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명을 위해 옳음을 버리다
생명을 위해 옳음을 버리다
  • 글 | 김재홍 (기쁜소식인천교회 목사)
  • 승인 2019.08.06 10:33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2019년 8월호 기쁜소식
옳음에서 벗어나 영의 세계로 (제3편)

 

 

옳음의 세 가지 속성
우리 마음에서 옳음이 생겨나는 이유는 하나님을 믿는 믿음에서 떠났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마음에 옳음이 생겨날 때 ‘이게 옳으냐, 그르냐?’를 따질 것이 아니라, ‘지금 내가 믿음에서 떠나 있구나’라는 사실을 발견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다음으로, 옳음을 따라가면 그 결과는 고통과 저주입니다. 성경에서 옳음을 가졌던 사람들의 삶을 보면, 가인과 요압을 비롯해 수많은 사람들이 불행하고 고통스럽게 살았을 뿐 아니라, 그들을 통해서 사망의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내가 아무리 옳아도 옳음을 쫓아가면 반드시 불행해지고 망하며 사망의 역사가 일어납니다. 마지막으로, 일단 옳음이 생기면 그 옳음은 버리려고 각오하고 결심해서 버려지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옳음이 보일 때 비로소 버려집니다.

한편으로 옳은 인간의 옳음
한 커플이 어느 날씨 좋은 봄날에 소풍을 가면서 통닭집에 들러 통닭을 주문했는데, 그날따라 주문하는 사람이 많아서 종업원이 “차에서 기다리십시오. 다 되면 차로 가져다 드리겠습니다.”라고 했습니다. 두 사람이 차에서 기다리고 있자, 얼마 후 종업원이 “통닭 나왔습니다.” 하고 통닭을 담은 상자를 들고 왔습니다. 두 사람이 그 상자를 가지고 소풍을 가서 먹으려고 뚜껑을 열었는데, 그 안에 통닭은 없고 돈이 가득 들어 있었습니다. 두 사람이 ‘이게 웬 횡재냐!’ 한 것이 아니라, ‘통닭집에서 장사한 돈을 여기 넣어두었다가 우리에게 잘못 주었나 보다’ 하고 다시 가져다주기로 했습니다.
통닭집에서는 돈이 없어졌다고 난리가 났습니다. 장사한 돈을 통닭 상자에 넣어두는 것을 종업원들 말고는 모르고 누가 와서 훔쳐갈 리도 없기에, 주인이 종업원들을 몰아세웠습니다. “솔직히 이야기해라. 너희 중에 누가 돈을 가져갔냐? 지금이라도 이야기하면 용서하겠다.” 하지만 아무도 자신이 그랬다고 하는 사람이 없어서 주인이 경찰에 신고를 했습니다.
경찰들이 와서 통닭집에서 이것저것 조사하고 있는데, 소풍 갔던 커플이 와서는 “우리가 통닭을 먹으려고 이 상자를 열어 보니 통닭이 들어 있는 것이 아니라 돈이 들어 있었습니다.”라고 했습니다. 어느 종업원이 통닭을 담은 상자를 준다는 것이 실수로 돈이 든 상자를 줘버린 것입니다. 주인이 너무 고마웠습니다. ‘세상에 이런 부부가 다 있나? 이런 분들은 언론을 통해 세상에 알려야 해!’ 그래서 신문사에 알리겠다고 하자, 두 사람이 알리지 말아 달라고 했습니다. 주인이 더욱 감동을 받았습니다. ‘선행을 하고도 알려지는 것을 원하지 않는구나!’ 그래서 꼭 알려야 한다고 하자, 두 사람이 극구 말리면서 “사실 우리는 부부가 아닙니다. 우리 사진이 신문에 나면 두 가정이 파탄 납니다.”라고 했습니다.
통닭집 주인이 볼 때에는 정말 선하고 옳은 사람들이었지만, 다른 면으로 보면 바람을 피우는 나쁜 사람들이었습니다. 그것이 인간입니다. 인간은 한쪽 면에서 옳고 선할 수 있지, 사람들 가운데 온전히 옳은 이가 없고 온전히 선한 이도 없습니다. 그런데 사탄이 우리 초점을 자신이 옳다는 데에 맞춰 놓으니까 사람들의 마음에서 옳음이 빠져나가질 않습니다.

