옳음, 불행으로 들어가는 문
옳음, 불행으로 들어가는 문
  • 김재홍 (기쁜소식인천교회 목사)
  • 승인 2019.06.04 16:00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2019년 6월호 기쁜소식
옳음, 불행으로 들어가는 문

 

사람이 사는 곳에는 어디나 다툼이 일어나는데, 서로가 옳다고 각자 자기의 옳음을 주장합니다. 부부가 다툴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상대편의 잘못을 지적하고 자기의 옳음을 주장하기 때문에 다툼이 일어납니다. 우리 마음에 옳음이 세워지면, 그 옳음은 원망과 시비와 다툼 등을 불러옵니다.
마음에 옳음이 자리 잡을 때, 한 가지 알아야 하는 사실이 있습니다.
‘이것이 옳으냐, 그르냐?’를 따지고 있는 것 자체가 잘못되었다는 것입니다. 옳음은 우리 마음이 하나님을 믿는 믿음에서 떠날 때 생겨나기 때문입니다. 마음에 옳음이 자리 잡으면 ‘아, 내가 믿음에서 떠나 있구나!’라고 깨달아야 합니다.
인간은 마음에 믿음이 자리 잡을 때 가장 행복합니다. 하나님이 그렇게 만드셨습니다. 그러니까 믿음의 반대편인 옳음이 마음에 자리 잡으면 불행해지기 시작합니다. 우리 마음에 ‘내가 옳다’는 마음이 하나 들어오면, 다른 많은 부분이 잘못되었으면서 그런 줄도 모르고 자신이 가지고 있는 옳음을 근거로 온갖 판단과 불만과 불신을 품습니다. 옳음에 사로잡히면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도 거절합니다. 내가 옳다는 생각 하나 때문에 삶 전체가 잘못된 방향으로 흘러가는데도 전혀 깨닫지 못해 결국 삶이 망가지고 불행해집니다.

