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5년 전 학교 친구들이 지금은 복음을 섬기는 자가 되어
35년 전 학교 친구들이 지금은 복음을 섬기는 자가 되어
  • 김도현(아르헨티나 부에노스아이레스교회 선교사)
  • 승인 2019.01.31 19: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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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교사 수기 제 1화
2019년 1월호

 

어릴 때부터 삶에 대해 걱정이 많았던 김도현 선교사는 교회가 없는 시골 마을에서 자랐지만 자연을 보며 하나님의 존재를 생각했다.
사춘기 때에는 죄를 인식하면서부터 멀리 있는 교회까지 걸어다녔는데 죄의 문제가 해결되지 않아 괴로웠다.
고등학생 시절 선배에게 복음을 듣고 당시 서울제일교회에 다니며 말씀에 젖어 행복한 시간을 보냈다.
그 시기에 구원받은 학교 동료들과 함께 복음을 전하며 지냈고, 그 친구들이 지금은 각기 다른 곳에서 복음을 섬기며 살고 있다.
35년 전 이야기다.

 

인생에 대해 고민이 많았던 아이
나는 1968년 7월 16일 전라북도 옥구군 회현면 증석이라는, 만경강 하구 자락에 농지가 한없이 펼쳐진 옥구평야의 한 시골 마을 끝에 있는 외딴집에서 가난한 농부의 5남매 중 막내아들로 태어났다. 우리 부모님은 또래 아이들의 부모님보다 연세가 많으셨는데, 어릴 때에는 인식하지 못하고 지냈다. 열 살쯤 되었을 때 아버지가 환갑이어서 조퇴하겠다고 선생님께 말씀드리자 반 친구들이 모두 웃는 것을 보고 그 사실을 알았다. 부모님은 늦게 얻은 아들이라서 나를 귀하게 키우셨다.
사람들은 나를 애늙은이라고 했다. 어린아이답지 않게 걱정이 많았고 생각이 많았기 때문이다. 넉넉지 않은 가정형편에 고생하시는 부모님의 모습을 보면서, 내가 스무 살이 되면 아버지는 일흔이시고 내가 도움이 필요할 때 나를 도울 수 있는 사람이 아무도 없다고 생각하니 다른 친구들처럼 마냥 뛰어놀 수 없었다. 인생에 대한 고민이 너무 일찍 와버렸던 것이다. 부모님도 아직 살아 계시고 형님과 누님들이 계셨지만 세상에 나만 덩그러니 남아 있는 것 같아서 불안한 미래에 대해 늘 걱정하며 살았다.

내가 회개한 죄가 사해졌다는 확신을 갖고 싶었지만
부모님은 종교를 갖지 않으셨고, 고향에는 교회나 어떤 종교 건물이 없었던 터라 나는 하나님에 대해서 듣지 못하고 자랐다. 그런데 나는 누가 가르쳐 주지 않았지만 매일 변하는 하늘, 붉게 물든 저녁노을 등 자연을 보고 자라면서 하나님이라는 분이 존재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중학생이 되어서는 사춘기에 접어들면서 죄에 대해 양심의 가책을 받기 시작했다. 그리고 위선적인 내 모습을 보면서 교회에 다녀야겠다고 생각했다. 죄를 씻고 싶은 마음이 커서 멀리 있는 교회까지 걸어서 다니기 시작했다. 중학교 3학년 때에는 한 친구가 고등학교에 진학에 필요한 체력장 시험을 준비하며 오래달리기를 하다가 쓰러지는 일이 있었다. 응급차에 실려 갔지만 결국 심장마비로 죽는 것을 보면서 내 영혼의 구원 문제에 대해 더욱 의문을 가졌다.
시골 교회에서는 농한기인 겨울철에 외부 강사를 초청해서 부흥회를 가졌다. 부흥회에서 사람들은 성령을 받으려고 박수를 치며 찬송을 부르고 뛰었다. 나도 성령을 받고 싶어서 따라해 보고, 내가 회개한 죄가 사해졌다는 확신을 가져 보려고 새벽부터 밤까지 나름대로 목이 쉬고 눈이 붓도록 부흥회에 참석해 보았다. 하지만 아무런 확신을 갖지 못했다. 다른 사람들은 성령을 다 받았다고 하는데, 나는 받지 못해 허탈한 마음으로 집에 돌아오곤 했다. 찬송가 257장에서 “금이나 은같이 없어질 보배로 속죄함 받은 것 아니요 거룩한 하나님 어린 양 예수의 그 피로 속죄함 얻었네”라고 노래하지만 내 마음에는 여전히 죄가 남아서 고통스러웠다.

