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종의 영역에 들어가는 것을 방해하는 옳음
복종의 영역에 들어가는 것을 방해하는 옳음
  • 김재홍(기쁜소식인천교회 목사)
  • 승인 2020.01.08 16: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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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년 1월호 기쁜소식
옳음에서 벗어나 영의 세계로 | (8편)

더 깊은 영적 세계로 가려면 복종이 필요하다
우리나라는 북한과 휴전 상태이기에 국방력 증강에 힘을 많이 쏟습니다. 한 예로 신형 전투기를 구입하는데, 한 대에 수백억 원 혹은 천억 원이 넘는 돈을 들여서 전투기들을 사옵니다. 전투기 성능이 뛰어날수록 적의 전투기들을 잘 물리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아무리 비싸고 좋은 전투기라도 그것을 타고 지구를 벗어나 우주로 갈 수는 없습니다. 지구를 벗어나서 넓은 우주로 가려면 우주선이 필요합니다. 전투기가 지구라는 영역 안에서는 하늘을 잘 날지만 우주라는 영역에는 가지 못하는 것처럼, 신앙생활에서 순종으로 갈 수 있는 영역도 한계가 있습니다. 더 깊은 영적 세계로 가려면 복종이 필요합니다.
그런데 우리가 순종하는 신앙의 세계에서 복종하는 세계로 가려고 하면 우리 발목을 잡는 것이 있습니다. 바로 옳음입니다. 순종하는 영역에서 생긴 옳음이 버려지지 않으면 복종하는 신앙의 단계에 절대 들어가지 못합니다. 순종함으로 생긴 옳음을 버리지 못하는 사람들의 마음에 들어가 보면 이렇게 생각합니다.
‘왜 그렇게 해야 하는지 이해가 안 가는데 어떻게 따르라는 말이야? 나도 복음과 교회를 사랑하고 복음과 교회를 위할 마음이 있고, 순종할 마음이 있다. 하지만 이해가 안 가는 일을 어떻게 하냐고? 그 일을 할 마음이 생겨야 하지, 마음이 전혀 일어나지 않는데 어떻게 해?’
이런 사람들은 신앙은 마음이 일어나서 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신앙에 대한 자기 나름대로의 기준을 가지고 자기 옳음 속에서 살고 있는 것입니다. 어떤 일을 할 때 이해가 가야 따른다는 기준과 옳음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복종하는 영역에 들어가지 못합니다.

에스더의 옳음과 모르드개의 강한 인도
에스더는 순종하는 길을 걸어서 많은 은혜를 입고 왕후의 직분을 얻어 쓰임을 받지만, 4장에서는 전혀 다른 모습을 보입니다.
에스더 3장에서 하만이 세워지고, 하만은 모르드개가 자기에게 절을 하지 않아 유대인을 다 죽이려고 마음을 먹습니다. 그 일을 왕에게 이야기하고 허락을 받아 ‘유대인을 멸하라’는 조서를 써서 각 도에 보냅니다. 이어 4장에서 모르드개가 에스더에게 ‘유대인을 멸하라는 조서가 전국에 반포되었으니 왕 앞에 나아가서 유대 민족을 위해 간구하라’고 합니다. 그때 에스더는 자신이 왕 앞에 나아갈 수 없다며 모르드개를 설득했습니다.
“왕이 부르지 않았는데 어전 뜰에 들어가서 왕에게 나아갔을 때, 그때 왕이 금홀을 내밀지 않으면 죽이는 법입니다. 내가 왕의 부름을 받지 못한 지가 30일이기에 왕에게 나아갈 수가 없습니다. 내가 가기 싫은 것이 아니라 갈 수가 없는 처지입니다.”
그런데도 모르드개는 에스더에게 왕 앞에 나아가 유대 민족을 위해 구하라고 했습니다. 나아갈 수 없는 형편인 것을 알면서도 무조건 나아가라고 한 것입니다. 모르드개는 지금 에스더에게 순종이 아니라 복종을 요구하는 것입니다. 그때까지 에스더는 모르드개의 명을 양육을 받을 때와 같이 따랐습니다. 순종하면서 살아 사랑스럽게 여김을 받았고, 왕후의 직분을 얻었으며, 쓰임도 받았습니다. 하지만 유대 민족을 구원하는 큰 일에 쓰임을 받기 위해서는 순종만으로 되지 않고 복종이 필요했습니다.
