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사마리아인이
어떤 사마리아인이
  • 월간 기쁜소식
  • 승인 2019.12.11 12: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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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년 12월호 기쁜소식
믿음에 이르는 길 | 세상 죄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양 (3편)

강도 만난 자가 한 일은 사마리아인을 만난 것 외에 없습니다.
사마리아인이 그를 불쌍히 여겼고, 가까이 갔으며, 상처를 싸맸고,
그를 주막으로 데리고 가서 돌보아 주었습니다.

 

진정한 구원은 ‘사마리아인이 모든 일을 하는 것’
누가복음 10장에 강도를 만난 사람 이야기가 나옵니다. 실제로 있었던 일이 아니라, 예수님이 하신 이야기입니다.
어떤 사람이 예루살렘에서 여리고로 내려가다가 강도를 만났습니다. 강도들이 그의 옷을 벗기고 때려서 거반 죽은 것을 버리고 갔습니다. 이 사람은 죽음 직전에 있었기에 스스로는 살아날 수 없었습니다.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상태로 죽어가고 있는데, 마침 한 제사장이 지나갔습니다. 제사장은 그 사람이 강도를 만나 죽어가고 있음을 바로 알았습니다. 그런데 구해주지 않고 그냥 지나갔습니다. 이어서 레위인이 지나가다가 그를 보고 역시 그냥 지나갔습니다. 세 번째로 사마리아인이 와서 이 사람을 구원했습니다.
세 사람 다 강도 만난 자를 한눈에 알아보았습니다. 그런데 두 사람은 ‘이 근방 어딘가에 강도들이 있겠구나! 강도를 만나면 나도 이 사람처럼 비참하게 되겠구나. 도와주다가 나도 이렇게 될지 모르니 빨리 이곳을 피해야겠다!’ 하고 황급히 지나갔습니다. 선한 사마리아인은 강도를 만나도 괜찮다는 마음으로 생명을 걸고 이 사람을 구했습니다.
이 이야기를 강도 만난 사람의 입장에서 다시 생각해 봅시다. 자신이 죽어가고 있는데, 제사장이 다가오더니 그냥 지나가고 이어서 레위인이 다가오더니 역시 그냥 지나갔습니다. 그때마다 강도 만난 자는 ‘저 사람이 도와주지 않으면 나는 죽는데…’라고 생각하며 죽음이 점점 다가왔을 것입니다. 그때 사마리아인이 다가왔습니다.
누가복음 10장 33절에 굉장히 아름다운 이야기가 나옵니다. “어떤 사마리아인은 여행하는 중 거기 이르러 그를 보고 불쌍히 여겨” 이 말씀에서 ‘거기’가 어디입니까? 강도 만난 자가 쓰러져 있는 곳, 기쁨과 소망이 없는 곳, 절망뿐인 곳, 죽음이 기다리는 곳입니다. 어떤 사마리아인이 거기 쓰러져 죽어가고 있는 강도 만난 자를 보고 불쌍히 여겼습니다.
“가까이 가서 기름과 포도주를 그 상처에 붓고 싸매고 자기 짐승에 태워 주막으로 데리고 가서 돌보아 주고”(눅 10:34)
강도 만난 자를 구원할 때 선한 사마리아인이 모든 것을 했습니다. 강도 만난 자가 한 일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진정한 구원은 바로 그런 것입니다. 우리가 선을 행하거나 무엇을 열심히 해서 구원받는다면 그것은 온전한 구원이 아닙니다. 예수님의 은혜가 아닙니다. 은혜는 내가 일하거나 대가를 지불하지 않는 것을 뜻합니다. 예수님이 우리를 구원하시려고 100% 일하셔야 은혜입니다.
사람들은 구원받기 위해 자신이 무언가를 하려고 합니다. 성경에서 구원받는 이야기가 나올 때마다 자신이 무엇을 하려고 한 사람은 멸망과 저주를 받았습니다. 반대로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자신을 깨닫고 예수님이 하신 것만을 받아들인 사람이 구원받았습니다.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을 인함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을 인함이라.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 우리가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도다.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하여 각기 제 길로 갔거늘 여호와께서는 우리 무리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도다.”(사 53:5~6)
여기서 ‘그’는 예수님을 가리킵니다. 우리 죄를 예수님에게 넘기거나 죄를 씻는 것은 우리가 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 죄를 예수님에게 넘긴 분은 하나님입니다. 하나님을 아는 사람이나 모르는 사람이나, 예수님을 믿는 사람이나 안 믿는 사람이나, 모든 사람의 죄악을 하나님이 예수님에게 넘기셨습니다. 우리가 우리 죄를 예수님에게 넘긴다면 완벽하게 넘길 수 없습니다. 천 가지, 만 가지 되는 죄를 어떻게 완벽하게 넘기겠습니까? 그렇기 때문에 죄를 넘기는 일은 하나님이 맡으셨습니다.
“… 여호와께서는 우리 무리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도다.”(사 53:6)
그와 마찬가지로 강도 만난 자가 구원받는 이야기에서 그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기에 사마리아인으로 등장한 예수님이 모든 것을 하셨습니다.
다윗 왕 시대에 다윗이 법궤를 예루살렘 성에 모시려고 했습니다. 그동안 법궤가 있었던 아비나답 집에서 법궤를 수레에 싣고 웃사와 아효가 수레를 몰았습니다. 그런데 중간에 수레를 끌던 소가 뛰었고, 웃사가 법궤가 바닥에 떨어질까봐 얼른 붙들었습니다. 그러자 하나님이 웃사를 쳐서 웃사가 그 자리에서 죽었습니다. 하나님이 넘어지는 우리를 붙들어 주셔야지, 인간이 하나님을 붙든다는 것은 너무 교만한 일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당신을 위하여 일하는 것 말고 하나님이 우리를 위해 일하시는 것을 진정으로 기뻐하십니다.

