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를 보고 불쌍히 여겨 가까이 가서
그를 보고 불쌍히 여겨 가까이 가서
  • 박옥수(기쁜소식강남교회 목사)
  • 승인 2019.03.13 20: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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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쁜소식 2019년 3월호
믿음에 이르는 길 | 하나님을 어떻게 믿어야 할까요? _15편_은혜편(2)

“가까이 가서 기름과 포도주를 그 상처에 붓고 싸매고 
자기 짐승에 태워 주막으로 데리고 가서 돌보아 주고”(눅 10:34)

 

박옥수 목사는 자주 “신앙은 쉽습니다.”라고 이야기합니다. 사람들은 대부분 ‘목사님이니까 쉽지, 우리는 신앙이 어렵고 힘들어요’라고 생각합니다. 박옥수 목사는 다시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신앙이 정말 어려우면 저는 신앙생활을 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제가 신앙생활을 해보니, 세상 무엇보다 쉬운 것이 신앙입니다. 신앙이 어렵다고 하는 이유는 신앙에 대해 잘 모르기 때문입니다.”

아리우스의 아들로부터 
영화 ‘벤허’에 보면, 유대 왕의 후손인 벤허와 멧살라는 어릴 적에 친구였습니다. 멧살라는 로마 사람으로, 나중에 유대의 호민관이 되어 예루살렘으로 돌아옵니다. 어른이 되어서 다시 만난 두 사람은 이념 차이로 인해 원수가 되고, 멧살라는 벤허를 로마 함선에서 노를 젓는 노예로 보냅니다. 그 뒤 해적을 소탕하려던 로마 함대와 해적들 사이에 격렬한 전투가 벌어지고, 전투 중에 죽을 뻔한 로마 함대의 사령관 아리우스를 벤허가 구합니다. 아리우스는 로마제국에서 서열이 몇 손가락 안에 드는 집정관으로, 그는 자신을 살려준 벤허를 양아들로 삼습니다. 아리우스 가문에는 대대로 내려오는 인장 반지가 있는데, 아리우스가 그 반지를 벤허의 손에 끼워 줍니다. 
벤허는 아리우스의 아들로 부귀영화를 누리지만 고향에 있는 어머니와 누이동생의 소식이 궁금해 예루살렘으로 돌아갑니다. 이어서 벤허와 멧살라가 만나는 장면이 나옵니다. 벤허가 작은 칼에 “아리우스의 아들로부터”라고 적어서 멧살라에게 선물로 보냅니다. 멧살라가 칼을 받아들고는, 집정관 아리우스에 대해 잘 알기에 “아리우스의 아들? 아리우스의 가문에 아들이 있었나?”라고 합니다. 그러자 옆에 있던 로마군 장교가 ‘최근에 아리우스가 양아들을 얻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고 말합니다. 그때 벤허가 나타납니다. 
“멧살라, 나다!”
멧살라가 깜짝 놀라며 묻습니다. 
“네가 무슨 요술로 아리우스의 아들이 되었냐?”
“요술의 주인공은 너다. 네가 나를 노예선으로 보냈는데, 내가 노예선에서 아리우스를 구했다.”
벤허가 손가락에 끼고 있는 반지가 그가 아리우스의 아들이라는 사실을 증거합니다. 벤허가 “표식은 알겠지?” 하고는, 반지에 있는 인장을 판에 콱 찍어서 멧살라에게 보입니다. 멧살라가 보니 아리우스 가문의 표식이 맞았습니다. 벤허가 말합니다. 
“내 어머니와 누이동생의 소식을 알려다오. 그러면 내가 노예선에서 괴로이 노를 젓던 기억을 잊겠다.”
“그건 총독의 허가를 받아야 한다.”
“허가를 받아내!”
벤허가 그냥 유대인이면 멧살라가 파리 목숨 날리듯 처리해버릴 텐데, 아리우스의 아들이니 꼼짝 못했습니다. 