내 마음에 자리 잡은 옳음이 버려지기까지
저도 신앙생활을 하면서 옳음을 버리지 못해서 고통했던 적이 많이 있습니다. 여러 가지 일들에 대해 옳고 그름을 따져보다가 ‘내가 잘못한 것도 있지만 어떤 부분에서는 내가 옳다’는 마음에 사로잡히니까 그 옳음이 쉽게 버려지지 않았습니다. 옳음 속에서 갈등하고 고통하다가 하루는 박옥수 목사님이 다말에 관하여 말씀을 전하시는 것을 들었습니다.
유다의 아들 엘과 오난이 예수 그리스도의 족보를 잇기 위해 생명을 낳는 일에 마음을 쏟아야 하는데, 두 사람이 그것을 싫어해서 죽임을 당했습니다. 반대로 다말은 생명을 얻기 위하여 모든 어려움을 뛰어넘어 그리스도의 족보를 이었습니다. 박 목사님이 말씀을 전하는 도중에 “여러분, 우리가 이 복음을 지켜나가지 않으면 우리 후손들에게 누가 이 복음을 전해주겠습니까?”라고 뜨겁게 외치셨습니다. 복음을 지키고자 하시는 목사님의 간절한 마음을 읽을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저는 제 평판 때문에 갈등하고 고통하고 있었습니다. 나를 지키려는 마음 때문에 어려워했습니다.
하나님의 옳음 앞에 서 보니까 내가 가진 옳음은 더러운 것임을 알 수 있었습니다. 그것 때문에 고통하고 갈등하는 것 자체가 더러운 마음이라는 사실을 알 수 있었습니다. 내 마음에 있던 옳음이 비로소 내려놓아졌습니다. 그러자 전에 볼 수 없었던 세계가 보이고, 전에 가질 수 없었던 마음의 세계가 저에게 흘러들어오는 것을 경험할 수 있었습니다.

주인의 은혜와 긍휼을 허비한 불의한 청지기
누가복음 16장에 나오는 ‘불의한 청지기’ 말씀이 새롭게 보였습니다. 불의한 청지기가 주인의 재산을 허비한다는 이야기가 들려, 주인이 그에게
‘청지기 사무를 계속하지 못하리라’고 이야기합니다. 그러자 청지기가 속으로 ‘땅을 파자니 힘이 없고 빌어먹자니 부끄럽구나.’ 하더니, ‘내가 할 일을 알았도다!’라고 합니다. 그리고 주인에게 빚진 자들을 낱낱이 불러다가 빚을 탕감해 주는 일을 합니다.
“너는 빚을 얼마나 졌느냐?”
“기름 백 말입니다.”
“네 증서에 오십 말이라고 고쳐라.”
“너는 빚을 얼마나 졌느냐?”
“밀 백 석입니다.”
“네 증서에 팔십 석이라고 써라.”
청지기는 ‘내가 이렇게 하면 직분을 빼앗긴 후 저희가 나를 자기 집으로 영접하리라’ 하고 빚진 자들에게 은혜와 긍휼을 베풀었습니다.
그러자 주인이 청지기에게 잘했다고 칭찬했습니다. 전에는 청지기가 빚진 자들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너, 우리 주인에게 빚진 것을 언제 갚을 거야?”
“곧 갚을 테니 조금만 참아 주십시오.”
“작년에도 기다려 주었잖아. 빚진 밀 백 석 중에 올해 오십 석을 갚아!”
“그러면 우리 식구가 먹고살 것이 없습니다.”
“그래도 안 돼! 작년에도 봐주었는데 또 미루려고 하네.”
청지기는 옳은 소리를 하면서 나름대로 열심히 일했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하면 할수록 주인의 소유를 허비했습니다. 주인의 소유 가운데 가장 귀한 것이 주인의 인자와 긍휼이었기 때문입니다. 청지기는 사무를 계속할수록 사람들에게 베풀 주인의 인자와 긍휼을 허비하는 삶을 살았습니다. 그렇게 살던 청지기가 직분을 빼앗길 상황에 처해 빚진 자들을 불러다가 주인에게 진 빚을 탕감해 주었을 때 주인이 잘하였다고 칭찬했습니다. 사람들에게 주인의 인자와 긍휼을 나타냈기 때문입니다.

