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종의 세계와 복종의 세계
순종의 세계와 복종의 세계
  • 글 | 김재홍 (기쁜소식인천교회 목사)
  • 승인 2019.12.24 11: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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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년 12월호 기쁜소식
옳음에서 벗어나 영의 세계로 (제7편)

복종을 가로막는 옳음
신앙에는 순종하는 신앙과 복종하는 신앙이 있는데, 아주 중요하고 복된 신앙의 단계가 복종하는 단계입니다. 그런데 복종하는 단계로 가지 못하게 만드는 것이 ‘자기 옳음’입니다.
요셉의 청지기는 요셉이 하는 일이 도무지 이해가 안 되었지만 요셉의 뜻 앞에 복종했습니다. 자기 생각을 버리고 요셉이 명하는 그대로 했습니다. 양식을 사러 온 요셉의 형제들의 자루에 양식 값을 도로 넣고, 베냐민의 자루에 은잔을 넣었습니다. 그런데 요셉이 말하길, 그들이 멀리 가기 전에 따라 미쳐서 도둑으로 몰아 잡아오라는 것입니다. 청지기는 요셉의 형제들이 훔치지 않았다는 사실을 분명히 아는데, 요셉은 그들을 도둑으로 몰아서 잡아오라고 했습니다. 정말 이해가 안 되는 일이었지만 청지기는 그대로 행했습니다. 이처럼 자기 생각과 판단을 버리고 복종했을 때 요셉은 청지기를 통해서 자신의 뜻을 마음껏 펼칠 수 있었습니다. 신앙생활에서 가장 아름답고 신령한 단계가 이처럼 복종하는 삶입니다. 그리고 이 아름다운 복종하는 삶을 깨뜨리는 것이 바로 ‘자기 옳음’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구원을 받아도 처음에는 자기 옳음을 따라서 살아갑니다. “각각 소견에 옳은 대로 행하였더라”고 한 사사 시대처럼, 구원받았어도 사람들에게 각각 자기 소견에 옳은 대로 살고자 하는 마음이 있습니다. 그러다가 그 단계를 넘어 순종하는 삶을 배우게 됩니다. 순종하는 신앙을 배우면 구원이 감사하고 복음을 위해 살고자 하는 마음이 일어나서 복음을 위해 헌신도 하고, 봉사도 하고, 물질로도 섬기고, 인생도 드리면서 살아갑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우리를 이 단계를 넘어 더 신령한 세계로 이끌어 가고 싶어하십니다. 그 세계는 복종하는 세계입니다. 이 단계까지 와야 신앙을 제대로 배우게 됩니다. 복종하는 신앙의 영역에 들어가면, 이해가 안 가고 또 마음이 일어나지 않아도 따르는 참된 신앙을 하게 됩니다.
그런데 복종하는 신앙의 영역에 들어가지 못하게 만드는 것이 ‘자기 옳음’입니다. 교회 안에서 불신을 갖고 있거나 불만을 갖고 있는 사람들, 또 교회나 하나님의 종을 대적하는 사람들에게는 공통점이 있는데, 하나같이 복종하는 신앙의 단계에 들어가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불신하고 대적하는 삶을 살게 되는 것입니다. 성도들이 자기 마음에 이해가 가고 마음이 일어나서 주님과 복음을 섬기는 것까지는 하는데, 어느 날 사탄이 그 마음에 ‘내가 옳다’는 옳음을 넣어주면 그 옳음이 불신을 낳습니다. 불신은 또 대적하는 마음을 불러옵니다.

복종하는 신앙을 배우지 못할 때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구원받고 신앙생활을 하면서 신실하게 복음을 섬기며 삽니다. 물질도 드리고, 시간도 드리고, 삶도 드립니다. 그런데 어느 날 복음을 대적하고, 교회를 떠나 교회를 비난하고 대적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런 사람들의 마음 세계에 들어가 보면 복종하는 신앙의 단계에 들어가지는 못했다는 사실을 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복종하는 신앙의 세계를 가르쳐 주고 싶어하십니다. 복종하는 신앙을 배우지 못하면 사탄이 그 마음에 옳음을 넣어줄 때 결국 대적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자신이 그동안 주님과 복음을 위해 살았다는 것이 마음에 더 큰 옳음으로 작용하고, 수고하고 희생하며 교회를 섬겼던 모든 것이 오히려 대적하는 재료가 되는 것입니다.
