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대학에 들어가면 행복할 거라는 생각에 갇혀
좋은 대학에 들어가면 행복할 거라는 생각에 갇혀
  • 글 | 김학철(태국, 기쁜소식방콕교회 선교사)
  • 승인 2020.01.06 18:42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2020년 1월호 기쁜소식
선교사 수기(제1화)

김학철 선교사는 구원받기 전, 가난한 시골 동네에서 자라며 큰 도시에 있는 대학에 들어가는 것을 꿈꿨다.
그곳에 행복이 있을 것 같았다. 열심히 공부해서 대학에 들어갔지만 대학생활은 날이 갈수록
허무하고 자괴감에 빠졌다.

**기쁜소식선교회는 해외 200여 개의 교회에 230여 명의 선교사들을 파송하여 복음을 전하고 있습니다.
2020년에는 태국 김학철 선교사의 수기를 연재합니다. 현재 태국에는 7개의 교회와 3명의 선교사, 7명의 현지사역자가 있습니다.
선교지에 많은 관심을 가지고 기도해 주시기 바랍니다.

 

내가 태어난 곳은 아주 가난한 시골 동네로, 전기가 안 들어와 호롱불을 켜고 생활했다. 학교에 입학한 후로는 매일 4~5km를 걸어서 등하교를 해야 했다. 날씨가 좋으면 괜찮지만 비가 올 때는 우산도 없이 비를 맞으며 1시간 정도를 걸어가야 했다. 비를 맞는 것은 그래도 참을 만했지만, 눈이 올 때면 귀랑 코가 떨어져나갈 것 같고 발은 얼어서 감각이 없었다. 중학교를 졸업할 때까지 그 동네에서 살았는데, 초등학교에서 중학교까지 9년 동안 학교를 빠진 적이 한 번도 없었다. 가끔 아파서 학교에 못 가겠다고 하면 어머니가 이렇게 말씀하셨다. “아파서 죽더라도 학교 가서 죽어라.”
당시에는 사람들이 대체로 많이 가난했다. 우리 집에도 돈이 없고 밥도 없어서 학교에 도시락을 싸서 가져가지 못해, 학교에서 나눠주는 빵 하나로 점심을 때웠다. 사실 그거 하나 다 먹어도 배부를 양이 아닌데, 반절만 먹고 나머지 반절은 저녁에 집에 가서 먹으려고 보자기에 싸서 집으로 돌아갔다. 집으로 돌아가는 길 중간쯤에 동네 청년들이 그 빵을 뺏어 먹으려고 기다리고 있었다. 그렇게 형들한테 빵을 빼앗기면 울면서 집으로 갔다. 가끔은 빵을 빼앗기기 싫어서 산으로 올라가 멀리 빙 돌아서 집으로 갔다. 그렇게 가면 2~3시간 정도 걸어야 집에 도착할 수 있었다.
집에 도착할 때쯤이면 동네에 어둠이 조금씩 내려앉고 있었다. 산 밑에 있는 우리 동네를 바라보면 마치 반딧불처럼 빛나긴 했지만, 호롱불 불빛이 약해 어둠 속에서 금방이라도 꺼질 듯한 희미한 모습이었다. 그 모습이 나에게는 가난에 찌든 음침하고 두려운 곳, 들어가기 싫은 곳의 모습으로 다가왔다. 그 산에서 한 50km 떨어진 곳에 익산이라는 도시가 있었는데, 그쪽을 바라보면 그렇게 멀리 있는데도 전깃불이 들어와서 우리 동네보다 더 밝게 빛나고 있었다. ‘와… 저기에는 누가 살고 있을까? 저기에는 돈도 많고 공부도 잘하는 사람, 똑똑하고 예쁜 사람들이 살겠지? 나는 공부도 잘 못하는데…, 내가 중학교를 졸업하면 저런 도시에 가서 살 수 있을까? 나도 저런 곳에서 살고 싶다. 어떻게 하면 저런 곳에서 살 수 있을까?’ 많은 생각이 들었다.