학교생활과 종교생활에 회의를 느끼다
서울에서 고등학교에 다니는 중학교 선배의 소개를 받아, 서울 강남구 개포동에 위치한 한국전력 산하의 특수목적고등학교인 수도전기공업고등학교 입학시험에 응시했다. 시험에 합격하여 1984년부터 연고자가 아무도 없는 서울에서의 삶이 시작되었다. 우리 학교는 전국에서 모인 학생들이 전액 장학금을 받고 단체생활을 하는 규율이 아주 엄격한 학교였다.
나는 막내아들로 태어나서 한 번도 매를 맞아 본 적 없이 자랐는데, 학교에서는 매일 이유도 없는 벌을 받고 매를 맞았다. 음악의 매력에 끌려 학교 브라스 밴드부에 들어갔는데 매일 새벽, 점심시간, 방과 후부터 저녁까지 반복되는 연습이 무척 힘들었다. 거기에다 적응이 안 되는 기술 교육, 밤마다 시작되는 폭력 등은 학교생활에 대한 회의와 갈등을 더 크게 느끼게 했다. 토요일 오후부터는 외출과 외박을 나갔는데, 나는 여러 교회를 찾아다니면서 예배에 참석했다. 그러나 죄의 문제를 해결받지 못하고 구원의 확신도 갖지 못해 종교생활에도 회의를 느꼈다.

 

 

내 죄가 영원히 씻어진 사실을 들었다
고등학교 1학년이 끝나갈 무렵인 11월 어느 날, 기숙사에 한 선배가 찾아왔다. 기숙사 생활 규칙상 밤 7시에는 무조건 책상에 앉아 있어야 했는데, 그 선배는 규율을 어기면서까지 우리 방 동료에게 성경 이야기를 했다. 소곤거리며 이야기하는 것이 나에게도 다 들렸다. 선배는 다음날도 그 시간이면 찾아와 이야기하고 갔다. 며칠을 그렇게 찾아와 이야기하다가 마지막 날에는 방 동료가 구원받았다고 이야기했다. 그 말이 내 귓전에 계속 맴돌았다.
나는 마음속으로 ‘구원을 어떻게 그렇게 쉽게 받지? 수십 년을 노력해도 안 될 것 같은 구원을 성경에 있는 몇 마디 말씀을 듣고 쉽게 받는다면 나도 받을 수 있겠다.’는 마음이 들었다. 그리고 이번 기회를 놓치면 구원받을 수 있는 기회가 다시 오지 않을 것 같아서 교제를 마치고 가는 선배에게 용기를 내어 다가가 이야기했다.
“선배님, 방금 제 친구에게 한 이야기를 저에게도 해 주십시오.”
선배는 미소를 지으며 나에게 물었다.
“너, 마음에 죄가 있냐?”
“예, 죄는 많이 있습니다.”
그때부터 선배는 나에게도 성경에 대해 하나하나 차근차근 이야기하며 죄와 회개와 복음에 대해 전해주었다. 삼일 째인 1984년 11월 14일 밤 12시쯤 “염소와 송아지의 피로 아니하고, 오직 자기 피로 영원한 속죄를 이루사 단번에 성소에 들어 가셨느니라.” 히브리서 9장 12절 말씀을 들으면서 내 죄가 영원히 씻어진 사실을 처음 알았다. 내가 이미 깨끗해졌고 구원받은 사실을 확신할 수 있었다.