내 마음이 일어나서 주님을 위해 살고 복음을 위해 희생하는 삶이 전부가 아닙니다. 즉 순종하는 삶이 전부가 아니라, 복종하는 신앙이 있습니다. 그 신앙을 배워야 온전한 신앙이 이루어집니다.

자기 옳음의 위험
제가 서울에서 사역할 때, 한번은 서울 대전도집회를 앞두고 있었습니다. 그 당시에 일간지 전면에 광고를 내고 대전도집회를 대대적으로 광고했습니다. 저는 ‘어떻게 더 광고하면 대전도집회를 서울 시민들에게 잘 알려줄 수 있을까?’라고 생각했습니다. 과일 장사들이나 생선 장사들처럼 우리도 트럭에 아주 큰 스피커를 장착해서 자동 녹음된 광고 메시지를 틀어주기로 했습니다.
출근 시간에 트럭을 끌고 지나가면서 방송하니까 사람들이 다 쳐다보았습니다. ‘이게 무슨 소리지?’ 하고 쳐다보는데, “기쁜소식선교회에서는 죄 사함 거듭남의 비밀이라는 주제로…” 이런 내용으로 광고 메시지가 나가는 것이 듣기에 너무 좋았습니다. 서울 각 구區에 트럭을 한 대씩 준비해서 한 달쯤 광고하면 집회 소식을 모르는 사람이 없겠다 싶었습니다.
하루는 당시 대전에 계시던 박옥수 목사님이 서울에 연합예배를 드리러 오셨습니다. 그래서 목사님이 오시기 전에 사역자들이 다 모였는데, 사역자들이 광고용 탑차를 보고는 모두 “이거 너무 좋다. 누구 아이디어냐? 우리도 당장 만들어야겠다.” 했습니다. 예배를 마치고 우리 교회 형제들이 광고 탑차를 끌고 서울역으로 가는데, 교회 앞에서 미리 광고를 틀었습니다. 차도車道 건너편 멀리에서 틀었는데도 사역자들이 모여 있는 방까지 들려왔습니다.
박 목사님이 그 광고 소리를 듣고는
“이게 무슨 소리지?” 하셨습니다. 제가 자랑스럽게 “예, 대전도집회를 앞두고 저희 교회에서 탑차에 방송장비를 설치해 광고를 하고 있습니다.”라고 대답했습니다. 그러자 목사님이 “신문과 TV에 대전도집회 광고가 나가고 있는데 이건 좀 품위가 떨어진다. 그렇지?” 하시는 겁니다. 그때 제 마음에서 그렇게 광고하는 것이 효과가 아주 좋다는 옳음이 자리하고 있으니까, 목사님이 하신 말씀에 “예, 그렇습니다.” 하고 마음으로 순종이 바로 안 되었습니다. 하지만 교회로 돌아가서 형제들에게 광고 차량을 철수시키라고 했습니다.
그때는 몰랐지만 시간이 지나고 나서 내 판단이 틀렸고 종의 판단이 옳았다는 것을 하나님이 보여 주셨습니다.
하루는 늦둥이를 낳은 어떤 형제님에게 “형제님, 아이 잘 큽니까?”라고 물었습니다. 형제님이 “예, 잘 큽니다. 얼마나 귀여운지 모르겠습니다.” 하더니, “그런데 있잖아요. 아이를 막 재워 놓았는데 장사하는 차가 와서 광고 방송을 해서 아이를 깨우면 너무 짜증이 나요.”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이 저에게 그 말을 듣게 하신다는 마음이 들었습니다. 우리가 광고한 것은 장사하는 분들의 스피커 소리보다 10배쯤 컸기에, ‘만약 매일 동네 구석구석을 돌면서 방송을 했더라면 어떻게 되었을까?’라고 생각하니 아찔했습니다. 온 동네 아이들을 다 깨웠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만약 그때 그렇게 큰 스피커 소리로 우리 교회 근처인 관악구와 동작구를 매일 돌아다녔으면 사람들이 대전도집회를 어떻게 생각했겠습니까? 제가 그때 깨달은 것이, ‘내가 이해가 안 가도 그대로 받으면 나중에 하나님이 잘못된 것을 보여 주신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때 제 신앙이 복종하는 삶에 너무 익숙지 않다는 사실을 발견했습니다. 저는 그때까지 순종하는 삶을 배워서 순종하는 신앙의 길은 걸었습니다. ‘아, 순종하는 삶이 너무 아름답고 복되구나!’ 그 사실을 깨닫고 순종하는 삶을 배우면서 하나님의 은혜도 많이 입고, 교회에서 귀한 직분도 얻고, 복음의 일들에 쓰임도 받았습니다. 그러나 복종하는 단계에 이르러서는 쉽게 넘어가지 못했습니다.

