깊도다, 하나님의 지혜와 지식의 부요함이여!
깊도다, 하나님의 지혜와 지식의 부요함이여!
  • 이헌목(기쁜소식양천교회 목사)
  • 승인 2019.04.01 18:19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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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쁜소식 2019년 3월호
이기는 삶

 

 

페니실린, 실수에서 기적의 물질을 발견하다
1928년, 영국의 미생물학자 플레밍 박사가 여름 휴가를 마치고 연구소로 돌아와 보니, 포도상구균을 배양하는 유리 접시의 뚜껑이 반쯤 열려 있고 그 안에 푸른곰팡이가 생겨 있었습니다. 그는 실수로 포도상구균이 세균에 오염됐다고 생각해 버리려고 하다가 세심하게 관찰한 결과 신기한 사실을 발견했습니다. 푸른곰팡이 가까운 곳에서는 포도상구균이 자라지 못하고, 그 곁에는 아예 무균 상태였던 것입니다. 플레밍은 쓸모없는 푸른곰팡이가 세균을 죽이는 항균작용을 한다는 놀라운 사실을 발견한 것입니다. 플레밍은 푸른곰팡이에서 추출한 물질로 세계 최초의 항생제인 페니실린을 만들었고, 페니실린은 수많은 사람들을 질병에서 건져내 생명을 살리는 ‘기적의 약’이 되었습니다. 
플레밍의 실수가 기적의 물질을 발견하는 계기가 된 것처럼, 인간의 실패가 그리스도 안에 있는 영원한 생명을 발견하게 해주는 통로가 됩니다. 푸른곰팡이가 있는 곳에서는 세균이 살지 못하듯이, 예수님의 보혈이 성도들의 마음 안에 흘러들어오면 죄가 완전히 죽고, 사망이 그리스도에게 삼켜진 바 됩니다.

사환으로 충성할 것인가, 아들로 충성할 것인가?
무슨 일을 하든지 주인과 사환은 일할 때의 마음이나 생각이 많이 다릅니다. 당연히 일하는 방식도 다릅니다. 사환은 주인뿐 아니라, 아버지의 유업을 이을 아들과도 마음이나 생각이 다릅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모세는… 하나님의 온 집에서 사환으로 충성하였고 그리스도는 그의 집 맡은 아들로 충성하였으니…”(히 3:5~6)라고 이야기했습니다. 
신앙에는 두 부류가 있습니다. 하나는 자기가 열심히 일해 그 대가를 받으려는 사환과 같은 신앙이고, 다른 하나는 예수님의 영이 마음에 임하여 그 영에서 나오는 아들의 마음으로 하는 신앙입니다. 사환의 신앙은 율법 아래서 종노릇하는 신앙입니다. 자기가 열심히 율법을 지키고 선을 행하며 잘해서 그 대가로 복을 받으려고 노력하고 충성하는 신앙입니다. 다른 신앙은 그리스도가 하나님 앞에 아들로 충성했던 것처럼, 값 없는 은혜를 힘입어 하나님 아버지 앞에서 아들의 자격, 아들이라는 믿음으로 충성하는 신앙입니다. 
하나님은 사환으로 충성하려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기뻐하지 아니하셔서 그들이 광야에서 멸망을 받았습니다(고전 10:5). 또한, 법 아래서 충성하려는 사람들에게 성령께서 ‘너희가 주의 음성을 들을 때 마음을 강퍅하게 말라’고 하고(히 3:7~8), ‘저희가 항상 마음이 미혹되어 내 길을 알지 못하는도다’라고 하십니다(히 3:10). 반대로 아들로 충성하는 사람들에게는 ‘소망의 담대함과 자랑을 끝까지 견고히 잡으면 그의 집이라(히 3:6)’는 놀라운 말씀을 하십니다. 성도는 아들로 살 수 있도록 모든 것이 갖추어진 사람임을 발견해야 합니다. 
 