언제나 완전한 하나님의 아들
신앙생활은 우리 이름으로 하는 것이 아닙니다. 벤허가 아리우스의 아들로 행하는 것처럼,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의 이름으로 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어떻게 하나님의 자녀가 되어서 예수님의 이름을 사용하면서 살 수 있습니까? 
많은 사람이 자기 이름으로 하나님 앞에 서려고 합니다. 일찍 일어나서 기도하고, 성경 읽고, 죄를 짓지 않고 진실하게 살려고 애를 씁니다. 그렇게 해야 하나님이 받으시고 죄를 이길 수 있는 줄 압니다. 그것은 참된 신앙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세상에 보내 인간을 구원하실 때, 인간이 완전하게 살 수 있어서 구원하신 것이 아닙니다. 넘어지고 쓰러지며 연약하고 부족한 것을 알고 구원하셨습니다. 
누구든지 자신이 온전하게 살아서 하나님 앞에 서려고 한다면 그 사람은 평생 하나님 앞에 설 수 없습니다. 우리가 못 하지만 예수님이 다 해주시니까 신앙이 쉬운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의 선행, 충성, 진실을 보고 우리를 자녀 삼으신 것이 아닙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이루신 일을 보고 자녀 삼으셨습니다. 그것은 우리 행위와 전혀 상관이 없습니다. 예수님이, 죄를 지으며 산 추하고 악한 우리 삶을 당신이 가져가시고 반대로 깨끗하게 사신 당신의 거룩하고 의로운 삶을 우리에게 주셨습니다. 그렇게 때문에 거듭난 성도는 언제나 완전하고 당당한 하나님의 아들입니다. 
벤허는 손가락에 아리우스 가문의 반지를 꼈지만, 구원받은 사람은 눈에 보이지 않지만 하나님의 자녀라는 반지를 끼고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담대하게 죄와 세상을 이기며 사는 것입니다. 

마음과 목숨과 힘과 뜻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하라
누가복음 10장에서 어떤 율법사가 예수님께 물었습니다. “선한 선생님이여, 내가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 굉장히 교만한 이야기입니다. 영생을 얻는 것은 인간이 무엇을 해서 이룰 수 있는 일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영생을 얻는 것은 예수님이 이루셔야 합니다. 우리가 죄를 사함받고 구원받는 것은 절대로 우리가 해야 하는 일이 아닙니다. 인간이 손을 대면 댈수록 망칠 뿐입니다. 무엇을 해야 영생을 얻느냐고 묻는 율법사에게 예수님이 다시 물으셨습니다. 
“율법에 무엇이라 기록되었으며, 네가 어떻게 읽느냐?”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힘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고,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하였나이다.”
“그렇게 해라. 그러면 살리라.”
예수님께서 분명히 ‘마음과 목숨과 힘과 뜻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네 몸처럼 사랑하라’고 하셨습니다. 그렇게 하면 삽니다. 문제는, 그렇게 할 수 있는 사람이 없다는 것입니다. 
한번은 박옥수 목사가 나환자촌에서 가진 집회에서 복음을 전하다가 “여러분, 저는 바다 위를 걸어가는 법을 압니다.” 하니까 사람들이 신기하게 생각했습니다. 사람들은 보통 그런 이야기를 들으면 농담으로 여기는데, 당시 나환자들은 순수해서 ‘정말 그런 법을 아는가?’라고 생각해 귀를 쫑긋 세우고 박옥수 목사가 하는 말에 귀를 기울였습니다. 
“바다 위를 어떻게 걸어가는지 가르쳐 드릴까요?”
“예에!”
“어렵지 않습니다. 모래사장에서 바다를 향해 힘껏 뛰어가 먼저 왼발을 바닷물에 디딥니다. 그 다음에 왼발이 물에 빠지기 전에 오른발을 디딥니다. 다시 오른발이 빠지기 전에 왼발을 디디고…. 그렇게 계속 뛰어가면 됩니다. 그러면 일본까지도 갈 수 있습니다. 만약 왼발이 빠질 때까지 오른발을 딛지 않아서 바닷물에 빠져 죽으면 저는 책임지지 않습니다.”
사람들이 “에이~!” 하고 웃었습니다. 논리는 맞을지 모르나 그렇게 할 수 있는 사람이 없으니 말이 안 되는 이야기입니다. 
율법을 다 지킨다는 이야기, 마음과 목숨과 힘과 뜻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한다는 이야기가 그와 같습니다. 누구도 그렇게 할 수 있는 사람이 없으니 말이 안 되는 이야기입니다. 마음을 쏟으면 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할지 모르나, 아예 불가능한 일입니다. 바닷물에 왼발이 빠지기 전에 오른발을 내딛는 것보다 어려운 일입니다. 아무리 마음과 목숨과 힘과 뜻을 다해서 하나님을 사랑하려고 해도 마음과 뜻이 금세 하나님을 떠나서 다른 곳으로 달려갑니다. 
예수님 외에 인류 가운데 율법을 지킨 사람이 없고, 지킬 수 있는 사람도 없습니다. 우리가 무엇을 해서는 결단코 영생을 얻지 못했습니다. 내가 무엇을 잘해서는 절대로 하늘의 축복을 받지 못합니다. 