그런데 모르드개가 에스더에게 복종을 요구하는 단계에 이르자 에스더에게서 자기 판단과 옳음이 나왔습니다. 자신이 처한 형편에 맞는 소리가 나오고 자기 주장이 나왔습니다. 그렇게 행하는 에스더에게 모르드개가 강하게 말했습니다.
“이때에 네가 만일 잠잠하여 말이 없으면 유다인은 다른 데로 말미암아 놓임과 구원을 얻으려니와 너와 네 아비 집은 멸망하리라. 네가 왕후의 위를 얻은 것이 이때를 위함이 아닌지 누가 아느냐?”(에 4:14)
에스더가 순종하는 삶을 살아왔지만 복종하는 단계로 넘어가지 못하면 어떻게 된다고 했습니까? ‘너와 네 아비 집은 멸망한다’고 했습니다. 우리가 신앙생활을 하면서 순종하여 복음을 위해 수고하고 희생했는데 왜 망합니까? 순종하는 신앙에서 복종하는 신앙으로 넘어가지 못하면 망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한때 복음을 위해 충성되게 살았던 사람이 왜 복음을 대적하고 교회를 헐뜯는 자가 되며, 육신을 따라 흘러가느냐는 것입니다.
순종하는 삶을 배워서 갈 수 있는 신앙의 영역에는 한계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 영역을 벗어나서 복종하는 영역으로 가지 못하면, 복종해야 하는 위치에 설 때 그것을 이해할 수 없습니다. 그때 사탄이 ‘네가 옳다’는 마음을 넣어 주면 하나님의 뜻을 등지고 자신의 길을 가게 되는 것입니다. 사탄은 언제든지 우리 마음에 옳음을 넣어 주려고 하고, 옳음이 생기면 그 옳음은 불신을 낳고 불신은 대적하는 삶을 불러옵니다.

너희를 인도하는 자들에게 순종하고 복종하라
신앙생활은 구원받은 성도가 순종과 복종을 배우는 삶입니다. 히브리서 13장에서는 그 삶에 대하여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너희를 인도하는 자들에게 순종하고 복종하라. 저희는 너희 영혼을 위하여 경성하기를 자기가 회계할 자인 것같이 하느니라. 저희로 하여금 즐거움으로 이것을 하게 하고 근심으로 하게 말라. 그렇지 않으면 너희에게 유익이 없느니라.”(히 13:17)
성경은 우리를 인도하는 이들에게 순종만 하는 것이 아니라 복종도 하라고 했습니다. 순종은 우리 마음에서 ‘참으로 그렇다’는 마음이 일어나 따르는 것이고, 복종은 이해가 안 되고 마음이 일어나지 않지만 따르는 것입니다. 내가 볼 때 어떠하고 내 판단이 어떠하며 내 마음 상태가 어떠하든지, 그 모든 것을 굴복시켜서 따르는 것이 복종입니다.
구원받은 성도가 기쁘게 신앙생활을 하다가 어느 시점에 이르러 신앙에 한계가 찾아오고 정체되며 기쁨을 잃고 어려워지는 것은, 복종하는 삶을 배우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복종을 배우면 삶 속에서 늘 주님의 새로운 역사를 경험하며, 하나님의 축복과 은혜가 밀려옵니다. 복종하는 단계에 들어가서 교회를 따르면 하는 일마다 복되며 큰 축복과 은혜를 입습니다.   
안타깝게도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순종하는 신앙만 배워 그 안에서 살기 때문에, 사탄이 마음에 옳음을 넣어 주면 그때부터는 교회와 함께하지 못하고 판단하는 마음과 불신을 품은 채로 머물러 있습니다. 복종의 단계로 넘어가서 더 크고 놀라운 하나님의 역사와 새로운 은혜와 축복을 맛보지 못하고 망하는 길로 가고 있으면서도 그 사실을 깨닫지 못합니다.

예수님이 생애 마지막에 걸어가신 복종의 길
예수님이 이 땅에서 걸어가신 길이 가장 신령한 길이요 가장 영적인 길입니다. 예수님은 생애 마지막에 복종의 길을 가셨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의 죽음을 앞두고 이렇게 기도하셨습니다.
