 이렇게 내 안에서는 생각할 수 없는 일들이 일어나는 것을 보며 하나님의 종의 인도 안에 있는 것이 얼마나 감사한 것인지 배웠다.  

불과 몇 달 전만해도 나는 깊은 슬픔 가운데 있었는데 박 목사님의 말씀을 받아들인 것 하나가 내게 기쁨을 주고 큰 소망을 일으키고 있다. 나같이 자신을 신뢰하느라 인생을 많이 허비한 사람이라도 나를 내려놓으니까 정말로 예수님이 길이 되시는 것을 본다. 박 목사님이 수도 없이 전선과 전선이 연결되면 전기가 흐르듯, 하나님의 마음과 연결된다면 하나님의 능력이 우리에게 흐른다고 말씀하셨는데 나는 그것을 애써 무시했다. 흘러 받아야 사는 세계에서 나는 내 것으로 굶주리며 살았다. 굶고 또 아파보니 비로소 박 목사님의 진심을 알게 됐다. ‘왜 내 말을 무시해? 그러면 내가 어떻게 이끌어줘?’ 하셨던 말씀은 이론도 아니었고 마음과 마음이 연결되기를 바라시는 예수님의 마음이었다.
지난 9월에 피지와 키리바시를 다녀왔다. 피지의 경우 국민의 대다수를 차지하는 감리교회가 우리 기쁜소식선교회가 전하는 복음을 듣고 우리도 성경으로 돌아가자며 선교회 목사님들을 초청해서 말씀을 듣기 시작했다. 기쁜소식선교회를 닮고 싶어 큰 예배당과 음악학교를 세우기 위해 내게 건축 컨설팅을 요청해 왔다. 참, 별일을 다 본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우리 교회만 세웠는데, 이제는 모든 나라에 말씀의 씨가 심겨질 수 있는 열린 건축으로 복음의 지경이 넓어져가는 것을 본다. 내가 이런 일에 쓰임을 받는 것은 크나큰 영광이 아닐 수 없고 이런 길로 이끌어 가시는 예수님과 당신의 종 앞에 찬송과 감사를 드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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