도시에 있는 고등학교에 가려면 열심히 공부해야 한다
당시 내가 다니던 중학교에는 학생이 280명 정도 되었는데, 그 중에서 도시에 있는 고등학교에 가서 공부하는 학생은 30~40명 정도밖에 안 되었다. 280명 중에서 30명이 고등학교에 진학한다면 나머지 250명은 시골에 남아 농사를 짓거나, 공장에 가서 돈을 벌며 살았다. 결론은 공부를 잘해서 280명 중에서 적어도 30등 안에는 들어야 하는데, 나는 40등 정도 했기 때문에 ‘내가 도시에 가서 공부할 수 있을까?’ 하고 걱정이 되었다.
그래서 학교에 갔다가 집에 돌아오면 늦은 시간이었지만 희미한 호롱불 아래서 책을 읽고 공부를 했다. 몇 시간을 걸어 피곤하고 졸리지만 책상에 앉아 공부했다. 그렇게 20~30분 지났을까, 어머니가 부르시는 건지 누가 부르는 건지 “학철아~” 하고 부르는 소리가 들려 깜짝 놀라서 눈을 떠보니 졸고 있었다.
‘누가 날 불렀지? 엄마가 부른 건가?’ 하고 안방을 보니 어머니는 주무시고 계시고 부엌에는 아무도 없었다. 그런데 조금 있다 보니 오징어 타는 냄새가 나는 게 아닌가.
‘내가 열심히 공부한다고 엄마가 오징어를 구워 주시는 건가? 근데 이상하다? 엄마는 방에서 주무시고 계신데? 내가 방금 졸다가 일어났으니까 꿈속에서 오징어 굽는 냄새를 맡은 건가?’
잠결에 여러 생각을 하다가 머리를 만져보니 앞머리가 탄 거였다. 호롱불에 머리가 타면 오징어 굽는 냄새하고 똑같은 냄새가 났다. ‘아이고, 머리가 탔네. 또 친구들이 놀리게 생겼네. 정신 차리고 공부해야지.’
다시 열심히 책을 읽고 있는데 또 어머니가 부르시는 것 같아서 깼는데, 어머니는 여전히 주무시고 계시고 또 오징어 타는 냄새가 나는 게 아닌가. 다시 머리를 만져보니 머리는 조금 전 그대로였다. ‘그럼 어디가 탄 거지?’ 하고 눈썹을 만져보니 눈썹이 타 있었다. ‘학교 가면 친구들이 문둥이 왔다고 놀릴 텐데’ 하는 생각이 들어, 창피해서 학교에 가기가 싫었다.
다음 날 어머니한테 아파서 학교에 못 가겠다고 하자, 어머니는 막대기를 들고 나와 나를 때리면서 무조건 가라고 하셨다. 어머니가 무서워서 학교에 가면 예상대로 친구들이 나를 놀려댔다. 진짜 학교에 가기 싫을 때가 많았지만 학교는 꼭 가야 했다. ‘공부를 잘해서 출세하고, 부자가 되어 행복하게 살아야 한다’는 어머니의 뜻에 이끌려서라도 열심히 공부해야 했다.
 
아, 이렇게 공부하면 되는구나
그렇게 노력한 결과 고등학교 입학시험에 합격해서 도시로 갈 수 있었다. 봄이 되어 개학해 우리 반에 가서 보니, 나 같은 촌놈과 달리 친구들은 다 도시 아이들이라 공부를 정말 잘할 것 같아 보였다. 그래서 나는 학교에 도착하면 ‘공부해야 돼’ 하고 바로 책상에 앉았지만, 친구들은 학교에 오면 책가방을 던져놓고 놀러 다녔다. 그러면 속으로 ‘쟤들은 예습 복습 안 해도 공부를 잘하니까 놀러 다니는 거겠지. 시험을 보면 나는 50명 중에서 40~50등 정도 하겠지? 그럼 창피해서 학교를 어떻게 다니지?’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학교 갔다 오면 더 열심히 공부해야 했다.
학교에 다니는 내내 쉬는 시간에 놀아본 적이 없었다. 점심시간에도 친구들처럼 돌아다니며 놀아본 적이 없었다. 시간만 있으면 책상에 앉아서 공부를 해야 했다. 얼마 뒤 고등학교에 들어가서 처음으로 시험을 보았다. ‘아, 과연 몇 등 정도 했을까? 한 20등만 되도 좋겠다. 50명 중에 20등만 해도 잘한 거지. 아니면 40등? 50등일까?’ 나중에 시험 결과가 나왔는데 2등이었다. ‘와! 공부하면 되는구나’라고 생각했다.
매일 아침 조회시간에 담임 선생님이 교실에 들어오실 때면 친구들은 놀다가 “선생님 왔다!” 하며 허겁지겁 자리에 앉았다. 그런데 나는 미리 앉아서 공부하고 있으니까 선생님이 우리 반 친구들에게 “너희들은 학철이처럼 공부해라”라고 하셨다. 그 얘기를 들으니까 기분이 정말 좋았다. ‘아, 이렇게 공부하면 되는구나!’ 선생님도 칭찬해 주시고, 가끔 친구들이 빵도 가져다 주고, 학교 가는 게 재미있었다. 공부하는 것도 재미있었다. ‘내가 공부하면 할 수 있구나!’라는 마음이 들었다.
고등학교 3년 중에 한 번 가는 수학여행이 고등학교 2학년 때 있었다. 3박 4일 동안 속리산 밑에 텐트를 치고 정상까지 올라갔다가 오는 여행이었다. 모든 친구들이 수학여행을 갔지만 나는 혼자 학교에 남아서 공부를 했다. 수학여행도 안 가고, 어디 놀러도 안 가고 열심히 공부만 했다. 남들 놀 때 같이 놀면 어떻게 더 좋은 결과를 얻을 수 있겠나 싶었다. 그렇게 하면 좋은 대학교에 들어갈 것이라고 생각했다.
 