강도 만난 자는 누워 있기만 했다
예수님은 ‘무엇을 해야 영생을 얻느냐?’고 묻는 율법사에게 강도 만난 자 이야기를 들려주셨습니다. 
어떤 사람이 예루살렘에서 여리고로 내려가다가 강도를 만났습니다. 강도가 그를 때린 후 거반 죽은 것을 버리고 갔습니다. 이 사람이 어떻게 구원받습니까? 그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습니다. 강도를 만나서 죽어가고 있는데, 어떤 사마리아인이 와서 그를 살려 주었습니다. 이 사마리아인은 예수님을 가리킵니다. 우리가 구원받고 영생을 얻기 위해서 우리가 일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이 일하신다는 것입니다. 
“어떤 사마리아인은 여행하는 중 거기 이르러 그를 보고 불쌍히 여겨 가까이 가서 기름과 포도주를 그 상처에 붓고 싸매고 자기 짐승에 태워 주막으로 데리고 가서 돌보아 주고”(눅 10:33~34)
이 말씀에서 강도 만난 자가 일한 것은 하나도 없습니다. 그는 죽을 수밖에 없는 위치에 이르러 누워 있었을 뿐입니다. 우리가 구원받기 위해 필요한 것은 죄를 지어서 저주와 멸망 앞에 있는 것만으로 충분합니다. 그 뒤에 우리는 아무것도 하면 안 되고, 그때부터 예수님이 일하셔야 합니다. 
“가까이 가서 기름과 포도주를 그 상처에 붓고 싸매고” 기름은 성령을, 포도주는 기쁨을 가리킵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만나면 우리 속에 성령이 임하시고 삶이 기뻐집니다. 그것을 싸매어 주십니다. “자기 짐승에 태워” 그리고 주님이 타셔야 할 자리에 우리를 앉히십니다. 예수님이 앉으신 하늘나라에 우리를 앉히신 것입니다. “돌보아 주고” 돌보아 준다는 말이 정말 좋습니다. 모든 것을 맡아서 해준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은혜입니다. 우리가 하늘나라 가기에 부족함이 없도록 예수님이 모든 일을 완벽하게 이루신다는 사실을, 강도 만난 자 이야기를 통해서 주님이 우리에게 보이셨습니다.

우리 수고와 노력은 구원의 역사를 망칠 뿐
우리가 할 수 없기에 예수님이 오셨고 예수님이 이루셨는데, 많은 사람들이 자기가 이루려고 애를 씁니다. 그런 사람은 신앙생활이 굉장히 힘들고 고달픕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잘 섬긴다고 하는 것이 하나님이 보실 때에는 일을 망치는 것입니다. 영생을 얻는 축복은 처음부터 끝까지 예수님이 완벽하게 이루셔서 우리에게 값 없이 은혜로 주셔야 합니다. 
우리 노력, 우리 수고, 우리 행위가 들어가면 신앙은 망칩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다 이루실 때까지 기다렸다가 다 되면 그냥 받으면 됩니다. 사람들이 노력해서 구원받으려고 하는 것을 보면 너무 우습습니다. 구원은 예수님이 이미 이루어 놓으셨습니다. 우리는 아무것도 하지 않고 그것을 그냥 받는 것입니다. 그것을 은혜라고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