“조금 나아가사 얼굴을 땅에 대시고 엎드려 기도하여 가라사대 ‘내 아버지여, 만일 할 만하시거든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 하시고”(마 26:39)
세 번을 이렇게 기도하셨습니다. 지금 예수님의 마음에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고 싶은 마음이 일어나지 않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 ‘할 수만 있다면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해 달라’고 간구했습니다. 십자가의 길을 가지 않고 싶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나의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라고 하셨습니다. 이것이 복종하는 삶입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서의 삶을 마감하면서 가신 길은 순종이 아닌 복종의 길이었습니다. 예수님은 마지막 가신 길을 통해서 우리에게 복종하는 삶을 가르쳐 주셨습니다.
우리가 성화聖化되어야 한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잘못된 생각입니다. 십자가 앞에서 육체를 입은 예수님은 하나님의 뜻과 다른 마음을 가졌습니다. 하나님의 뜻은 예수님이 십자가의 고난을 당하는 것이었고, 예수님의 마음은 그 잔이 지나가는 것이었습니다. 죄 없이 탄생한 예수님도 육신의 욕구가 있어서 하나님의 뜻과 하나가 안 되는데, 죄악 중에 출생한 인간이 어떻게 성화가 되겠습니까? 육체를 입고 있는 동안에는 육신의 소욕이 끊임없이 일어나기 때문에 자기를 부인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내 마음에서 원하지 않지만 내 마음을 부인하고 복종하는 것입니다. 만약 성화되어서 하나님과 같아지면 자기를 부인할 필요가 없기에, 성화는 자기를 부인하는 삶을 없애는 잘못된 이론입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의 길을 앞두고 “나의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라고 하셔서 자기를 부인하는 복종의 길을 우리에게 가르쳐 주셨습니다. 빌립보서 2장 5절에서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라고 했습니다. 복종하는 마음을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마지막으로 가신 가장 신령한 영적인 단계가 바로 복종의 영역입니다.

너희의 복종이 온전히 될 때에
우리가 옳음에 대하여 다 깨우치지는 못하지만, 한 가지 분명한 사실은 내 옳음을 버리고 복종하는 신앙을 배워나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복종의 영역에 들어간 사람들의 삶을 보면, 이해가 안 가고 납득이 안 되지만 따르는 것을 봅니다.
언젠가 박옥수 목사님이 이런 이야기를 하셨습니다. 당시에 목사님을 거스르고 대적하는 사람들이 많았는데, 하루는 목사님이 목회자들 앞에서 “나를 인하여 너희를 욕하고 핍박하고 거짓으로 너희를 거스려 모든 악한 말을 할 때에는 너희에게 복이 있나니 기뻐하고 즐거워하라….” (마 5:11~12)라는 말씀을 그날 보았다고 하셨습니다. ‘주님이 기뻐하라고 하시네. 그러면 기뻐해야겠다’는 마음이 들었다며 “하하하! 기쁘다!” 하셨습니다. 기뻐할 일은 전혀 없고 근심할 일밖에 없어 보이는데 성경 말씀대로 하시는 것을 보았습니다. 제가 다시 그 일을 생각하면서 ‘이것이 하나님의 말씀 앞에 복종된 삶이구나’라는 마음이 들었습니다.
우리가 배워야 할 신앙의 영역이 복종의 영역인데, 어느 단계까지 가야 하는지 고린도후서 10장에서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모든 이론을 파하며 하나님 아는 것을 대적하여 높아진 것을 다 파하고 모든 생각을 사로잡아 그리스도에게 복종케 하니, 너희의 복종이 온전히 될 때에 모든 복종치 않는 것을 벌하려고 예비하는 중에 있노라.” (고후 10:5~6)
저는 이 구절에서 ‘복종이 온전히 될 때’라는 말씀이 좋습니다. 제 삶을 돌아보면 복종했던 경험이 있기는 하지만 복종이 온전히 된 삶은 아니었습니다. 여러분의 삶은 어떻습니까? 어떤 일 앞에서 자신의 생각이나 판단이 올라올 때 그것이 옳다고 여기고, 사실과 다른 소리를 들었을 때 분하고 억울해하는 것은 온전한 복종을 배우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걸어가신 길은 죽기까지 복종하신 복종의 길입니다. 가기 싫은 길이고, 가고 싶은 마음이 일어나지 않지만 예수님은 복종하는 삶을 사셨습니다. 이것이 우리가 걸어가야 할 신앙의 길입니다.