바울에게 순종한 빌레몬
빌레몬서를 보면, 빌레몬에게 오네시모라는 종이 있었는데 그가 죄를 지어 감옥에 갔다가 사도 바울을 만나 구원을 받았습니다. 바울이 오네시모를 복음을 위해 자신을 돕는 자로 쓰고 싶었는데, 빌레몬의 종이므로 빌레몬에게 승낙을 요청했습니다. 그다지 중요한 내용이 아닌 것 같은데, 이 빌레몬서를 하나님은 성경 66권에 포함시키셨습니다. 왜냐하면 빌레몬이 순종하는 아주 귀한 마음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오, 형제여! 나로 주 안에서 너를 인하여 기쁨을 얻게 하고 내 마음이 그리스도 안에서 평안하게 하라.”(몬 1:20)
사도 바울은 빌레몬에게 오네시모를 자신의 심복으로 머물러 두고자 하는 일을 구하면서 “나는 네가 순종함을 확신하므로 네게 썼노니…”(몬 1:21)라고 했습니다. 바울은 ‘과연 빌레몬이 순종할까, 순종하지 않을까?’라고 재본 것이 아니라 순종할 것이라고 확신했습니다. 빌레몬이 그만큼 평소에 순종하는 삶을 살면서 사도 바울에게 신뢰를 주었기 때문입니다. 사도 바울이 여러 번 빌레몬에게 명했을 때 빌레몬이 늘 순종했기 때문에 이번에도 순종할 것을 확신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여러분은 교회나 하나님의 종이 여러분에게 어떤 일을 명할 때 ‘저 형제나 자매가 과연 이걸 받아들이고 순종할까?’ 하고 고민해 봐야 하는 사람입니까? 아니면, ‘저 형제라면 내가 이걸 명할 때 반드시 순종할 거야.’ 하며 마음껏 명할 수 있는 사람입니까? 빌레몬의 삶은 사도 바울 앞에서 항상 순종하는 삶을 살았기 때문에 ‘이번 일에도 나는 네가 순종함을 확신하므로 네게 썼다, 뿐만 아니라 나의 말보다 더 행할 줄 안다’고 했던 것입니다. 빌레몬은 바울이 어떤 일을 시키면 어쩔 수 없이 하거나 바울이 명하는 것만 행하는 것이 아니라, 바울의 마음을 받아서 전적으로 순종하고 따르는 아주 귀한 일꾼이었습니다.

순종하는 에스더
에스더 성경은 순종하는 삶과 복종하는 삶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에스더 1장에는 왕후 와스디가 왕의 명을 거역하고 불순종하는 이야기가 나옵니다. 왕후 와스디는 자기 소견을 따라 자기 옳은 대로 행했습니다. 그처럼 옳음을 따라간 결과가 어떻게 되었습니까? 옳음은 항상 저주를 불러오고, 고통을 불러오고, 사망의 역사를 불러옵니다. 와스디가 자기 옳음을 따라 삶으로 인해 결국은 폐위를 당했습니다.
에스더 1장에는 와스디가 자기 옳음을 따라 사는 삶이 나오고, 2장에는 에스더가 순종하는 삶이 나옵니다. 에스더가 모르드개의 이끌림을 받는 삶을 살고, 수하에 속하고 주관을 당하는 삶을 산다는 것이 에스더 2장의 특징입니다.
“왕의 조명이 반포되매 처녀들이 도성 수산에 많이 모여 헤개의 수하에 나아갈 때에 에스더도 왕궁으로 이끌려 가서 궁녀를 주관하는 헤개의 수하에 속하니”(에 2:8)
“모르드개의 삼촌 아비하일의 딸, 곧 모르드개가 자기의 딸같이 양육하는 에스더가 차례대로 왕에게 나아갈 때에 궁녀를 주관하는 내시 헤개의 정한 것 외에는 다른 것을 구하지 아니하였으나 모든 보는 자에게 굄을 얻더라.”(에 2:15)
위 말씀대로 에스더가 순종하는 삶을 살았고, 왕에게 나아갈 때 모든 보는 자에게 굄을 얻었습니다.