예수님이 하신 일을 빼고 내 것을 더하는 만큼 구원이 무너진다
죄를 사함받는 것이 우리 생각으로는 이해가 잘 안 됩니다. 구원받으려면 우리가 선해야 하고, 하나님의 뜻대로 살아야 하고, 율법을 지켜야 되는 줄 알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인간은 죄를 지을 수밖에 없습니다.
진리는,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혀서 우리가 받아야 할 죄의 형벌을 다 받으셨다는 것입니다. 우리 죄에 대한 심판이 끝났습니다. 우리가 당할 사망과 저주와 멸망이 끝났습니다. 믿든 믿지 않든 우리 죄가 예수님에게 넘어갔고,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그 죄에 대한 벌을 받으셨습니다. 우리를 지옥으로 가게 하는 우리 죄는 예수님이 짊어지고 돌아가셨고, 대신 예수님이 선하게 사신 의는 우리에게 다 주셨습니다. 이 사실을 믿으면 우리가 예수님처럼 의롭고 거룩합니다.
이것을 믿는 것이 예수님을 믿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우리를 의롭게 하기 위해 행하신 일을 빼고 내 것을 더하면, 더하는 만큼 구원이 무너집니다. 구원은 100% 예수님이 행하신 것으로 이루어집니다. 선한 것, 잘한 것, 충성한 것, 봉사한 것, 그런 것을 더하면 더할수록 망합니다.
강도 만난 자가 한 일이 무엇입니까? 강도를 만나 죽어가는 위치에서 사마리아인을 만난 것 외에 아무것도 없습니다. 사마리아인이 그를 보고 불쌍히 여겼고, 사마리아인이 가까이 갔으며, 사마리아인이 기름과 포도주를 붓고 상처를 싸맸으며, 사마리아인이 주막으로 데리고 가서 돌보아 주었고, 사마리아인이 주막 주인에게 데나리온 둘을 주며 그를 잘 돌보아 주라고 했습니다. 강도 만난 자가 구원받은 이 이야기에서 강도 만난 자가 한 일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모두 사마리아인이 했습니다.
예수님은 세상에 있는 모든 사람의 죄를 하나도 남기지 않고 다 짊어지셨고, 십자가에 못 박혀 형벌을 받으셔서 죄를 손톱만큼도 남기지 않고 완벽하게 씻으셨습니다. 우리가 할 일은 없습니다. 그냥 믿으면 됩니다.
‘내 죄가 사해졌네! 내 죄가 씻어졌네! 예수님이 나를 깨끗하게 하셨네! 이제 나는 천국 가!’