꿈꾸던 대학 입학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대입 시험을 봤는데 떨어졌다. 너무 절망스러워서 친구들 만나는 것도 두렵고 친척들 만나는 것도 싫었다. 재수하며 1년을 더 공부해서 시험을 봤는데 또 떨어졌다. 얼마 후 누나 집에 갔는데, 누나가 하는 말이 “내가 너 같은 동생 둔 게 창피하다. 너, 대학교 합격해야 우리 집에 올 수 있어. 그 전까지는 우리 집에 오지도 마라.” 하였다. 마음에 ‘대학 떨어지니까 누님도 나를 버리고, 친구도 나를 버리는구나’라고 생각했다.
더 열심히 공부해서 대학교에 꼭 들어가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삼수 끝에 마침내 대학 입학시험에 합격했다. 날아갈 듯이 기뻤다. ‘이게 행복이고 자유야. 바로 이렇게 사는 거야’라고 생각했다. 내가 어렸을 때부터 꿈꾸었던 큰 도시에 가서 대학교를 다니게 되었다.
 
여기서 뭐하고 있는 거지?
대학교 1학년 때에는 술 먹고 담배 피우고, 수업이 없는 주말에는 계속 놀러 다녔다. 하이킹도 하고 등산도 가고 바닷가에도 놀러가고, 계속 놀러 다니면서 ‘이렇게 사는 게 행복이다’라는 마음이 들었다. 그런데 이상한 점이 있었다. 계속 놀러 다니다 보니 술을 좋아하게 되고, 나중에는 술을 너무 많이 먹어서 다음 날 못 일어나 학교 수업까지 빠졌다.
‘어? 내가 무얼 하고 있지? 내가 학생 맞아? 내가 어렸을 때 이런 도시에서 살면 행복할 거라고 생각했는데, 지금 나는 여기서 뭐하고 있는 거지?’
중학교 동창들 중에서 대학에 들어간 사람은 10명도 되지 않았다. 내가 그 10명 중에 한 사람이기에 고향에 가서 친구들을 만나면 친구들이 나를 정말 부러워했다. “넌 대학생이라 좋겠다.” 친척들도 다 나를 칭찬하고 부러워했다. 아버지는 내가 열심히 공부한다며 책 사라고 돈도 주시고 했는데, 나는 그 돈으로 술을 마시면서 놀러 다녔다. 부모님 앞에서는 학생이었지만 도시에 돌아와서는 노느라 수업을 빠지기 일쑤였다.
술을 먹고 놀다 보면 어떤 때는 너무 취해서 길거리나 역전 같은 곳에서 잠든 적도 있었다. 아침에 일어나면 ‘내가 공부 잘해서 도시에 오면 행복할 줄 알았는데 지금 내가 도대체 뭐가 된 거야?’라는 자괴감 속에 괴로웠다.
그렇게 시간이 흘러 대학교 3학년이 되었다. 마음을 가다듬고 공부하려고 새벽 4시부터 도서관에 갈 채비를 했다. 그 당시 내가 다니던 대학에서는, 새벽에는 도서관 정문은 열지 않고 비상계단만 열어 놓았다. 새벽 4시 반에 도서관에 도착하면 벌써 200~300명이 비상계단 앞에 줄을 서서 기다리고 있었다. 빨리 들어가야 독서실에서 가장 안에 위치한 조용한 자리를 잡을 수 있었다. 문 앞에 있는 자리에서 공부하면 오가는 사람들 때문에 집중이 안 되니까 모두 그런 자리는 원치 않았다. 시험기간에는 도서관 앞에 아예 텐트를 치고 자는 사람도 있었다.
‘아, 저렇게까지 공부를 하는구나’ 싶었다.
도서관 4층에는 ‘정독실’이라는, 공부하는 방이 있었다. 새벽에 도서관 문을 열면 기다리던 학생들이 정독실에서 좋은 자리를 잡으려고 한꺼번에 무섭게 계단을 뛰어서 올라갔다. 한번은 한 여학생이 계단에서 넘어졌다. 그래서 뒤에 있던 학생이 “여기 사람이 넘어졌으니까 밀고 올라오지 마세요!”라고 소리를 질렀는데, 저 뒤에서는 그 소리가 안 들리니까 계속 밀고 올라와 앞에 있는 학생들이 떠밀려서 넘어진 여학생을 밟고 올라갔다. 그 광경을 지켜보며 서글펐다. ‘이게 대학인가? 이렇게 해서 행복해지는 건가?’
어렸을 때 대학교는 자유와 낭만이 있는 곳이라고 생각했는데, 막상 들어가 보니 밖에서 보는 대학과 안에서 보는 대학은 너무 달랐다. 직접 보니 경쟁이 고등학교 때보다 더 치열했다. 내가 중고등학교에 다닐 때, 대학생들은 와이셔츠에 배지를 달고 다녔다. 그 배지가 별처럼 빛나 보였다. 그래서 ‘나는 언제 저런 배지를 달지? 언제 저런 별을 달아볼까?’라는 생각으로 열심히 공부해서 대학에 들어왔는데, 들어와 보니 그런 행복은 없었다.
‘내가 공부해서 행복할 수만 있다면 해야지. 그런데 고등학생 때 대학교에 들어가면 행복할 거라고 생각하고 열심히 공부했는데 여기 행복이 없잖아. 그럼 대학에서 열심히 공부해서 졸업하고 좋은 직장을 얻었어. 결혼을 했어. 그럼 그곳에는 진짜 행복이 있을까?’
내 마음은 불안함과 막연함으로 가득 찼다. 내가 대학에 들어오기 전에 했던 상상이 현실과 전혀 달랐던 것처럼 대학을 졸업한 후에도 전혀 다른 현실이 있을 것 같았다. ‘이런 세계를 계속 걸어가야 하나? 정말 행복할 수만 있다면, 행복이 보장만 된다면 목숨을 걸고서라도 공부할 텐데....’ 내가 꿈꾸던 곳에 이르렀지만, 그곳에 상상했던 행복한 삶이 없는 것이 너무나도 허무했다. 그때 그 허전함, 허탈감은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것이었다.

