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가지의 꿈
두 가지의 꿈
  • 박옥수(기쁜소식강남교회 목사)
  • 승인 2019.10.15 16: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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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년 10월호 기쁜소식
믿음에 이르는 길 | 세상 죄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양

 

구원받을 꿈과 저주를 받을 꿈
창세기 40장에 보면, 요셉이 누명을 쓰고 갇혀 있던 감옥에 바로의 두 관원장이 죄를 지어 들어옵니다. “그 후에 애굽 왕의 술 맡은 자와 떡 굽는 자가 그 주 애굽 왕에게 범죄한지라. 바로가 그 두 관원장, 곧 술 맡은 관원장과 떡 굽는 관원장에게 노하여 그들을 시위대장의 집안에 있는 옥에 가두니 곧 요셉의 갇힌 곳이라.”(창 40:1~3) 그런데 한 사람은 구원을 받고, 한 사람은 멸망을 당합니다. ‘옳거니, 이것은 인간이 구원받는 길과 멸망당하는 길을 가르쳐 주는 이야기다!’ 하고, ‘똑같이 죄를 지었는데 왜 한 사람은 구원받고 한 사람은 멸망을 당하는지’를 성경 안에서 찾아야 합니다.
신기한 것은, 두 사람이 꾼 꿈을 요셉이 해석하는데 그 해석대로 되었다는 것입니다. “바로의 술 맡은 관원장은 전직을 회복하매 그가 잔을 바로의 손에 받들어 드렸고 떡 굽는 관원장은 매달리니, 요셉이 그들에게 해석함과 같이 되었으나”(창 40:21~22) 그러니까 술 맡은 관원장의 꿈은 구원받을 꿈이고, 떡 굽는 관원장의 꿈은 저주를 받을 꿈입니다. 거기까지는 창세기 40장에서 찾을 수 있는데, 두 사람의 꿈이 왜 그런 내용의 꿈인지는 요셉 같은 지혜가 없어서 이해가 안 됩니다.
두 사람이 꾼 꿈의 내용과 요셉이 해석해준 내용을 생각해 봅니다.
“술 맡은 관원장이 그 꿈을 요셉에게 말하여 가로되, 내가 꿈에 보니 내 앞에 포도나무가 있는데 그 나무에 세 가지가 있고 싹이 나서 꽃이 피고 포도송이가 익었고, 내 손에 바로의 잔이 있기로 내가 포도를 따서 그 즙을 바로의 잔에 짜서 그 잔을 바로의 손에 드렸노라.”(창 40:9~11)
이 말씀을 찬찬히 생각하다 보면 “내 앞에 포도나무가 있는데”라는 부분에서 생각이 탁 떠오릅니다. 예수님이 “내가 참 포도나무요, 내 아버지는 그 농부라.” 하셨습니다. ‘아, 포도나무는 예수님이구나!’ 이어서 술 맡은 관원장이 애굽 왕 바로 앞에 나갈 때 무엇을 들고 나갔는지 이야기하고 있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 나갈 때 무엇을 들고 가야 하는지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오직 포도나무에 맺힌 포도의 즙만 가지고