 

내 마음에 없었던 기쁨과 소망과 감사를 만들어내었다
알고 보니, 우리 학교에는 1년 선배인 오효근 학생이 시골에서 복음을 듣고 학교에 입학하면서 한두 명씩 전도하여 모임을 형성하고 있었다. 그렇게 하여 복음을 들은 학생들이 20~30명이 되었고, 그 가운데 6~7명이 당시 서울제일교회 예배에 참석하고 있었다.
나는 구원받은 주 금요일에 구역예배에 초청받아서 학교 운동장 옆에 있는 정원으로 갔다. 추운 날씨에도 불구하고 20~30명의 학생들이 둥그렇게 모여 앉아 찬송을 부르고 간증하고 성경 이야기를 하는데, 그렇게 힘이 날 수 없었다. 모임을 마치고 돌아오면서 ‘초대교회의 예배가 이런 것이 아니었을까?’ 하는 마음이 들었다.
그 주일에는 복음을 전해준 선배의 인도로 서울 삼성역 근처에 위치한 서울제일교회에 갔다. 내가 그동안 가보았던 교회들과는 전혀 다른 모습이었다. 교회가 건물 이층에 있고, 화장실도 변변찮고, 의자도 없어 바닥에 빨간 방석이 깔린 초라한 모습이었다.
그곳에서 처음으로 박옥수 목사님을 뵈었다. 구원받고 난 후라서 모든 것이 신기했지만, 다른 교회에서 드린 예배와 다르게 말씀을 들으며 마음이 살아 있는 것을 느꼈다. 당시 우리 학교에서 구원받은 학생들은 방석 첫 줄에 앉아서 찬송을 부르고 간증하고 말씀을 들었다.
그날 박 목사님은 창세기 27장의 야곱과 에서에 대한 이야기로 복음을 자세히 전해주셨는데, 말씀을 들으면서 내 마음이 뛰었다. 그런 경험은 처음이었다. 야곱을 향해 어머니 리브가가 “너의 모든 저주는 내게로 돌리리니”라고 한 말이 ‘우리의 모든 저주를 예수님이 다 받으시고 우리에게 하나님의 거룩한 의의 옷을 입혀 주셨다’라는 의미라고 말씀하시는데, 내 마음에 없었던 기쁨과 소망과 감사를 만들어내었다.
처음에 이상하게 보였던 교회의 어떤 모습도 문제가 되지 않다. 말씀을 들으면서 마음이 살아 움직이는 것을 느꼈고, 그때부터 주일이면 친구들과 함께 예배에 참석하고 예배를 마치면 같이 학교로 돌아왔다. 그 생활이 무척 기쁘고 감사했다.