옳음의 양면성
경기도 안산에서 있었던 일입니다. 어떤 남자가 술에 취해서 택시를 탄 뒤, 택시비로 만원을 주며 자기 집까지 가자고 하고는 잠이 들었습니다. 술을 마시고 택시를 탈 때마다 그렇게 했기에, 그것은 그 사람에게 습관과도 같았습니다. 얼마 뒤, 택시 기사가 다 왔다며 그 사람을 깨웠습니다. 그래서 내리려고 하는데 기사가 “손님, 택시비 주셔야죠.”라고 했습니다.
“탈 때 만원 줬잖아요.”
“안 주셨는데요.”
“무슨 소리예요? 내가 만원 줬잖아요!”
둘이 옥신각신하다가 파출소로 갔습니다. 경찰들이 두 사람의 이야기를 듣고 누구 말을 믿겠습니까? 술에 취한 승객 말이 아니라, 당연히 택시 기사 말을 믿었습니다.
“아저씨, 택시를 탔으면 택시비를 내야죠.”
“아니, 내가 택시비 만원을 냈다니까요!”
파출소 안에서도 다툼이 일어났습니다. 이 사람이 억울해서 소리를 지르고 난동을 부리니까 경찰이 보호실에 넣어버렸습니다. 보호실에 갇혀 있으면서 이 사람이 너무 분하고 억울했습니다. 다음날 내보내 주었는데, 분한 마음이 사그라지지 않아 주유소에 가서 휘발유를 한 통 산 뒤 파출소로 갔습니다.
“파출소장 나와서 사과해! 안 그러면 몸에 불을 붙인다!”
경찰들이 내다보고는 “어제 택시비 안 내고 난동을 부렸던 사람이네. 술이 아직 덜 깼나?” 하고는 거들떠보지도 않았습니다. 경찰이 대꾸도 하지 않으니까 이 사람이 몸에 휘발유를 붓고는 다시 소리쳤습니다.
“파출소장 나와서 사과해! 안 그러면 정말 몸에 불을 붙인다!”
그래도 대꾸가 없자 이 사람이 몸에 불을 붙이고 말았습니다. 경찰들이 뛰어나와서 몸에 붙은 불을 끄고 급히 병원으로 데려갔습니다. 이 사람이 전신에 화상을 입었습니다. 피부도 호흡을 해야 하는데 전신 화상을 입으면 피부가 호흡을 못 하기 때문에 사람이 살 수 없다고 합니다.
이 일이 화젯거리가 되어 신문과 방송에 보도되었습니다. 기자들이 와서 이 사람을 취재했습니다. “나는 택시비를 분명히 냈습니다! 술을 먹고 택시를 타면 습관적으로 택시비를 먼저 줍니다.” 여론이 이 사람이 택시비를 낸 것이 맞고, 택시 기사가 나쁜 사람이고, 경찰이 일을 잘못 처리했다는 쪽으로 흘러갔습니다. 결국 파출소장은 자리에서 물러나고 관련 경찰들도 문책을 받았습니다.
이 사람이 이제 옳다고 인정은 받았는데, 문제는 자신과 가족들이 큰 고통을 당하고 있었습니다. 죽어가는 자신도 고통스럽고, 그 모습을 지켜보는 가족도 말할 수 없이 고통스러웠습니다. 다행히 그의 부인이 옆집에 사는 거듭난 부인의 인도로 복음을 듣고 구원을 받았습니다. 부인의 마음에 ‘남편도 죽기 전에 구원받으면 좋겠다’는 바람이 간절했습니다. 그런데 교회에서 이 사람을 찾아가서 복음을 전하려고 ‘인간은 죄인이며 악하다’고 이야기하면, “내가 왜 죄인이야? 택시 기사 그놈이 나쁘지! 나는 죄가 없어!”라고 소리치며 강하게 거부했습니다.
시간이 흐르면서 화상을 입은 살이 썩어들어가 이 사람이 살 수 있는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습니다. 하루는 목사님이 찾아가서 작심하고 ‘당신은 악한 사람이다’고 이야기했습니다. 그 사람이 “나가!”라고 소리쳤지만 물러서지 않고 그가 왜 악한지 조목조목 이야기해 주었습니다.
“당신이 택시비 낸 것 맞아요. 그런데 당신 아내는 이제 과부로 살아야 하고, 당신 아이들은 아빠 없이 살아야 해요. 당신이 옳다는 것 하나 인정받으려고 얼마나 큰 죄를 지었는지 알아요?”
이 사람이 목사님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자신이 옳다는 마음이 꺾였습니다.
‘내가 아내에게나 자식에게나 부모님에게나 정말 몹쓸 짓을 했구나…!’ 자신이 옳다는 마음이 버려지고 오히려 악하다는 사실을 발견한 뒤, 이 사람은 복음을 받아들여 구원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며칠 뒤 세상을 떠났습니다.
‘내가 옳다’는 마음 하나 세워지니까 분신자살을 시도할 정도로 옳음을 주장합니다. 사탄은 오늘도 이런 일을 벌이려고 사람들의 마음에 수많은 옳음을 넣어줍니다. 우리 마음에 옳음이 자리 잡으려고 할 때 ‘이것이 옳으냐, 그르냐?’를 따지고 있다면, 벌써 사탄에게 속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를 행복하게 하는 믿음에서 이미 떠났기 때문입니다. 옳음을 가지고 있는 성도의 마음을 살펴보면 하나님을 믿는 믿음에서 떠나 있다는 사실을 분명히 발견할 수 있습니다.