나를 신뢰하는 마음을 버리는 회개를 통과해 믿음의 세계로
지난 날들을 돌아보니, 제가 불의한 청지기처럼 사람들에게 늘 옳은 소리를 하며 살았지 주인의 인자와 긍휼을 나타내지는 못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내 직분을 빼앗으셨구나.’라는 마음이 들었습니다. 이어서 ‘불의의 재물로 친구를 사귀라’고 하신 예수님의 말씀을 보며 ‘하나님이 내게 주신 모든 것은 내 것이 아니구나. 하나님은 그것으로 내가 이 땅에 있는 동안에 친구를 사귀길 원하시는구나.’라는 마음이 들었습니다. 그 뒤로 저에게 두 친구가 생겼습니다. 한 친구는 예수 그리스도고, 다른 한 친구는 교회의 형제 자매들입니다. 그 전에 저는 늘 옳은 사람으로 서 있었는데, 하나님께서 저에게 인자와 긍휼을 베풀려는 마음을 주셨습니다.
하나님이 저에게 하신 다른 큰 일은, 나를 신뢰하는 마음을 빼내신 것이었습니다. 자기 생각과 판단을 믿기 때문에 우리 마음에 옳음이 생겨나고, 자신의 생각과 판단을 믿고 있는 동안 그 옳음은 끝이 나지 않습니다. 옳음이 버려진 사람들을 보면, 그 마음에서 자기를 신뢰하는 마음이 버려졌습니다.
믿음은 그냥 생기는 것이 아니고, 회개를 통해서 분명한 믿음의 세계로 들어갈 수 있습니다. 회개는 자기 자신을 믿는 마음을 버리는 것입니다. 내가 잘못한 데에서 돌이키려고 하는 것이 회개가 아니고, 나를 신뢰하는 마음을 버리는 것이 성경에서 말하는 진정한 회개입니다. 자기를 믿는 마음이 있으면 참된 믿음이 형성되기 어렵습니다. 나를 신뢰하는 마음이 버려졌을 때 우리 안에 참된 믿음이 자리를 잡습니다.
제가 나를 신뢰하는 마음을, 내 마음에 있던 옳음을 한 번 버렸을 때 모든 것이 다르게 보였습니다. 내 눈에 보이는 형편이나 내 속에서 올라오는 생각을 믿을 수가 없었습니다. 내 마음에 드는 생각이 아무리 옳다 해도 그것은 오히려 믿음을 방해하는 것들일 뿐입니다. 그처럼 내 생각과 판단을 믿을 수 없기 때문에 성경 말씀대로 믿는 믿음의 세계를 경험할 수 있었습니다.

예수님이 이 집에 오셨다면
그 후, 구원받으신 어느 할아버지가 몸이 많이 불편해져서 의사가 가족들에게 “이제 준비하셔야겠습니다.”라고 했습니다. 병원에서 손쓸 일이 없어서 할아버지를 집으로 모신 뒤, 가족들이 마지막으로 얼굴을 뵈려고 다 찾아왔습니다. 할아버지도 그런 사실을 느꼈습니다. ‘내가 죽을 날이 얼마 남지 않아서 인사하러 왔구나.’
제가 그 집에 심방을 갔는데, 전에는 한 번도 들지 않았던 마음이 일어났습니다. ‘예수님이 이 집에 오시면 할아버지에게 뭐라고 하시겠나?’ 내 눈에 보이는 할아버지는 식사도 못 하고 호흡도 가빠 병원에서 살날이 얼마 남지 않았다고 이야기했지만, 예수님은 일어나라고 하시겠다는 마음이 들었습니다. 내 마음에 드는 생각 말고 주님이 주시는 마음으로 귀가 어두운 할아버지의 귀에 대고 크게 말했습니다. “할아버지, 일어나셔야죠!” 그 할아버지는 농사짓는 것을 좋아하셨습니다. “할아버지, 밭에 가셔야죠!” 그러자 할아버지가 헤헤 하고 웃으셨습니다.
그 후 놀라운 일이 일어났습니다. 할아버지가 다시 일어나시고, 밭에 일하러 가신 겁니다. 배추, 무, 고구마 등 여러 농작물을 기르고 키위 농장을 하시는데, 그 해 가을에 할아버지의 아내인 할머니가 저에게 전화해 ‘차를 가지고 와서 할아버지가 농사지은 것들을 가져가라’고 하셨습니다. 제가 승합차를 몰고 가서 농작물을 가득 싣고 왔습니다. 보통 상품 가치가 있는 키위는 팔고 남은 것으로 가족들이 엑기스도 만들고 잼도 만든다고 나누어 가져가는데, 할아버지가 아주 좋은 키위를 감추어 두었다가 저에게 잔뜩 주셨습니다. “어이구, 할아버지. 됐습니다.” 하는데도 차에 가득 실어주셨습니다.
그 전에 저는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도 내 마음에 드는 생각과 판단을 믿었고, 내가 옳다고 하는 생각을 믿고 살았습니다. 그런데 옳음을 버리고 믿음의 세계로 들어가니까 새롭고 놀라운 세계가 시작되었습니다.