품꾼과 아들, 어떤 이름으로 아버지에게 나가는 것이 좋은가?
품꾼은 일한 대가로 먹는 자이고, 아들은 조건 없이 은혜로 모든 것을 누리는 자입니다. 누가복음 15장에서 둘째 아들이 아버지의 재물을 허비한 뒤 아버지에게로 돌아갈 면목이 없어지자, ‘아버지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감당치 못하겠으니 “나를 품꾼의 하나로 보소서” 하리라’는 생각을 합니다. 그는 아버지 집에 가서 열심히 일하고 품꾼처럼 먹고 살겠다고 합니다. 허랑방탕하게 살고 돌아온 그 아들에게 아버지는 집에 있는 모든 좋은 것을 줍니다. 그가 ‘아들’이기 때문입니다. 아들이기에 받는 은혜의 세계가 얼마나 놀랍습니까?
우리도 둘째 아들처럼 아들의 위치를 버리고 품꾼의 위치에서 충성하려는 마음에 붙들려 살 때가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연약함과 허물이 나타날 때마다 마음속으로 얼마나 자주 “나를 품꾼의 하나로 보소서”라고 말하는지 모릅니다. 예수님은 구원받은 성도들에게 당신의 의와 성령뿐 아니라 당신의 이름도 주셨습니다. 이는 언제든지 아버지 앞에 아들의 이름으로 담대히 나아가 아들로 서고 아들로 살게 하기 위함입니다.

하만의 조서는 유대인들에게 유익한 것 
에스더 성경에, 유대인의 대적 하만에 의해 큰 어려움을 겪습니다. 하만에 의해 쓰여진 ‘12월 13일 하루 동안 유대인들을 죽이고 도륙하고 진멸하고 그 재산을 탈취하라’는 왕명이 각 도에 이르러, 유대인이 크게 애통하여 금식하며 부르짖고 굵은 베를 입고 재에 누운 자가 무수했습니다(에 4:3). 
왕비 에스더는 간절한 마음으로 아하수에로 왕에게 나아가 “내가 어찌 내 민족의 화 당함을 차마 보며, 내 친척의 멸망함을 차마 보리이까?” 하며, 유대인을 해하려 한 하만의 조서를 제하기를 울며 구했습니다. 하만의 조서는 유대인들에게 슬픔과 절망을 주는 조서로 보였습니다. 사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하만의 조서로 말미암아 유대인들을 대적하는 자들이 드러나, 나중에 그들을 멸할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아하수에로 왕은 하만의 조서를 취소하지 않고, 
“함께 모여 … 저희를 치려 하는 자와 그 처자를 죽이고 도륙하고 진멸하고 그 재산을 탈취하라”는 두 번째 조서를 유대인들에게 주었습니다. 첫 번째 조서를 통해서 유대인을 죽이려는 대적들이 드러나고, 두 번째 조서를 통해서 그들을 진멸하라는 것입니다. 이런 놀라운 하나님의 섭리를 모르고 하만의 조서를 취소해버린다면 유대인들의 대적들을 찾아낼 수 없습니다. 
겨울에 날씨가 따뜻하면 옛 어른들이 “올 여름에는 병충해가 많겠구나” 합니다. 그리스도인의 삶도 그렇습니다. 어려움이 없는 편한 환경에 젖어 살다 보면 세상의 것을 쉽게 용납하고 타락해 오히려 더 큰 어려움을 당할 수 있습니다. 우리도 하나님께 어려움을 제해 달라고 간구할 것이 아니라, 어려움을 넘고 부딪쳐 싸우면서 믿음을 갖게 해달라고 구해야 할 것입니다. 
유대인들은 대적과 싸우는 것이 부담스러워 보였지만, 아하수에로 왕은 모르드개를 높여서 온 백성들이 유대인을 두려워하고 돕도록 하여 마침내 유대인이 승리하도록 했습니다. 유대인들이 수산 성에서 대적자 오백 명을 죽이고, 하만의 열 아들을 죽이고, 또 삼백 인을 도륙하고, 또 칠만 오천 인을 도륙하여 유대인의 대적 75,810명을 도륙했습니다. 이처럼 많은 대적자들이 숨어 있는데, 하나님의 놀라운 계획을 깨닫지 못하면 하만의 조서를 제하여 달라는 요청이 얼마나 어리석은 요청인지 모르는 것입니다. 유대인들이 모르드개의 믿음을 따라 하만의 세력과 부딪쳐 싸우지 않았다면 어찌 수많은 대적들을 멸할 수 있었겠습니까? 
“깊도다, 하나님의 지혜와 지식의 부요함이여…”(롬 11:33) 
하나님의 지혜를 가진 믿음의 사람 모르드개로 말미암아 유대인들은 자신들을 제거하려 했던 하만의 세력을 무너뜨리고, 도리어 자신들을 미워하던 자들을 제어했습니다. 하만의 조서가 그로 말미암아 대적들을 진멸하여 유대인들에게 참된 평안과 기쁨을 얻게 해주고, 그날이 길한 날이 되게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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