항상 악뿐인 인간
사람이 가지고 있는 옳음들 가운데 100% 옳은 것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인간의 옳음은 한편으로 옳지, 다른 편에서 보면 옳지 않습니다. 앞에 소개한 이야기처럼 자신이 옳다는 마음이 아내나 자식이나 부모님에게 해서는 안 될 몹쓸 짓을 하게 만들었습니다.
그렇다면 성경은 인간의 옳음에 대해 어떻게 이야기할까요?
“여호와께서 사람의 죄악이 세상에 관영함과 그 마음의 생각의 모든 계획이 항상 악할 뿐임을 보시고 땅 위에 사람 지으셨음을 한탄하사 마음에 근심하시고 가라사대 ‘나의 창조한 사람을 내가 지면에서 쓸어버리되 사람으로부터 육축과 기는 것과 공중의 새까지 그리하리니 이는 내가 그것을 지었음을 한탄함이니라’ 하시니라.”(창 6:5~7)
이것이 인간을 보시는 하나님의 눈입니다. 하나님이 보실 때 인간은 항상 악할 뿐이며, 쓸어버림을 당할 존재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왜 자신이 옳다는 생각을 갖게 될까요? 악하고 잔인한 본성이 덮여 있고 좋은 모습을 나타내기도 하기에, 사탄이 악하다는 사실을 숨기고 ‘이것은 네가 옳아’라고 속이기 때문입니다.
‘사랑의 장’이라고 불리는 고린도전서 13장을 보면 인간의 모습을 좀 더 자세히 알 수 있습니다. “내가 내게 있는 모든 것으로 구제하고 또 내 몸을 불사르게 내어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게 아무 유익이 없느니라.”(고전 13:3) 어느 날 제가 이 구절을 읽다가 의문이 생겼습니다. ‘내게 있는 모든 것으로 구제해도 사랑이 아니란 말인가? 자기 몸을 불사르게 내어주는데도 사랑이 아니란 말인가?’ 성경은 이러한 일을 하는 것이 사랑이라고 하지 않았습니다. ‘이렇게 해도 사랑이 없으면 유익이 없다고 하는데, 사랑이란 도대체 뭐란 말인가?’ 곰곰이 생각해 보니, 사랑 없이도 인간이 위와 같은 일을 할 수 있다는 사실을 알았습니다.
언제 그렇게 합니까? 사람은 자신이 존중 받을 때, 인정 받을 때, 높임 받을 때 무엇이든지 할 수 있습니다. 타인을 사랑함으로 구제하거나 희생하는 것 같지만, 사실은 자신이 좋아서 그 길을 가는 것입니다. 만약 그렇게 했을 때 사람들이 다 자신을 비웃고 무시하고 짓밟는다면 그렇게 하지 않습니다. 언제든지 그렇게 할 수 있는 것이 참된 사랑인데, 그 사랑은 예수님에게만 있습니다. 예수님은 사람들이 당신을 무시하고 업신여기고 짓밟았지만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셨습니다.
사람이 남을 돕거나 위하는 선을 행하는 것 같지만, 인간은 자신의 유익을 생각하기 때문에 그것은 참된 선이 아닙니다. 창세기 6장 말씀대로 인간에게는 선한 것이 전혀 없습니다. 이런 인간에게 무슨 옳음이 존재할 수 있겠습니까? 그런데도 대부분의 사람이 자신이 옳다는 마음을 가지고 있습니다. 사탄이 자신의 모습을 보지 못하게 한 뒤, ‘네가 옳다’는 마음을 넣어주기 때문입니다.

성경에 등장하는 옳음을 가진 사람들
성경에는 옳음을 가진 사람들이 많이 등장합니다. 옳음을 가지고 살아가는 우리 모습을 그들을 통해서 보여 주기 위함입니다. 성경에 나오는 옳음을 가진 사람들을 생각해 보면 먼저 가인이 떠오릅니다. 가인은 마음에 얼마나 큰 옳음을 가지고 있었느냐면, 하나님을 항하여 분한 마음을 품고 안색이 변할 정도였습니다. 옳음을 가지고 있었던 인물을 하나 더 꼽는다면 요압을 들겠습니다. 그는 자신이 옳다는 생각 속에서 다른 것을 다 무시하고 자기 옳음을 따라 살았던 사람입니다. 옳음을 가진 사람들에게는 공통점이 있습니다. 그들의 삶에서 사망의 역사가 일어난다는 것입니다. 가인은 자신이 옳다는 마음 때문에 동생 아벨을 돌로 쳐서 죽였습니다. 요압도 자신의 옳음을 따라서 아브넬을 죽이고, 아마사를 죽이고, 압살롬을 죽였습니다. ‘내가 옳다’는 마음을 가졌는데, 거기에서 맺히는 열매가 죽음인 것입니다.
옳음은 누군가를 죽일 뿐 아니라 결국 자신도 불행하게 만들고 맙니다. 성경에서 옳음을 가진 사람들의 결국을 보면 한결같이 불행했습니다. 사탄은 인간에게 옳음을 넣어주어서 누군가를 파멸시키는 도구로 사용하고, 그 일을 행하는 사람 또한 불행으로 이끄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어리석어서 사탄이 넣어주는 ‘내가 옳다’는 마음을 넙죽넙죽 받아먹습니다. 사탄은 치밀한 계획을 가지고 우리 마음에 옳음을 넣어주는데, 우리는 그에 대하여 거의 무방비 상태로 살아갑니다.