한숨만 계속 나왔다
초등학교 6년, 중고등학교 6년, 재수와 삼수를 합해 14년 동안 공부해 대학에 가서 4년을 더 공부했다. 다 합해서 18년, 그 시절 동안 나는 마치 누가복음 13장 11절의 “십팔 년 동안을 귀신들려 앓으며 꼬부라져 조금도 펴지 못하는 한 여자가 있더라”라는 성경 구절에 나오는 여자와 같았다. 귀신들려 꼬부라져서 18년 동안 한 번도 몸을 제대로 펴보지 못한 여자의 모습, 그것이 나의 모습이었다.
나는 어려서부터 이런 생각을 많이 했다. ‘내가 공부를 잘해서 도시에 살면 어깨를 딱 펴고 살겠구나.’ 그래서 열심히 공부해 도시에 있는 고등학교에 들어갔을 때 어깨가 딱 펴졌다. ‘내 친구들은 이런 도시에서 공부 못 하는데 나는 친구들보다 공부를 잘해서 이런 도시에 살잖아.’ 그런데 나보다 앞서 가는 사람들을 따라잡으려고 하면 나는 또 꼬부라져 있었다. 재수, 삼수 끝에 대학에 합격했을 때 다시 어깨가 쫙 펴졌지만 졸업해서 좋은 직장을 얻으려면 전보다 더 열심히 공부해야 해서 또 꼬부라졌다.
나는 어느덧 ‘차라리 죽자. 살아도 아무 소망이 없어’ 하며 절망 속으로 점점 빠져들었다. 한숨만 계속 나왔다. 내가 지고 있는 짐들이 너무 무거웠기 때문이다. 그 짐이 사라지질 않았기 때문이다. ‘어떻게 해야 좋은 직장에 들어갈까? 어떻게 돈을 벌까? 어떻게 살아야 하는 걸까? 내 죄는 어떻게 씻을 수 있는 걸까?’ 그렇게 가득 쌓인 짐들이 나를 짓눌러 나를 점점 더 꼬부라지게 만들고 있었다.
“그러면 십팔 년 동안 사단에게 매인 바 된 이 아브라함의 딸을 안식일에 이 매임에서 푸는 것이 합당치 아니하냐?”(눅 13:16) 18년 동안 사탄에게 매여 지냈던 이 여자처럼, 사탄은 나에게 ‘좋은 대학에 들어가면 자유를 얻을 거야, 부지런히 일하면 돈을 많이 벌어서 행복하게 살 거야’ 등등의 생각을 넣었다. 그것은 모든 사람이 하는 지극히 평범한 생각이었고, 나는 그 생각을 따라 열심히 살며 주변 사람들로부터 칭찬과 부러움을 받는 엘리트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내 모습을 정확히 본 적이 한 번도 없었지만, 성경에 비쳐진 나의 모습은 귀신들린 사람처럼 미친 마음을 품고 산 것이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