왕이 첫 번째 왕후를 뽑을 때는 왕후 와스디의 용모가 왕의 마음에 들어서였습니다. 와스디는 왕이 뭇 백성에게 자랑하고 싶을 정도로 아름다웠습니다. 그러나 와스디는 왕의 명령에 불순종하여 폐위를 당했습니다. 폐위를 당하니까 와스디가 가진 외형적인 아름다움은 아무 의미가 없었습니다. 왕은 이제 외형적인 아름다움을 가진 여인 말고 내면의 아름다움을 가진 여인, 즉 순종하는 아름다움을 가진 여인을 찾았습니다. 누가 그런 아름다움을 가지고 있는지 외모만 보고는 알 수 없기 때문에, 왕후가 되기 위해 모인 여인들을 왕궁에서 1년 동안 지내게 하면서 순종하는 삶을 사는지 검증하는 과정을 거치게 했습니다.
마지막 관문이 왕 앞에 나아가는 것이고, 왕 앞에 나아갔다가 왕이 다시 부르지 않으면 다시는 왕 앞에 가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127도에서 모인 많은 여인들 중에서 에스더가 뽑힌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에스더가 모든 보는 자에게 굄을 얻고 사랑스러웠던 이유가 어디에 있었습니까? 그것은 에스더가 순종하는 아름다움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처녀가 왕에게 나아갈 때에는 그 구하는 것을 다 주어 후궁에서 왕궁으로 가지고 가게 하고”(에 2:13)
여인들이 왕 앞에 나아갈 수 있는 기회가 단 한 번뿐이기에, 왕 앞에 나아갈 때에는 각자 자기를 아름답게 꾸밀 수 있도록 구하는 것을 다 주었습니다. 목걸이든 귀걸이든 열 손가락에 끼울 반지든, 무엇이든지 여인들이 달라고 하면 구하는 대로 다 주었습니다.
왕후로 간택되기 위해서 모인 127도 출신의 여인들은 모두 각자의 아름다움을 추구하며 자신을 꾸몄습니다. 그런데 에스더는 다른 여인들과 달랐습니다. 궁녀를 주관하는 내시 헤개가 정한 것 외에는 다른 것을 구하지 않았습니다. 모든 여인들이 난생처음 왕 앞에 가봅니다. 그러나 궁녀를 주관하는 내시 헤개는 수없이 많은 궁녀를 왕 앞에 보냈습니다. 그렇다면 누가 왕의 마음을 잘 알겠습니까? 궁녀를 주관하는 내시가 제일 잘 압니다. 그런데 헤개가 정해준 그대로 나간 사람은 에스더밖에 없었습니다. 다른 여인들은 자기 나름대로의 아름다움을 추구하고 그 모습으로 나아갔습니다. 에스더만 헤개가 정해준 대로 왕 앞에 나아간 것입니다. 이 순종의 아름다움 때문에 에스더가 왕후로 간택되었을 뿐 아니라 왕의 사랑을 받았습니다.

내가 살아온 영역보다 더 신령한 신앙의 세계로 가려면
구원받고 교회에서 순종하는 신앙을 배우면, 그 신앙은 우리에게 굉장히 귀하고 복된 것들을 가져다줍니다. 교회 안에서 순종을 배우지 못해 마음이 늘 삐닥하고 불순종하고 판단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런 사람은 신앙이 자라지 않을 뿐 아니라 삶 속에서 하나님의 역사나 은혜를 경험하지도 못합니다. 반대로 교회 안에서 순종을 배워서 에스더처럼 자신의 생각과 판단을 버리고 순종하는 삶을 사는 사람들은 하나님의 수많은 역사들을 경험하고 많은 은혜를 입으면서 삽니다.
순종하는 신앙의 다음 단계는 복종의 단계입니다. 에스더 4장에서는 모르드개가 에스더에게 복종하는 삶을 요구합니다. 그런데 에스더 4장에서 에스더는 복종하는 삶에 아주 서툰 것을 봅니다. 에스더가 그 동안 순종하면서 굉장히 귀한 삶을 살았고, 왕후의 직분을 얻었으며, 쓰임도 받고 굄도 얻고 은혜도 입었지만, 에스더 4장에서 모르드개가 에스더에게 복종을 요구했을 때 복종하는 부분에는 굉장히 서툴렀습니다. 에스더가 아주 어려워하면서 겨우 그 과정을 넘어가는 내용이 나옵니다.
우리가 구원받고 신앙생활을 하면서, 지금까지 내가 살아왔던 영역보다 더 신령한 신앙의 영역이 있습니다. 그 세계로 가려면 복종하는 삶을 배워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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