쉽게 버려지지 않는 옳음
우리가 다른 사람을 불행하게 만들고 자신 또한 불행의 구렁텅이로 몰아넣는 길에서 벗어나려면 마음에 자리 잡고 있는 옳음을 버려야 합니다. 그런데 ‘이것은 내가 옳아!’ 하고 우리 마음에 옳음이 들어오면 빠져나가질 않습니다. ‘내가 이 옳음을 버려야겠다!’라고 각오하고 결심한다고 버려지는 것이 아닙니다. 예를 들어, 어느 부인이 남편과 부부싸움을 했는데 자신이 분명히 옳고 남편이 잘못되었다는 마음이 들었다고 해봅시다. 그 부인의 마음에서 자신이 옳다는 마음이 쉽게 버려지겠습니까? 혹은 차 안에서 어떤 사람과 다투었는데, 분명히 내가 옳고 상대가 잘못되었다는 마음이 들었다면 그 옳음이 버려지겠습니까?
우리가 성경 말씀을 근거로 옳음은 사탄이 넣어주는 것이라는 사실을 알고, 그 옳음이 주변 사람과 자신을 불행하게 만든다는 사실을 안 뒤에도 옳음은 쉽게 버려지지 않습니다. ‘사람이 다 악한데 옳은 게 뭐가 있어? 내가 옳다는 이 마음을 버려야겠다!’ 해도 마음에서 옳음이 좀처럼 빠져나가질 않습니다. 그렇다면 옳음을 어떻게 버릴 수 있을까요?
창세기 4장에서 가인은 땅의 소산을 제물로 삼아 하나님께 드렸고, 아벨은 양의 첫 새끼와 기름을 드렸습니다. 가인이 생각할 때, 땅에서 가시와 엉겅퀴를 뽑아내고 땀흘려 농사를 지어 얻은 소산을 드린 자신의 제물은 좋아 보이고 새끼 양을 죽여서 기름과 함께 드린 아벨의 제사는 흉측해 보였습니다. 자신은 잘하고 있고 아벨은 잘못하고 있는 것 같았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아벨의 제사는 받고 가인의 제사는 받지 않으셨습니다.
그때 가인이 “하나님께서 피 흘림이 없는 제사는 받지 않으시는데, 제가 하나님의 뜻을 몰라서 어리석게 행했습니다. 제가 잘못된 제물을 드렸습니다.”라고 한 것이 아닙니다. 성경은 “가인이 심히 분하여 안색이 변하니”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이 가인에게 “네가 분하여 함은 어찜이며 안색이 변함은 어찜이뇨?”라고 하며 그가 잘못되었다고 말씀하셨지만, 가인은 돌이키지 않았습니다. 가인이 ‘내가 수고해서 얻은 소산으로 제사를 드린 것이 옳다’는 마음을 가졌는데, 그 옳음이 하나님이 말씀하셔도 빠져나가지 않았습니다. 자신의 옳음을 버리지 못하니까 가인은 결국 아벨을 돌로 쳐서 죽이고 말았습니다. 그 후 하나님이 “네 아우 아벨이 어디 있느냐?”라고 하셨을 때에도 가인은 “내가 내 아우를 지키는 자니이까?”라고 하며 하나님의 손길을 거부했습니다.
창세기 4장에 기록된 가인 이야기는, 사탄이 우리 마음에 옳음을 넣어줄 때 그것이 얼마나 강하게 자리 잡는지를 보여 줍니다. 이처럼 자신의 옳음에 강하게 사로잡혀 있던 가인의 마음에서 옳음이 버려지는 때가 있었습니다. 그것은 가인이 ‘하나님의 옳음’을 발견했을 때입니다.

우리 마음에 하나님을 믿는 믿음이 자리 잡아서
인간의 옳음은 하나님의 옳음이 보일 때 버려집니다. 하나님의 옳음이 보일 때 비로소 자신이 옳지 않았다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하나님의 옳음이 보이지 않는데 인간이 결심하고 각오해서는 옳음을 버릴 수 없습니다. 공을 눌러서 물속에 넣어둔 것처럼 옳음을 눌러서 밖으로 표출되지 않게 할 수는 있겠지만, 버리지는 못합니다.
옳음은 하나님의 뜻 앞에서 가인처럼 심히 분하여 안색이 변하게 하고, 그것이 잘못되었다는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도 돌이키지 못하게 하며, 결국 자신이 보기에 옳지 않은데 하나님이 옳다고 하신 아벨로 돌로 쳐서 죽이게까지 합니다. 우리 마음에 옳음이 들어오면 쉽게 빠져나가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그 심각성을 깨달아야 합니다. 지금까지 자신이 보기에 옳은 것을 따라 살아왔다면, 이제 자신의 옳음 말고 하나님의 옳음을 발견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세계가 우리 마음에 믿음으로 자리 잡을 때 우리는 행복해집니다. 많은 성도들의 마음에 믿음 대신 옳음이 자리 잡아서 주위 사람들에게 아픔을 주고 자신을 고통스럽고 불행하게 만듭니다. 이제 우리 모두의 마음에 하나님을 믿는 믿음이 자리 잡아서 행복한 삶을 살기를 바랍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