브라스 밴드부에서 활동했다. 왼쪽 동그라미가 김도현 선교사, 오른쪽은 기쁜소식강남교회의 임병철 장로

말씀을 들을수록 복음을 위해 살고자 하는 소망들이 생겨났다
전에는 밴드부에서 피곤하도록 악기를 불며 학교 생활의 고충을 잠시 잊었지만, 연습을 마치고 저녁에 돌아올 때는 늘 무언가 모르게 마음이 공허했다. 그런데 이제는 마음에 무엇인가가 가득한 것을 느끼면서 음악과 학교 공부보다 말씀과 복음을 전하는 것에 마음이 기울었다. 전에는 성경을 읽어도 이해되지 않았지만 이제는 성경을 읽으면 하나 둘 이해가 가는 것이 신기하고, 누군가와 이야기할 때 나도 모르게 성경 말씀이 줄줄 나오는 것도 신기하고, 모든 것이 신기했다. 학교에서도 구원받은 형제들끼리 매일 모임을 갖고 같이 복음을 전하는 삶이 그렇게 좋을 수 없었다.
구원받기 전에는 공부와 음악이 전부였고 마음은 늘 공허했는데, 구원받은 후에는 공허함이 사라지고 말씀을 들을수록 복음의 소중함이 느껴지면서 복음을 위해 살고자 하는 소망이 생겨났다. 당시에는 서울제일교회에 선교학교가 있어서 기숙사 생활을 하는 우리 학교 형제들은 토요일에 외박을 나오면 선교학생들과 같이 먹고 자고 지냈다. 그들의 간증을 들으면 욕망으로만 가득했던 마음이 복음을 위해 살고자 하는 마음으로 옮겨졌다. 그리고 방학이 되면 교회의 배려로 선교학생들과 같이 일주일간 교회에서 훈련을 받는 특별한 시간들도 가졌다. 아침에는 성경공부를 하고 오후에는 선교학생들과 전도도 다니면서 더욱 복음을 위해 살고자 하는 마음을 가질 수 있었다.

 

학교 친구들이 복음을 같이 섬기는 동료가 되었다
구원받은 후 같은 학년의 동료들이 계속 구원받아 교회에 같이 다니기 시작했다. 그때 구원받은 동료들이 지금도 교회에서 복음을 섬기고 있는 것을 본다. 벌써 35년이라는 세월이 흘렸는데 복음을 같이 섬기는 평생 동료가 된 것이다. 그들이 목회자로, 장로로, 집사로, 평신도로 교회와 복음을 소중하게 여기고 교회를 섬기는 모습이 참 아름답다.
그 중 한 친구가 기쁜소식강남교회에 있는 임병철 장로다. 그는 학교 동창이며, 브라스 밴드부 친구다. 나보다 늦게 밴드부에 들어왔고, 밴드부에서 기압을 받고 매를 맞고 나면 서로 엉덩이에 약을 발라주곤 했다. 내가 교회에 가자고 초청했을 때 순수하게 따라와 주었던 친구다. 구원의 확신을 갖기까지 시간이 걸리기는 했지만 그가 구원받은 후 어렵기만 했던 학교생활과 밴드부 활동에 큰 힘이 되었다. 임 장로의 동생도 구원받아 지금은 내가 있는 아르헨티나와 가까운 볼리비아에서 선교사로 복음을 섬기고 있는데 그 모습을 보면 참 신기하다.

 

 

귀한 복음의 일꾼들이 일어날 것이다
학교에서 복음의 역사가 크게 일어나고 많은 학생들이 구원받아 모임이 형성되자 핍박을 받기 시작했다. 학교에는 신우회가 있고 지도 교사들이 있었는데, 전도하면서 그 학생들과 많이 부딪혔다. 신우회에 속한 선생님들과도 성경 말씀을 가지고 부딪히면서 본격적으로 핍박이 찾아왔다. 매주 토요일이면 당연히 나가는 외출 외박을 허락해 주지 않아서 하는 수 없이 학교 담장을 넘어 예배에 참석하고 벌을 받고, 또 담장을 넘고 벌을 받았다. 어려움들이 이어졌지만 그럴수록 교회에 가서 말씀을 듣고 예배를 드리는 것이 더욱 소중하게 여겨졌다. 그리고 전에는 공부와 장래가 컸지만 복음과 교회가 더 크게 자리잡아갔다.
박옥수 목사님은 우리들을 향해서
“여러분의 학교가 복음의 황금 어장입니다.”라고 하시며, 귀한 복음의 일꾼들이 일어날 것이라는 소망을 이야기해 주셨다. 35년이 지난 지금 복음을 들었던 많은 학생들 가운데 지금은 어디에 있는지 모르는 사람들도 있으나, 그 중에 여럿이 복음의 일꾼으로 자라서 복음을 같이 섬기는 동료들이 된 것이 무척 감사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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