바로 왕이 마시는 술을 관장하는 관원장이 되려면 외모도 괜찮고 아는 것도 많았을 것입니다. 관원장이니 위치도 상당해서 어깨 펴고 큰소리칠 수 있었을 것입니다. 거기에 빠져 함부로 살다가 결국은 잘못한 것이 드러나 감옥에 들어갔습니다. 그가 행한 것은 죄악이기에, 자신이 행한 것을 들고 바로에게 나가서는 안 되었습니다. 술 맡은 관원장이 포도의 즙을 짜서 나갔다는 이야기가 우리 마음을 뜨겁게 합니다.
박옥수 목사의 간증을 하나 소개합니다.
“제가 주일학생 때였습니다. 우리를 가르치던 선생님이, 어느 겨울 밤에 길을 가다가 거지가 벌벌 떨고 있는 것을 보고 입고 있던 코트를 벗어서 거지에게 입혀 주고는 얼른 뛰어왔다고 했습니다. 굉장히 멋있어 보였습니다. 저도 그렇게 해보고 싶은데 저에게는 코트가 없었습니다. 마침 비상금으로 숨겨두었던 빳빳한 새 돈이 있어서, 하루는 거지에게 그 돈을 던져주고는 얼른 뛰어왔습니다. 그 일이 제 마음에서 잊혀지지 않고 뿌듯한 기억으로 자리하고 있었습니다. 저는 선한 일을 하면 기도하면서 미소를 지으며 하나님을 불렀습니다. 하지만 죄를 지었을 때에는 ‘이 더러운 죄인이…’ 하며 고통했습니다.”
사람들이 십일조를 냈거나 선한 일을 했을 때에는 하나님 앞에 나가는 데 자신이 있고, 죄를 지으면 거리낌을 갖습니다. 성경은 그것이 잘못되었다고 말합니다. 자신의 행위를 의지하는 신앙이기 때문입니다. 우리 행위는 자신이 보기에 잘할 때도 있고 선할 때도 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보실 때에는 그 모든 것이 더럽습니다. 그래서 자신의 선이나 의를 가지고 나가면 멸망을 당한다고 성경은 이야기합니다.
하나님 앞에 나갈 때에는 술 맡은 관원장처럼 해야 합니다. 그는 포도즙을 바로의 잔에 짜서 그것을 들고 나갔습니다. 자신이 행한 것으로 감옥에 왔기에, 자기 것을 들고 나가면 멸망을 당할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그는 오직 포도나무에 맺힌 포도의 즙만 가지고 바로에게 나갔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만 들고 나간 것입니다.
“하나님, 저는 하나님 앞에서 선을 행한 것이 하나도 없는 더럽고 추한 인간입니다. 저에게는 악뿐입니다. 그러니 저를 보지 말고 내 모든 죄를 위하여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신 예수님의 피를 보시옵소서. 그 피가 저의 죄를 사했으니 그 공로로 저를 받으시옵소서.”
하나님 앞에 나가는 술 맡은 관원장의 신앙은 이와 같습니다. 이것이 하나님 앞에 나가는 바른 자세이며, 구원받는 자세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죄를 사함받기 위해 철야하고, 금식하고, 산에 가서 기도하고, 눈물을 흘리며 애통해합니다. 그렇게 해야 죄가 씻어지는 줄 알지만, 우리 죄를 씻는 것은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 그리스도의 피밖에 없습니다. 십자가의 피 외에 다른 것을 이야기하는 사람은 예수님을 믿지 않는 사람입니다.
“… 내가 그들의 죄악을 사하고 다시는 그 죄를 기억지 아니하리라. 여호와의 말이니라.”(렘 31:34)
“그러므로 형제들아 우리가 예수의 피를 힘입어 성소에 들어갈 담력을 얻었나니”(히 10:19)