나를 믿는 자는 내가 하는 일을 할 것이요, 더 큰 일도 하리니
복종은 우리로 하여금 한계를 넘게 하고 우리를 새로운 영역에 들어갈 수 있게 만들어 줍니다. 야곱이 아버지 이삭에게 축복을 받는 이야기에서도 그런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이삭이 나이 많아 늙어서 앞이 잘 보이지 않을 때 맏아들 에서를 불러
‘네가 사냥하여 그 고기로 별미를 만들어 오면 내가 먹고 너를 축복하겠다’고 했습니다. 그때 이삭의 아내 리브가가 그 말을 듣고 야곱을 불러서
‘염소 떼에 가서 새끼 한 마리를 가져오면 그것으로 아버지가 좋아하는 별미를 만들어줄 테니, 그것을 들고 가서 복을 받으라’고 했습니다. 야곱이 생각해 보니, 아버지가 앞은 못 보지만 목소리는 들을 수 있고, 목소리가 이상해서 자기를 만져 보면 형 에서는 몸에 털이 많고 자기는 매끈매끈하니까 금방 들통날 것 같았습니다. 그래서 어머니에게 복은커녕 저주를 받을까 두렵다고 하자, 리브가가 ‘내 말만 좇고, 가서 염소 새끼를 가져오라’고 복종을 명합니다. 야곱은 리브가의 말이 이해가 안 되고 저주를 받을 것처럼 보였지만 복종했을 때 하나님의 큰 축복을 받았습니다.
에스더도 왕이 부르지 않았는데 나아가면 죽임을 당할 것 같았습니다. 자기 민족을 위해 왕에게 구하러 나아가기 싫었습니다. 그러나 모르드개의 말 앞에 자신의 모든 것을 꺾고 복종했을 때 이전에 왕후로 살던 삶과 비교할 수 없이 복된 삶을 살았습니다. 유대 민족을 다 구원했을 뿐 아니라 왕의 사랑을 받았고, 나라에서는 하만이 죽임을 당하고 모르드개가 세워졌으며, 온 수산 성이 기뻐하고 즐거워하는 놀라운 역사를 경험했습니다.
새로운 영역에 들어가서 전에 맛보지 못했던 새로운 기쁨 속에서 충만한 삶을 살도록 만들어 주는 것이 복종입니다. 사탄은 이 사실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를 그 영역에 들어가지 못하게 하려고 우리 마음에 옳음을 넣어 주어서 ‘이해가 안 가. 납득이 안 돼.’ 하며 복종하는 삶을 잃어버리게 만듭니다. 순종하는 신앙생활을 하면서 마음에 옳음이 자리 잡을 때, 그로 인해 복종이 안 될 때
‘이 옳음이 나로 하여금 복종하는 신앙으로 가지 못하게 만드는구나!’ 하고 두려워하며 그 옳음을 제할 줄 알아야 합니다. 모든 이론을 파하고 옳고 그름을 다 떠나 하나님의 교회 안에서 하나님의 뜻 앞에 복종할 때, 처음에는 이해가 안 가지만 그것이 참되고 깊은 축복의 길임을 하나님이 보여 주십니다. 내가 틀렸다는 사실과 하나님과 교회가 옳았다는 사실을 분명히 보여 주십니다.
요한복음 14장에서 예수님이 “나를 믿는 자는 나의 하는 일을 저도 할 것이요, 또한 이보다 큰 것도 하리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이 하신 일을 우리도 하게 되고, 그보다 더 큰 일도 하게 될 것이라는 말입니다. 사탄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이런 놀라운 삶을 주셨다는 사실을 알기 때문에 우리 신앙이 복종하는 단계에 들어가지 못하도록 하려고 여러 가지 옳음에 사로잡히게 만듭니다.
옳음이 끝나고 복종하는 삶을 살며, 온전한 복종이 이루어져서 주님의 뜻이 여러분을 통해서 마음껏 나타나는 복된 신앙생활을 하시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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