예수님의 피로 영원한 속죄를 이루셨다
사람들은 “예수님을 믿고 죄를 또 안 지어요?”라고 말합니다.
“그리스도께서 장래 좋은 일의 대제사장으로 오사 손으로 짓지 아니한, 곧 이 창조에 속하지 아니한 더 크고 온전한 장막으로 말미암아 염소와 송아지의 피로 아니하고 오직 자기 피로 영원한 속죄를 이루사 단번에 성소에 들어가셨느니라.”(히 9:11~12)
예수님이 인간의 죄를 사하실 때 어느 시대에서 어느 시대까지의 죄를 사하신 것이 아닙니다. 영원한 속죄를 이루셨다고 했습니다. 예수님이 돌아가시고 2천 년, 3천 년, 수만 년이 지나도, 그때 사람들이 짓는 죄를 씻는 것은 영원한 속죄 안에 들어 있기 때문에 모든 죄가 끝났습니다.
구약시대에는 염소와 송아지의 피로 죄를 사했습니다. 그런데 그 피는 죄를 영원히 씻지 못하기에 죄를 지을 때마다 제사를 드려야 했습니다. 예수님은 염소와 송아지의 피가 아닌 당신의 피로 영원히 죄를 사하셨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다시 죄를 위하여 제사를 드리지 않아도 됩니다.
성경은 예수님이 당신의 피로 영원한 속죄를 ‘이룰 것이다’라고 하지 않았고, 이루었다고 했습니다. 다 이루었습니다. 단번에 성소에 들어가 영원한 속죄를 이루셨습니다. 영원히 죄를 사하는 일을 끝내셨습니다.

죄를 사함받지 않은 것이 신앙생활을 잘하는 것인가?
죄를 사함받아 의롭게 되었다고 하면 이단시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러면 죄를 사함받지 않는 것이 신앙생활을 잘하는 것입니까?
“또한 성령이 우리에게 증거하시되, 주께서 가라사대 ‘그날 후로는 저희와 세울 언약이 이것이라’ 하시고 ‘내 법을 저희 마음에 두고 저희 생각에 기록하리라’ 하신 후에 또 ‘저희 죄와 저희 불법을 내가 다시 기억지 아니하리라’ 하셨으니, 이것을 사하셨은즉 다시 죄를 위하여 제사 드릴 것이 없느니라.”(히 10:15~18)
죄를 씻기 위해 할 일이 남아 있습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다시는 죄를 위해 제사 드릴 것이 없도록 완벽하게 끝냈습니다. 많은 목사님들이 죄를 씻기 위해 우리가 무엇을 해야 한다고 하는데, 그것은 성경과 다른 이야기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의롭다고 하셨으면 우리가 의롭습니다. 성경에는 우리가 의롭게 되었다는 구절이 정말 많습니다.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구속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 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 되었느니라.”(롬 3:23~24)
모든 사람이 죄를 범했는데, 예수님 안에 있는 구속으로 말미암아 아무 한 일 없이 우리가 의롭다 하심을 얻었습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보고
“의롭다!” 하셨다는 말입니다.
“네가 죄를 지었지만 네가 의롭다.”
“아닙니다. 저는 죄인입니다.”
“아니야. 너는 의로워.”
“아니에요. 죄인이라니까요.”
“할 수 없다. 너는 지옥에 가거라.”
이렇게 되어서는 안 되지 않습니까? 그런데 사람들이 신앙을 오해해서 하나님이 우리를 의롭게 하신 것을 믿지 않았습니다. 많은 기독교인들이 신앙의 기준을 예수님이 행하신 일이 아니라 자신의 행위에 두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늘 잘못하고 허물 많은 자신 때문에 신앙생활이 안 됩니다.
강도 만난 자가 죽어갈수록 구원받기 좋은 것처럼, 신앙생활은 무엇을 잘해야 하는 것이 아니라 못할수록 잘 됩니다. 신앙은 우리가 무엇을 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이 온전한 의를 이루신 사실을 믿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죽음은 헛되지 않습니다. 십자가의 죽으심으로 우리의 모든 죄가 씻어졌습니다. 성경이 그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성경과 마음을 같이한다면 분명히 성령이 살아 역사하셔서 누구든지 새 사람으로 변해 하나님을 섬기게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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