예수님의 피 외에는 하나님 앞에 담대히 나가게 할 수 있는 것이 없습니다.

떡 위에 구운 식물을 얹은 떡 굽는 관원장
요셉이 술 맡은 관원장의 꿈을 좋게 해석하는 것을 듣고 떡 굽는 관원장도 자신이 꾼 꿈을 이야기했습니다.
“나도 꿈에 보니 흰떡 세 광주리가 내 머리에 있고 그 윗광주리에 바로를 위하여 만든 각종 구운 식물이 있는데 새들이 내 머리의 광주리에서 그것을 먹더라.”(창 40:16~17)
흰떡은 우리를 위해 찢기신 예수님의 몸을 가리킵니다. 우리가 성찬식을 가지며 주님을 기억할 때 떡과 포도주를 먹고 마십니다. 예수님의 몸이 십자가에 못 박혀 찢기심으로 우리 죄가 씻어졌습니다. 그 흰떡만 들고 나가면 구원을 받는데, 떡 굽는 관원장은 거기에 각종 구운 식물을 얹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 나갈 때 예수님 외에 무언가를 얹어서 가는 신앙의 모습을 보여 주는 것입니다. 십일조 낸 것, 주일 지킨 것, 새벽기도 간 것, 어려운 사람 도와준 것….
마태복음에서 예수님이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그날에 많은 사람이 나더러 이르되 ‘주여, 주여,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하며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며 주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치 아니하였나이까?’ 하리니”(마 7:22) 여기에 등장하는 사람들은 예수님 앞에 자신들이 잘한 것을 들고 왔습니다. 그들은 결국 저주를 받습니다. “그때에 내가 저희에게 밝히 말하되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 하리라.”(마 7:23) 자신이 잘한 것을 들고 가면 멸망을 당합니다.
술 맡은 관원장과 떡 굽는 관원장의 차이가 이것입니다. 안타깝게도, 오늘날 떡 굽는 관원장의 신앙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 너무나 많습니다. 난 40일 기도를 했어, 난 헌금을 많이 했어, 난 집을 팔아서 예배당을 지었어…. 선한 것을 가지고 가면 하나님이 받으실 줄 알지만 하나님은 인간에게 죄악이 너무 많아서 사형을 언도하셨습니다. 인간은 다 사망을 당해야 합니다. 그처럼 죽어야 할 우리 대신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셨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에게는 예수님의 피 외에는 하나님 앞에 들고 갈 것이 아무것도 없습니다.
누구든지 예수님이 흘리신 피가 자기 죄를 눈보다 희게 씻으신 사실을 믿지 않으면 그는 예수님을 믿지 않는 사람입니다. 죄를 자신이 씻으려고 하는 사람은, 예수님이 못 씻은 죄를 자신이 씻겠다는 것과 같습니다. 자신이 예수님보다 더 능력이 있다는, 교만하기 이를 데 없는 사람입니다.
우리는 무엇을 믿어야 합니까? 예수님의 피를 믿어야 합니다. 감동을 받거나 마음이 뜨겁지 않아도 좋습니다. 예수님이 우리의 모든 죄를 십자가에서 다 씻으신 사실을 믿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실 때 “다 이루었다!” 하셨습니다. 우리 죄를 사하는 일을 다 이루었다는 말입니다. 십자가에서 우리 죄가 완벽하게 씻어졌기 때문에 우리가 죄를 씻기 위해 할 일이 아무것도 없습니다. 우리 죄를 씻는 일은 예수님이 끝냈습니다. 예수님의 피가 우리 죄를 영원히 씻었습니다. 만일 우리가 아직도 내 죄를 위해 할 일이 있다면, 예수님이 다 이루지 못했다고 여기는 것입니다.

은혜를 인하여 믿음으로 구원을 얻었나니
떡 굽는 관원장은 우리 죄를 씻기 위해 찢기신 예수님의 몸으로는 부족할 것 같아서 거기에 자기 보기에 좋은 것을 얹었습니다. 잘한 것, 선한 것을 더하여 나가려고 했기 때문에 죽임을 당했습니다.
박옥수 목사의 간증을 하나 소개합니다.
“사람들은 예수님의 피를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잘한 것을 바라봅니다. 저도 소년 시절에 그렇게 신앙생활을 했습니다. 한번은 어느 집사님이 교회에 종각을 만들었는데, 페인트를 칠하지 않은 채 종각을 세웠습니다. 높은 종각에 올라가서 페인트를 칠해야 하는데, 아무도 올라가려고 하지 않아 제가 올라갔습니다. 높은 곳에서 페인트를 칠하다 보니 얼굴과 옷에 페인트가 다 묻었습니다. 그때 ‘내가 지금 떨어져서 죽으면 교회 일을 하다 죽었으니 하나님이 나를 봐주시지 않을까?’라고 생각했습니다. 만일 그때 떨어졌으면 영원히 지옥에 갈 뻔했습니다.”
예수님이 우리 죄를 위해 죽으신 것을 믿습니까? 예수님이 우리 죄를 대충 씻으신 것이 아니라, 모든 죄를 완벽하게 씻으셨다고 믿습니까? 많은 사람들이 이 진리를 모르고 있습니다. 많은 기독교인이 죄를 용서해 달라고 눈물을 흘리며 기도하는 것은, 예수님이 죄를 사해 주신 사실을 믿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너희가 그 은혜를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었나니 이것이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니…”(엡 2:8~9)
우리가 구원받는 것은 우리 행위로 되는 것이 아닙니다. 오직 예수님의 피로만 됩니다. 기분이 좋든지 나쁘든지, 기쁘든지 슬프든지, 예수님의 피가 우리 죄를 완벽하게 씻으셨다는 것을 믿어야 합니다. 죄가 남아 있다는 사람은 예수님이 달린 십자가를 모욕하는 것입니다. 십자가를 믿어야 합니다. 십자가에서 죄가 끝나고, 심판이 끝나고, 멸망이 끝났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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