생명을 위해 옳음을 버린 창기
‘솔로몬의 재판’ 하면 사람들이 다 압니다. 한 아이를 두고 두 엄마가 서로 자기 아이라고 우기는데, 솔로몬이 지혜로 진짜 엄마를 가려낸 재판입니다. 이 재판에서 사람들은 솔로몬의 지혜를 주목하지만, 솔로몬의 지혜보다 더 아름답고 귀하고 복된 것이 그 이야기 안에 들어 있습니다.
두 창기가 거의 같은 시기에 각기 아이를 낳았습니다. 그런데 한 창기는 미련해서 밤에 자다가 아이 위에 누워 아이가 죽고 말았습니다. 그때 그 창기가 죽은 아이를 함께 출산한 다른 창기 옆에 누이고, 그 여자의 아이를 안고 와서 자기 옆에 뉘었습니다. 문제는, 두 여인이 창기여서 아버지가 누군지 모르니 산 아이가 누구의 아들인지 알 수가 없는 겁니다. 요즘 같으면 유전자 검사로 친모를 금방 가려내겠지만, 서로 자기 아이라고 우기는데 아무도 판결을 내리지 못했습니다. 결국 왕 앞에까지 갔습니다.
솔로몬 왕이 재판을 시작했습니다. 두 여인이 서로 산 아이가 자기 아이라고 주장하는데, 솔로몬이 ‘칼로 아이를 둘로 나누어 두 사람에게 반씩 주라’고 했습니다. 그러자 가짜 엄마는 그렇게 하라고 하고, 진짜 엄마는 그 아이를 위하여 마음이 불붙는 것 같아서 아이를 죽이지 말고 상대 여자에게 주라고 했습니다.
진짜 엄마는 아이의 생명을 위하여 자신의 옳음을 버렸습니다. 산 아이가 자기 아이 맞지만, 자기 아이라고 옳음을 주장하면 주장할수록 아이는 죽습니다. 아이를 살리기 위하여 여인은 옳음을 버려야 했습니다. 옳음을 버리면 그걸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미련곰탱이 같으니라고! 아무리 미련해도 그렇지, 아이 위에 누워서 자기 아이를 죽이는 엄마가 어디 있냐?”라는 지탄을 받아야 합니다. 그뿐 아니라 자신이 진짜 엄마라고 주장했던 것이 다 거짓말이고, 심지어 왕 앞에서까지 거짓말을 한 것이 됩니다. 감옥에 갈지 아니면 목숨을 잃을지, 어떤 일이 닥칠지 모릅니다. 그러나 진짜 엄마는 아이를 살리기 위하여 자신의 옳음을 버렸습니다.

마음에 있는 옳음을 한번 내려놓아 보라
진짜 옳은 것은, 이처럼 생명을 위하여 자신의 옳음을 버리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자신이 옳다고 여기면 죽어도 옳다는 생각을 가지고 그 옳음을 주장하는데, 그것은 옳은 것이 아닙니다. 미련한 것입니다. 하나님이 보시기에 옳은 것은, 아이의 진짜 엄마처럼 생명을 위하여 자신이 옳은데도 그 옳음을 버리는 것입니다. 자신의 옳음을 버리는 것이 진짜 옳은 것이라는 사실을 우리는 성경에서 배울 수 있습니다.
솔로몬의 재판에서 솔로몬의 지혜보다 더 아름답고 위대한 것은 진짜 엄마의 마음이었습니다. 그 여자는 천하디 천한 창기였습니다. 그런데 그 여자를 통해서 위대한 마음이 나타났습니다. 너무 귀한 모습이 나타났습니다. 생명을 위하여 자신의 옳음을 버리는 것, 그것이야말로 진정으로 옳은 것입니다.
사람들은 “나는 한번 한다면 하는 사람이야!”라고 말하는 것을 좋아합니다. 자신을 옳은 사람으로 나타내려는 그런 마음은 얕고 잘못된 마음입니다. 실제로 많은 사람들이 자신이 옳다는 생각 하나를 버리지 못해서 저주를 받고 멸망을 당합니다.
이제 마음에 있는 옳음을 한번 내려놓아 보십시오. 그러면 생명의 말씀이 들릴 것입니다. 그 말씀이 구원의 길로, 놀라운 하나님의 세계로 인도할 것입니다. 자신의 아이를 위하여 옳음을 버린 창기처럼, 거듭난 성도가 생명을 얻기 위해 자신의 옳음을 버릴 때 생명을 얻는 복된 삶을 살게 될 것입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